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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일상수행日常修行입니다.
자기 집에 가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것(入道)입니다. 가고 오고 일하는 모든 것이 다 일용인데, 그 순간에서 진짜 자기 집에 가는 방법이 일용입도日用入道입니다.
그러면 집이란 무엇인가? 경전이나 어록 등에서 집은 '법성토法性土'라고 했습니다.
하늘. 땅. 사람 등 일체 만법에 다 통하는 본성을 법성이라고 합니다.
만법의 본성인 법성의 세계를 법성토라 하고, 그 법성토가 진정한 나의 집입니다.
그리고 항상 즐거운 고향인 상락향常樂鄕이 나의 집입니다. 우리는 법성토 상락향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뇌가 따릅니다. 항상 즐거운 법성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방황하는 나그네처럼 고뇌가 따릅니다.
의상義相(625~702)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연선교로 여의를 잡게 되면 집에 돌아가서 자기 능력, 자기 노력에 따라서 자량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자량은 양식이고 이익입니다.우리가 법성토에 들어가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법성토의 집, 상락향의 집에 돌아가면 자기 분수대로 자량을 얻는데, 『화엄경』「이세간품」에서는 그 자량을 2,000가지로 설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집에 돌아가는가? '무연선교착여의'로 갑니다. 연緣이란 반연攀緣인데, 자꾸 밖으로만 밖으로만좇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연은 분별입니다. 그리고 추구입니다.
밖으로 분별하고 밖으로 추구하는 것을 연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좇아가고, 귀로 듣는 것을 좇아가고, 코로 냄새를 좇아가고, 혀로 맛을 좇아가고, 몸으로 촉감을 좇아갑니다.
이것을 반연이라고 합니다.
또 마음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낀 이것을 과거 것도 좇아가고, 현재 것도 좇아가고, 미래 것도 좇아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다 통합니다. 이렇게 보고 내지 생각하고 하는 것이 항상 밖으로 밖으로만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식심 의식만 좇아가면 영원히 나그네가 되어 영영 자기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7식第七識은 제8식을 집착해서 '이것이 나다.'하고 제8식을 좇아갑니다. 제8식은 반연 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8식 식심이라는 것이 자기 집은 비워놓고 항상 밖으로만 나갑니다. 고약하게도 자기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반연만 하지 자기를 모르는 것이 식심입니다. 이런 반연하는 마음이 없이(無緣) 좋은 노력(善巧선교)으로 부처님의 가르침(如意)을 딱 잡으면, 집에 돌아가서 자기 분수에 따라서,『화엄경』「이세간품」에서 말하는 2,000가지 이익을 얻습니다. 이것이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입니다.
오늘날 살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제가 태어난 1940년대에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면 60년 후는 괜찮은가? 60년 후에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 중생은 항상 고뇌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 끝이 나는가?
항상 즐거운 고향(常樂鄕), 만법의 법성 세계(法性土)로 돌아가기 전에는 늘 보는 데 걸리고 듣는데 걸리고 온갖 경계에 걸려서 고뇌가 없을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 중생심으로만 살면 중생심은 참 고약합니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한창 떠드는 용어 중에 '깔때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깔때기는 기름집 등에서 사용하는데, 위는 동그렇고 넓고 밑은 좁은 것을 병 주둥이에 꽂고 위에서 기름을 부으면 기름이 병에 들어갑니다. 그 붓는 기구가 깔때기입니다. 깔때기에 모래를 부어도 내려가고, 물을 부어도 내려가고, 곡식을 부어도 내려갑니다. 무엇을 붓든지 다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위로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도 따라가다 보면 저 좋게 하고, 행동하는 것도 따라가다 보면 저 좋게 합니다. 그래서 깔때기라고 합니다.
