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폭 투하 준비를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69년이 지난 최근 공개됐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는 인류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핵무기가 사용된 예이다.

폭탄 외부를 체크하는 병사

리틀보이 내부. 부품의 테스트나 충전을 위한 배선연결

감독자 물리학자 프랜시스 버츠(왼쪽). 히로시마에 투하될 원폭에 L-11 표기 중
지켜보는 사람은 물리학자 노먼 라므제(오른쪽)

케이스 수납 직전 팻맨

테니안 섬 기지로 운송 전 팻맨에 마무리 장치를 검사 중

설치가 완료된 팻맨에 서명을 하는 정비병

폭탄에 쓰여진 관련자들 사인

원숭이국 히로히토(일왕)에 두 번째 키스를..이라 적혀있다

비행장 수송 전 검사 받는 팻맨

비행장으로 수송중인 폭탄과 호위차량

원폭이 수납될 테니안 섬의 격납피트

격납되고 있는 원폭

유압리프트로 들어올려진 원폭

피트에 설치된 원폭. 안전을 위해 커버를 걸고있다.

원폭 실으러 가는 폭격기

폭격기에 탑재되는 리틀보이

유압리프트로 탑재되고 있는 원폭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에 따라 히로시마 인구의 절반인
90,000~166,000명이 숨졌다고 추정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거리

히로시마 투하 3일 후 8월 9일 나가사키 팻맨 투하. 희생자 6만~9만 추정
원폭 투하로부터 몇개월 간 화상이나 방사선에 의한 부상, 그 합병증이 원인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히로시마에는 주둔군이 머물었다고는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희생자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었다. 이 2번의 원폭 투하와
소련의 선전 포고로 며칠 뒤인 8월 15일 일본 정부는 무조건 적인 항복을 발표

폐허가 된 나가사키를 지나가는 생존자들

이 사진과 동시에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소장으로 맨해튼 계획을
주도해"원폭의 아버지"라고 칭해 진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이루어진
기밀 안전 보유 의혹에 관한 50년대의 조사 자료도 공개돼 있다.
스아라모스 국립 연구소 소장으로 맨해튼 계획을 주도해"원폭의 아버지"라고
불려진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고명한 물리학자였으며 전쟁 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오펜하이머는 4주간 비공개의 심문을 받고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혐의로
직무에서 추방. 미정부 당국은 오펜하이머의 아내나 형제가 공산 당원이고
오펜하이머 자신도 공산당의 말단 조직과 관계되어 있다고 의심했다.
미국 과학자 연맹의 정부 기밀 계획 책임자 스티븐 애프터 굿 씨의 말처럼
이 자료의 공개에 따라 오펜하이머 사건의 수수께끼가 풀릴 듯 하다.
오펜하이머 사건은 냉전 시대의 빨갱이 사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오펜하이머는 1967년 사망하기까지 일생을 FBI의 감시를 받았다.


자료 펌-포구테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