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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의 주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
그의 작품은 심리적·정치적 통찰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은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830)·
〈파름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1839)이다.
그는 많은 필명을 갖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름은 프로이센의 도시 슈텐달에서 따온 스탕달이었다.
아버지 셰뤼뱅 벨은 그르노블 고등법원의 법정 변호사였고,
어머니 앙리에트(결혼 전 姓은 가뇽)는 그르노블에서 명망 높은 의사의 딸이었다
(외가는 14세기에 교황과 함께 아비뇽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가문으로,
스탕달은 이 점을 내세워 자신을 이탈리아인의 후손으로 여기기를 좋아했음).
어린 벨은 7세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숭배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어머니의 아름다움과
민감한 감수성 및 뛰어난 지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썼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아버지의 사상과 태도와 물욕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앙리 가뇽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되도록 많은 시간을 외할아버지와 함께 보냈고,
외할아버지를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다.
벨은 집에서는 아버지와 세라피 이모,
그리고 가정교사인 랠란 신부에게 억눌려 지내면서
(그는 이들의 억압적인 태도를 과장한 것이 분명함),
개인주의적이고 무례하며 충동적인 성격을 키웠다.
이 세 '폭군'은 그가 싫어하게 된 그르노블 부르주아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과보호를 받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교제조차 갖지 못한 채 격리되어 있었다.
외향적인 활동 대신 몽상을 즐겼고,
이때 생긴 명상 취미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스탕달은 나중에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Vie de Henri Brulard〉라는 자서전에서
가족과 교육에 대한 자신의 반발을
'에스파뇰리슴'(스페인주의)으로 설명하고,
이 용어를 평범하고 진부한 것에 대한 혐오, 돈과 장사에 대한 경멸,
인간의 의지력과 넘치는 정열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규정하고 있다.
17세 때 그는 파리로 갔는데,
겉으로는 유명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그르노블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대한 그의 안목은
소설(그가 특히 애독한 소설은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와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 La Nouvelle Héloïse〉였음)에서 읽은 것뿐이었다.
그는 몇 주 동안의 비참한 생활 끝에 위장병에 걸렸으나
다행히 외사촌 형인 노엘 다뤼가 그에게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노엘 다뤼는 엄격한 신사로서 시골뜨기 청년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육군성의 말단 서기 자리를 구해주었다.
3개월 뒤인 1800년 5월,
앙리 벨은 이탈리아에 2번째로 원정중인 나폴레옹의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나폴레옹이 마랭고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날 밀라노에 도착했다(나폴레옹 전쟁).
밀라노는 그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는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들은 훌륭한 음악에 대해 글을 썼고,
밀라노의 몇몇 귀부인들,
특히 프랑스의 화가 앙투안 장 그로의 친구였던 안젤라 피에트라그루아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으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11년 뒤에 그녀의 애인이 된 그는 밀라노에 도착한 직후
난생 처음으로 성 경험을 가졌는데,
이때 걸린 성병이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바람에 평생 동안 시달렸다고 함).
벨은 안젤라에 대한 사랑으로 고민하는 한편
라 스칼라 극장의 공연을 관람하고
카지노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의 인생의 특징이 된 연정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
군대생활을 막 시작한 그는
이탈리아어와 펜싱 교습, 승마, 연극, 오페라 및 밀라노 숙녀들과의 연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8개월 동안 원정에 참여했지만
진정한 군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801년말에 그는 군대를 떠나 파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20세가 된 그에게는
문학이 주요관심사가 되어 있었고,
희곡은 그를 가장 사로잡은 문학 형식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몰리에르의 후계자가 될 작정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려면 책이 필요했고
사교계에 나가려면 옷과 돈이 필요했다.
그는 그르노블 사투리와 못 생긴 외모, 열등감
그리고 여자를 유혹하는 면에서 한 번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경력 때문에
자주 우울증에 빠졌고,
운문 희곡을 쓰지 못하는 것도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서 참고 견딘 경험은
모두 그르노블 출신의 부르주아 앙리 벨을 소설가 스탕달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여배우 멜라니 길베르(루아종이라고도 함)와 연애에 빠진 그는
1805년 길베르를 따라
마르세유로 가서 몇 달 동안 식료품과 잡화를 파는 도매상 노릇을 했다.
그후 육군부로 돌아와
1806년 10월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할 때 그 현장에 있었고,
2년 동안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에 주둔했다.
이곳에서 그는 전부터 읽기 시작한 18세기 철학자들
(특히 데스튀트 드 트라시, 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위스)의 책을 계속 읽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
1809년에는
일선 부대로 돌아왔으며
1812년
병참 참모로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쟁터에 남겨진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했고,
이 장면들을 몇 통의 편지에서 탁월하게 묘사했다.
