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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처칠이나 이율곡 같은 나라 구할 유비무환 전비(戰備) 지도자 없어 필시 멸망으로 간다.
- 대통령의 신념기자회견과 김정은의 방중을 보면서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이재유
대통령의 신념기자회견과 김정은의 방중을 보면서, 두 사람 다 이 한민족의 올바른 지도자가 결코 아니다가 정답이다.
대통령은 김태우는 자기 비리라고 신재민은 속좁거나 시야좁은 전사무관의 관점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전대법원장의 사법농단수사와 그 뉴스집중으로 이 정부 결함이나 실정이 가려지기에는 너무도 속보이도록 자기 합리화에 너무도 바빴다.
김정은은 거대 미국에게는 겁을 내면서 거대 중국에게는 무한정 숙이고 굴욕적으로 들어가, 절대로 중국중심으로 동 동이, 서 서융, 남 남만, 북 북적을 전부 오랑캐라고 지칭하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오로지 동의 동이 오랑캐만 살아 남아 있고 전부 다 망하거나 다 포섭되어 거대중국을 이루고 있으니,
실제로 외국에서 남북한 핵전쟁으로 서로 다투다가 어부지리로 중국이 적화통일 한국을 얻어가는 인구나 경제 모두 중국에 흡수되어 스탠다드차타드사 2030년 한반도 세게경제의 10위 안에 통일한국은 없다. 망하리라고 보고 있는 것이리라,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page=1&branch=&source=&category=world&art_id=6880866
지금이후 남북한 모두 급격히 편중국 흡수중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역사상 공짜 점심이 없었던 중국 남이 차려주는 생일상 받기에 여념이 없어, 미국이 혼줄낼까봐 조마조마하면서 미중무역전쟁에 기분 나빠진 시진핑이 김정은이 대미핵무장 강성전략으로 미국을 강성 대응 내지 협박하고 있으니 대리만족 내지 대리 기분 풀기로 해석되도록 김정은에게 한껏 기분 내도록 환대하면서 전부 우리 대통령도 김정은도 모두 자기 기분 풀고 회견하고 나다녔다.
지금의 좋은 말로는 고시로써 인생을 걸어서 자신의 확신과 신념에 너무 집착하여 왔고 너무 자신을 믿는 나머지 지나친 자신감으로 무장하여서 대통령과 대통령의 신념과 맞서는 타인들과 타인의 신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그런 정당한 비판과 타인과의 유대와 화해와 순응에 덜 민감하고 덜 수용하여서 대통령 스스로 너무도 고집이 세고 너무도 대통령의 신념이 확고한 반면에 그런 것과 더불어서 대통령이 고시라는 수험공부만 하였다 성공하다보니 사회의 복잡한 이면과 경제학적 마인드가 부족하여 법리적으로 밝으나 경제적으로는 어두워 실리적 균형감각이 상당히 떨어지는 현실경제 감각마저도 자신의 신념에 둘러싸여 무시되거나 주저앉혀지는 상태에 있고 또한 심리적으로 대통령이 국제정치외교나 국내경제사회정치문화의 복잡한 굴레를 다 이해도가 떨어져 오로지 양극화와 평등화 균등화에 올인하다 보니 효율성과 경제성이 침해되거나 무너지는 약점을 안고 있으며, 고시공부를 한 집중적 편집적 성격으로 자기 확신이 선 뒤에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에 차서 행동하여 그 대통령의 시야와 시각이 너무 편협하여 정책 균형감과 현실감이 아주 떨어져 있고 우리의 국방안보외교에서 우리 국민과의 약속을 더 김정은의 약속보다는 더 철저히 지키려고 해야 하나 거꾸로 되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적 권모술수적이지 않고 있고, 국제국방외교에서 그간 북한이 행해온 6.25전쟁도발이후 수많은 침략도발은 물론이고 지금의 극비사기위장 핵무장의 악행 침략도발이 그 모두 사악하고 거짓 위장으로 무장한 김정은과의 약속을 너무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우리 문대통령이 김정은보다 한수 아래가 아니라 거의 바둑으로치면 김정은은 9단인데 우리 문대통령은 아마 1단같이 행동하는 것 같이 김정은과의 약속이 법칙과 철칙같이 믿고 철칙같이 준수하겠다면서 우리 남한의 국방안보 장벽을 전부 다 허물고 국방안보의 방패와 칼을 모두 내려놓게 하는 너무 급진적 정직해서 멍청하다 못해 바보스러울 정도로 국제정치외교적으로 지도자로서 부적합한 정신무장 내지 심리상태로 너무도 나이브하고 너무도 순수하고 정직한 대통령을 뽑은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사실상 우리의 한반도 미래예정 내지 미래도정이란 대한민국 멸망, 남한의 북한 핵무력적화통일, 통일적화한국 중국편입이라는 불행의 연속이 예정되어 있다.
