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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sunland
유성룡 '징비록' http://blog.naver.com/khj0614/221778509239
[책으로 보는 세상]
"적의 침략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임진왜란 전후 7년간 생생한 기록
이순신 활약, 피폐해진 백성의 삶… 당시 상황 객관적으로 표현했어요
전쟁 직감해 대비하자 주장했지만 침략 막지 못한 참회·반성 담고 있어
여러분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떨지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인 우리에게 전쟁은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소재로만 생각될 거예요. 그러나 과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탓에 주변 강국에 의해 잦은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죠.
최근 한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징비록'이라는 드라마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었던 선조 임금과 조선 조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선조 임금은 일본의 침략을 스스로 막아내려 하지 않고, 명나라에만 의존했어요. 또한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세자 광해와 바른말을 하는 대신들을 경계하는 데 바빴지요. 실제 선조 임금은 심신이 약한 편이었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조선을 유린하고 약탈하였으니 의지할 곳 없고 도망갈 곳 없는 백성은 굶주림 속에서 헤매야 했고 일부는 일본에 끌려가기도 했어요.
"3도를 짓밟은 적은 가는 곳마다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죽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을 붙잡기만 하면 코를 베어 위세를 부렸던 까닭에 그들이 직산에 도착할 무렵부터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드라마는 실제 '징비록'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7년간의 전란을 겪고 나서 이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담고 있어요. '징비(懲毖)'라는 말은 '뉘우치고 조심하다'는 뜻으로 중국의 고전인 '시경'에서 유래했어요. 징비록의 저자인 유성룡(1542~1607)은 서문에서 "시경에 '지난날의 잘못을 거울삼아 후일에 일어날 환란을 경계하다'(예기징이비후환, 予其懲而毖後患)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곧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라고 밝혔어요. 그는 국가의 중책을 맡았음에도 전쟁을 막아내지 못한 데 대해 반성하며 이 땅에 왜란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책을 썼다고 해요.
▲ 그림=이병익
그렇다면 유성룡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안동 하회마을에서 자란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대사헌과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고, 임진왜란 극복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어요. 유성룡을 비롯한 몇몇은 당시 동북아의 불안한 정세와 일본의 전쟁 기운을 알고 있었다고 해요. 당시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처럼 유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하여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자고 역설했습니다.
"매사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경우라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 만일 지금 준비하지 않는다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로 마음먹고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수입해서 병사를 훈련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심복을 파견했는데, 사신으로 온 요시토시는 매우 거만한 태도로 조선의 병사들을 비웃었다고 해요. 이렇게까지 전쟁의 낌새가 있었음에도 조선은 제대로 방비를 하지 않은 것이죠.
'징비록'에서는 이렇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의 일, 그리고 정유재란의 발발과 7년간의 전란이 끝나는 날에 이르는 중요한 사건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어요. 백성의 딱한 사정이라든지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와의 갈등 등 유성룡 스스로 보고 들은 바를 소상히, 그리고 상당히 객관적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또한 '징비록'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성으로 돼 있어 문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훌륭한 재상이었던 유성룡의 재능과 인품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랍니다.
#이야기
과거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통해 육체적·정신적 억압을 받으면서도 우리나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임진왜란에 이어 또 한 번 일본에 침략을 당해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에는 특히 뛰어난 독립투사가 많았어요. 그중 '백범일지'를 쓴 김구 선생은 나라의 군사적 힘보다는 문화적 힘을 강조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원도 부족하고 영토도 작은 나라에서 똑똑한 사람이 많아야 미래에 더 부강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서로 하는 말은 달랐지만 유성룡과 김구의 나라 사랑은 모두 애틋했어요. 백범일지에 담긴 김구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적의 외침을 꿋꿋이 물리치며 나라를 지켜온 조상 덕분이에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하는 공부나 해야 하는 일들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도록 노력해보세요.
김대근·한우리독서토론논술 선임연구원
'징비록' 1647
저작자문화재 지정창작/발표시기성격유형권수/책수분야소장/전승
유성룡 |
국보 제132호 |
조선 |
실기 |
문헌 |
1책 |
역사/조선시대사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
요약 ; 조선시대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실기.
