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그림은 고희동의 그림입니다.
김관호의 졸업 전시회 사진이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의 신문에 아주 잘 그렸다는 평이 실렸다고 합니다.
김관호의 초상화
서양화의 태동
한국의 근대 미술을 서양화의 도입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대변하는 화가는 고희동이다. 고희동이 서양화를 공부한 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 당시는 그림 공부란 중국의 화보를 모방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유사하게 그려내면 成家를 이루었다고 했다.”
고희동이 그림을 배우러 찾아간 곳이 心田 安中植과 小琳 趙錫晉이었다. 이들은 중국 화풍의 그림을 무기력하게 그린다고 생각한 고희동은 1910년에 일본의 東京美術學校에 유학을 갔다. 비로서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한국의 근대 미술이 태동한 것이다.
1915년에 졸업하고 귀국함으로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이를 한국의 서양화단의 효시로 본다. 이후에 1911년 金觀鎬, 1912년 金瓚永, 1913년 羅蕙錫이 일본에 서양화를 공부하러 갔다.
2) 고희동(高羲東)
고희동은 조선 말(1886)에 비교적 유복한 사대부 집에서 태어나서 벼슬도 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청년 시절에 망국을 맞은 그는 현세에서 물러나서 현실도피의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예전의 선비들이 낙향하던 심정으로 미술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안중식과 조석진을 찾아 갔으나 중국화의 무기력한 모방에 실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서양사람들을 자주 접촉하였다. 불어를 4년이나 배워서 서양인들과 소통도 가능하였다. 그래서 서양문화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서양화 공부를 하러 갔다.
1909년에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1915년에 미술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 每日申報는 고희동을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소개하였다. 1915년 가을에 고희동이 발표한 ‘가야금을 타는 기녀’는 고희동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조선물산 공진회 전시회에서 이었다. 이 전시회는 다수의 조선화단의 화가가 참여하였지만 서양화가는 고희동과 김관호 두 사람 뿐이었다.
그는 서양화의 불모지인 서울에서 자신이 사랑방에 학생을 모아서 서양화를 가르쳤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도화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그림은 점차 동양화에 경도되었다.
1918년에는 조선의 화가들이 書畵協會를 결성하면서, 고희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나중에는 이 협회를 주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발기인은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 김규진, 정대유, 현채, 강진희, 김응원, 정학수, 김규진, 김돈희, 이도영 등 당당한 화가들이 거의 참여하였다. 그러나 협회의 고문으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정치인 거물을 모시므로 협회의 미술운동이 빛을 잃었다.
외광파의 영향이 다소 보이나 인상파와는 거리가 멀다. 빛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려 하였지만 빛을 3원색으로 분할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1915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 2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화라는 명예를 안고 있다. 1935년에 서화협회는 간판을 내리므로 그도 미술계에서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행방후에 그는 한국화단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여 국전심사위원 등 온갖 감투를 쓰고, 미술 권력자가 되어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미술이 아닌 권력자로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 김관호(金觀浩) 월간미술 95/5
평양이 고향으로서 1911년에 동경미술학교로 미술공부를 하러 갔다. 수석 졸업을 하면서 졸업작품인 ‘夕暮’가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 미술 전람회에 특선을 하였다. 동경미술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 하여 떠들썩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고희동의 자화상 2점과 이 작품이 유일하다. 1915년에 조선물산 공진회에도 고희동과 같이 작품을 출품하였다. 일반적으로 김관호를 고희동보다 더 천재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작품 특징은 외광파의 영향을 보이는 것이다. 인상파의 색채 분할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프랑스의 외광파 화풍이 도입되어 유행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사실적인 그림도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도 인상파와 사실주의 중간 쯤에서 어정쩡한 그림이리라 생각한다.)
김관호는 1916년에 평양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1923년에 선전에 출품한 湖水라는 작품이 입선을 하였다. 이후로는 붓을 꺾고 공식적인 전시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평양에서 목재상을 하면서 살았다고 하나, 이후의 그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희동과 김관호가 미술 활등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한 것은 아직 우리의 여건이 서양화(특히 누드)를 받아들일 여건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