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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대장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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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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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산 |
1.91 |
07:44 |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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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머리재갈림 |
1.79 |
08:36 |
52 |
|
웅 석 봉 |
4.33 |
10:43 |
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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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지맥갈림 |
3.87 |
12:48 |
125 |
33분 휴식 |
이방태극갈림 |
0.63 |
13:01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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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 산 |
5.40 |
15:09 |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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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마을 |
2.51 |
16:04 |
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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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20.44 km |
09:32 |
07:59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사진 #1
산청에 오면 이른 시간에 문이 열려 있는 집은 김밥집 밖에 없으니 들러서 순두부 찌개 하나 먹고 김밥을 싸서는 대장마을로 갑니다.
06:32
조금 늦었습니다.
머리는 개운하지만....
우측으로 눈을 주면 산청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는 좌측의 뾰족한 필봉산858.2m을 봅니다.
가끔은 문필봉이라는 이름과 헷갈리기도 합니다.
특히 한 잔 했을 때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게 되면 문필봉으로 얘기할 때도 있지만 그때 그 상대방도 그렇게 넘어가니 사실 별 문제는 없습니다.
어쨌든 저 봉우리 끝이 붓의 끝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데 저 모양이 보여주듯 산청은 선비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단성도 이에 뒤질 것은 없지만 다만 남강을 건너야 하는 불편이 따라 군수는 강을 걷너는 불편을 피해 이곳에 눌러앉아 결국 단성이 아니라 이 산청이 군소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강이 산청에 들어오면 경호강이 된다
이 산청의 예전 이름은 산음이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경덕왕( ? ~ 765)은 지품천현이었던 이 산청을 산음으로 바꿨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리다가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소흥시紹興市)의 빼어난 산수와 비견比肩된다고 하여 거기서 따온 이름이란다. 그래서 중국 산음에 경호강이 있으니 이 남강도 산청으로 들어서면 특히 경호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단성의 끄트머리까지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 경호강의 본 이름은 남강이다. 이 남강이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지리산의 동쪽 영역을 한정한다는 것이다. 즉 남강을 만나면서 지리산의 모든 맥들은 다 끝나게 된다. 그러니 덕천지맥이나 지리태극종주, 남강태극종주, 하다못해 진양태극종주는 물론 지리동부능선까지도 모두 그 맥의 끝은 이 남강까지 인 것이다. 남강과 지리산과의 관계는 이것만 이해해도 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59쪽
이 대장마을의 들머리는 항노화 산업단지 조성공사로 우회하면서 둘레길을 할 때 눈여겨 봤던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에는 꽤 길게 산자락까지 이어지는 길로 표기되어 있으니 접근성도 좋은 편입니다.
이번에 새책 출간에 맞춰 새로 만든 표지띠를 입구 나뭇가지에 느슨하게 매달고 오늘 산행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 시멘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저 산자락을 겨냥하여 오르면 됩니다.
의성김씨제실을 지나....
우측에는 봄이 오고 있습니다.
이게 매롸나무인가?
아니면 배나무인가?
몰라도 너무 모르니....
고도를 높였건만 아직도 왕산은 보이지 않고 동부능선의 왕등재봉에서 가지 쳐 내려와 쌍재로 떨어지는 줄기만 살짝 보이는군요.
둘레길 4구간이죠.
좌측으로 황매산1113m이 보이고...
이 동부지리에 오면 늘 주변을 살피는 데 중심이 되는 산이 바로 저 황매산입니다.
산 자체도 남강지맥(진양기맥)의 중산에 있으니 그럴만도 하지만 생김세 또한 봉우리 세 개가 한라산 정상부 모양을 하고 있어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지맥 얘기가 나왔으니 산줄기 공부 하나 하고 가야겠지만 진ㅇ양기맥이니 남강지맥 운운하면서 신산경표니 대한산경표니 얘기가 나오면 너무 길어지니 오늘 만큼은 생략하고 뒤로 넘기겠습니다.
제 산행기의 단점이 지식 전달의 장이라는 것을 넘어 장황하고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의 나열일 거 같으니....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산줄기이고 저 줄기가 바로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의 동쪽을 확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리의 동東은 남강, 서西는 섬진강
김선신은 지리산의 남쪽 끝을 지리의 가지줄기가 바다 즉 물을 만나는 곳까지라고 한다. 아니 김선신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지리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봤다. 그래서인가? 산줄기를 알려면 물줄기를 알아야 하듯이 지리산의 영역을 특정하기 위해서는 지리산 주위의 물줄기를 확정하여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두류전지 제5장 流水經유수경 편에서 지리산과 관련한 물줄기 세 개의 흐름을 보았다.
