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장사가 잘 되어서 텅 빈 봇짐탓에 더 불안했다 봇짐이 비었다는 말은 어딘가에 봇짐을 대신할 돈이 있다는 말이었다
혼자 화적떼 우글대는 모너머 고개를 넘을 생각에 다리가 벌써부터 후들거렸다 햇밤같은 일곱 살 아들, 석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위협적인 함성이 뒷머리를 잡아챌 찰나 우악스러운 손이 소해의 팔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마중 나온 횃불이 몇몇 보이자 그는 팔을 슬그머니 놓았다
이쪽에서 보는 숲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등골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은 울울한 나무에 가려 어디론가 흩어져버리고 보이지도 않았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며 숲 가운데서 우우우웅 우우우웅 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검은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소리는 마치 마른하늘의 뇌성 소리 같기도 하고 여섯 해 전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이 입을 틀어막으며 울던 소리 같기도 했다. 소해는 길 앞에 서서 봇짐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마치 전투에 나가는 병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속곳 위에 두른 전대를 다시 한 번 만져보았다. 얼마나 야무지게 묶었는지 숨을 못 쉴 지경인데도 만져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었다.
옛날 '모너머 고개'라 불리던 부산진구 양정동 송공삼거리 일대. 현재 광장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이진우 프리랜서
오늘따라 장사가 잘 되었다. 전을 펼치자마자 양반집 규슈로 보이는 처녀 두 사람이 와서는 물건을 반이나 사 갔다. 마련해 간 베를 다 판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해의 바느질 솜씨를 익히 알고 있는 김진사 부인이 살이 쪄서 못 입겠다며 수선해 달라고 저고리 두 개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오늘은 빈손으로 모너머고개를 넘을 뻔했다. 텅 빈 봇짐은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켰다. 봇짐이 비었으면 어딘가에 봇짐을 대신할 돈이 들어있다는 말이었다. 동래전이나 부산전이나 장날 이슥해서 모너머고개를 넘는 사람은 대부분이 장꾼일 터이니 말이다.
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두 해가 넘었다. 처음엔 부끄러워서 좌판에 옷감을 내놓기만 했을 뿐 사가라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 발만 보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남편 도섭이 죽고 난 후 쥐고 있던 소작도 떨어져버리고 살길이 막막했을 때 옷에 금박자수를 놓는 자수 할미가 소해에게 장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었다.
"농사일이 힘들어도 내 땅이기만 한다면 무슨 걱정이고? 뼈 빠지게 지어서 넘 좋은 일만 시키는 거제. 그라고 이래 가느다란 석이 어메 손 가지고 농사는 어림도 없겠다. 그래도 장사는 고생한 만큼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이 있거든."
길쌈과 바느질이라면 자신 있었다. 할미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몇 달 동안 할미는 소해에게 이것저것 시장에 자리 잡는 법 하며 손님들을 상대하는 방법들을 일러 주었다. 특히 할미는 집으로 돌아올 때 모너머고개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모너머고개에 들어서면 앞이 안보일 정도로 나무가 울창해서 칼이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는기라. 거기 도적들이 어찌나 무섭고 포악한지 하룻밤에 돈이랑 물건 빼앗기는 일이 수십번이라 카이."
할미의 영웅담이 시작되었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다.
"부산장에 갔다가 밤늦게 모너머 고개를 혼자서 넘게 되었을 때 아이가. 사방이 깜깜하니 앞뒤로 사람은 안보이지. 오금이 저려서 다리는 발발 떨리지. 그래서 내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한 기다. 일행이 뒤에서 따라 오는 것맨키로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형님, 형님, 어서 오이소' 라고 외치면서 걸었다아이가. 내 뒤를 밟고 있던 화적이 일행이 뒤따라오는 줄 착각하고, 감히 정면에 나타나지 못하고 계속 따라오는 기라. 난 쉬지 않고 '형님! 어서 오이소' 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미친년 널뛰듣키 달리는데 저만큼 달래네 주막집이 보이대. 주막집까지 '사람 살려라'고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냅다 달렸는기라."
