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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리안아쉬람 원문보기 글쓴이: 이명권
5)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중요성
『리그베다』나『사마베다』혹은『야주르베다』와 같이 초기나 중기의 『베다』가 신들에 대한 찬양이 중심 내용을 이루었다면, 베다의 최종적 결론을 구성하는 베단타 사상의 핵심은 변전하는 만물의 근저에 놓여있는 근원적 실재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지고한 가치가 있다. [문다카 우파니샤드]의 다음 대화 내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훌륭한 집안의 사람, 사우나카(Śaunaka)가
앙기라스(Angiras)에게 예의를 갖추며 다가와 물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시여,
무엇을 먼저 알아야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되겠습니까?"
이 말은 세계의 모든 다양한 현상 속에서 그 모든 변화의 배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한 가지 근원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잡다한 지식의 이면에 흐르는 근원적이고 통일적인 지식의 추구 그것이, 제의 중심의 [브라흐마나]에서 출발하여 은자들이 숲속에서 탐구하던 숲의 서(書) [아라냐카]를 거친 결과 얻어지는 심오한 철학적 오의서(奧義書)인 [우파니샤드]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파니샤드에 와서는 베다의 여러 신들이 우주의 창조 속에 드러나는 '하나의 빛(One Light)'을 증거 해 주는 메신저일 뿐이다. 베다의 찬송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관심의 이동은 객관적 대상의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 주관적 내면세계로의 이동이라는 사고의 대전환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마치 탈레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의 자연 철학이 물질적 혹은 우주적 대상 세계의 탐구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자신과 그 내면 세계로 철학적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과도 유사한 혁명적 의식의 전환이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 그것이야말로 역으로 우주의 혹은 자연의 본질을 해석하는 실마리가 된다고 본 것이다. 우주의 심장으로서의 '실재'(Real)는 영혼의 무한한 깊이 속에서 반영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파니샤드는 그러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이르는 내면세계로의 영적 탐구에 대하여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고, 진리야말로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러 곳에서 다양한 비유를 들어 강조한다. 이러한 사상적 맹아(萌芽)의 씨앗은 후기 베다인 [아타르바베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최초의 운명적 인간(purusa)을 만들 때 신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였다." 육체의 죽음을 피 할 수 없는 인간 속에도 신들이 거주 한다는 이 사상에서 신인(神人)의 합류 또는 '하나 됨'이 예고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푸루사(purusa)'는 샹키야(Sānkhya) 철학체계에서 최초의 원인(原人)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인간이다. 또한 푸루샤는 인간의 참 자아(the Self)이며, 절대자요 순수의식이다. 그리고 물질세계(prakriti)의 변화를 관찰하는 '증인'이기도 하며, 푸루샤(순수의식)와 프라크리티(물질세계)의 결합을 통해 우주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푸루샤는 [우파니샤드]의 베단타 철학에서 아트만(ātman)과 동일시되고 따라서 동시에 브라만(brahman)과도 동일시되고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푸루샤와 브라만을 동일시하는 예를 한군데 살펴보자.
"손가락만한 크기의 푸루샤는 몸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푸루샤)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이것(푸루샤)이야말로 그것(브라만)이다."
여기서 "손가락만한 크기의 푸루샤"(angustha-mātrah puruso)는 다른 [우파니샤드]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크기의 작음을 비유한 것일 뿐이다. 앞서 본 라마누자(제한적 불이론자)와 림바르카(不一不異論)는 푸루샤를 '손가락만한 크기'라고 [우파니샤드]가 말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예배하는 자의 마음에 푸루샤는 작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경우에서 푸루샤로서의 '자아'는 "쌀이나 보리알처럼 작지만 모든 것의 통치자요 모든 것의 주인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은 '손가락'이나 '곡물' 혹은 '원자(原子)'처럼 지극히 작은 것 같으나 영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지고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푸루샤가 몸 중앙에 있다는 것은 내면의 깊은 영혼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의 주인이다. 그러한 푸루샤를 [카타 우파니샤드]의 이어지는 본문에서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푸루샤는 몸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연기 없는 불꽃과 같이.
