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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합시다(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없다).
요1서 4:7-11/ 2013. 5. 12 어버이주일설교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특히 이 나라도 Dia De Mama(어머니의 날)이기도 합니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효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는 모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우리에게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버이를 통해 사랑을 옷입게 됨에 대해서 부모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버이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가족이나 사회 그리고 교회안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덕목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가정도 존재할 수 없고 아마 이 세상은 온통 짐승같은 사회로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힘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이 있기에 세상에서 살며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은 이미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특히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가정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가족간 서로 사랑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하시길 부탁합니다.
헬라인들은 사랑을 4가지 단어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그리고 스톨레라는 단어입니다. 모두다 사랑을 말하지만 조금씩 의미는 다른 것 같습니다.
4가지의 사랑이야기
1. 아가페(희생적인 사랑, 하나님의 신적인)의 사랑이야기- 복음은 하나님의 러브스토리이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의 다이아몬드중의 다이아몬드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의 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복음이며 그 복음이 또한 우리를 구원케 한 것입니다. 이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소개할 때 이 부분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아들을 버리신 것은 곧 그 자신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인 아가페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신적인 사랑, 자신을 죽음으로 버린 사랑이 바로 그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은 바로 그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고 감격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나도 이제 그 사랑을 갚아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을 깊이 기억하십시다. 잊지 마십시다. 그 사랑이 오늘 나를 구원하게 하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가시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부모님의 사랑
-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세상에서의 최고의 사랑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을 쏘아 3발을 명중시켰습니다. 코코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이토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을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비서관 모리 등 3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사살한 뒤 뤼순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조 여사는 1910년 2월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신 명주수의를 입고 아주 떳떳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뤼순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때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수의와 함께 보낸 편지내용 중 일부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안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7통의 유서를 남겼습니다. 안중근의사께서는 옥중에서 "안(중근)응칠"이라는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이라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중에 한통 어머님께 보내는 편지 유서를 소개합니다.
"어머님전상서"
아들 안토마스 올림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 자식은 감히 한 말씀 어머니에게 올리려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저의 막심한 불효와 정성(定省)을 못다 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슬처럼 허무한 이 세상에서 육정(六情)을 못이기시고 이 불초 자식을 너무나 염려해 주시니, 후일 천국에서 만날 뵈올 것을 바라며 기원합니다.
현세의 일이야 말로 모두가 주의 명령에 따른 바이오나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님꼐 바치도록 교양해 주시옵소서. 이상은 그 대요이며 여쭐 말씀은 많습니다만 어쨋든 후일에 천국에서 기쁘게 또 만나 뵈옵겠으니 그때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가족 일동에게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주교(主敎)를 전심(專心) 신앙하여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사는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에게서 들어주시옵고 반드시 염려를 거두시옵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안중근의사에게 보내는 어머니 조마리아여사의 편지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살아서 너와 상봉하기를 기망하지 않노라.
네가 만약 늙은 어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감옥에 수감되었을때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 동생을 통해 다음의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어미는 현세(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오니...내세((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의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
자식의 죽음앞에서도 의연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어떻게든 살아줄 것을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텐데 그 모든 사적인 감정들은 표현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신앙과 나라를 위해 아들에게 이 편지를 써내려 갔을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아픈(이 정도로 표현이 안되겠지요..) 일이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편지글입니다.
2. 필레오(사제간, 친구간)의 사랑이야기
코르자크(Korczak) 선생님의 희생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야드바셈(Yad Vashem) 이란 유대인학살기념관 이 있습니다. 기념관 앞에는 제자들을 꼭 껴 앉고 있는 코르자크(Korczak) 선생님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독일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하루하루 불안하게 지내고 어느 날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독일군의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와서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태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독일군의 모습을 본 유태인 어린이들은 무서워서 선생님에게 달려가 매달렸습니다. 코르자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몰려온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줍니다. 선생님은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아이들을 왜 잡아가느냐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짐승만도 못한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트럭 한 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팔에 더욱 안타깝게 매달렸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 곁에서 유태인 어린이들을 떼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 내리려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 라고 하며 선생님도 아이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블린카(Treblinka)의 가스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태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함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학살된 동포들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기념관 뜰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동상은 바로 코르자크 선생님의 동상입니다. 트레블린카는 지금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치가 패전에 이르자 흔적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르자크 선생님에 대한 얘기는 목격자의 입을 통해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제자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어 희생적인 사랑의 표본으로 전해집니다.