①지리의 동쪽 물인 진주의 남강과 ②지리의 서쪽 물인 하동의 섬진강 그리고 ③지리의 남쪽 물인 천왕봉의 청천 등이 그것인데 청천은 남강에 합류되니 결국 지리산이 물줄기는 두 개兩端水라는 얘기가 된다. 다만 첫 번째 물줄기인 ‘동쪽의 물’은 정령(치) 아래에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흘러 광천에 합류하고 임천이 되어 임천은 산청의 경계에서 남강에 합류된다고 하였으니 결국 북쪽과 동쪽은 남강과 임천 그리고 임천의 지천으로 보면 되겠다.
- 졸저 전게서 32쪽
이런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끝은 보이기 마련!
06:54
지도 #1의 '가'의 곳에 이르러 좌측을 주시합니다.
우측으로는 좋은 길이 사면을 타고 올라가지만 그 길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아닙니다.
잡목이 무성하고 숲이 덩굴들로 빽빽할 경우 오히려 들머리 찾기는 쉬워집니다.
틈이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때쯤이면 그 숲이 허하고 바닥은 낙엽으로 덮혀 있어 사람이 밟고 지나간 흔적을 찾기란 이외로 어렵습니다.
자세히 보면서 좌측 능선을 주시합니다.
사면을 따라 오릅니다.
오늘 밤머리재 삼거리까지 같이 한 표지띠.
07:21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능선 위를 올라서면서 산청읍을 만나 이제부터 산청읍과 금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일단을 평범하게 진행이 되지만,
기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우측으로 크게 우회하여야 하지만 지금은 아직 잡목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는 아니니 된비알을 그냥 치고 올라갑니다.
07:41
그러면 키 낮은 무덤이 나오고 그 앞에 3등급삼각점(산청310)이 있는 612.9봉입니다.
기산은 이 삼각점봉에서 조금 더 이동하여야 합니다.
07:44
그 흔한 정상석은 물론 코팅지 하나 없습니다.
제 표지띠 하나로 이곳이 기산임을 알려줍니다.
좌측으로 경호강 그러니까 남강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08:06
688.1봉을 지나 지도 #1의 '다'의 곳에서 좌틀합니다.
우측으로 드디어 천왕봉이 보이는데 정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였습니다.
그 라인은 우측 새봉까지 이어지고.....
역시 천왕봉은 천왕봉입니다.
08:36
드디어 밤머리재 3거리입니다.
이정표는 지금까지 4km를 걸었으며 웅석봉까지는 아직 4.4km 더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덕천지맥의 지맥꾼이나 지리태극종주자들의 휴식처 밤머리재까지는 1km를 더 가야하고.....
우회전하여 밤머리재를 향한다. 기산 삼거리에서 금서면을 만나 이제부터는 금서면과 삼장면의 면계를 따라 걷게 된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이내 9번 도로가 지나는 밤머리재로 내려선다. 이 59번 도로가 확·포장 되어 개통되기 전까지는 사실 웅석봉 오르기가 천왕봉 오르기보다 더 어려웠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만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 사실 그보다는 이제 삼장면 사람들이 군에 볼일 보러 가기가 그만큼 편해졌다는 얘기겠다.
지리동부능선에는 이 밤머리재를 포함해 다섯 개의 고개가 있다. 쑥밭재(청이당고개), 새재, 외고개, 왕등재 등이 그것들이다. 비교적 능선까지 거리가 짧고 오르내리기 쉬워 이 고개들을 통해 남쪽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장德山場과 북쪽의 금서今西, 산청장山淸場의 문물이 활발하게 오갔을 것이다. 그뿐인가 덕산에 살던 남명도 덕계 오건을 만나러 오고가던 고개가 바로 이 밤머리재이다. 그렇게 한때는 지리산 동부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들이었는데, 무상한 세월 속에 이제는 길도 희미하고 잡초만 무성할 이 길들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덕천지맥을 싸고 있는 북쪽의 임천과 남강 그리고 남쪽의 덕천강 주위의 산군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밤머리재 너른 공터 한 편에는 버스 한 대가 서 있고 그 뒤로는 옥수가 철철 넘친다. 가만히 보니 그냥 버스가 아니고 휴게소 겸 쉼터 겸 식당이다. 이 고개에 예전에는 지나는 길손을 위한 주막이 있었다면 지금은 태극종주꾼들을 위한 쉼터로 이 버스가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꾼들은 일단 여기서 백숙이나 삼계탕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면서 충분히 쉰 후, 다음 구간을 이어간다. 물론 예약은 필수이다.