평화를 구하려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평화를 얻으려거든 지킬 힘(국방력)을 상시 준비하라.
평화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자는 반드시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라는 역사가 알려주는 평화조약과 평화협정의 역설, 평화는 평화로써 구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5&nNewsNumb=20170725545&nidx=25546
우리 대한민국은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신물이 난 영국민이 독일 히틀러가 영국 뮌헨협정이라는 평화협정을 어기고 체코 폴란드 등을 야금야금 점령하고 프랑스까지 다 점령할 때 즈음하여 가장 고립무원의 영국이 되어서야 스스로 영국민이 아 이랬다간 독일에게 망하겠다고 하던 막바지 멸망의 막장에 들어서서야 영국민이 그간의 평화협정의 잘못을 깨달을 때 쯤 처칠이 망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우방 프랑스 함대를 폭격하라고 할 때서마저에 영국민에게 영국을 망하지 않게 굳세게 줄기차게 독일 히틀러와 싸워야 한다고 미국은 나중에 영화한 가장 어두운 시기(darkest hour; 다키스트 아우어)의 고리무원의 망할 영국을 도우기를 주저할 때 우방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전쟁에 끌어들이고 영국을 독려하여 구한 인물이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537
우리에게는 조선의 임진왜란전 십만양병설의 이율곡이 있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북한 핵무장에 무장해제를 하는 거꾸로 가고 그러는 사실상 평화유지정책이 아니라 이미 확립된 정전협정이든 정정협약이든 지금껏 유지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도발인 전쟁이고,
https://www.bbc.com/korean/news-43904026
사실상 전쟁으로 이어지게 하는 북핵의 비핵화실패에 따른 북한식의 (숨겨진) 후과 내지 남한식의 (깨닫지도 준비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인 핵전쟁을 심지나 핵전쟁도발침략유인 유도하는 다이너마이트 선에 불이 붙이는 것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상상도 못하는 문대통령이 있으니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848843.html#csidx8efa2cd4f7e29fa9f9e51e9557fe507
반처칠 반이율곡 전략전술로서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미래 방향이 처칠식 이율곡식 국가국방안보 전략전술이 아니라면 정말로 망하는 방향으로 전략전술을 택하고 있다.
(참고자료)
'2030년엔 중국·인도가 미국 제치고 세계경제 1·2위 차지'
[연합뉴스] 기사입력 2019/01/08 17:03
스탠다드차타드 전망…세계 10대 경제대국 중 7개국이 현 신흥국
(서울=연합뉴스) 김치연 기자 = 2030년에는 중국과 인도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 대국 1, 2위를 나란히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또 2030년 세계 10대 경제 대국 가운데 7개를 현재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나라가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은 8일(현지시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의 보고서를 인용해 2030년에는
세계 경제 규모 순위에서 중국이 1위, 인도가 2위를 차지하고 미국은 3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각국의 물가수준을 고려한 구매력평가지수(PPP) 환율 기준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2030년 중국은 64조2천억 달러로 1위, 인도는 46조3천억 달러로 2위를 차지하고 미국은 31조 달러로 3위로 밀려나게 된다.
보고서는 2020년대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7.8%로 고속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중국은 5%대 성장률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도네시아는 10조1천억 달러로 4위를 차지하면서 5위권 안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됐다.
터키, 브라질, 이집트, 러시아가 그 뒤를 이었다.
현재 경제 대국으로 꼽히는 일본과 독일은 각각 9위와 10위로 밀려났다.
세계 GDP에서 아시아의 비중도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아시아의 비중은 28%이지만 2030년에는 유로존과 미국을 합한 수준인 35%까지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러한 신흥국의 약진에는 인구수가 크게 작용했다.
