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문화유산 남기고 역사 속으로
신라의 멸망과 신라의 의미 '골품제' 인재 등용 걸림돌 왕위 놓고 싸움 국력 약화 석굴암 등 문화재 많이 남겨 궁예와 견훤이 크게 세력을 키우는 동안 신라는 나날이 약해졌습니다. 궁예가 북쪽 지역을 공격해 왔을 때, 신라는 방어할 힘이 없어 여러 성주에게 그저 성벽만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할 뿐이었습니다. 계속 영토가 줄어듦에도 왕과 귀족들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은 왕비와 왕실 가족과 더불어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하며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석정에 견훤의 후백제군이 갑자기 쳐들어왔습니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에게 붙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습니다. 후백제군은 신라 수도를 약탈했고, 김부를 왕위에 앉히고 돌아갔습니다. 김부가 곧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입니다. 경순왕은 망해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신하들과 회의를 하여 나라를 고려에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차피 나라를 지킬 힘이 없다면, 전쟁 없이 항복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1000 년의 왕국 신라가 멸망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 왕과 귀족들이 지나치게 나태하고 사치와 낭비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ㆍ백제ㆍ가야 등과 경쟁하던 시절에는 늘 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 초기에는 이웃한 가야보다 발전이 느렸습니다. 하지만 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여 빠르게 성장한 이후에는 가야를 제압하고 소백 산맥 동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국력면에서 백제가 보름달이라면 신라는 반달이라고 할 정도로 백제와의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승리에 자만하여 사치를 일삼고 나태해진 사이, 신라는 역전의 기회를 노리며 철저한 준비를 했고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 신라보다 훨씬 크고 강한 나라였던 고구려마저도 당과 연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당나라마저 몰아 내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도 신라였습니다. 문제는 삼국 통일 이후 오래도록 지속된 평화와 번영이었습니다. 평화와 번영이 도리어 신라 사람들을 게을러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왕과 귀족들은 왕위를 놓고 서로 간에 싸움을 벌여 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또한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호족들은 지방에서 힘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게다가 신라가 갖고 있는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는 능력은 있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이 신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던 것입니다. 신라는 해상왕 장보고가 대표하듯이 활발한 해외 무역 활동을 펼치며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했습니다. 또 석굴암ㆍ다보탑을 비롯한 세계적인 문화유산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모두 다 차지하여 큰 나라로 발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토의 크기가 나라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다 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한 나라가 천 년의 역사를 지속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는 드뭅니다. 신라가 가야, 백제,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라 역사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신라는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과 유산을 많이 남겨 준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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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용만의 고구려의 재발견 원문보기 글쓴이: 영양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