3. 에로스(이성간)의 사랑이야기
어느 아내가 받은 남편으로부터의 편지(여성시대라는 라디오 프로에 소개된)
작성일 : 09-09-29 22:37 / 이영희
두 분 안녕하세요? 명절도 다가오는데 준비 잘 하시기 바랄께요. ^^
다름이 아니라..오늘은 제가 받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여성시대를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편지를 줬어요. 뜬금 없이요. 이게 뭔가 하고...바로 뜯어보려니 남편이 준 편지였습니다.
내용을 옮겨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먼저.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부끄럽소.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오.
30년 이상되었나. 다름이 아니라 늘 당신한테 고맙다는 이야기한번 못하는 남편이었는데
오늘은 편지로나마 그 마음을 전해보려고 펜을 들었소.
지인에게서 좋은 내용을 담은 메일을 보았는데, 거기 그렇게 써 있었소.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망설이지 말라’고.
그래서 그동안 말 못한 이 마음 다 담진 못해도...부족하나마 이렇게 표현해보오
‘사랑하오. 이번 명절에도 힘들텐데... 애써 주시오.’
이 편지를 읽고 있노라니. 크고 작았던 설움이 다 씻겨져 내려가더군요.
남편이 들을 지 모르겠지만, 저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저도 늘 당신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4. 스톨게(가족간)의 사랑이야기
시골의사 박경철
저는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한 환자가 있죠. 4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위암이었죠. 하지만 이게 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어요. CT가 그때만 해도 3cm 단위로 잘라져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암이 작으면 잘 보이지 않죠. 일단 보고를 드려야 했죠. ... 아침에 주임과장에게 이런 환자가 있었고 전이가 확인이 안됩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더니 배를 먼저 열어보고 전이가 되어있으면 닫고, 안 되어 있으면 수술을 하라고 하더군요. 근데 환자 보호자에게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걸 환자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가족과 보호자를 이야기해봤더니 남편은 죽었고, 시댁식구들은 연락이 끊어졌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본인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고등학교 아들과 중학교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어떡합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하더라고요. 그래서 수술 날짜를 잡았죠. 헌데 배를 열고 보니까 저희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가슴부터 배까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되어 있더군요. 작은 암세포로 전체가 퍼져 있었어요. 너무 심각했던 거죠. 바로 닫고 수술실을 나왔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하고 다시 환자에게 가려고 하는데 저는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창 밖으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가습기에서 희뿌옇게 수증기가 나왔고 침대 옆에서 아이 둘이서 검정색 교복을 입고선 엄마 손 하나를 둘이서 잡고 서 있더군요.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느낌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환자가 저를 보시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환자는 알고 있었던 거죠. 수술을 했더라면 중환자실에 있었을 텐데 일반 병실이니까 암이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옆에는 지금 애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수술 후 급속도로 나빠져서 퇴원도 못하고 바로 돌아가셨죠. 사망을 앞두고 며칠 동안은 아이들이 학교를 안가고 병원을 왔는데 항상 그 자세였어요.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셋이서 서서 있었죠. 그랬던 우리들 중 하나가 돌아가면서 그 병실에서 아이들을 데려와서 같이 라면을 먹고는 했었어요. 하지만 이건 사실 특별한 선의는 아니었어요. 특별한 선의였다면 제 시간에 제 돈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었겠죠. 하지만 제약회사에서 가져온 라면을, 인턴이 만들어 놓은 라면을 같이 먹었었죠. 후륵 후르륵 먹으면서 아이들한테 이런 저런 대화를 했었을 거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아이들에게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도 힘들었다’ 뭐 이런 얘기를 했었나 봅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했었나 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제가 사실 기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 의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들의 엄마인 환자는 거의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의사가 할 일은 사망 실시간이 임박하면 사망확인하고 시간 기록하고 진단서 쓰는 게 다입니다. 간호사한테 정말로 연락이 왔어요.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저와 간호사는 서 있었죠.
두 세 차례 사인곡선을 그리다가 뚜뚜.. 하면서 심전도가 멈췄는데 아이들은 또 예전의 그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죠. 이후의 상황은 대충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울부짖고, 간호사들이 떼어내고, 영안실에서 와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로 데려가고.. 저는 속으로 ‘이걸 어떻게 보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모르나 보다. 그래서 한 잠시 일분 기다렸어요.