할미가 그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바로 뒤에서 화적떼가 달려들기라도 한 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모너머고개에서 화적 떼를 만나 가지고 있던 돈과 물건을 몽땅 빼앗겼다는 말이 종종 풍문으로 들렸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니 장사치들에게 모너머고개는 절벽 앞에 놓인 외나무다리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장날이면 할미랑 함께 부산전에 들락거렸다. 밤길이 무섭기는 해도 할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형님, 어서 오이소! 하고 외칠 수 있는 할미의 용기가 웬만한 남정네 못지않게 소해를 안심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보름 전 장날, 고개를 넘다가 미끄러져 허리를 다친 할미는 그예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자리를 깔고 누워버린 할미 병문안을 하고 나오는데, 자리보전한 할미 걱정보다 혼자 모너머고개를 넘을 걱정이 태산 같았다.
소해는 벌써부터 후들거리는 다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면서 오솔길로 들어섰다. 3월의 추위가 슬금슬금 바닷물 들어오듯이 몸 속으로 밀려들었다. 소해는 어깨를 떨며 봇짐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봇짐 아래 허리에 두둑한 전대가 느껴졌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석이의 해사한 얼굴이 떠올랐다. '약이라도 한 재 해 먹여야겠다'. 애비를 닮은 것인지 석이는 태어날 때부터 약했다. 고뿔을 잘 앓고 기침이 한 번 시작되면 그치지를 않았다. 제 몸이 그러한데도 올해부터는 다 컸으니 저 혼자 집을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무이 고생하시는데, 혼자서 밥 차려먹는 일이 무어 그리 어렵겠느냐고 오히려 어미를 안심시키지 않았던가. 문득 목구멍이 뜨뜻해지며 소해는 햇밤 같은 아들 생각에 크르릉 코울음을 삼켰다.
석이 생각에 잠겨 주변의 먹물 같은 어둠을 잠깐 잊고 있을 때였다. 바람도 없는데 수풀이 울렁울렁 움직이더니 스르륵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지만 빠른 발소리, 바람 많은 날 감나무이파리가 서로 몸을 쓸어대는 듯 바쁜 저 소리는, 화적떼가 틀림없었다. '형님, 어서 오이소'라고 할미처럼 목소리를 내어보려고 했지만 목구멍이 얼어붙었는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걸음을 빨리 움직이려고 해 보았지만 다리가 달달거리기만 할 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이고, 어무이. 소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와아- 화적떼의 위협적인 함성소리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해의 뒷머리를 잡아챌 듯 가깝게 들렸다. 한 손으론 봇짐을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대를 움켜쥐고 발걸음을 떼었다. 온통 얼굴을 뒤덮은 땀을 소매로 훔치며 소해는 비릿한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때였다. 웬 우악스러운 손이 소해의 팔을 낚아채더니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손아귀에서 핏줄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몸은 그 손에 이끌려 훨훨 날아가는 듯했다. 몇 번을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날 때는 아픈 줄도 몰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겨드랑이며 가슴팍을 온통 적셔놓았을 때에야 벌떼처럼 왕왕거리던 화적떼들의 소리가 차츰 차츰 멀어져갔다.
홰바지에 다다르자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제야 소해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막혔던 핏줄이 퍼지기라도 하듯 손목에서부터 어깨 근육까지 실금 같은 줄이 지나가며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소해는 손을 거두며 상대를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을 정면으로 본 적은 없으나 그 남자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지난번 장날에 소해 서너 발짝 뒤를 따라오며 묵묵히 걷기만 하던 남자. 무서움에 뒤를 돌아보자 앞서 가라며 훠이훠이 손을 내젓던 남자. 처음엔 혹시 화적이 아닐까 해서 치마가 휘말리도록 빨리해서 걷느라 생목이 올라올 지경이었으나 어험 어험 헛기침을 하며 좌쪽, 우쪽 하며 잘못 든 길을 가르쳐주기까지 하던 남자. 남자는 홰바지에 이르러서는 어디론가 훵하니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두 번씩이나 신세를 지다니…. 소해는 주춤주춤 남자의 등짐을 따라갔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횃불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어룽거리는 속에서 남자의 등짐은 횃불에 타버리기라도 하듯 푸시시 어느새 또 사라져버렸다. 소해는 잔상으로 남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기라도 할 것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늘 아팠던 남편은 농사일을 하는 것도 힘에 부쳐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집에만 들어오면 축 늘어져 방바닥에 등을 붙이기가 일쑤였다. 자신의 병약함을 한탄하며 자주 우울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아들 석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자신이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울음을 터뜨려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남편의 마음과 몸에 소해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남편은 늘 허약함과 병치레에 급급한 자신에게 골몰하느라 소해의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준 적이 없었다.