- 졸저 전게서 519쪽 이하
08:38
3거리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조망처가 나타납니다.
반갑기 그지 없군요.
우선 천왕봉부터....
이제 황금능선과 그 뒤로 낙남정맥의 삼신봉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군요.
천왕봉.
그리고 우측의 금서면 수철리.
수철리는 그저 하천가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둘레길 첫 구간 즉 주천~운봉 구간에서 수철리라는 이름을 본 것 같다. 운봉읍 행정리에서 세걸산 옆의 세동치로 올라가던 길목에 있던 마을이었다. 그 수철리나 여기 수철리나 모두 산자락의 물가 마을이다. 두 수철리 모두 각 공안천이나 금서천을 끼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긴 우리나라 어느 땅이 조그만 개천하나 끼고 있지 않은 곳이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이곳 수철리도 예전에 대장간 혹은 쇠를 제련하는 공장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말이 들린다. 제련소와 풍부한 물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워서 생긴 말이니 그런 것 같다. 어쨌든 이 부근에 그런 시설이 있었을까?
'물'의 고대어는 '믇' 혹은 '묻'이었으며 따라서 물 옆의 골짜기나 마을의 경우 '뭀울' 혹은 '뭇막' 이라 하였다. ‘뭇+울>무싀울>무시울’, ‘뭇+막>무수막>무쇠막’ 등으로 변하여 오늘날에도 무싀울, 무시울, 무쇠막 등의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잠작하다시피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무水+쇠鐵=수철리水鐵里가 된 것에 불과하다. 지리산 자락의 두 군데 이외에도 '수철리'라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데 모두 하천가에 있는 마을이다. 비슷한 예로 필자의 고향이기도 한 서울의 한강 가에 있는 금호동金湖洞도 원래 이름이 '무수막'이었고 도봉동의 한 골짜기 마을도 무시울이었다. 물의 마을이란 뜻으로 물막>무수막>무쇠막 이라 불리다가 훗날 사람들이 무쇠솥 운운하며 말을 지어내어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쇠 ‘금金’을 따와서 금호동이라 한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제철산업은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해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 제철산업이 항구 도시에서 발달하듯이 그 당시에도 대부분 큰 강가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외국에 반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철저하게 금지시킬 정도였다. 국가 권력과 지원이 미치지 않는 지리산 골짝 마을에서 제철製鐵을 할 수도 없었으며 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수철리'는 무쇠 솥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쇠막이라는 옛 지명대로 '물 옆에 있는 마을'정도의 뜻이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섬강 주변 마을 이름인 '문막'도 동일한 어원에 속한다.
- 졸저 전게서 154쪽 이ㅏ
저 수철리에서 우측 왕산 쪽을 따르면 쌍재로 올라 화계리나 주상리로 진행하여 구형왕릉도 볼 수 있습니다.
좌측 길을 탄다면 고동재를 지나 방곡리에서 산청함양학살사건의 현장을 볼 수 있게 되죠.
우측으로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 1.2km’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야겠다. 제주 4·3 사건이 국가에 의한 과도한 진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던 것처럼 이 산청·함양 사건 역시 이에 못지않은 민간인에 대한 극악무도한 국군의 학살 현장이다. 이 사건은 거창양민사건과 더불어 한국 전쟁 기간 중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들 중 하나이다.
때는 중공군 개입 뒤 1·4후퇴 시기인 1951년 2월 7일이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었던 이날 지리산 동쪽 큰 산들 사이, 해 뜨고 지는 것으로 시간을 아는 두메산골인 가현·병곡·점촌(산청군 금서면)과 서주리(함양군 휴천면) 등 네 마을 양민 705명(어린이, 여성, 노인 85%)이 남원·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의 ‘보11사 작명5호 견벽청야堅壁淸野’ 명령을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에 의해 2월 7일 아침부터 11일 사이에 수행한 양민 학살 작전닷새 만에 느닷없이 떼죽음을 당하고 세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가 된다.
학살 작전을 벌인 이유가 최덕신 11사단장의 민간인에 대한 ‘견벽청야’ 전술, 4·3 사태 진압군이었던 9연대의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여기에 지휘관과 전쟁 자체의 부도덕성이 얽혔고 거기에 더하여 양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여야 할 만큼 전세가 다급하고 전과가 부실했던 탓도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 졸저 전게서 147쪽 이하
산청읍도 봅니다.
