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민족시인 이육사 소나무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남쪽, 윤동주는 북쪽의 민족시인이자 애국지사이다. 문학과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때도 앞으로도 남과 북,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며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39여 년의 삶에서 17번의 옥살이를 했다. 누구보다도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시인 이육사는 본관이 진성, 호는 육사(陸史)이다. 이름을 이원록, 이원삼, 이활이라 하다 이육사로 개명했다. 필명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는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때의 수인번호가 264였기 때문이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에서 태어났다. 영천군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하였다.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다 1932년 3월 퇴사하고 4월 만주 펑톈(奉天·봉춘)으로 갔다.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에 입단한 뒤,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다. 특히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33년 학교를 졸업하고 7월에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논문, 시나리오를 쓰고 뤼순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라는 게 밝혀져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다음 해인 1934년이다. 난징 군사정치학교 1기 동기생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처남 안병철이 일제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못 이기고 그만 자백을 하여 여러 동지가 체포되고 죽거나 다쳤다.
이 일로 크게 분노한 이육사는 안병철의 뺨을 때린 뒤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의 편지로 ‘더러운 피의 일족인 아내를 데려가라’ 했다. 심지어 7년간이나 본가에 들려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여관에서 잤다니, 이로써 이육사의 품성이 어떠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1937년 이육사는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다. 이 무렵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에 있는 사촌 형 이종형의 60만 평 청포도 농장에서 시 ‘청포도’를 썼다. 또 이 무렵 시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이육사는 1943년 베이징에 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다시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때 대나무로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받았다.
이육사의 유해는 둘째 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난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마을은 현재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이다. 이곳에 2004년에 개관한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또 문학관 왼쪽에 둘째 딸 이옥비가 사는 집이 있다. 문학관 오른쪽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이육사 묘소이다. 쓸쓸한 묘소를 소나무가 울타리로 지키는데, 아직 어리지만 맘엔 낙락장송이다. 말없이 말술을 마셨다는데…. 미처 준비 못 해 쓴 술 한잔 올리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참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