스탠다드차타드의 데이비드 만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GDP에서 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국 그 나라가 전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수렴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2030년 세계 경제 규모 순위
┌───┬────────────┬───────────┐
│순위 │국가 │명목 GDP │
├───┼────────────┼───────────┤
│1 │중국 │64.2 │
├───┼────────────┼───────────┤
│2 │인도 │46.3 │
├───┼────────────┼───────────┤
│3 │미국 │31.0 │
├───┼────────────┼───────────┤
│4 │인도네시아 │10.1 │
├───┼────────────┼───────────┤
│5 │터키 │9.1 │
├───┼────────────┼───────────┤
│6 │브라질 │8.6 │
├───┼────────────┼───────────┤
│7 │이집트 │8.2 │
├───┼────────────┼───────────┤
│8 │러시아 │7.9 │
├───┼────────────┼───────────┤
│9 │일본 │7.2 │
├───┼────────────┼───────────┤
│10 │독일 │6.9 │
└───┴────────────┴───────────┘
※ 자료/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 단위 : 구매력평가지수(PPP) 환율 고려한 조 달러(Trillions of international dollars).
chi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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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연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page=1&branch=&source=&category=world&art_id=6880866
평화협정이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8000여건의 평균 유효기간 고작 2년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앞으로 유럽에서 전쟁은 없다. 우리 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1869~ 1940)가 1938년 9월 30일 런던 헤스턴 공항에서 몰려온 환영 인파 앞에서 뮌헨 평화협정문을 흔들면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이다.
체임벌린 총리는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려 하자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와 함께 히틀러와 협상을 벌였다.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다른 지역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우면서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란트를 할양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히틀러가 이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4개국 지도자들은 뮌헨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뮌헨의 교훈
당시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영토 일부를 양보해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 의원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새로운 국제질서냐”면서 체임벌린 총리를 비판했다. 처칠의 말대로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국제사회의 여론 때문에 뮌헨 평화협정을 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임벌린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히틀러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차지한 데 이어 1939년 3월, 체코 전역까지 점령해 뮌헨 평화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이어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됐다. 이로 인해 ‘적의 도발 앞에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과 소련이 맺은 불가침조약까지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 외상 요아힘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성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 불린 이 조약이 1938년 8월 체결되자, 전 세계는 견원지간인 양국이 평화를 선택했다면서 환호했다. 공산주의를 증오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의사당 방화 사건을 독일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탄압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이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였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상호 불침략과 분쟁의 평화적 처리 등이었다. 이 조약에는 또 폴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이, 발트국은 소련이 각각 차지한다는 비밀 조항들도 들어 있었다. 이후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독·소불가침 조약에 따라 나치 독일에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유럽 전체를 차지하려던 히틀러는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했다.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만을 믿고 침공에 대비하지 못한 소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4년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500만명이 희생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미국 최고의 전략가라는 말을 들어온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바로 미국과 남·북베트남이 1973년 1월 체결한 파리 평화협정이다. 당시 막대한 전비(戰費)와 국내의 반전 여론 때문에 미국은 북베트남(월맹)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베트남전쟁을 종결하고 싶었다. 이를 간파한 북베트남은 협상과정에서 미군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남베트남(월남)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협상대표였던 키신저는 미군 철수 후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침공하면 미국의 해·공군력을 동원해 북베트남을 응징하고 지상군을 지원하겠다고 남베트남에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파리 평화협정은 종이쪽에 불과한 셈이 됐다.
▲ 1938년 뮌헨 평화협정 1938년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나치 독일과 함께 서명한 뮌헨 평화협정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키신저의 오판
북베트남은 1975년 4월 남베트남을 침공해 무력으로 통일시켰다. 그 결과 남베트남에서 1000여만명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서 죽어갔고 100만여명의 보트피플이 공산 치하를 피해 해상을 떠돌았으며 그중에서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협상의 주역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키신저는 “미국은 타협을 원했지만, 북베트남은 승리를 원했다”면서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을 후회했다. 키신저는 또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 내의 평화운동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키신저의 이런 회고는 미국이 더 이상 전쟁을 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었다. 파리 평화협정의 교훈은 평화협정이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4형의 시험발사에 성공하고 조만간 핵탄두를 소형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비핵화와 함께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 사회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아예 쌍중단(雙中斷, 북한 핵·미사일 도발 중단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병행)을 미국에 제안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한이 화성-14형을 시험 발사한 지난 7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쌍중단과 쌍궤병행을 한반도 위기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중국이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를 병행 추진하려는 것은 비핵화를 평화협정 체결 카드로 활용하는 동시에 동북아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주한미군 철수 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은도 지난해 5월 제7차 당 대회에서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철회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조선에서 모든 무장장비와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1939년 독·소 평화협정 1939년 몰로토프 소련 외무인민위원(왼쪽)과 리벤트로프 독일 외상이 악수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전쟁이나 분쟁 당사국들은 모두 평화협정을 맺고 평화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평화협정(Peace agreement)이란 군사적으로 대치 관계 또는 전쟁을 벌이는 국가들이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맺는 약속을 말한다. 7월 27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4년을 맞는 남북한도 평화가 정착되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정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경우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정은 평화를 반드시 보증하는 약속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돼왔다.