집안에서도 중생은 다 깔때기니까 결국은 저 좋게 합니다. 시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하면 결국은 시어머니 좋게 하는 것이고, 며느리가 하자는 대로 하면 결국은 며느리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면 결국은 남편 좋은 쪽으로 가고,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결국은 아내가 좋은 쪽으로 갑니다. 결국은 깔때기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자기 좋은 쪽으로 계속 했는데,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돈 벌고, 사람 사귀고, 권력 얻고, 건강 얻고, 이렇게 자기 좋은 쪽으로만 깔때기로 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죽는 날이 왔을 때는 여태까지 사귄 사람도 소용없고, 쌓아 놓은 권력도 소용없고, 돈도 소용없고, 명예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고민만 남습니다. 아주 영리하면서도 흉악한 바보가 바로 중생입니다. 만약 1분 후에 죽는다면 지금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버는 것도, 사람 사귀는 것도, 권력을 얻는 것도, 운동해서 건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죽는 순간에 하는 일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평생 장사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장사하겠습니까? 평생 아이들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 아이들을 위해서 노력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평생 노력했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완전히 헛똑똑이입니다.
만약 내가 한 시간 후에 죽는다고 해도 돈 벌러 나가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어디로 갈까. 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를 걱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는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정말로 영리한 사람은 그런 것들을 하면서도 '나는 무엇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자기 성찰 없이 살다가 죽음이 임박해서 '나는 어디로 가는가?'를 고민한다면 이미 늦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성찰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수행은 깔때기가 아닙니다. 수행은 마중물입니다. 옛날에 수도시설이 없을 때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다가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물을 다른 데서 한 바가지 떠서 펌프에 붓고 펌프를 누르면 물이 올라옵니다.
한 번 물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계속 올라옵니다. 이 한 바가지 붓는 물을, 물을 마중한다고 해서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수행도 이와 같습니다. 밖으로 밖으로 향하던 그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반조返照를 하면 문이 열립니다.
문이 한 번 열리면 거기에 『화엄경』에서 말하는 2,000가지 이익이 그냥 올라옵니다.
사시사철,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그냥 올라옵니다.
이처럼 중생심은 깔때기, 수행은 마중물에 비유합니다. 그 마중물 한 바가지만 부으면 됩니다.
그러면 수행은 무엇이냐? 일상수행, 즉 항상 복과 지혜를 닦는 것입니다.
복은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쁘고 다 기쁜 것입니다. 지혜는 내가 나를 찾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결국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나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나는 없습니다.
그러면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그냥 놔두면 밖으로만 나가서 억만 년이 지나도 알 길이 없습니다.
돌아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사람 생각, 물질 생각, 무슨 무슨 생각하는 의식을 가만히 점검해 보면 전부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지금 보고 듣는 것들만 좇아 다닙니다.
보고 듣는 것, 이것이 무엇인지는 꿈에도 모릅니다. 이 보는 것을 알고, 듣는 것을 알면 도에 들어가는 문이 환히 열립니다. 그러려면 우선 저 밖으로 나갔던 마음을 되가져와야 합니다.
모든 근심걱정이 밖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저 사람 때문에 걱정되고, 물질 때문에 걱정되고, 죽을 것 때문에 걱정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죽는 것을 걱정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슬프면 그 슬픔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슬픈 그 환경에서 슬픈 그 마음을 되가져 와서 '슬픈 이 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되돌아보면 없어집니다. 밖에서 헤매는 마음을 되가져 와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못 살겠다.'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그 사람한테 있기 때문입니다. 되가져 오면 끝나 버립니다.
'아이고, 돈 손해 본 것 때문에 억울해 못 살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돈 손해 본 것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가져와야 합니다. '아, 00에 망신당한 것 때문에 못 살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망신은 과거에 당했는데 지금까지 마음이 거기 눌러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가져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 되가져 오기' 수행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나인데, 이 나를 되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용입도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거기 도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데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데 가서 찾으면 전부 반연뿐입니다.
반연으로는 따라갈 뿐이지 집에는 갈 수 없습니다. 나그네 생활만 하는 것입니다.
자꾸 보는 대로만 좇아가면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보는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그것이 바로 일용입도입니다. 그래서 '견문언사見聞言思 시개심마是箇甚磨', 즉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바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법성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보는 것은 법상法相이고, 전부 식심識心이 하는 일입니다.
