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사학계 일각에서,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의 탄생지로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라고 주장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이다. 말끔하게 단장되어 서있는 황형장군 유적지인 이곳의 황씨 문중 사당이 이를 잘 보여 준다. 황사영은 1790년(정조 14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詩 부분 1등)에 합격하였다. 이때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 주기까지 하였으므로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바로 이 해에 그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 요한)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난주(丁蘭珠, 命連, 1773~1838, 마리아)와 혼인한 뒤 정씨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1791년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홍낙민(洪樂敏,1751~1801, 루카) 등과 함께 교리에 관해 더욱 깊이 연구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이라고 확신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세속의 영광을 뒤로하는 등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회 겸 전교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의 집을 그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를 위한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명도회 회장 정약종 등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을 도우면서 신자들을 가르치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널리 전하였으며, 조선 교회의 선교사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801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하고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舟論]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겼다. 조선 교회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이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다.
이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밀서를 전달하기 전에 압수 되었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져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戮屍刑, 일명 六支刑)을 내렸다.
▒ 육회(六會)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인 명도회는 당시 교회의 지도급 인사였고 명도회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던 황사영에 의하면 그 집회 장소로 육회(六會), 즉 여섯 군데가 있었는데, 그중 다섯 곳은 홍필주(洪弼周), 홍익만(洪翼萬), 김여행(金勵行), 현계흠(玄啓欽), 황사영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첨례(瞻禮)[축일] 때마다 신도들과 같이 육회에 참석하여 포교에 힘썼으며 육회는 각각 3, 4명 내지 5, 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사영에 따르면 그가 맡았던 모임은 자신을 필두로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愼行), 이재신(李在新) 등 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었으며 그중 조신행과 이재신은 양반, 손인원은 중인이었다고 한다.
▒ 황사영 생가에 대한 논변
몇 해 전까지 황사영의 강화도 생가설(生家說)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왔으나 현재는 서울 아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는 서울 아현설이 오히려 학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 기록에 황사영의 결안(結案) 즉 판결문에 그의 태생에 관한 부분 “부모가 그를 서부 아현에서 낳았으므로(胎生於西部阿峴)”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일부이다. 영조·정조 때의 ‘서부 아현’은 주로 지금의 마포구 아현동 지역에 있던 넓은 마을을 지칭한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 관한 《추안급국안》이나 《포도청등록》 등 현존하는 관찬 기록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심문이나 형벌의 시행 등의 일자는 정확하지만, 교회 활동에 관해서는 당사자들이나 그 동료 신자들의 의도적인 진술 회피로 소홀하거나 누락된 점이 많은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따라서 태생과 관련하여 결안에 기록된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황사영의 역대 조상들이 세거했던 강화도의 일가들에게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가 태어난 곳을 서울 아현이라고 위증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 황사영 백서
백서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청국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에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국이 종주권을 행사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아 보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시키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이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청나라의 정통성과 문화를 부인하는 북벌론적 배청 감정과 함께, 청국의 문물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북학론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 발상은 북벌론자는 물론이고 북학론자에게도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서양 선박과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양 선박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한 바 있었던 초기 교회의 경험에, 박해라는 극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무력의 요소가 결부되어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 널리 유행되고 있던 해상 세력의 조선 침략에 관한 위기 의식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황사영의 신앙은 생전의 활동과 문초 기록, 그리고 그의 <백서>에 잘 드러난다. 이들을 통해 본다면, 황사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굳게 간직하였으며 바로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는 '순교자의 피는 천주교의 씨앗'임을 굳게 믿었고, '주님을 위해 진실로 남은 힘을 다하고자 한다'는 소명 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한방책을 <백서>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서>는 내용상 국가에 해를 끼치려는 방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위정자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의 양박(洋舶) 청래운동과 일장 판결(一場判決)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단서가 되었으며 ,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가 초기의 순교자 약전을 기록하면서 황사영을 시복 추천 대상자에서 제외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 죽음으로 비밀의 문 열고 (황사영 생가터에서) <김영수> ▒
빈 터에는 햇살 가득 고여
향기 진한 바람소리 깊습니라
눈 밝은 소년 하나
대지 누르는 비바람을 뚫으며
죽음으로 비밀의 문 열고
겹겹 여울진 골짜기에다
새 숨결을 펴고 있습니다
어느 사랑인들 슬픔 아닐까만
또한 어느 슬픔인들 사랑 아닐까만
푸르게 예비된 하늘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뜨거운 노래입니다
내가 새로이 상처를 입어
목숨 뜨거워지는 기도 그리워하며
빈 터에다 얼굴 비춰봅니다
나는 다만
어느 고독에서 숨쉬는 것입니까
어느 침묵에서 깨어나는 것입니까
상한 갈대들 사이에서
둥지를 트는 바람들이나 새들의 아침은
더욱 빛나게 눈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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