조감도鳥瞰圖를 왜 조감도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측 앞의 꽃봉산237.5m이나 그 우측의 예전에는 회계산231.7m이며 그 뒤로 와룡산416.m과 상여봉508.9m가 거기서 이어지는 정수산829.1m도 확실하며, 그 좌측 줄기 용두봉342.2m나 황매산 역시 뚜렷합니다.
환아정이라는 정자
<사진 4〉 영남 3대 누각 중 하나였던 환아정. 인터넷에서 퍼왔다.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산청지에는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가(경호강)에 임해 굽어보고 있다. 현감 심린이 건립할 때 당시 저명한 선비였던 화산(花山) 권반權攀(1419∼1472)이 우군 왕희지의 고사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우암 송시열과 백헌 이경석의 기문이 있다.”고 적었다.
권반이 ‘백아환자白鵝換字’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1950년 3월 1일 01:00 원인 불상의 화재로 또 소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는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고는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 정유재란 뒤 복원한 환아정을 본 김회석(1856~1934)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그렸는데 이런 환아정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남주헌(1769~1821)은 함양군수 재직 중이던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산행 도중 산음에 들러서는 이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이렇게 그렸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필자 주 왕희지)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둘러보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山鏡水繞空臺 계산경수요공대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춘년상사회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왔네
그러면서,
籠鵝已去沙鷗至 농아이거사구지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난봉동객래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그런데 그 경호강과 어우러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회계산이 어디인가?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나와 있는 이 회계산이 현대 지도에는 위치가 불분명하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고 하고,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럴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산청군 하수 종말 처리장 옆에 있는 231.7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정도의 조망의 봉우리에 그 수려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까?
깊게 살펴보면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남강지맥이 소룡산 부근에서 양천지맥을 다시 분기시키고 이게 비득재 부근에서 다시 우측으로 가지를 친 줄기가 상여봉506.9m~와룡산416.7m으로 내려오다 마지막에 빚은 산이 바로 꽃봉산237.5m이다. 또 꽃봉산에서 5리 정도라면 와룡산이 거의 맞을 거 같다. 그런데 사실 와룡산은 그렇게 풍치가 없으며 경호강변에 위치한 곳도 아니다. 사실 강변에 있으며 정곡마을 왼쪽에 있다고 하면 당시의 지형이 지금과 똑같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아까 얘기한 231.7봉 밖에는 없다.
- 졸저 전게서 160쪽 이하
그 정수산은 우측 척지고개를 넘어,
그 우측 둔철산828.4m으로 이어지는데 이 능선이 신산경표에서는 정수지맥이라 부르는 양천지맥입니다.
비득재 부근에서는 고생할 각오를 하여야 하는 지맥이죠.
그만 자리를 뜹시다.
08:55
헬기장을 지나 10분 정도 걸으니,
09:05
조망처가 나오는군요.
좌측으로 십자봉과 웅석봉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물론 아까도 잡목 사이로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제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기는 처음이군요.
861.1봉을 내려서면서 나오는 조망처에서 입니다.
십자봉이라...
이내 시멘트 길은 ‘십자봉 입구’로 안내한다. 십자봉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는 물론 '김형수555'에도 나오지 않는 산 이름이다. 다만 이곳 주민들 혹은 이 부근 산꾼들에게만 특유하게 사용되는 산 이름인데 특히 지리동부능선을 하던 꾼들에게는 널리 회자膾炙되는 그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지리동부능선에서 볼 거 잠시 예습이나 하고 갈까? 십자봉의 ‘십자’가 궁금해 할까봐 그렇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봉우리의 생김새가 ‘십자’ 모양이 아니라 이 봉우리 정상에 성심원에서 십자가를 세워두고 거기에 피뢰침까지 설치해 놓았다. 그래서 십자봉이다. 파주 감악지맥의 주봉 감악산이나 감천(기양)지맥 상의 국수봉을 떠올리면 되겠다.
- 졸저 전게서 166쪽 이하
좌측 정수산과 가운데 척지고개 그리고 우측의 둔철산.
왈매산과 정수산.
그리고 서쪽으로는 앞의 대원사능선과 그 뒤의 황금능선.
저 황금능선을 걸을 최적기가 바로 지금이죠.
천왕봉 우측으로 푹 갈아 앉은 곳.
쑥밭재라고도 불리는 청이당 고개죠?
그러니 그 우측이 진주독바위 혹은 산청독바위라 불리는 독바위 그 우측 뾰족한 봉우리가 새봉1322.3m입니다.