그는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다.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다.
진실로 이것(푸루샤)이 그것(브라만)이다."
여기서 푸루샤의 속성을 연기 없는 불꽃에 비유하고 있다. 연기 없는 불꽃은 투명하다. 내면의 영혼이 그 무엇에 가려져 있지 않다. 순수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순수 의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영원한 시간의 주인이 된다. 여기서 시간의 주인이라는 문제에 대해 라다크리쉬난은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예컨대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시간적인(timeless) 절대자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적 질서와 흐름의 통제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푸루샤의 기능은 무시간적인 절대자의 역할에서 다소 축소된 단순한 시간적 통제자의 역할이라는 차별이 생긴다. 푸루샤가 순수 의식의 차원에서는 브라만과 동일하지만 시간성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차별성을 보이는 듯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라다크리쉬난은 이러한 신성(神性)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우파니샤드에서는 희생제의를 강조하던 그 이전의 종교적 풍속은 열등한 것으로 배격된다. 그 대신 지혜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희생제의를 강조하던 그 이전의 [베다]의 문헌들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이제 실로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세계, 조상의 세계, 신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자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수단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계는 의례와 같은 행위로 구제되는 것이고
신들의 세계는 지혜로 획득된다.
실로 신들의 세계는 최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지혜를 찬양하라."
현실적 인간의 세계와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신들의 세계라는 세 개의 세계를 상정해 놓고,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신들의 세계임을 밝힌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는 과거와 같이 동물의 희생제의를 바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지혜(vidyā)를 통해 획득 되는 세계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지혜다. 산스크리트어의 "비드야(vidyā)"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knowledge)"이다. 그런데 이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의 감각에 기초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혹은 계시적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서에서도 "너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할 때의 지식과 상통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도 제의의 수행 그 자체는 '신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지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묘사된다.
"이 (다섯 아그니에 대한) 지혜를 아는 자,
그리고 숲에서 신념을 가지고 엄격히 수행하는 자들은
빛에 이르고 다시 낮(날)에 이르며,
다시 빛나는 달빛의 밝은 보름동안(날)에 이르고,
다시 태양이 북반구로 향하는 동안의 여섯 달에 이른다.
이 여섯 달에서 일 년으로, 일 년에서 태양으로,
태양에서 달로, 달에서 번개로 간다.
거기 그곳에서 인간이 아닌 인간(초인)이 그들을 브라만에게로 데려간다.
이것이 신에 이르는 길이다."
이처럼 신에게 이르는 길은 먼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혜가 없이 그저 제의의 희생제례나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은 신에게 이르는 길이 참으로 아득하다. 계속 이어지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의 본문을 살펴보자.
"그러나 속세에 살면서 희생제의를 수행하고 공적인 일과 자선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서 불에 태워진 다음) 연기로 가고, 또 연기에서 밤으로, 밤에서 (달빛 없는)보름동안의 어두움으로, 또 어두운 보름 동안에서 태양이 남반구로 향하는 여섯 달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일 년의 그해(그 시간 내)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의 중심의 수행자와 지혜 중심의 수행자의 차이를 선명하게 비교시켜 주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수행자의 처소는 숲이다. 반면에 일반 세속인들은 세상 속에서 희생 제의와 보시를 행하는 정도로 수행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신들에 이르는 길이 그 만큼 아득하게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지혜의 수행자가 아니고서는 오히려 죽어서도 신에게 이르지 못하고 윤회를 거듭 할 뿐이다. 더구나 악행을 하는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개나 짐승 또는 천민으로 태어난다. 계속되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의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業報를 마친 사람) 중에 선한 행위를 한 자들은
곧 좋은 탄생을 보게 되는데,
바라문(사제)으로 태어나거나
크샤트리아(武士계층) 혹은 바이샤(평민)로 태어난다.
그러나 악(惡)을 행한 자들은 곧 나쁜 탄생을 보게 된다.
개나 돼지나 천민으로 태어난다."
