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타셨던 나귀)
나귀는 단단한 굽을 가진 말과의 동물로써 말에 비해 몸집이 작고 갈기가 짧으며 귀가 길고 꼬리털은 짧은데,
꼬리털은 꼬리 끝 쪽으로 절반에만 총채 모양으로 나 있습니다.
나귀는 굽이 작고 뾰족해서 말보다 발걸음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에 매우 많은 울퉁불퉁한 산악 지형에서 이동하기에는 말보다 더 적합한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들 나귀가 어리석고 고집 센 동물이라고 말하지만, 나귀는 지능이 실제로는 말보다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참을성이 있고 지구력이 강한 동물이라서 오래전부터 나귀(Equus asinus)를 힘들고 어려운 일뿐만 아니라
짐을 나르는 운송 수단으로 많이 유용되었던 동물입니다.
(출애굽기 13:12~13) “여러분은 처음 태어난 것을 다 여호와께 바쳐야 합니다.
짐승들의 처음 태어난 것들도 다 여호와께 바쳐야 합니다.
처음 태어난 모든 나귀는 양으로 대신해서 바칠 수 있습니다.
나귀 대신 양을 바치기가 싫으면, 나귀의 목을 꺾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 중에서 맏아들은 다른 것으로 대신해서 바쳐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나귀는 돼지와 마찬가지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습니다.
나귀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지만 부정한 동물로 취급되었던 것은 나귀가 말과에 속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위기 11:1~8)
그러나 나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유용한 동물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각 가정에서 많이 기르고 있었던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첫 번째 태어난 나귀를 살리기 위해서 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 나귀의 목을 꺾어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나귀와 같은 부정한 동물을 살리기 위해서 정결한 양을 제물로 바쳐져서 그 나귀의 생명을 대신하여 양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정결하지 못하고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서 피 흘려 죽으신 은총이 없었다면 “나귀의 목을 꺾는 것과 같은” 죄의 심판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1: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건너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가면, 지금까지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이리로 가지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러십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필요하시 답니다. 곧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나귀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운 동물로 묘사되었는데,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겸손의 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순종' 상징…출애굽을 도운 짐승
산길을 잘 다닐 수 있는 나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귀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을 지고 그들과 함께 출애굽을 도운 짐승이
바로 나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는 부정한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을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출 34:20)
뿐만 아니라 나귀는 자신의 주인이 주는 먹이가 아니면 먹지 않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순종의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귀는 발목이 아주 강해서 울퉁불퉁한 산지의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에서도 잘 걷습니다.
그리고 나귀는 지구력 면에 있어서도 말보다 더 강합니다. 나귀는 75 Kg의 짐도 거뜬히 싣고 산길이라도 갈 수 있어서
산지가 많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최고의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사람들과의 전투에서만 총 6만 1000마리의 나귀를 전리품으로 취한 사실을 볼 때,
틀림없이 아주 많은 수의 나귀를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민 31:3, 32-34)
또 성경에 자주 나귀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나귀가 없는 집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어에서 “나귀 같은 사람”은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으며, 어리석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충성되고 우직한 나귀는 때때로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왜 누가복음의 기자는 구유 통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표적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인간들을 위하여 이 세상으로 오신 그것부터 “겸손”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오신 것이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 상징성으로 인하여 “구유 통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유 통에 누우셨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상징적인 개념을 통해서 보자면 “겸손과 순종”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말구유이고 마구간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서에서 말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전쟁”, “정복자”, “교만” 등인데 반하여 나귀는 겸손과 순종,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말구유가 아니라 나귀의 여물을 담는 구유였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말은 이집트로부터 수입한 동물이었으므로 일반 가정에서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일반 사람들은 나귀를 교통수단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누이셨다는 이야기를 만약에 1세기 당시의 유대 크리스천들이 들었다면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유라는 것은 보통 나귀와 양의 구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순종의 종”으로 오셨다는 유대인 식의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유가 등장하는 구절들은 일반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해에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의 환영을 받았는데 사실은 이러한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으로 “승리의 입성(Triumphant Entry)”을 하는데 당연하게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모습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뒤뚱뒤뚱 들어오는 모습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슥 9: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말과에 속하는 포유류 동물로서 나귀의 한글 표준이름은 “당나귀(Equus Asinus)”입니다.
당나귀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키가 100~150 cm정도이며, 몸무게 100~200 kg정도입니다.
가축화된 당나귀는 물건들을 운반하는 수단에 사용되기 위해서 BC 4,000년경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가축화가 된 동물입니다.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지방에서도 이 야생 당나귀를 가축화했고, 아시아 야생당나귀는 소아시아를 경유하여 그리스, 이집트로 옮겨 지중해 연안까지 분포하게 되었습니다.
영어의 나귀(Ass)는 작은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 아시누스(asinus)에서 파생되어 켈트어(Celtic)를 통해 파생된 단어로 추정되는 매우 오래된 단어입니다. 지금은 당나귀(donkey)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32:15)의 영어 Colt는 말에 속하는 어린 짐승을 말한 것인데 “약대와 그 새끼”라고 표현된 것 이외에는 모두 “어린 나귀”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나귀를 연자 맷돌(grindstone)을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일(마 24:41)에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이사야 21:6~7) “주께서 내게 이처럼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파수꾼을 세워 그에게 본 대로 보고하라고 하여라.
전차나 기마병을 보거나, 나귀 탄 자나 낙타 탄 자를 보거든,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하여라.’”