실제로 각국이 맺은 평화협정은 지금까지 8000여건이나 되지만 평화협정의 평균적인 유효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의 문명사학자인 윌과 아리엘 듀런트 부부에 따르면 인류 문명사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68년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역사에서 91.6%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일상사였으며 평화로운 시기가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얘기다. 20세기만 놓고 보더라도 전쟁으로 죽어간 인구가 9억여명이나 된다.
▲ 1953년 정전협정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대표 해리슨 미군 중장(왼쪽 두 번째)과 북한군 남일 대장(오른쪽 두 번째)이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photo 미국 국무부
휴지조각된 오슬로 평화협정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93년 9월 체결한 오슬로 평화협정을 들 수 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아랍 영토를 당사국에 반환함과 동시에 그곳의 일부에 팔레스타인의 독립국 건설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다. 국제사회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적극 지지했고, 세계 언론들은 중동지역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덕분에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슬로 평화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독립국을 세우려던 땅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분리장벽을 세웠으며,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테러 공격과 로켓포를 무차별로 쏘아댔다. 양측의 분쟁과 유혈충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평화회담의 전 단계인 정전협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유엔에 따르면 북한은 전 세계에서 정전협정을 가장 많이 위반한 국가이다. 북한은 그동안 정전협정을 무려 43만여건이나 위반했고, 이 가운데 침투와 국지도발은 3000여건이 넘는다. 북한은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면서도 핵 실험을 무려 다섯 차례나 실시했으며, 올 들어서만도 ICBM급을 비롯해 각종 탄도미사일을 12차례나 발사하는 등 위기를 고조시켜왔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날을 ‘전승절’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을 북한이 승리했다고 인정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하나도 없는데도 북한은 세계 최강인 미국에 대항해서 승리했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올해 기념행사를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다. 주민들은 굶어죽어 가는데도 엄청난 돈을 허투루 쓰고 있다.
▲ 1973년 파리 평화협정 1973년 미국 대표 헨리 키신저(오른쪽)와 북베트남 대표 레둑토가 파리 평화협정 합의 후 악수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적화통일전략의 일환이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는 ‘공산화’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비핵화는 평화협정과 연계할 수 없으며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브루스 클링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 6월 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한 관리들과의 비공개 협의에서 “북한 관리들이 미국이 먼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이후 평화협정을 체결할지 전쟁을 할지 대화를 하자고 제의했다”면서 “한국을 협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은 핵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헌법과 당 노선으로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한 북한은 핵 포기를 전제로 한 어떠한 대화와 협상에도 응할 생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북한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론을 거부하고 있다. 북한의 전략은 오로지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적화통일을 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정전협정에 근거해 유지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가 해체돼야 하고 주한 미군은 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이런 주장에 중국과 러시아가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핵무기와 ICBM이 두려워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자칫하면 체임벌린과 키신저의 전철(前轍)을 밟을 수 있다.