남의 얼굴 보면 얼굴 모습 시비할 일이 아니라 보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되돌아보는 것이 일용 속에서 도에 들어가는 일용입도입니다. 어디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다고 하는 것은 반연입니다. 무엇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것도 반연입니다.
의상 스님 법문에 '무연선교無緣善巧'라고 했습니다. 밖으로 달려가지 않고 안으로 좋게 노력하는 이것이 자심반조自心返照입니다.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는 자심반조가 무연선교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해탈, 열반, 성불, 반야바라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법문을 딱 잡아서 '무엇인가?'하면, 그냥 거기 법상에서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법상을 떠나서 보는 것이 아니라 법상에서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얼음을 떠나서 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물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相에 집착하다 보니 성性을 몰라서 고생합니다. 상만, 얼음만 좇아가고 물을 모르니 참 큰일입니다. 법상에서 법성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견성에 대한 게송을 하나 적어 보았습니다.
目前明明無疑惑 목전명명무의혹
心心寂寂性圓照 심심적적성원조
昨夜牛腹成牛事 작야우복성우사
今朝依舊造人圖 금조의구조인도
눈앞에 분명하고 분명해서 의혹이 없다.
마음 마음이 고요해서 본성이 둥글게 비춘다.
어젯밤에는 소 배 속에 들어가서 소 일을 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예전처럼 사람 그림을 그리더라.
성性이라는 것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밝게 나타나므로 의혹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법성法性입니다. 그런데 법성을 보는 마음은 어떠냐? 마음이 고요해서 그 본성이 둥글게 비춥니다.
둥글게 비춘다는 것은 무엇이냐? 유식에서는 대원보조大圓普照, 즉 크게 둥글고 넓게 비추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면 상락향이고 법성토인데, 이것을 모르면 보는 대로 억만년을 좇아가도 영원히 나그네입니다. 백천만겁 끝이 없습니다. 돌이키면 금방인데 좇아가면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법성이 가만히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집니다.어제 저녁에는 소 배 속에서 소 일을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예전처럼 사람 그림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성을 본 소식입니다.그런데 들어도 잘 모릅니다. 그 모르는 것도 법성입니다. 알고 모르는 데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죄로 죄짓고 고뇌 받는 것이 중생놀음입니다. 전부 깔때기가 되어 온갖 죄를 지었는데, 그 깔때기 마음으로 이익 본 것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사람을 사귀려고 애썼는데 사람은 다 떠나가고, 세력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세력도 다 떠나가고, 건강을 얻으려고 애썼는데 건강도 다 없어지고, 재산을 모으려고 애썼는데 재산도 다 없어졌습니다. 자기가 모아 놓은 것은 다 없어졌는데, 모으면서 지은 죄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몸을 만들어 몸짱이 되려 하고, 또 얼굴을 고쳐 얼짱이 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그 과정에서 거짓말도 많이 하고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얼굴도 몸도 다 없어지고, 만드느라 지은 죄만 수두룩하게 남아서 내 발목을 잡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을 만나서 이런 이치를 알고, 일상 속에서 입도入道해야 합니다.일하고 돈 벌고 사업하면서 '돈 버는 이것이 무엇인가?' 싸움을 하면서도 '싸움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웃고 놀면서도 '웃고 노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입도입니다.그것을 하지 않으면 자기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자꾸 밖으로 밖으로만 반연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일상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하고 나를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복과 지혜를 닦는 중요한 수행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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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부처님 법을 만나서 이런 이치를 알고, 일상 속에서 입도入道해야 합니다.일하고 돈 벌고 사업하면서 '돈 버는 이것이 무엇인가?' 싸움을 하면서도 '싸움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웃고 놀면서도 '웃고 노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입도입니다.그것을 하지 않으면 자기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자꾸 밖으로 밖으로만 반연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일상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하고 나를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복과 지혜를 닦는 중요한 수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수고하셨어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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