서지적 사항 ; 16권 7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책은 1969년 11월 7일에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징비(懲毖)’란 『시경(詩經)』「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이 책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간의 기사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이다. 그리고 외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손자가 조수익에게 부탁해 1647년(인조 25)에 간행했으며, 자서(自敍: 자신이 쓴 서문)가 있다.
한편 처음 간행은 1633년(인조 11) 아들 유진(柳袗)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할 때 그 속에 수록했다가 10년 뒤 다시 16권의 『징비록』을 간행한 이후에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설도 있다.
책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 관계에 있어서 교린사정(交隣事情)도 일부 기록했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단초(端初)를 소상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징비록』은 16권 본 이외 이본(異本)으로 한 종류가 있다. 『근포집(芹曝集)』·『군문등록( 軍門謄錄)』을 제외한 『징비록』 본문과 『녹후잡기(錄後雜記)』만으로 된 2권 본(二卷本)이 있는데, 간행 연대의 선후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쓴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으니, 임진년[1592(선조 25)]에서 무술년[1598년(선조 31)]까지의 것으로 모두 약간의 분량이다. 이에 따라 장계(狀啓: 관찰사나 왕의 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올리는 글)·소차(疏箚: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차자)·문이(文移: 상급 관청과 하급 관서 사이에 오가는 공문) 및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본 2권은 내용이나 체재가 결본(缺本)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초간 『징비록』본에 자손들이 『근포집』과 『군문등록』을 빼놓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은 『징비록』 2권, 『근포집』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 2권 및 『녹후잡기』로 되어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록한 것으로, 저자의 손으로 된 관계 문서가 붙어 있다.
『근포집』은 저자가 올린 차자(箚子) 및 계사(啓辭)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3년(선조 26)까지 종군(從軍)하는 동안의 장계를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군문등록』은 1595년(선조 28)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저자가 도체찰사로 재임할 때의 이문류(移文類)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와 자발(自跋: 자신이 쓴 발문)이 들어 있다. 『녹후잡록』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저자가 듣고 본 사실들을 수필 형식으로 기록한 글이다.
1695년(숙종 21)에 일본 교토[京都] 야마토야[大和屋]에서 중간(重刊) 되었으며, 1712년(숙종 38)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종가의 소장본을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는 제목으로 영인했으며,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서애집』 끝에도 영인되었다. 『광사(廣史)』 3집에는 『징비록』과 『녹후잡기』가 합쳐 4권으로 수록되어 있다.
1957년과 1958년에는 이민수(李民樹)의 번역이 『현대문학』 제3·4권에 연재되었고, 1975년에는 이동환(李東歡)이 『징비록』 1·2권과 『녹후잡기』를 번역해 삼중당(三中堂)에서 출간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성룡은 이 책자를 가리켜 “비록 볼만한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의 위치나 책의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임진 전란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유성룡 柳成龍
출생사망
1542년 |
1607년 |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고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여 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했으며 군대 양성을 역설했다.
저서로는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라는 말처럼 유성룡은 나라가 어지럽고 난리가 날 때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성룡은 뛰어난 학식과 지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혼란의 시대에 병조 판서, 영의정을 두루 거치고 도체찰사로 전쟁의 최전면에 나서 위기의 조선을 지켜 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에게도 너그럽고 온화한 성격, 인재를 발탁하는 눈 그리고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화합과 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리더십 등으로 당시 많은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노년에 자신이 가진 세 가지 한(恨)을 기록했는데,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 자리에서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 도(道)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하니 겸허하고 공손한 삶의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유성룡
유성룡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柳仲郢)과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부터 《대학》을 읽을 정도로 영특했고, 스물한 살부터는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에게서 수학했다. 책을 들고 뒤따라 다니며 궁금한 것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유성룡을 보며 이황은 그가 장차 나라를 위해 크게 쓰일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는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출사했다. 문서를 맡아 보는 권지부정자 등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 좌랑을 지내면서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명나라에서 그는 태학(太學) 유생들의 학문적 오류를 바로잡아 주어 유생들의 우러름을 받을 만큼 학식이 깊었다.