또한 독녀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른바 점필재 루트이기도 하다. 이 새봉을 지나면서 산청군 금서면과 헤어져 함양군 마천면으로 들어오게 되니 이제부터는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삼장면의 군계를 따라 걷게 된다.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 좌측으로 독甕모양을 한 진주(산청) 독바위가 나온다. 바위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는 맛도 쏠쏠하다. 그러고 나면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졸저 전게서 523쪽 이하
그런데 쑥밭재의 어원에 대해서 설이 갈립니다.
한편 이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된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쑥박재>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 수긍이 간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설에 한 표를 던진다.
- 졸저 전게서 524쪽 각주 9번
정말 아름다운 줄기입니다.
도토리봉은 바로 앞으로 보이고 우측 밤머리재 고갯마루에는 지리태극종주꾼들을 위한 휴게소가 보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그저 908.8봉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병주의 ‘지리산’에는 어엿하게 ‘도토리봉’으로 나오는 산 이름이다.
- 졸저 전게서 520쪽 각주 5번
삼장면 법계리 일대입니다.
우측 상단부에 평촌마을을 통하여 대원사로 들어가는 그 유명한 유평계곡으로 바로 덕천강이 발원하는 중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장항동이라 불리던 곳으로 겸재 하홍도나 월촌 하달홍이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던 곳이죠.
30리가 넘는 긴 계곡으로 화대종주를 하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
밤머리재로 오르는 길을 통하여 남명 조식과 그의 제자 오영경의 사제의정이 묻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구곡산....
남명은 지리산의 저런 잔줄기를 보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죠?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초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지도 #2
09:39
지도 #2의 '라'의 곳에서 좌측 내리의 선녀탕으로 떨어지는 산거리를 지납니다.
선녀탕은 둘레길 6구간의 지선이기도 한 곳입니다.
그 선녀탕 옆에 있는 내리저수지를 잡목 사이로 봅니다.
09:48
그러고는 우측으로 동촌삼거리를 지납니다.
우리는 좌틀하고....
십자봉과 둔철산 그리고 그 뒤로 한우산과 자굴산.
남강지맥과 진양기맥의 큰 차이점이 숨어 있는 곳이죠.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바로 앞이 지나온 능선 중 857.6봉 그리고 그 뒤로 필봉산과 왕산.
그 우측으로 넘덕유산과 덕유산 향적봉이 보이건만 사진으로는....
그러니 왕산 좌측의 법화산과 삼봉산도 그저 이렇게....
육안으로는 조망 만점입니다.
중앙 도토리봉,
그리고 국기봉은 우측으로 휘어져 능선을 이어가고....
.............
.............
............
앞줄기 우측으로 772.2봉이 이어지고 그 너머가 감투봉인데....
소위 '이방태극'길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한검 대장님.
요즘 일때문에 산행도 못하시고 ....
이한검 대장님이 지리태극종주를 할 때 달아놓은 표지띠 옆에 이번에 새로 제작한 제 표지띠를 기댑니다.
10:30
드디어 웅석봉 삼거리입니다.
지도 #2의 '마'의 곳이죠
여기서 좌틀하여 웅석봉으로 갑니다.
그러러면 우선 헬기장을 지나,
나무 계단을 올라,
삼거리 아정표에서 좌틀해야 합니다.
우측은 둘레길로 내려가거나 남강태극하는 분들이 이용하는 루트입니다.
동부능선 역시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이 길을 타고 어천마을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루트는 산청읍과 단성면의 면계가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10:43
웅석봉으로 오릅니다.
전망대에서 천왕봉을 향해 절을 올립니다.
제물이 없으니 고사는 아니겠고...
지난 번과 같이 올해 세종도서에 선정되게 해달라는 기원입니다.
이 귀한 책을 내주신 '리더북스' 이기준 대표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습니다.
2등급삼각점(산청25)이 있는 웅석봉은 지리동부의 중심입니다.
존경하는 글쟁이 산악인 박인식은 웅석봉을 이렇게 얘기한다. “지리산은 어디서 보아도 그 산세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워낙 넓은 산자락 탓이다. 그래서 ‘한국의 산’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지리산은 애매모호한 추상화로 인식되기 쉽다.(중략) 웅석봉에서 바라보아야 지리산은 추상화의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웅석봉은 이런 봉우리이다. 어디서 보아도 지리산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웅석봉에서 만큼은 다르다는 얘기다. 박인식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웅석봉이 정리됨을 느낀다.