나폴레옹 제국이 무너진 뒤
새 정권에 등용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자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에게 밀라노는
전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그가 L.-A.-C. 봉베라는 필명으로 쓴 첫 작품
〈하이든과 모차르트 및 메타스타시오의 생애 Vies de Haydn, de Mozart et de Métastase〉(1814)는
과연 그가 어떤 유형의 작가인가
(음악 비평가냐, 예술 비평가냐, 또는 문학 비평가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벨은 평생 동안 약 170개의 필명을 사용했지만,
독일의 유명한 예술 비평가인 J. J. 빙켈만이 태어난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이름에서 따온
'M. 드 스탕달'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17년의 로마, 나폴리, 피렌체 Rome, Naples et Florence en 1817〉를 발표할 때였다.
1821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는 파리에서 사교계 출입을 되도록 삼가면서,
그후 9년 동안 〈연애론 De l'amour〉(1822),
2권의 소책자로 작성된 〈라신과 셰익스피어 Racine et Shakespeare〉(1823, 1825),
〈로시니의 생애 Vie de Rossini〉(1823),
그의 첫 장편소설인 〈아르망스 Armance〉(1827),
〈로마 산책 Promenades dans Rome〉(1829),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 된 장편소설 〈적과 흑〉 등 6권의 책을 출판했다.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난 뒤,
그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주재 프랑스 영사로 임명되었지만,
이듬해 4월에 다시 로마 근처에 치비타베키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직책과 관련된 하찮은 일들과
치비타베키아의 단조로운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 글을 쓸 기회는 충분했고,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밀라노뿐 아니라 로마도 차츰 사랑하게 되었다.
스탕달은 공무원 신분으로 있는 동안 책 출판을 자제했다.
그러나 〈에고티슴 회상록 Souvenirs d'egotisme〉(1892)과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장편소설 〈뤼시앵 뢰뱅 Lucien Leuwen〉(1894),
사춘기까지만 다룬 자서전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1890)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로마의 관습·예술·역사 등 모든 측면에 매혹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영적인 문제나 신비주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로마 가톨릭은
놀라운 제국, 유능한 정치체제일 뿐이었다.
스탕달은 늙어갈수록 활동을 줄인 조용한 생활을 원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호기심을 어느 정도는 유지했다.
그는 젊은시절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사랑을 꿈꾸었고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한 연애의 추억에 잠겼다.
〈파름의 수도원〉도 그런 기회에 쓴 소설이다.
그가 이 소설을 쓴 52일 동안,
수많은 여인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그의 머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탕달은 평생 동안 행복의 이미지를 추구했지만
현실에서는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도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후세에 가서야
자신이 존경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으로 위안을 얻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파름의 수도원〉을 격찬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사를 읽는 기쁨을 누렸다.
이 칭찬은 '행복한 소수'가
스탕달의 소설에서 결국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최초의 신호였다.
1841년 3월에 뇌졸중 발작을 일으켰으며,
그후 이따금 실어증에 걸리곤 했던 그는 질병을 이유로 공식 허가를 얻어,
1841년 10월 11일에 프랑스로 떠났다.
5개월 뒤 스탕달은 심한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고 결국 호텔 방에서 죽었다.
스탕달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가정과 사회에서 행복을 얻는 전통적 비결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결코 따르지 않은(또는 따르지 못했던) 한 사람의 생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일정한 주소나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집도 자식도 없었고, 심지어는 애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08년에 누이 폴린
(그는 폴린에게 모든 것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고, 마르세유와 독일에서 많은 편지를 써보냈음)
마저 결혼한 뒤에는 가족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고
대다수 사람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도 오늘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문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진정한 공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앙리 벨의 가장 근본적인 삶(그의 생각과 환상, 감정의 전기)은 '
스탕달'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속에서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젊은이의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들은 서로 다른 무대 속에 펼쳐진 앙리 벨의 환상이며,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소설 주인공인 젊은이의 매력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매혹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의 주인공들(〈적과 흑〉의 쥘리앵,
〈파름의 수도원〉의 파브리스,
〈아르망스〉의 옥타브)은
각기 다른 사회에 나타나 다른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만,
그들의 욕망과 감수성 및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스탕달이 상상하는 스탕달 자신이며,
따라서 이 소설들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는 이런 소설로써 자신의 감정을 달랬다.