그러다 아이의 어깨를 눌렀더니 엄마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봤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옷의 절반이 눈물로 젖어 있더라고요. 돌아가신 것을 아는 거였더라고요. 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서 있는데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가서서 왼팔로 목을 잡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아요. 그리고는 엄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사랑해요.. !’ 하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수 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 '사랑해요..' 라는 말 안에는 떠나는 엄마에 대한 송별사 일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고, 남겨진 자의 각오일 수도 있죠.
저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어떨 때는 제가 맡았던 환자가 하루에 5명이 돌아가신 적이 있었어요. 인간이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직위? 돈? 그가 누구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진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하는 단어가 바로 ‘손’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진짜 내 마지막 순간에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로 어떻습니까.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내일이 될지, 다음 주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올 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때로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럼없이 상처 입히고, 더러는 외면 하잖아요.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
가장 위로 받을 수 있고 마지막에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해보면 집에 있는 가족과 아이들이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보다도 금배지고, 좀 더 필요한 건 공천이고, 그보다 지금 빨리 필요한 것은 돈다발입니다. 어쨌든 이후 저는 안동 신세계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계속 했지요. 근데 십여 년이 지나서.. 간호사가 하루는 신부님이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피 흘리는 신부님이 오셨나 보구나 했습니다. 제가 안동에서는 항문외과의로는 아주 유명해서 사실 경상도 지역 전체에서 거의 손꼽을 정도거든요. 신부님들이 보통 손님으로 위장해서 치료받으러 오시는데 그런 분이신가 하고 문을 열고 나가니 손님의 얼굴에 아우라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의 아우라는 사실상 그 사람에게 나쁜 습관, 나쁜 태도, 나쁜 성향이 거의 없었다는 얘깁니다. 놀라서 제가 ‘누구십니까’ 했더니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 고등학생이 저랍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혹시나 잘못한 게 있나 뜨끔 하더라고요. (웃음)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눠보았더니 여동생은 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두 오누이가 곱게 잘 자랐죠. 그러면서 신부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는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겨진 아이들이 혹시나 잘못되면 어떡할까 하고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라..’저는 제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그 말씀이 두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된 가장 중요한 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어요. 제가 멋있는 말을 했구나 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생각을 했더니, 반대로 누군가를 절벽에서 밀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모두다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힘을 얻어 일어서고 삶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랑은 신비한 묘약처럼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말로 정의하면, 희생, 관용 그리고 이해입니다. 나를 죽이는 희생없이 사랑할 수 없고 남에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없이 사랑할 수 없으며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해라는 영어 단어가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는 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타인의 아래에 서서 그를 받아주는 것이 이해인데,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답고 모두에게 넉넉한 기쁨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실패자요 배신자였던 베드로와의 대화를 기억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와의 주고받은 대화는 오늘도 주님과 우리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때의 대화속으로 여러분을 이입시켜서 한번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시길 바랍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의 물음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베드로를 향해, 아니 오늘 우리 개개인을 향해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럼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 베드로처럼 나도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 그러면 내가 네게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해라. 너에게 준 비전과 사명을 이루어라’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연이은 3번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오늘 우리도 다시한번 우리의 비겁했고 부끄러웠던 과거의 삶을 되뇌이고 회개하면서 새로운 결단과 희망으로 대답을 하여야 합니다.
베드로와의 대화는 그의 잃어버렸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믿음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베드로에게 물으셨고 사랑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셨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그의 떨리는 대답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힘찬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분명한 남은 삶의 이유와 목적을 설정해 주십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그에게 맡겨진 양들을 먹이고’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후의 삶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전해지는 전승에 의하여 주후 65년경에 로마의 마머딘 감옥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닮아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어서(예수님처럼 하기에는 부끄러워서 거꾸로 매어 달림)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삶의 마무리를 가능하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었습니다. 곧 사랑은 신뢰였습니다. 베드로와의 대화는 곧 예수님의 그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를 신뢰한다는 분명한 확인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결국 베드로의 삶을 순교적인 삶으로 이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한 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베드로의 사명은 사랑에 의해 주어졌고 완성되어졌습니다. 사랑은 신뢰이며 의탁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진정한 사명을 말해줄 수 있고 사랑을 받은 자는 온전히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 사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베드로가 받았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사랑의 힘으로 끝까지 사명의 완성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며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오늘 우리의 삶을 경주해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7-8)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말한다 하더라도 ‘사랑’을 빼놓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배운 바 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당연히 아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온전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받고 보고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많은 정의와 방법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사랑에 대한 성경의 요구 1) 자기자신을 사랑하라 2)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라 3)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라 4)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라.
