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박경리, 흙으로 돌아가다 =
이혜정 시인
▒ 박경리 [朴景利 1926~ 10.28~ ]
대하소설(토지 土地)를 쓴 소설가. 이 작품을 26여 년간 집필했으며, 한국 근 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뤘다.
국적: 한국
활동분야:문학
출생지: 경남 통영
주요수상
현대문학 신인상(1957), 한국여류문학상(1965), 월탄문학상(1972), 인촌상(1991)
주요작품
김양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토지
1926년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 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 전도 剪刀>> <<불신시대>> <<벽지>>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 <<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 가 있다.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었으며 시인 김지하가 사위이다.
▒ 故 박경리 "토지"의 품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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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경리씨가 '토지'의 품으로 돌아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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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타계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故 박경리씨가 토지의 품에 잠들었다. 박씨는 지난해 7월 폐암을 선고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포기, 강원도 원주에서 요양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달 4일 뇌졸중 증세를 보여 서울 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나 증세가 악화돼 지난 5일 오후2시45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와 정치인, 문인, 연예인 등 각계 인사들이 찾아 조문했다. 이들은 " 선생의 타계는 한 작가의 죽음이 아니라 한 연대기의 극적인 종언"이라며 "비록 선생이 잠들더라도 <토지>는 영원히 그의 넋을 이어갈 것"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그가 2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엮어낸 <토지>는 문학작품이기 전에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역사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경리씨는 타계 전 발표한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을 통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갔다. 한국 작가회 문인장으로 5일간 치러진 장례는 9일 오후2시 고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시 산양읍 양지공원에서 열린 안장식으로 끝을 맺었다.
안장식에 앞서 오전 10시 통영시 강구안 문화마당에서는 김태호 경남도지사, 진의장 통영시장과 문인 등 각계에서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 후 시내로 행진한 꽃상여 행렬엔 전국의 문인들과 통영시민의 애도가 담긴 만장 200여 개와 수천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다.
안장식은 남해안 별신굿보존회 정영만 회장의 들채굿(영혼인도굿)으로 시작됐고, 이어 유족과 지인들의 작별인사 속에 하관이 진행됐다. 하관을 마치고 강원 원주 토지문화관과 토지문학공원에서 가져온 흙을 관 위에 뿌리는 허토의식이 치러졌다. 고인이 2003년 전남 함평 나비축제 명예대회장을 했던 인연으로 함평에서 가져온 수십 마리의 흰나비를 날리는 것으로 안장식은 마무리됐다.
▒ 문학과 그의 삶
"행복했따면 문학도 없었다"
박경리씨는 1926년 10월28일 초저녁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병인년 호랑이띠. "초저녁은 호랑이가 한창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여서 기가 센 사주" 라는 말처럼 굴곡진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네 살에 네 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해 열여덟에 박경리를 낳은 아버지 박씨가 태어나자마자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박씨가 아버지를 좋아했을 리 만무했고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특히나 아버지에게 학비 문제로 대들었다가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고 학비 부담을 어머니에게 미루자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다 맞았던 것이다 그 시절 박씨에게 문학은 유일한 즐거움이지 희망이었다.
후일 그는 책에 미칠 정도로 좋아해 누가 책방에 돌려주는 책이 있으면 싹싹 빌어서라도 책을 손에 놓고선 밤새 읽고 돌려주곤 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1946년 김행도씨와 만나 어두웠던 가정사의 그늘을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고 6.25전쟁 난리통에 사별의 아픔을 겪는다. 전쟁 직후에는 아들마저 가슴에 묻어야 했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을 찾아가 두세 편의 시를 보여줬던 것이 그가 문학으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고 김동리 선생은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을 권했다. 1955년 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발표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소설을 시작하며 한국 문단의 판도를 바꿔놓은 대작 <토지>, 그는 외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권 분량의 소설을 써서 탈고까지 마친 후에야 세상에 공개하기로 작정했었다. 그러나 생계를 이어가야 할 가장의 책임이 뒤 따르는 그로서는 그 책임감을 벗을 수 없었다. 결국,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고 한 차례의 절필을 포함, 1972년 문학사상, 1977년 독서생활과 한국문학, 1983년 정경문화, 1987년 월간 경향, 1992년 문화일보로 지면을 옮겨가는 우여곡절 끝에 1994년에서야 원고지 3만 1200장으로 펜을 놓을 수 있었다.