스탕달은 이러한 소설들을 쓰고 싶은 이상한 충동,
이런 소설이 제공하는 쾌락과 심리적 위안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 신비에 걸맞는 이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명이 아니라 본명을 이용하여 '벨리슴'(Beylisme)이라는 낱말을 만들었다.
이 낱말은 소설의 방법 및 행복의 추구를 가리킨다.
벨리슴 신봉자는 앞서 말한 '행복한 소수'의 한 사람이다.
행복에 대한 스탕달의 개념 속에는
신비주의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행복의 추구는 수학의 증명과 비슷한 것으로,
행복의 논리는 이기주의(egoisme)의 명령에 따르는 데 있었다.
스탕달은
이기주의야말로 모든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기라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 복잡한 세계
(나폴레옹의 몰락과 부르봉 왕조의 복위 및 1830년의 혁명을 목격한 일 등)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움직임을 빈틈없이 계산하고,
기회를 판단하고, 습관적으로 아첨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벨은 누이에게 보낸 많은 편지에서
자신의 결함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
이제 그 결함의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채택하여 추진해야 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1820년대의 스탕달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 19세기초의 젊은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연애론〉에서
그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감상만이 아니라
1821, 1822년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이때쯤 스탕달은 그가 나중에 M. 뢰뱅(〈뤼시앵 뢰뱅〉)과
모스카 백작(〈파름의 수도원〉)을 통해
묘사한 세련된 신사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1830년에 〈적과 흑〉이 출판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고,
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준 철학은
인류의 완성가능성을 믿는 18세기 관념론자들(idéologues)로,
데스튀트 드 트라시에 의해 설명되었다.
벨리슴은
인간의 행동을 재료로 삼아
인생을 유물론적·관능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완전히 의식적인 수단을 만들어낸다.
스탕달은
예술, 즉 그림과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자신을 훈련한 방법에서
그의 타고난 쾌락주의적 측면을 보여준다.
평범한 안락과 그 이상의 것
(마차, 오페라 극장의 지정석, 친구들을 충분히 대접할 수 있는 집)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입이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쾌락주의자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표를 그렇게 사교적이고 미학적인 것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쥘리앵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파브리스는
사교계 신사의 특징과는 걸맞지 않은 기질과 대담성을 갖고 있었다.
스탕달 자신의 본성이 갖고 있는 쾌락주의와 소
설 주인공들의 대담한 영웅주의가 빚어내는 모순은
벨리슴 속에서 한데 뒤섞이고 조화를 이룬다.
감정적인 면에서
스탕달은 가족과 결별했고,
지적인 면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결별했다.
이러한 스탕달의 태도는
보들레르가 나중에 '당디슴'이라고 부르게 된 것과 거의 일치했다.
그것은 모든 측면(예술적·사회적·지적 측면 등)의 고립이었다.
스탕달의 끊임없는 필명 사용은
심리적 성격(비록 신비주의적인 성격은 아닐지라도)을 띤 순례나 탐색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 헤맨 행복,
그러나 항상 그를 피해 달아나는 행복을 책
(특히 2편의 걸작인 〈적과 흑〉·〈파름의 수도원〉)을 쓰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찾아냈다.
이 책들은 소설일 뿐 아니라
세계의 나아갈 바에 대한 연구서인 동시에
앙리 벨이 그 자신의 숱한 자아가 엮어내는 드라마와 함께
유물론적으로 또는 상상적으로 배워온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가공의 설계도인 것이다.
스탕달의 전기작가들은
그의 성격과 그가 종사한 직업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면서,
끊임없이 '실패'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는 연인으로도 실패했고,
군인으로도 실패했으며,
작가라는 천직에서도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그를 발자크·플로베르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하고 있다.
젊은 독자층,
특히 프랑스·영국·미국의 젊은 독자들은
발자크나 플로베르보다
스탕달한테서 훨씬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스탕달의 글은
수많은 역설적 갈등과 욕망이 뒤섞인 그의 인간성과
생각을 놀랄 만큼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는 '행복한 소수'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
비굴함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
감각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고 봉사하는 세계에 반항하는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탕달은 세계를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세계와 싸울 때는 세계가 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브리태니커 W. Fowlie 글
Le Rouge et le Noir(赤 과 黑)
1827년의 신문에 보도된 실화를 기초로 쓴 것이며
부제는 〈1830년 연대사 Chroniques de 1830〉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행위의 은밀한 동기와
사람들의 내면적인 영혼의 특성에 대해 말해주는
심리학과 역사철학의 연구서이다.
자연이나 사물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관찰과 심리적 상상, 감정의 가장 미묘한 차이의 분석에서는
매우 뛰어난 심리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