소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았다. 남자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팔목에는 시뻘건 자욱이 채찍처럼 남아 있었다. 부끄럽고 상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해는 남자의 손이 남겨둔 자국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치솟듯 올라왔다. 이렇게 낯도 모르는 남정네를 그리워하고 있어도 될까. 남편이 죽고 나서 혼자된 삶이 처량해도 꾹꾹 참으며 사람들 앞에서 속울음만 삼켰는데, 장마 때 터진 둑처럼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울음이 으흑으흑 토해져 나왔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소해는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눈물로 얼룩진 소해의 얼굴 위로 단풍잎 같은 손바닥이 내려앉은 것은 그 때였다. 뭐가 그리 서러워서 눈감고도 찾아낼 수 있는 저 작은 몸뚱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일까. 석이의 손이 소해의 볼을 서투르게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어무이, 와 이라고 계십니꺼?"
한 손에 제 키만한 횃불을 들고 선 석이가 얼굴 가득 걱정을 풀어놓은 채 제 어미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더러 홰바지로 나오기는 해도 어른과 함께였지 석이처럼 어린 아이가 저 혼자서 어둔 밤길에 마중을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소해는 화들짝 놀라며 아들에게서 얼른 횃불을 받아 들었다.
"무겁다, 횃불 이리 도고. 어미 혼자 충분히 갈 수 있는데 위험하게 밤길을…, 도대체 얼마나 걸어온 기고?"
석이가 비죽 웃었다. 횃불에 어룽거리는 석이의 얼굴은 마치 어린 부처처럼 해사하고 맑아 앞에 앉혀놓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석이가 소해의 손에 들린 봇짐을 빼앗듯이 챙겨들었다. 되었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소해의 봇짐을 한손에 든 석이가 다른 손으로 소해의 팔목을 꼭 잡아 쥐었다.
"다시는 이라지 마라. 니가 이라몬 어미가 걱정이 돼서 장사를 맘 편히 할 수 있겠나."
"어무이 뭔 소립니꺼. 저 이제 다 컸심더."
"니가 커기는 뭘 다 커? 이제 일곱 살짜리가…."
"아부지는 일곱 살 때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20리 길을 걸어서 할무이 약도 지으러 갔다메요?"
"그걸 니가 어찌 아노?"
석이가 다시 비식 웃었다. 횃불 아래 드러난 석이의 미소는 영판 도섭의 것이었다. 도섭이 웃을 때 꼭 저렇게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눈웃음치며 소해를 향해 미간을 찡등그릴 땐 소해의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달아올랐다.
"아부지가 그랬심더. 돌아가시기 전에 내보고. 니가 어무이 지켜드리야 한다. 어데를 가든지 어무이 팔목을 꼭 잡아쥐어라…. 니 어무이는 손가락 마디가 약하고 부러질 것 같아서 험한 일은 하지 못한다. …앞으로 그 약한 손으로 우찌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느냐, 항상 니가 어무이 옆에 꼭 있어라."
석이가 쥐고 있는 팔목이 뜨끈하게 데워지는 느낌이 왔다. 석이의 작은 손 사이로 아직까지 나있는 팔목의 붉은 손자국을 소해는 아릿하게 바라보았다. 저 손이 도섭의 손이었던가, 저것이 석이의 손이었던가. 횃불 때문인지 크렁하게 차오르는 눈물 때문인지 자꾸만 길이 얼룽이며 헝클어져 보여 소해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칫거려야 했다. 제 어미가 그런 줄도 모르고 석이는 제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소해의 팔목을 힘주어 꽉 그러쥐고 있었다.
박향 소설가
▶작가 약력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제9회 세계문학상 수상
-소설집 '영화 세 편을 보다' '즐거운 게임'
-장편소설 '얼음꽃을 삼킨 아이' '에메랄드궁'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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