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타 오야스코6 - 오야스코 온천에서 온천욕후 계곡을 구경하고 유자와로 가다!
어제는 아키타 에서 유자와 湯沢 를 거쳐 미나세강변에 위치한 모토유 "Motoyu 元湯" 정류장
에서 하차해 모토유 湯の宿 元湯くらぶ 료칸에 체크인을 하고는 오야스쿄 온센 (小安峽
溫泉 소안협 온천) 의 협곡으로 내려가 '오야스쿄 다이훈토우 (小安峡大噴湯)' 를 구경했습니다.
협곡에서 대지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듯한 열탕과 증기 가 격렬하게 분출 하니 바위 틈 사이로 98도 원천
(源泉)이 끓어오르는 모습과 수증기 를 뿜어내는 모습을 구경하고는 올라와 계곡에 걸린 붉은 다리
에서 협곡과 단풍을 구경하고 료칸으로 돌아와 온천욕을 하고 저녁에는 가이세키 요리 를 잘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2022년 10월 31일 아침에 일어나 다시 대중탕 으로 찾아가서 온천욕을 하고는 돌아와
어제밤 가이세키 요리 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진수성찬 이라 할 만한 아침을 듭니다.
온천 료칸을 나와 다시 미나세강변에 오야스쿄 협곡 으로 가서는 붉은 다리를 찾아 계곡에
쏟아져 흐르는 물줄기와 단풍이며 분출하는 온천수가 내는 흰 연기 를 구경합니다.
유자와에는 오노고마치 小野小町 전설이 있으니 9세기 무렵에 유자와 오기치 에서 태어난
오노 고마치는 일본에서 미인을 나타내는 말로 통용될 정도로 절세의 미녀로
아키타 사람들은 중국의 양귀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와 견주는 미녀 라고 자부한답니다.
어릴적부터 재능이 뛰어났던 처녀로 13세에 교토에 간 후 궁중 에서 근무하면서 당시대를 대표
하는 작가로 활약했으니 많은 남자들이 연애편지를 보내오고 임금의 총애 도
받았는데 재색이 겸비한 여인은 40세에 화려한 교토를 버리고 고향 유자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온천 료칸으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는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유자와시 로 가는데
오른쪽에 미나세 강변에 붉은 단풍 을 구경하다가 문득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자 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인 박상준씨가 쓴 “고아를 위해 헌신했던 선한 일본인 다우치 지즈코” 기사가 떠오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다우치
6·25전쟁 때 남편 행방불명 후 고아원 지켜
곤경에 처한 고아들 외면 못한 어머니 마음
기억하는 이 줄어들지만 선한 삶의 울림 여전해
다우치 지즈코 는 1912년 10월 31일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조선총독부 목포부청 하급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1919년 목포로 이주했다.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정명여학교
에서 음악교사 로 근무하던 중, 여학교 시절 은사의 소개로 공생원이라는 고아원 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공생원 원장이던 윤치호와 결혼 했다. (독립협회 회원 윤치호와 동명이인)
윤치호 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한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부랑아 일곱명 을
집에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28년 공생원 을 설립했다. 개인이 설립한 전남
지역 최초의 아동복지시설 이었다. 돌보는 고아가 늘어나면서 거지대장 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졌다.
일본인 자원봉사자 다우치 지즈코와의 결혼은 거지대장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으로 세간의 화제였다고 한다.
윤치호의 이력과 주변의 회고를 종합하면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꽤 두터운 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친일파로 인민재판 에 회부되었으나 시민들의 변호 로 목숨을 구했다. 대신 인민군은
그에게 인민위원장직을 맡겼다. 목포가 수복된 뒤에는 국군에게 체포 되었지만 목포 시민들의 적극적 구명
운동 덕에 석방될수 있었다. 그후 고아들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주위의 권고, 일본에 홀로 사는 어머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지즈코는 행방불명된 남편 을 기다리며 공생원을 지켰다. 양친이 있는 일반 가정에서도 하루
세 끼가 여의치 않던 시절, 고아원 운영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강소천 문학전집에서 고아원을 무대로 하는 아동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 후 궁핍하던
시절, 헌신적으로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원 원장의 눈물겨운 분투 를 그린 소설이었다.
다우치 여사의 장남 윤기씨의 회고록에서 잠깐씩 비치는 그 시절의 공생원 모습을 보고
까마득하게 잊고있던 그 소설이 생각났다. 어린 마음에까지 전달되던 절망감 이 다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우치 지즈코는 1968년 10월 31일 폐암 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장례식은 목포 시민장 으로 치러졌고,
3만 명의 시민이 운집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광복 직후에는 일본인 이라는 이유로, 인민군 치하에서는
친일파 라는 이유로, 수복후에는 부역자 라는 이유로 그와 그의 남편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민들이 나서서 그 가족을 지켰다는 것과 3만명의 시민 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모였다는 것으로
볼 때, 그와 윤치호는 국적과 사상을 떠나 주변 한국인들로 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즈코에게는 윤학자 라는 한국 이름이 있다. 1960년대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몇번 있었는데 언제나 치마
저고리 차림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뜨기 한달 전 장남인 윤기에게 “우메보시가 다베타이 (매실 장아찌
가 먹고 싶어)” 라는 말을 힘겹게 뱉은후 부터는 일본말만 썼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을 일본 호적 에 올렸다.
무남독녀 였던 그는 자녀들이 다우치가를 잇기 바랐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고 그
자신 한국인인 듯 살았지만,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 이었다. 한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곤경에 처한
고아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았다.
어려서 선한 사마리아인 의 우화를 들었을때, 나는 그저 착하게 살라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어른이
되어서 그 우화의 청중이 유대인이었고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증오하고 경멸하던 민족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청중에게는 그래서 보편적 인류애 를 상기시키는 그
우화가 더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다우치 지즈코의 얘기를 처음 듣고 나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
10월 31일은 그의 생일이자 기일이기도 하다.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줄고 있지만, 선한 일본인 다우치 지즈코 의 얘기를 듣게 된 사람들에게
그의 삶은 여전히 충격 을 준다. 그의 고향인 고치시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새에 버스는 유자와시 에 도착하는지라 내려서 유자와역으로 들어가서는
시간표를 확인 한 후에 멀리 나루코 온천 으로 가기위해 먼저 신조 로 가는 기차표를 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