▲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의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photo 연합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
트럼프 미국 정부는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개별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최대의 압박 정책을 추진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중국과 러시아의 주장을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 25년간 북한 정권을 상대한 경험으로 볼 때 우리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더라도 북한은 매번 핵 개발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해왔다”면서 “북한의 핵 개발을 지금 상태로 동결하더라도, 북한이 매우 높은 수준의 핵 능력을 여전히 보유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도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수미 테리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국담당 보좌관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추진하려는 것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 동맹을 해체하기 위해”라면서 북·미 간 평화협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브루스 베넷 랜드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 정권은 결코 한국을 점령해 무력통일을 이루는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다”며 “북한의 평화협정 요구는 평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전쟁 준비의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베넷 선임연구원은 “만약 평화협정이 체결돼 미군이 일단 철수하면 다시 한국에 재배치 가능성이 희박하다”면서 “북한 정권은 이를 활용해 수십 년간 축적한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등을 앞세워 한국 점령을 시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베넷 선임연구원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은 역설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테리 전 보좌관도 “북한과 조급하게 대화에 나서면 비핵화는 물론 한반도의 평화나 안정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 자칫하면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정전협정 64주년을 맞아 한반도에선 또다시 평화협정이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꾼다고 평화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로마제국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의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467호
등록일 : 2017-07-26 10:28 | 수정일 : 2017-07-26 10:28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5&nNewsNumb=20170725545&nidx=25546
평화협정이 판도라의 상자인 이유
2018년 4월 26일
휴전회담부터 정상회담까지 이뤄진 판문점
정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65년.
27일 남북정상회담과 5~6월께 열릴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는 요구가 높다.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엄밀히 말하면 평화협정이 필요 없다는 주장에서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북한 노림수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의견까지 반대 이유는 다양하다.
평화협정 (또는 평화조약)이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내용이 들어가며 얼마나 걸릴까? 평화협정에 대해 꼭 알아야 할 3가지를 정리해 봤다.
"평화협정은 1945년 이전의 방식"
1919년 4월 1일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반대하는 시위
1947년 2월의 파리평화조약에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외무장관
일각에서는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끝내는 건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옛날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아산정책연구소에서 국제법을 연구하고 있는 이기범 연구위원은 "오늘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쟁이 합법일 수 있었던 1945년 이전의 국제법적 사고에 불과하다"며 "한국전쟁의 종결에는 평화협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위원은 BBC 코리아에 "쉽게 말해 1945년 이전엔 선전포고가 전쟁의 시작이었고 평화협정이 전쟁의 끝을 의미했다"며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UN 체제가 성립되었고, UN 헌장 제2조 제4항 9은 국가들의 무력사용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즉, 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전쟁이 기본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평화협정으로 끝낼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남북한 종전 논의'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 할 4가지
'정치 선전' 위해 납북된 문화 예술계 인사들
한국전쟁은 이미 끝났다?
200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강화조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다나카마키코 일 외상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조약은 많지 않다.
1973년 1월 27일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간에 체결된 파리평화협정과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체결된 평화협정이 있지만, 이기범 연구위원은 특수한 케이스라는 분석이다.
한반도의 경우도 특수하다. 정전협정이라는 게 주로 24시간 혹은 72시간 휴전을 한다는 취지에서 체결이 되지만 한반도에서는 65년 동안 정전협정 체제였다는 거다.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은 끝난 거고 만약 한반도에 군사 행동이 또 있다면 이건 새로운 전쟁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국가들의 무력사용에 관한 국제법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요람 딘스타인(Yoram Dinstein)도 "만약 정전협정 체제가 비정상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경우에 적대행위가 재개된다면 이는 '새로운' 전쟁의 시작일 뿐"이라고 본다고 이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평화협정이 기피 대상이었던 이유
지난해 11월 말 ICBM급 '화성-15' 발사를 축하하는 북한 주민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내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평화협정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도 같다"며 "평화협정 당사자, 평화보장관리기구, 유엔사령부 해체, 해상경계선 확정, 상호 군비통제 등 동반되는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이 연구위원에 따르면 베르사유 조약에는 400조항이 있고 독일이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연합국끼리만 작성했는데도 8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작성에는 무려 6년이 걸렸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전쟁의 평화협정에도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5월~6월초 만날 예정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
"19세기에는 1~2개월이면 됐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한국과 북한 간에 서로 조율해야 할 것이 산적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이 들어올 경우 더 하다.
보통 평화조약에는 ▶종전선언 ▶영토범위 ▶포로 교환 ▶배상금 문제 등이 들어간다.
우선 한국과 북한은 서로를 국가로 보지 않고 있고 영토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한국 헌법에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써있고 북한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정했지만 북한이 인정하고 있지 않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도 있다.