- 졸저 전게서 517쪽
그런 곳입니다.
웅석봉으로 오른다. 웅석산에 오르면 우선 숨이 멎게 된다. 갑자기 세상의 정상에 올라온 느낌이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지 머리가 멍해질 따름이다. 그저 두 군데의 전망대를 오가며 살펴보는데 이마저도 시원치 않고 만족할 수 없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침착해져야 한다. 그러고는 아무래도 올라온 곳부터 살펴보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슬쩍 둔철산으로 눈길을 준다. 그런데 둔철산은 혼자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의령지맥의 한우산과 자굴산까지 함께 데리고 온다. 차근차근 그 줄기를 따라 우측으로 눈길을 옮기면 꾼들의 눈은 자잘한 봉우리들을 지나 그래도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백마봉과 집현산을 지나 남강을 따라 진양호에서 머물게 된다.
웅석봉에서 봐야 비로소 지리산이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에 더하여 양천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둔철산 좌측으로는 척지고개에서 정수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이 명백하고 황매산이 높게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여봉 ~ 와룡산을 보고 산청읍을 지나면 필봉산에서 왕산으로 오르게 된다. 그 뒤로 거창의 황석산과 거망산 그리고 남덕유의 흐름도 읽을 수 있는가? 그러면 그 우측의 대덕산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 졸저 전게서 516쪽 이하
그런데 이 웅석봉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져 보면 좀 다른 의미의 얘기가 떠돕니다.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서 웅석봉이라고?
웅석봉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볼까? 이 웅석봉 정상에 곰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고도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모든 산이 그렇겠지만 특히 지리산은 ‘신성’, ‘신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神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감’, ‘검’, ‘곰’, ‘고마’, ‘구마’ 등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면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산이나 커다란 바위 등과 관련하여 ‘검산’, ‘검암’ 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山’, ‘劍巖’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곰’이다. 그 한자어가 ‘熊’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 곰바위〉 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봉은 그저 ‘신성한 산’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517쪽 이하
그렇게 주변을 둘러봅니다.
서쪽 천왕봉....
그리고 그 좌측 라인.
천왕봉과 우측 동부능선 라인....
동부능선 뒤로 임천지맥의 삼봉산 라인.
왕산과 쌍재 그리고 고동재.
앞은 기산라인.
산청읍과 경호강.
꽃봉산, 회계산, 와룡산...
황매산 등이 이어지는 남강지맥.
양천지맥의 정수산과 둔철산.
둔철산, 한우산과 자굴산 뒤로 멀리 낙동정매그이 가지산과 운문산...
그러고는 남쪽의 진양호와 그 우측으로 남해바다.
산청에서 만큼은 경호강이라 불리는 남강.
산불감시초소에는 한 분이 나오셔서 열심히 근무를 서고 있다가 제가 하는 행동거지를 보시더니 무슨 일이냐는 겁니다.
여차여차해서 저차저차라고 하니 반색을 하시면서 축하를 한다고 하시는군요.
자신도 지리산을 그렇게 다녀봤아도 아무 의미 없이 그저 걷기만 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러면서 책 구입 방법을 문의합니다.
'예스24' 얘기해봤자 시간만 길어질 것 같아 퇴주를 나누면서 책에 싸인을 해주면서 그 책을 드립니다.
너무 기뻐하는 정선생님을 보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명의 지리산꾼이 또 탄생하는 느낌입니다.
그 분과 얘기하다 보니 제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 분은 단성에 사시는 분이시더군요.
격일제 근무를 서신다고요?
단성이라....
단성은 신성한 마을의 의미이다
단성이라. 예전에는 단성현이었다. 단성면의 옛 지명 단성현은 신라시대에는 적촌현과 궐성현이었다. 결국 ‘赤’이 ‘丹’으로 바뀐 것이다. 무슨 뜻일까? 이 ‘丹’이나 ‘赤은 우리나라의 ‘ᄇᆞᆰ’사상의 산물이라 봐야한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의하면 신라의 개국 당시부터 ‘박朴’이란 제사장을 뜻하는 계급이었다. 남자무당인 ‘박수’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ᄇᆞᆰ’의 변형이 곧 ‘박’, ‘밭’, ‘불’, ‘발’ 등인 것이다. 그것들이 한자가 들어오면서 ‘光’, ‘明’, ‘赤’, ‘朱’, ‘足’이 되었으며 ‘붉을 赤’의 경우 단순하게 같은 색깔의 한자어인 ‘붉을 丹’으로 바꿔 쓴 것이지 그 뜻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신성시 하였던 신라인이나 가야인들은 ‘赤村’ 즉 지리산 아래의 신성한 마을인 ‘赤村’을 ‘丹村’으로 바꿔 부르게 된 사연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백두대간 상의 소백산을 끼고 있는 충청북도 단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단양의 옛 이름이 赤山이었으며 ‘陽’은 산이나 고개를 나타내는 말이니 적산=단양이므로 이 단성의 옛 이름이 적성이었음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 졸저 전게서 168쪽
11:17
아쉬워 하는 정선생님을 뒤로 자리를 뜹니다.
