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차례상
- 이 성 구 -
올해도 우리의 2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이 돌아왔다. 기해년 황금돼지의 해는 음력 설날에 시작되니 이날부터 “돼지꿈 꾸시고 부자 되세요”하고 인사말을 해야 옮을 것 같다. 우리민족은 동방예의지국이라 할 만큼 예부터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예절을 숭상하고 미풍양속을 지키며 살아왔다.
제사는 앞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을 후손들이 받들어 모시는 의례로 조상을 추모하고 은혜에 감사하면서 뿌리를 지키는 의식이다. 그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해 주신 조상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생전의 뜻을 기르며 추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며 효도의 연장이라 할 수 있겠다.
설날이 돌아오면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차례상을 차리는 방식이 각자 다르다. 그래서 옛날 속담에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 집은 유교의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차례상 진설법은 조율시이(棗栗柿梨),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동두서미(東頭西尾),를 기본으로 하고 과(果), 채(菜), 탕(湯), 적전(炙煎), 떡국 순으로 진설한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아내는 마트나 전통시장을 찾아다니며 싸고 좋은 제물을 사다 사랑방에 쌓아 놓느라 정신이 없다.
까치설날이 되면 형제, 조카, 손주들까지 집안에 모여 제물을 준비한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각종 고기와 생선들, 과일과 채소들을 가지고 각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를 골라서 제수용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요리된 제물은 사랑방이나 다용도실에 먹음직스럽게 다양한 모습으로 진열된다. 특히 주방에서 전 부치는 고소한 냄새는 침샘을 자극한다. 이를 참지 못하는 남자들은 재촉하여 술상을 차려놓고 갓 만든 제물을 시식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어린 시절 명절 때의 추억담을 나누다 보면 웃음꽃이 터진다. 이를 통해 우애와 화합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매년 차례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부들의 여러 가지 불평불만이 나오기도 한다. 뉴스를 보니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사를 없애 주세요”, “구정과 신정을 통일하자“는 등의 요구가 있다고 한다. 명절 제사를 둘러싼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여성의 일방적 가사부담, 시댁위주, 남녀차별의 명절문화가 부부갈등과 가정불화의 원인을 야기한다고 한다. 사실 우리 집도 가끔은 대동소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장남이 무슨 죄라도 진 것처럼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명절 연휴를 보내야 한다. 이때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되 뇌이며 등산복을 입고 집을 나가 아차산에 올라가서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런데 TV에서는 다양한 설 풍경을 경쟁적으로 방송한다. 설 연휴가 되면 귀성객들이 교통체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귀성열차표와 고속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전날부터 두꺼운 옷을 입고, 담요를 덮고,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선물과 음식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고향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평소보다 긴 고난의 시간을 인내하고 귀향하는 모습을 보면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부모님과 가족들을 찾아본다는 마음으로 설레고 기쁘다”고 해맑게 웃음 짓는 며느리들의 얼굴은 왜 그렇게 예쁘게 보이는지. “한해 중에서 아들, 손자손녀, 며느리를 만나는 설날이 제일 행복하다”는 검게 탄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보면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이 더욱 저려온다.
그리고 설날 저녁이면 가족들이 편을 짜서 남녀노소가 동거동락하는 윷놀이가 시작되면 온 집안이 요동친다. 자기편을 위해 도, 개, 걸을 외치기도 하고, 말을 어떻게 놓을까를 두고 의견 충돌이 분분하고, 말의 생사에 탄성과 원망이 오가며, 말이 날 때 마다 박수를 치며 한바탕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 이렇게 명절에는 가족들이 각자 좋아하는 방법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여러 세대가 함께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그리워할 추억을 만들고 느끼기 위해 귀성행렬의 수고를 기꺼이 견디며 고향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설 연휴를 맞이하여 국내외 관광여행으로 단란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공항 출국장의 며느리들은 “즐거운 명절을 가족들과 뜻 깊게 여행갈 수 있어서 기쁘다”며 활짝 웃는 모습를 보면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젊은이들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고 부모님 세대도 이에 동참해서 명절 제사도 해외에서 지내기로 했다”면서 기자들이 달라진 설 풍경을 소개한다.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보수 꼴통인가, 아니면 무능력자인가’하고 자신의 신념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요사이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무너지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서구화가 곧 근대화란 인식 속에서 전통은 열등하며 동시에 현대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의식을 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돌잔치, 결혼식, 칠순 잔치를 점점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보내기도 한다. 이제부터 명절도 찬반의 논쟁에서 벗어나 보다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여성을 불합리하게 대우하는 명절문화를 과감히 단절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사를 모실 때 많은 음식물을 차려 놓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모든 제사는 본인의 형편에 맞게 간소하게 정성껏 지내면 되는 것이다. 제사의 진정한 의미는 흩어져 있는 가족이 모여 조상의 덕을 기르고, 혈육 간에 유대를 돈독히 하며,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자신의 근본을 깨닫게 할 수 있는 풍습으로 정착시키는 일일 것이다.
요사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각종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청소년의 비행과 탈선, 중장년층의 성 추행과 폭언 폭행사건, 노인들의 고독사와 자살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TV에 보도되고 있다. 나는 농사철이 되면 소일거리로 시골에 있는 조그만 농토를 경작하기 위해 자주 내려간다. 어쩌다 길에서 동네 어른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할 때, 그냥 놓아 주질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계속하려 하면 좀 난감할 때가 더러 있다. 이런 현상은 주변에서 그들에게 말을 걸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노인들이 감옥에 가기위해 일부러 도둑질을 한단다. 감옥에 가면 사람들이 북적거려 외롭지 않고, 자신의 건강까지 교도소에서 살펴주고, 운동까지 시켜주니, 고독사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없지만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이 감옥를 찾는 노인들의 생각이란다.’ 이를 생각하면 종묘공원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다 점심때가 되면 우르르 무료급식소에 줄을 서서 식사를 기다리는 노인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실버타운 간 시어머니와 양로원 간 친정엄마’란 제목의 두꺼운 책이 눈에 아른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현실이 멀지 않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려면 민족 명절을 미풍양속으로 계승 발전시켜 현대적 가치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어떠한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이나 경제적 풍요로도 채울 수 없는 가치가 명절을 통해 치유할 수 있지 않을지. 내가족의 행복과 더불어 다른 가족과의 행복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행복을 위해 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긍정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가족들의 화합과 갈등의 쌍곡선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만 설날의 차례상이 행복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그런 지혜가 과연 찾아질 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