주한미군도 쉽지 않은 문제다. 조성렬 수석연구위원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고 유엔사령부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주한미군 지위, 한미동맹의 재조정 등 복잡한 과제들이 동반된다"고 밝힌 바 있다.
https://www.bbc.com/korean/news-43904026
처칠의 ‘다키스트 아워’ 영국의 ‘다키스트 아워’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승인 2018.03.05 14:45
[역사비평]
영국인들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윈스턴 처칠을 우선적으로 지목한다. 재미있는 건, 영국인들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그런다는 사실이다. 유럽연합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통해 정식으로 유럽인들을 묶기 시작한 2002년에 실시된 ‘19세기 이후 가장 위대한 유럽인’ 설문조사에서 처칠은 1위를 차지했다.
그가 6년 가까이 지속된 대(對) 나치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유럽도, 유럽의 번영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처칠이 구해낸 것은 영국만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지배하는 세상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한 노예들의 세상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유럽 땅에서 멈추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처칠이 항상 존경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처칠 역시 오랜 정치 경력 동안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처칠은 영국 정계의 말썽거리였다. 20세기 초 자유당 내각에서는 복지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을 주도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해군장관으로서 갈리폴리 작전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큰 희생을 야기했다.
특히 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그의 완고함은 간디가 이끈 인도 민족운동과 심각하게 대립했고, 영국의 ‘문명화 사명’에 따르기를 거부한 식민지인들은 처칠로부터 모멸적 언사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역사에 남은 처칠의 궁극적 이미지는 영국과 유럽을 나치즘으로부터 구해낸 영웅이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처칠은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는 것이다.
위스키와 시가 담배에 절어 있던 그는 조급하고 고집 세고 독단적이었지만 바로 그런 성정 덕분에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전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처칠의 위대함은 특히 전쟁 초에 발휘되었는데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그 때를 조명한다. 이 글에서도 전쟁 지도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위대한 지도자 처칠
처칠이 수상 직을 넘겨받은 1940년 5월의 시점에서 영국은 마치 대양 한가운데 홀로 돛단배에 버려진 사람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유럽 대륙은 거의 히틀러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스탈린은 바야흐로 히틀러와 조약을 맺고 땅 따먹기에 몰입하기 직전이었으며,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휘말릴까봐 조바심을 내며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영국만이 홀로 남아 사악한 나치 정권에 대항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처럼 어려운 순간에 영국과 전 세계의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바로 처칠이었다. 프랑스가 항복한 1940년 6월부터 진주만 폭격 후 미국이 어쩔 수 없어 참전하게 된 1941년 12월까지 18개월 동안 처칠은 혼자서 자유를 위한 인류의 투쟁을 이끌었다.
영국에게는 동맹국도 없었고 무기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국에는 신념과 용기와 행동으로, 그리고 사람들의 혼을 감동시키는 연설로 무장한 윈스턴 처칠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3일 시작되었다. 1933년에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가 국제법과 조약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독일을 재무장시키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등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동안 유럽 정치인들은 전쟁이 터지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생각에 그의 만행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뮌헨협정(1938년 9월)에서 합의한 대로 주데텐란트 만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집어삼킨 히틀러가 폴란드까지 침공하자 영국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게 되었다. 막상 선전포고 후 여러 달 동안 전투는 별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1940년 4월 9일, 갑자기 독일군이 총공세를 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곧이어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5월 10일, 나치군의 프랑스 공격이 시작된 날, 체임벌린 정부가 불신임되고 65세의 처칠이 수상 직에 올랐다. 1920-30년대 영국 사회에서 처칠은 외로웠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더 이상의 전쟁은 용납할 수 없다는 반전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만큼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컸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히틀러가 등장해서도 바뀌지 않았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총리 체임벌린과 외무장관 핼리팩스로 대변되는 유화적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유화주의의 절정은 체임벌린이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당사자이며 주권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수용하고는 ‘세기의 평화’가 약속되었다고 주장하며 국민의 환호를 들을 때였다.
오직 처칠만이 히틀러와 나치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고 군비 확장을 주장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광야의 외로운 외침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를 전쟁광으로 비난할 뿐이었다. 반면 처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잔혹한 사기꾼에게 계속 당하고만 있는 체임벌린과 같은 종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를 보여줬다.