부제학을 지내던 1581년, 그는 〈변방방위책 5개조〉를 올렸다. 첫째 화(禍)의 근원을 막을 것, 둘째 싸우고 지키는 규정을 정할 것, 셋째 오랑캐의 정세를 살필 것, 넷째 군량을 충분히 보급할 것, 다섯째 황정(荒政)을 닦을 것 등이었다. 유성룡이 이 방위책을 만든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연 이이가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율곡의 《율곡전서》에도, 반대했다는 유성룡의 《서애집》에도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성룡의 이런 의견은 반대파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앞일보다 당파싸움에 열을 올리는 당쟁을 피해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는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 예조 판서 등을 거듭 제수하며 그를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러나 선조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결국 조정으로 돌아와 1584년에 예조 판서, 1590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일본은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은근히 조선을 압박해 왔으나 조정은 계속되는 당파싸움으로 이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는 동인에 속해 있었지만 상대 당파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뉠 때도 그는 온건파인 남인에 속했다.
위기감을 느낀 유성룡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일본의 상황을 확인해 볼 것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첨지 황윤길(黃允吉)과 사성 김성일(金誠一)을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로 선발하고 전적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사절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1590년 쓰시마 섬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안내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절단을 만나 주지 않아 몇 달을 기다린 끝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었고, 매우 불손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 김성일은 동인이었는데, 당파가 다른 만큼 조선으로 돌아와 보고한 내용도 정반대였다.
동인은 공연히 민심만 소란해질 수 있다며 전쟁 준비를 반대했고 서인은 하루라도 빨리 전란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신료들은 팽팽히 갈라져 연일 치열하게 서로의 입장만을 주장했다. 유성룡은 비록 동인이기는 했으나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통신사가 가져온 일본의 국서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 등의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반신반의했다. 유성룡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덕분에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성룡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권율을 의주 목사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추천했다. 특히 정읍 현감이라는 낮은 자리에 있던 이순신을 무려 7품계나 올려 기용하자 조정의 반대가 엄청났다. 벼슬을 물리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유성룡을 믿었던 선조의 결단에 대신들은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또한 당시 방위 체제인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진관(鎭管) 제도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진관 제도는 전국 요지에 주진(主鎭)을 설치하고 아래에는 거진(巨鎭)을 두며 그 아래 다시 여러 진을 소속시키는 형태의 방위 체제였다. 이것은 전쟁 같은 비상시국에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삼남 각 도에 성을 수축하고 성벽을 견고히 할 것도 지시했으나 관료들이 간과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유성룡은 혼자 동분서주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이 배 700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은 부산진성으로 몰려들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유성룡에게 병조 판서와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까지 맡겼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의 기세를 막을 수 없어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피란을 떠났다. 유성룡은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란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도착한 후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2년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일본의 주력 함대를 대파했고, 명나라가 4만 3,000여 명의 대군을 출병시켜 평양을 수복했다. 이 공로로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복귀해 다시 전란을 지휘했다. 그러나 일본의 술수로 이순신이 파직되면서 전세는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원균의 군대가 참패했고 일본군은 다시 공주와 진천까지 이르렀다. 유성룡의 간청으로 이순신이 복직되고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강화 협정이 전개되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철병할 것을 유언하고 숨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후퇴를 결정했으나 퇴로를 찾지 못하던 중 이순신이 명나라의 진린(陳璘)과 연합해 이들을 궤멸시켰고 7년간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전란이 지나가자 조정에서는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 유성룡은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고향인 하회로 돌아온 그는 독서와 저술로 말년을 보냈다. 이때 쓴 책이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는 중국 고전인 《서경》의 ‘징전비후(懲前毖後)’에서 따온 말로 ‘미리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하여 훗날의 환란을 대비한다.’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에 임진왜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7년간의 사실을 기록했다. 더 이상 임진왜란과 같은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징비록》을 저술할 당시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지만 거절했다.
그가 65세로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비어 있는 그의 서울 집으로 달려가 목 놓아 울었다. 또 가난한 그의 살림을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은 쌀이며 삼베를 모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