이같이 제의수행 보다는 지혜를 강조하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동시에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의 일생 자체가 곧 제사행위와 같다고도 말한다. 태어나서 24년 동안의 청년기는 아침의 제례와 같고, 그 다음의 44년의 중년기는 중천(中天)의 제례요, 그 이후 48년간의 노년은 마지막 저녁의 제례와 같다. 각 제례 때 마다 해당되는 숭배의 신이 있는데, 아침은 바수(Vasus) 신으로서 모든 생명을 지탱하는 호흡을 상징한다. 중천의 제례에는 루드라(Rudra) 신이 관계된다. 루드라 또한 생명의 호흡을 의미하지만 '울게 하는 자'라는 뜻이 있다. 44년 동안의 중년기에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이 루드라를 부름으로써 치유함을 얻는다. 그리고 남은 48년 동안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면 역시 생명의 호흡인 아디티야(Adityas)를 부른다. 이와 같이 지혜를 얻어 질병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116년을 산다. 이 모든 일생이 곧 제사의 삶과 같다는 것이다. 결국 제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제사라는 지혜다. 그 제사의 중심에는 "호흡"이 있다. 그러나 제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해 보면 그 가운데 자기-희생이라는 철학적 함의가 있다. 자기희생은 곧 자기-부인(否認)이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사례로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서두에서는 말의 희생제사(aśva-medha)와 관련하여 우주의 각 부분을 말의 각 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옴(aum),
새벽(usā)은 실로 희생제물인 말의 머리(śirah)이며
태양(sūryas)은 말의 눈(caksuh)이다.
바람(vātah)은 그의 호흡(prānah)이며
바이쉬바나라(Vaiśvānara)라는 불(agnir)은 말의 벌린 입(vyāttam)이다.
일 년(samvatsara)은 희생되는 말의 몸(ātmā)이며
하늘(dyauh)은 말의 등짝(prstham)이다.
대기(antariksam)는 그의 배(udaram)요
땅(pritivī)은 그의 발굽(pājasyam)이다. ..."
여기서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말은 우주의 각 주요 구성 부분을 이루는 몸체로서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는 우주를 상징하여 나타내고 있다. 말은 특히 전시에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을 감안하면 말의 전진은 힘찬 우주의 전진과 비교 된다. 말이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고 영광스런 귀환을 하게 될 때 도시의 한 복판에서 제사의 희생물이 된다. 그리고 제의를 집행한 왕은 황제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 같은 말의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사타파타 브라흐마나]에서는 우주적 해석을 길게 하고 있다. 말 희생제사의 우주적 해석은 "자기-부정"이라는 각도에서 종교적 진리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말이 전시에서 승리했지만 자기를 희생해야 했듯이, 인간의 삶의 방식도 태양과 땅이 그러하듯이 우주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가 존재하는 양식은 각자의 희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주 자체가 희생이며 제물이듯이, 인간의 삶 자체도 희생이며 제사다. 말이 희생되어 우주의 일부를 구성하듯이 인간은 자기-희생 즉, 비움(renunciation)을 통하여 지상의 권력이나 부귀 대신에 영적인 해방을 얻게 된다. 특히 우파니샤드에서 욕망과 무지는 영원한 해탈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도와 희생제의는 영적 삶의 수단은 되지만 참된 희생제의는 에고(ego)의 포기, 곧 비움에 있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담지하고 있는 카스트(caste)의 굴레에 매어있지 않다. 오히려 영적 우주의 세계로 인간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의 선언에서처럼,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Tat)과 다름 아니라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카르마(karma, 業)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베다』의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 계승 하지만 그 중심된 내용의 가르침은 오히려 훌륭한 스승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스승들 가운데 야즈나발키야(Yājnavalkya)와 샨딜리야(Śāndilya)와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 스승이 전개하는 제자들과의 대화의 내용들이 우파니샤드의 전체 중심 내용을 이루며 그 중심주제는 바로 "내가 곧 브라만"이라는 생각의 결론을 얻는 것이다. 과거의 신들에 대한 제의적 풍속과 사회적 온갖 구속의 억압에서 벗어나 내면의 근원적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최고(最高), 최종(最終)적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와 중요성이 있다. 이제 다음에서 우파니샤드의 중심 개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