패배를 승리로 바꾼 덩케르크 철수작전
총리가 된 처칠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프랑스 덩케르크 항구에 포위된 채 남겨진 35만 명의 영국과 프랑스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이 소개 작전은 5월 28부터 6월 4일 사이에 650 척이 넘는 온갖 종류의 배--개인 요트, 유람선을 포함--를 총동원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영국인들의 기억의 터전에 확고히 자리 잡은 ‘제국의 가장 위대한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철수 작전은 실은 패배 후의 후퇴였지만 오히려 ‘도덕적 승리’로 포장되면서 영국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레 그 과정을 지휘한 것은 처칠이었다. 핼리팩스를 위시한 정부 내 유화론자들은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대신 영제국을 손대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꼬임에 넘어가 협상에 임하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처칠은 그것이 히틀러의 또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한 약속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은 1941년 6월에 스탈린과 맺은 독소조약을 무시하고 독일군이 소련에 진군했을 때 명백히 드러났다. 덩케르크 소개 작전이 마무리되고 얼마 안 있어 프랑스가 결국 독일에 항복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당장 독일 손에 넘어가게 된 프랑스 함대 문제가 대두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함대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함들은 북아프리카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처칠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독일에 항복하는 경우에도 함대는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일부 비점령지역을 그들 통치에 남겨주겠다는 히틀러의 제안에 솔깃해 함대를 독일군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함대가 독일 측에 넘어가는 순간 영국 침공이라는 사태가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였다. 나폴레옹 이후 어느 누구도 영국을 침략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히틀러가 그런 야망을 품었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독일군은 영국으로부터 30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처칠은 급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수십 척의 구축함이라도 보내달라고 애원했지만 루스벨트는 거절했다. 처칠은 영국 해군 제독들에게, 각각의 프랑스 함대와 접촉해 그들이 결코 독일에 함대를 넘겨주지 말도록 설득하고, 불응할 경우 격침을 명령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의 신임 총리가 첫 라디오 연설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대본을 읽고 있는 영화장면
실제로 알제리 해안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가 요구를 거절하자 처칠의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동맹군으로 간주되던 프랑스 함대에 폭격을 하게 된 영국 병사들이나 당하는 프랑스 병사들이나 상상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처칠의 결정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지만 이 사건은 그야말로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라고 포효하던 처칠의 강철 의지를 입증한 사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처칠과 영국의 의지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스벨트는 영국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어차피 침몰하는 영국에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국 여론도 점차 고립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궁극적으로 미국은 무기 대여법에 의해 영국을 지원하게 된다. 이 두 사건을 겪고 난 처칠은 곧이어 8월부터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중전과 런던 공습이라는 심각한 사태를 맞게 된다.
당시 독일 공군은 영국에 비해 3대 1 이상의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영국 공군기들은 일당백의 용맹으로 적기에 대항했다. 물론 희생도 무척 컸다. 처칠은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빚진 적이 없었다”며 영웅적인 전투기 비행사들을 예찬했다.
이 전투는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공중전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자 히틀러는 영국 공군의 지상 기지만이 아니라 런던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8월부터 200일 동안 공습이 계속되었는데 이때 런던 시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도 길이 역사에 남을 만했다. 6만 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런던의 주택 7채 가운데 2채가 파괴되었으며 1941년 5월에는 의회 건물마저 폭격을 맞았다.
위기에서 단결한 영국 국민
이때 처칠은 그의 탁월한 어휘력을 발휘해 그 고난의 기간을 ‘가장 멋진 순간(the Finest Hour)’으로 부르며 국민들을 고무했다. “영제국의 역사가 앞으로 천년 동안 지속된다 해도 이 시간만큼 멋진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방공호에서 라디오로 처칠의 연설을 듣고 있던 영국인들은 ‘가장 멋진 순간’을 함께 하며 애국심과 자부심을 불태웠다.
역사상 영국 국민이 그처럼 단결되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처칠이 동원한 탁월한 무기는 심금을 울리는 연설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때로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처칠은 ‘영어를 동원하여 전투에 내보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한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비록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실시된 총선(1945년 7월)에서 영국민은 처칠이 아닌 노동당의 애틀리를 선택했지만 그들이 그를 영원히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처칠은 그 후 한 번 더 총리로 봉직했다. 처칠이 90세가 넘어 영면했을 때 노동당 지도부조차 그를 ‘국왕, 의회, 국교회, 언론과 더불어 우리의 가장 위대한 다섯 번째 제도’로 칭송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처칠에게 경의를 표한다. 처칠의 경우에서 보듯 모든 정치 지도자에게는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다. 처칠에 대한 그들의 존경에서 영국인들은 공과를 구분해 합당한 평가를 할 줄 아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이 1940년의 영국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든 히틀러에게는 핵무기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극명한 차이점은 우리에게는 처칠과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히틀러의 사기극에 넘어갔을 때, 혹은 용기를 잃고 노예로의 길을 받아들였을 때 끝까지 맞선 지도자가 처칠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김씨 일가에게 그렇게나 당하고도 아직도 그들이 제시하는 사기극에 넘어가려 한다. 우리를 이끌 처칠과 같은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일까?