30분 넘게 머물렀습니다.
11:22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좌틀항니다.
이제부터 소위 달뜨기능선으로 들어서게 되며 지리태극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면서 삼장면과 단성면의 면계를 따릅니다.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 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 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 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 7권에도 빨치산이 황석산을 넘어 둔철봉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에서 달뜨기능선을 보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 졸저 전게서 518쪽 이하
정선생님은 계속 저을 주시하시는군요.
지도 #3
11:59
997.5봉을 넘어 지도 #2의 '바'에서는 사면치기로 진행하고...
12:09
누군가 임의로 붙인 큰등날봉이라는 산패가 붙어 있는 지도 #2의 '사'의 곳입니다.
직진하고,
12:16
평평한 곳을 지나,
12:21
멋진 조망처에 다다릅니다.
지난 여름 그 더운 날.
여기서 조망을 즐기며 지리 동부를 마음껏 즐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아!
황금능선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구곡산까지....
좌측 유평계곡도 눈에 들어오고...
12:35
990.9봉으로 오르고,
이내 운리로 빠지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단속사지로 가는 길이죠.
우측으로 돌아,
12:48
지도 #3의 '아'의 곳으로 진행합니다.
이곳이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사진 우측 뒤로 표지띠가 날리고 있습니다.
그 방행으로 진행하면 백운산으로 들어 남강과 덕천강의 합수점으로 가는 이 덕천지맥의 종착점입니다.
또 최근에는 남강태극이라고 또 하나의 이름을 만들었나본데....
그런데 지도를 놓고 마루금을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동쪽 부분이 덜 휘어져 태극이라는 문양에 부족한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성심원 방향을 어천 방향으로 유도하긴 했건만 의도적으로 ‘태극종주코스’를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지리의 서부와 동부를 잇는 기존 코스만 생각한 결과였고 한계였던 것이다. 장거리 산행 클럽인 'J3 클럽'의 방장 배병만은 여기에 주목했다. 그러고는 기존에 있던 틀은 무시하고 지리가 가지고 있는 봉우리를 놓고 제대로 된 태극 문양을 긋는다. 그러다 보니 지리의 동부 쪽이 대폭 수정된다. 기존의 웅석봉 ~ 어천 방향이 웅석봉 삼거리에서 바로 직진을 하여 수양산 방향으로 그 끝을 튼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완성된 해가 2001년이었다. 이것이 요즘 장거리 산꾼들에게 '고수高手로의 관문關門(?)'의 필수 코스인 '지리태극종주' 코스 즉 '지태智太'이다. 구인월~덕두산~바래봉에서 성삼재를 잇는 ‘서부(북)능선+지리 주릉+동부 능선’의 동부능선 중 웅석봉+ 마근담봉+수양산을 첨가하여 도상거리 약 90.5km로 지리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 지리산의 경계를 확정한 것이다.
<사진 3> 복잡해진 지리태극종주길.
그런데 이렇게 지리태극능선 종주코스를 확정하여 산행을 즐기는데 문제가 생겼다. 즉 이 태극종주 코스의 서쪽 끝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는데 동쪽 끝은 좀 어수선해진 것이다. 무슨 문제일까? 좀 살펴볼까? 확인해보면 배병만은 기존의 웅석봉~어천마을 코스를 수정하여 웅석봉~수양산~시무산으로 가는 루트①을 택했는데(다른 루트와 구별하기 위해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수양태극종주Ⓑ’라 함) 최근 이 '지리태극종주' 코스에 아종亞種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즉 마근담봉에서 이방산으로 진행하는 코스 즉②이방태극종주 코스가 생겼고, 또 석대산으로 진행하여 망대산이 있는 남강으로 가는 루트인 소위 ③남강태극종주Ⓒ 코스도 생겼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덕천지맥의 끝을 수정하여 진양호로 가는 루트인 ④진양태극종주Ⓐ도 생겼으니 동쪽 끝만 4개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태극종주루트가 지리의 동부 경계를 확정시키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①②는 덕천강, ③은 남강과 덕천강의 합수점 부근, ④는 남강에서 각 끝나게 되니 이는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산경표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도 되겠다. 주의하여야 할 것은 위 4대 '태극종주'에 대한 얘기는 지리의 동부만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좋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산 이름이나 능선 그리고 산줄기 이름들은 고유명사이므로 한 번 굳어지면 이걸 고치기도 상당히 힘이 든다. 그리고 '다양성‘이란 사상이나 생각의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굳이 이런 사실적인 것까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세분시킨다면 이는 다양성보다는 ’난잡‘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 졸저 전게서 534쪽 이하
13:01
마근담을 따릅니다.
