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건국
김길 3세. 준 4세. 책 5세. 정준 6세.
9C말 신라의 국력이 약해지자,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약화 되었다.
이틈에 군웅들이 활약하는데
전라도에서는 견훤의 후백제가, 중부 지방에는 궁에가 태봉국을 세웠다.
양대 세력이 왕성해지자 후삼국으로 재편되었다.
후 삼국을 무너 뜨리고 민족을 재 통일을 한 지도자가 왕권이다.
왕건은 송악(지금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예성강 유역의 해상 세력과 힘을 합하여
그 일대에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후 궁예의 부하가 된 뒤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워 시중의 지위에 오른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포학한 정치를 하다가 민심을 잃게 된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서기 918년에 새 왕조를 세웠다.
국호는 고려, 연호는 천수, 수도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신라가 서기 927년 후백제의 침략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서기 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겼다.
후백제는 형제간에 왕위 계승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다.
서기 936년 고려가 그틈을 타서를 공격하여
후 백제의l 황복을 받아 민족 재 통일을 이룩한다.
고려의 건국이념.
첯째,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제의 수립으로 민족의 융화정책.
둘째, 단군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의 옛 땅을 찿기위한 북진정책.
셌째, 민족 고유의 신선도 문화 및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숭상.
고려의 불교문화는 팔관회 연등회 등의 거국적 불교행사를 중시했다.
국사와 왕사와 같은 승려우대 정책을 실시하였다.
※ 태조~의종 때 조상
김 길(金 佶 3世)
학행이 높고 기이한 계책으로 왕건을 도와
왕업을 성공한 공로로 삼중대광 사공을 지냈다.
중국 사서인 책부원기의(중국의 사료집) 외신부 조공조 청태원원 8월에
고려조의 조공사 김길의 선박이 청주(지금 산동성)에 왔다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4세 준(峻)
아버지는 길이며 벼슬은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였다.
5세 책(策)
아버지는 준이며, 한림학사 평장사를 지내고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처음으로 충당대 문을 열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어진 선비를 뽑았다.
이때에 왕융과 서희와 김책 등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다.(최자의 보한집 서문)
광종 15년(964) 3월에 한림학사 조익을 상시관으로 삼아 진사(進士)를 뽑을 때에
김책이 급제하니 광종이 덕천전에 거동하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김책에게 베옷을 벗게 하고 공복으로 갈아 입혀 잔치에 참여케 하였다.
잔치가 끝이 나고 헤어질 때에 말을 타고 의봉문을 나가도록 허락하였다.
급제한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의전 의식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려사)
벼슬은 평장사(정2품 장관급)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6세 평장사 휘 정준
아버지는 문정공 책이다.
고려 정종 2년(1035) 전중시어사에 제수,
정종 7년 이부원 외랑과 권지승성(임시직)이 되다.
문종 4년(1049) 중추원사와 판어대사를 거쳐, 문종 8년에 참지정사,
문종 10년에 내사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문종 12년 평장사로 치사할 때 어구마 한 필을 하사받았다.
문종 12년(1051)에 식목도감 최충이 “급제한 이신석이 씨족을 기록치 아니하여
등조(登朝)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다.
시랑 김원충과 탄어대사 김정준이 아뢰기를
“씨족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그 조부의 과실이요,
신석의 죄가 아닌데 힘써 공부하여
임금의 연전에서 급제하였고 몸에 허물이 없으니
신하의 반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께서는 공의 상소대로 등용시켰다.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5월. 편집인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