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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때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미국 네이비실의 전설적인 스나이퍼(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삶이 그렇다.
'마카로니 웨스턴' 배우로 데뷔해 인생의 황혼기에 연출의 거장으로 거듭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실존인물이었던 미군 역사상 최고 저격수의 일대기를 그린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전쟁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역동적이고 담담하게 담아냈다.
영화 제목과 동일한 카일의 자서전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매우 흥미로운 풀롯을 가지고 있다.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줄거리다. 현재진행형인 이라크내전이 배경이다.
미군과 피튀기는 전투를 벌이는 이라크 반군이 요즘 뉴스에 많이 등장하는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IS(이슬람국가)다.
IS는 외신에 등장하는 먼나라 집단이 아니다. 최근 IS에 우리나라의 10대소년도 스스로 찾아가 이슬람 전사가 됐다.
'카일'에겐 죽음의 광기가 어른거리는 전쟁터와 사랑하는 가족과의 평온한 일상이 수차례 반복된다.
일정기간 이라크로 참전해 전투에 참가했다가 잠시 미국으로 귀국해 아이들과 단란한 생활을 즐긴다.
전투중에는 한손으로 방아쇠를 당기면서 한손으론 휴대폰을 붙잡고 고국의 아내와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요즘 전쟁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스나이퍼에게도, 그 가족에게도 전쟁의 후유증이 비켜갈리 없다.
전쟁터엔 선과 악이 따로 없다. 미군이 선도 아니고 반군이 악도 아니다. 더 악한놈과 덜 악한놈만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며 내세운 명분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불법으로 대량살상 무기(WMD: weapon of mass destruction)
를 개발하고 테러를 지원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이라크 국민을 억압하기 때문에 무장 해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내세운 침공 이유는 그야말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국제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감행한 것은 명분보다는 자국의 실리와 국제정치, 군사무대에서의 헤게모니를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누가 더 악한놈인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지만 전쟁의 피해자는 분명히 드러난다.
내전의 소용돌이속에서 때로는 반군에게 때로는 미군에게 살해당하는 이라크 국민과 목숨을 걸고 반군과 싸우며 정신적으로
전쟁의 깊은 상흔을 안고있는 미군과 그 가족들이다. 저격수가 미군을 향해 돌진하는 10대 테러범을 사살하고 반군은 미군에 협조한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전기드릴로 살해한다. 몸서리 쳐치는 비극만 있을 뿐이다.
흥행질주하고 있는 윤제문감독의 '국제시장'이 이념논쟁이 뜨거운것처럼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마찬가지다.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압도적 1위를 자치하면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자 미디어와 정치인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연일 舌戰(설전)을 벌이고 있다.
진보는 '군국주의 시각의 위험한 영화(허핑턴 포스트)'라고 비난하고
보수는 '예수는 우리에게 카일을 보내주신걸 감사하게 되는 수작(폭스뉴스)'이라고 옹호했다.
하지만 '국제시장'이 그런것 처럼 이스트우드 감독도 누구편을 들지 않는듯 하다.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도 그의 이러한 시각을 보여준다.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 이오지마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소재로한 두편의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각각 미군과 일본군의 시각으로 태평양전쟁을 조명했다.
그는 두 영화에 대해 "나는 이야기를 할뿐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는 말을 남긴바 있다.
카일은 반군들이 알-샤이탄(악마)라는 별명을 붙일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식 확인 기록 160명. 비공식 기록 255명의 반군을 사살했다.
반군들에겐 반드시 응징해야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부상만 당한채 무사히 전역했다.
그리고 심리치료를 통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 가족과 행복한 나날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 40을 갓넘은 2013년. 미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였던 에디 루스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위해 텍사스주의 사격장을 방문했다가, 에디가 겨눈 권총에 맞아 사망했다
아이러니하다. 전쟁터에서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긴 전쟁영웅이 고국의 안전하고 안락한
일상에서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같은 제대군인의 총에 살해당한것이다.
영화에선 이 마지막 장면이 자막으로 처리 된채 생략됐다.
이스트우드가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하고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방점이 찍힌것 같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반전캠페인'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저 '관객의 눈'으로 판단하길 바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