여기서 시천면을 만나게끔 지도에는 그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측으로 이방태극길을 보냅니다.
이제부터 온전하게 오리지널 태극종주길 엄밀하게는 수양태극길로 들어섭니다.
그 길은 단성면과 시천면의 면계이기도 합니다.
13:05
마근담봉이라...
926.7봉인데 마근담 마을에 착안하여 붙인 이름 같습니다.
산패를 붙이는 거야 좋지만 이름을 마구잡이로 짓는 것은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모르는 산으로님.
803.5봉을 지납니다.
남명이라는 이름이 반가워서....
13:28
지도 #3의 '자'에서 임도를 만납니다.
지도 #4
13:40
793봉은 용무림산이 되어 버렸고....
14:03
오랜만에 볼거리를 만납니다.
1년 만에 만나는 둘레길입니다.
지도 #4의 '차'입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백운계곡의 백운천이 나오게 됩니다.
작년에 이곳을 지나면서 붙였던 시그널도 보고....
조금 전 793.01봉부터 이 둘레길까지는 대단한 비알을 내려왔습니다.
그보다는 난이도가 떨어지지만 744.1봉까지는 길게 올라가야 하는구간입니다.
남쪽이라서 그런가요?
제법 봄기운이 풍깁니다.
14:36
그러고는 744.1봉으로오르는데 이곳에는 벌목봉이라는 산패가....
경험에 의하면 태극종주를 하는 분들이 가장 힘들어 할 곳이 바로 사리마을부터 조금 전 지나온 793봉입니다.
일반적으로 산으로 오르려면 어느 정도 높이까지는 그냥 오를 수도 있으련만 이 쪽 만큼은 바닥부터 시작하여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700고지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744.1봉을 우측으로 내려서면서 된비알로 바로 이어집니다.
아까보다 더 한 경사입니다.
14:57
그렇게 20분을 조심스럽게 내려서야 좀 평평한 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려왔으니 올라가야죠.
15:09
얼마되지 않은 길을 다행히 좀 수월하게 오르니,
4등급삼각점(산청455)이 있는 수양산입니다.
진달래까지....
계속 도로를 낮추다가,
고개로 일차 떨어진 다음 다시 치고 올라갑니다.
예전 티브이 안테나가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15:42
4등급삼각점(산청454)가 있는 시무산입니다.
그런데 삼각점 표기는 465로 되어 있군요.
어디서 주워온건가?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예상보다 조금 빠릅니다.
성질 급한 애들....
여기도 된비알입니다.
16:02
시멘트 도로를 만나,
이한검 대장을 만나고는,
16:04
오늘 산행의 끝 지점인 사리마을회관입니다.
덕산교를 건너 주차장 옆의 화장실로 가서 땀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마침 들어오는 원지행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그런데 원지에 도착하자마자 서을행 16:40 버스가 막 출발했군요.
미련 없이 17:50 버스표를 끊고 길건너 단골집이 된 갈비탕집에 가서 나홀로 뒷풀이를 하고 귀가길에 오릅니다.
오늘 탄천지맥을 한 산으로님과 수헌님의 복잡한 트랙이 카톡방에 뜨는군요.
저도 오늘 같이 하자고 했으나 오늘 이곳에 와서 지리산 신령님과 접신을 하기로 해서 빠졌는데...
어쨌든 두 팀 다 무탈하게 마무리했으니 다행입니다.
주말에는 해밀에서 백두대간 출정식을 노치마을에서 하니 또 신령님을 만나야 겠습니다.
첫댓글 지리산 웅석봉을 정점으로 남북으로 진행하신거군요.
멋스러운 지리의 풍광이 포근하기만합니다.
언제 한번 지리산을 다녀온다고 하면서도 늘 게으름만 가득하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