1940년 6월부터 18개월 동안 처칠과 영국은 고립무원으로 혼자 싸워야 했다. 처칠은 영국 혼자만으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미국을 끌어들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미국이 참전했을 때 비로소 처칠은 다가올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처칠과 루스벨트가 가까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고 많은 사안에 의견 대립을 보였지만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적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미 미국이라는 혈맹이 있다. 그런데 너무 당연해서인지 우리는 그 동맹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이제라도 그 동맹의 막중함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제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를 바란다. 영화에서는 대화체로 표현되었지만, 처칠은 자신이 저술한 아버지 랜돌프 처칠의 전기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성정이지만 나 자신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충심으로 바란다”고 쓰고 있다.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의 종북 좌파들은 언제 처칠의 지혜를 배울 것인가? 일전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다키스트 아워’를 단체로 관람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러나 정파를 떠나 모든 정치인이, 나아가 일반인들이 ‘다키스트 아워’를 보고 자극을 받고 처칠에 대해 배웠으면 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아가 이 영화가 준 울림이 본격적인 역사 공부로 이어지기를, 역사학자로서 기대해본다. 영화 한 편 보고 역사를 다 이해했다는 식의 얄팍함에서 벗어나 역사가 주는 심오한 교훈을 책에서 찾아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537
‘종전선언’ 가시권…구속력있는 ‘평화협정’ 직행 가능성도
등록 :2018-06-13 04:59수정 :2018-06-13 08:49
트럼프 “조만간 종전선언” 명시
북미합의 이행조처 속도와 연동
평양·백악관 교차방문까지 거론돼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청 “북미 후속회담 추이 주시”
트럼프 귀국길 문 대통령과 통화
합의 이행 위해 한미 공조 하기로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오전 청와대 본관 세종실에서 국무회의를 하기에 앞서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나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미소 짓고 있다. 왼쪽은 이낙연 국무총리, 오른쪽은 국외출장 중인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대신 참석한 고형권 기획재정부 제1차관.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공적인 북-미 정상회담으로 남-북-미 정상이 함께 한국전쟁의 종식을 선언할 날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회담 직후 연 기자회견에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며 종전선언이 조만간 이뤄질 가능성을 언급했다.
현재로선 남-북-미 정상의 종전선언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명확하지 않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합의한 포괄적인 공동성명 이외에, 두 정상이 나눈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쇄’ 등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체제안전보장 등에 관한 구체적인 조처의 이행 속도에 연동될 것으로 보인다.
북-미 정상회담을 예의주시해왔던 청와대도 종전선언과 관련해선 앞서가지 않으려는 듯 말을 아끼고 있다. 청와대는 애초 북-미 정상회담 이전엔 문재인 대통령의 싱가포르 합류 가능성을 기대했고 그 가능성이 낮아지자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다음달 27일 판문점에서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다만 이날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엔 기류가 바뀌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동안 종전선언은 구속력은 없지만, 냉전체제 해체 및 평화협정으로 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졌다. 청와대 안에선 이날 북-미 정상의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체제안전보장 합의는 이런 종전선언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미 공동성명의 이행방안을 논의할 북-미 고위급회담이 이어지고, 트럼프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김 위원장의 백악관 방문이 거론되는 만큼, 북-미가 정치적 선언인 종전선언을 뛰어넘어 구속력이 있는 평화협정으로 직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남-북-미 정상의 종전선언은 일단 북-미 고위급회담 등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종전 논의”를 거론하고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도 ‘종전선언’을 공언한 만큼 적절한 시점에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미 회담 결과를 직접 설명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두 정상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이룬 북-미 사이의 합의 내용을 완전하고 신속하게 이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한-미가 더욱 긴밀하게 협의하고 공조해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정상 간 통화에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성공적인 결실을 맺어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큰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 결과에 대해 실무진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그리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김 대변인은 밝혔다. 이와 함께 문 대통령은 14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을 직접 만날 예정이어서, 이 자리에서도 남-북-미 종전선언 추진 여부 등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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