무려 25년에 걸쳐 쓴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는 그녀의 생애와 같다 객관적인 시간으로 25년을 매달렸지만 그는 평생을 썼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생각하고 있는 것, 역사관. 사상철학, 그러한 것들이 토지에 전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토지는 칼날 위에서 쓴 작품이라고도 소개했다. 토지를 쓰기 시작한 이듬해 유방암 수술로 신체 일부를 도려내고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글을 썼으며 병마를 이겨내야 하는 육체적 고통과 사위 김지하 시인이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어 유신체제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기에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80년 무렵 옥바라지를 위해 원주에 있던 외동딸 김영주를 따라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박씨는 이러한 고난을 "평생의 큰 아픔이나, 분노, 육체의 고통이 작품을 쓰게 한 추진력이었다."라고 말했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라는 글귀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는 한 권 분량으로 시작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보호조약, 청일전쟁, 광복에 이르기까지 한국근대사를 아우르며 민족의 한을 담아낸 대서사시로 완성됐다.
그 소설은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을 넓은 공간적 배경으로 스토리 구성하여 700명이 넘는 인물 설정 또한 인물에 대한 개성 성격, 심리묘사로 작품성과 함께 탁월한 대중성도 확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겨레의 재산 노벨문학상을 우리에게 안겨줄 유일한 작품이라고 전문가들의 찬사 속에 드라마와 서사음악극 또는 영화 등으로 각색되어지고 있으며, 독특한 어휘와 방언, 풍속, 속담 등을 담은 토지사전이 발간되었으며,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토지로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토지의 산실인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 토지문화관에서 낮에는 텃밭을 가꾸고 밤에는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내다 생전 "이곳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던 고향 경남 통영 신양읍의 미륵산 기슭 양지농원에 묻힌 박경리 작가. 문학계의 토지를 마련하고 '토지'의 품으로 돌아간 그의 뒤로 "영원히<토지>의 넋을 이어갈 것"이라는 후인들의 목소리가, 선생이 남긴 토지 위에 새로운 문학의 꽃을 활짝 피울 것이다.



통영의 딸로 태어나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8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경리 선생은 2008. 5. 9. 14:00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한산도 앞바다가 훤히 내다 뵈는 양지 바른 곳에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생명의 아픔
박경리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짙은
연민이에요
연민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설명없는 아픔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길러주는 사랑을 하세요.
(2008년4월 '현대문학'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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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 방한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 방한
오르한 파묵은 어렸을 때부터 한국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이모부에게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생활 환경으로인해 "2005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하는 한국이 매우 친근한 나라라 말했다.
파묵은 이날 '책의 길', '공존의 길', 이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서구화와 민족주의, 서양중심주의 사고방식에 대한 견해를 밝히며 최근 한국에 번역돼 나온 자신의 에세이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lstanbul: Memories and the City)'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사회에 대한 강렬한 의식을 지닌 작가로 "작가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보다 인간에게 정(情)으로 다가가기 위한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소한 것을 끄집어내고 채로 걸러 글로 옮기자는 것이 문학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히며 자신의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기자간담회도 파묵의 `사회참여 경향`을 드러낸 자리였다. 총회 기조연설에도 인용했던 `No Entry(진입금지)`라는 표식을 본 행인의 반응을 예로 들며 사람들을 특정 기준에 따라 가르는 행위가 사회에 갈등을 어떻게 가져오는지 설명한 것. 사람을 인위적으로 분류하는 일이 처음에는 큰 의도를 가지지 않고 일어나지만 이 때문에 일어나는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크다는 게 파묵의 이야기다.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재산을 지키고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 생각 없이 `진입금지`라는 표시를 걸 수 있죠. 하지만 이 간단한 행위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못 들어가는 사람`이란 계급이 생기는 거에요. 그리고 결국 이 `못 들어가는 사람`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길' 은 무엇일까. 파묵은 "미래를 함께하려면 과거에 대한 합의를 먼저 해야 한다" 고 말했다. '미래'에 정신이 팔려 현실 문제를 잊어버리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과의 경계와 금기를 긋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소설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우리 안의 경계와 금기를 허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며, 자칫하면 다양한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미래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화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미래에는 다양한 문화를 공유할 수 있다고 너무도 쉽게 생각하죠. 하지만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조화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어요. 저는 `문학`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중요한` 현실을 잡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도 당연히 사회와 소통하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겠죠." 라고 말하는 신념있는 태도를 볼수있다.
오르한 파묵은 1952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한때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도로서의 꿈을 키우기도 했으나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퇴했다.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의 아들들`을 펴낸 이후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 등을 주제로 작품세계를 넓혀오던 그는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 `눈`(2002) 등이 있다.

프로필
이름: 오르한 파묵(Orhan Pamuk)
출생: 1952년6월7일
출신지: 터키
직업: 소설가
학력: 이스탄불대학교
데뷔: 1974년 소설 '제브뎃 씨와 그의 아들들'
경력: 1985~1988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방문교수
수상: 2006년 노벨 문학상
1998년 아일랜드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 새로운 인생, 하얀성,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