사랑의 방법들도 다양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쿵 저러쿵 사랑의 방법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대로, 알고 배운 바대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 관념(사고)적인 사랑에서 실천(행동)적인 사랑으로
말에 그치는 사랑이 아니라 표현과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표현이며 행동입니다.
2)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용서와 위로의 말: 사랑은 말로 표현되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특히 성도들간이나. 가족이나 자녀들 사이에는 많은 사랑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는 말로 사랑을 고백하십시다. 격려와 용서, 사랑, 희망을 주는 말을 잊지 마십시다. 그리고 사랑스런 손으로 잡아주는 사랑의 터치로 사랑을 표현합시다. 무엇보다 가정속에서 사랑을 이루길 바랍니다. 가정은 가장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사랑의 실천장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실수도 이해해 줄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가정안에서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을 떠나서 사회에서 사랑을 실천하지만 정작 가정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가정부터 먼저 사랑의 장소가 되게 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안에서의 공동체적인 사랑: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은 타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안에도 많은 이들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이며 문제를 가지고 왔기에 , 아픔과 상처가 있기에 더더욱 교회안에서 사랑을 표현하는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보듬어주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변의 성도들은 여러분의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서로 키재기하고 네가 더 나은지를 경주하는 장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능력안에서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서로를 세워주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다 사랑을 받아야할 대상이며 또한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곳입니다. 사랑받고자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섬기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짧다....정채봉
두꺼비와 개구리가 논두렁을 가고 있었다. 개구리가 엉금엉금 기는 두꺼비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느리게 기어서 언제 양지바른 언덕에 도착하니?”
두꺼비가 숨을 가쁘게 쉬는 개구리를 향해 대꾸했다.
“그렇게 빨리 가서 뭐할 거지?”
개구리가 눈을 뒤룩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빨리빨리 가는 거야! 가서 쉬는 시간이 남아 있으면 누워 있으면 좋아”
두꺼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천천히 가는 것도 좋아”
이슬방울도 들여다보고, 풀꽃하고도 대화하며.....
개구리는 답답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펄쩍펄쩍 뛰어가며 말했다.
“내 같은 빠름은 네 같은 느림과 동행이 될 수 없어..먼저 간다..”
개구리는 펄쩍펄쩍 뛰어서 금세 사라졌다.
두꺼비는 천천히 천..천..히..하늘도 천천히 보고 파리도 천천히 잡아먹으며 돌 틈에 기대어 졸기도 하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두꺼비는 도랑을 건너다 말고 시체를 보았다. 그것은 경운기에 치여 죽은 먼저 간 개구리였다.
모든 일을 어떤 식으로든 깨끗이 정리하는 것이 마치 은밀한 인생 목표인 양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밤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하면서도 새벽 일찍 일어나고, 노는 것을 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유난스럽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치게 한 나머지 상대방이 더 이상 둘의 관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나도 예전엔 그런 식이었지요. 우리는 종종 “해야 할”일의 목록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스스로 확신합니다. 그 목록을 다 끝내기만 하면 차분해지고 , 관대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이 그런 식으로 풀려 나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항목을 지운다고 해도 금방 다른 새로운 항목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삶의 목적은 결코 그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길 한 걸음 한걸음을 즐기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자주 떠올린다면 해야 할 일 모두를 종결하겠다는 집착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워지지요. 잘 기억하십시요.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세상에는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당신 대신에 그 일을 처리할 것이란 사실을... 부디 불가피한 일들이 안타까워하느라 더 이상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사랑할 시간도 모자랍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길 시간, 그 시간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생은 너무도 짧습니다. 백년을 산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긴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짧습니다. 한순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정말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복을 누리며 나눠주고 베푸는 삶 그리고 사랑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날마다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의 프리 허그(닉 부이치치)를 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오늘부터 사랑을 고백하고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전화라도 하십시오.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도 족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더 늦기전에...
저의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1서 4:7-11)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시다. 사랑의 빚을 갚는 자로, 사랑의 빚을 낳는 자(지게 하는 자)로 삽시다. 사랑하기에 미친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채워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