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 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에 의하여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진 건물로,
건축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대표적인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 기둥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계통의 건물로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 모양의 우리량은 그중 백미로 꼽으며 연등천장과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은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조형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천주교성지로 불리운 해미읍성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문하신 전국 최대 순교성지로 외신 등에서 정원의 꽃밭처럼 아름다운곳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해미읍성은 성곽둘레 1,800m, 높이 5m, 면적 20만㎡로 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평성이다. 조선 태종 18년부터 세종3년까지 3년간 걸쳐 쌓았고, 성종 22년(1491)에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선조12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내포지방의 천주교 박해 때 1,000여명의 신도를 이곳에서 처형하게 됐다. 그때 박해와 관련한 회화나무(호야나무), 자리갯돌, 여숫골 등이 순교성지로 해마다 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있다. 도보객을 위해 읍성 성곽과 소나무 정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걸을 수 있으며 주말 전통문화공연 등으로 문화예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또한 회화나무(호야나무), 동헌, 옥사 등 현존하는 역사 자료로 조선시대부터 근대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해미읍성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으로 유명세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기존에도 해미읍성역사 체험축제에 매년 2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가고, 주말 전통 문화공연 등으로 연간100만여명의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다. 잘가꾸어진 잔디를 마음껏 밟을수 있고 연날리기, 떡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점차 관광객이 늘고 있다. 또한 해미순교성지가 인근에 있어 많은 수의 천주교 순교성지 순례객들이 연계하여 방문하고 있다. 다양한 맛집이 있고 숙박이 가능한 펜션, 농촌관광지 등 주변 관광 인프라가형성 되어 있 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운 서산 마애불
추사 김정희고택
위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안채에는 6칸 대청과 두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등을 갖춘 'ㅁ'자형 가옥이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대갓집」형이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 가옥 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사랑채 댓돌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
추사의 지혜와 고고함이 배어있는 추사고택 한채, 한채를 걸쳐 걷다보면 기둥마다의 주련과 추사의 작품들과 손길에 감성과 지성이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