이 말씀에서 “나귀 탄 자”를 KJV(King James Version)는 “나귀들의 병거(chariot of asses)”로 번역하였으며,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성경은 “나귀들을 탄 사람들(riders on donkeys)”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히브리인들의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는데 무기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사야 1:2~3)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내 자녀를 키우고 길렀으나, 그들이 나를 배반했다.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의 여물통을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베드로 후서 2:15~16) “옳은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진 이들은 발람의 길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은 나쁜 방법으로 얻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나귀는 말 못하는 짐승이었지만,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예언자의 미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
(민수기 22:2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게 하셨습니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시는 겁니까?’”
복음서 외에 신약에서는 단 한차례 나귀를 언급하고 있는데, 베드로 사도가 구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때 베드로 사도는 발람 선지자의 사건을 하면서 인용한 말씀인데 이 말씀은 구약의 (민수기 22:21~33)에 기록되었던 말씀입니다.
욥기에서는 나귀의 울음소리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욥30:7에 욥은 자기를 조롱하는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을 나귀에 빗대어 말하기를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길들지 않은 야생 나귀는 들이나 광야에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나귀를 “들 나귀”라고 하는데,
이 발이 빠른 들 나귀는 들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야생 나귀(히브리어 ; 페레)”입니다.
이 야생 나귀는 당시 메소포타미아를 중심하여 아라비아 지역에서 많이 서식하였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우상 신들을 따르는 모습을 들 암나귀가 성욕이 동하여 헐떡거림과 같다고 표현하였으며(렘 2:24), 이스라엘 땅에 있을 가뭄에 대하여서도, 들 나귀가 나무 없는 산에서 풀을 구하지 못해 헐떡이는 모습과 같다고 묘사하였습니다(렘 14:6).
호세아 선지자도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임자 없는 들 나귀처럼 아무런 돕는 손길 없이 앗수르로 끌려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호 8:9)
나귀가 죽으면 그냥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리고 말았는데, 이러한 관습을 빗대어 하나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인, 교만하고 믿음 없는 여호야김이 비천해질 것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2:19) “예루살렘 백성들은 그를 나귀 묻듯이 파묻어 버릴 것이다.
또한 그를 끌고 가서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창세기 16:5~12) “그러자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고통을 겪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내 여종을 당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임신을 하더니
나를 깔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누가 옳은지 여호와께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했습니다. “하갈은 당신의 종이니 하갈에 대해서는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사래가 하갈을 못살게 굴자, 하갈은 집에서 도망쳤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사막의 샘물 곁에 있는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샘물은 술로 가는 길가에 있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했습니다.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치는 길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 말했습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의 말을 잘 들어라.”
여호와의 천사가 또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
천사가 또 말했습니다.“네 몸 속에 아기가 있으니,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스마엘 이라 하여라.
이는 여호와께서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들 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대적할 것이며, 사람들도 그를 대적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과 마주 대하여 살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씀하였던 “이스마엘과 그 후손이 들 나귀 같으리라”는 예언은 3,000년이 넘는 세월 가운데
정착 생활을 단념하고 문명 생활을 떠나 약대나 말과 나귀를 타고 광활한 자연을 마음껏 누비면서 난폭하면서 거칠게 살아가고 있는 아랍계의 베두인(Bedouin)들에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노새 (Mule)
노새는 말과 함께 왕위에 오르던 왕들이 타던 동물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초기 왕국 시대에는 말을 타는 것보다 노새를 타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으며, 말이 노새보다 더 비쌀 것 같지만 노새가 말보다 2배 정도 더 비쌌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국 시대의 후기에 들어서면서 말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지만 초기 왕국 시대에는 신명기의 계명에 따라
말을 소유하기 꺼려하였고 또한 말도 그리 흔하지 않았지만 노새는 왕이 타기에 걸 맞는 짐승으로 여겨졌습니다. (신명기 17:16~17)
노새는 암컷 말과 수컷 나귀를 교배하여 탄생한 종자입니다.
그러므로 노새는 말과 나귀의 장점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노새는 소아시아의 흑해 연안 사람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량된 동물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노새는 이스라엘의 산지, 경사진 비탈길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다녔으며, 몸이 튼튼하여 거친 음식물도 잘 소화하여 내었습니다.
그렇지만 노새는 암컷 말과 수컷의 나귀를 교배하여 탄생한 짐승이기 때문에 번식력이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서로 다른 동물의 교배를 금하였으므로(레 19:19) 노새를 유대인들의 땅이 아닌 외부에서 수입하여 왕실을 위한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던 압살롬의 최후(삼하 18:9)는 2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왕이 타는 노새를 타고 상수리나무 밑을 지나다가 상수리나무의 굵은 가지에 머리가 걸렸는데
그 때 노새는 그대로 달려 나가 버려서 압살롬은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요압 장군은 압살롬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압살롬이 머리가 걸려 나무에 매달려 있었을 때, 하나님은 노새를 통하여 압살롬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셨습니다.
두 번째는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였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첫댓글 나귀 같은 부정한 짐승이 타고난 본성으로 살면 들나귀처럼 취급을 받고, 거룩한 이에 의해서 길들어지면(겸손하여지면) 주님이 부리는 거룩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을 잘 대비시키고 있는 사람짐승을 나귀에 빚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목이 꺾이지 않았거나 거룩한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모르면 거름(쓰레기)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도 합당한 처분이겠지요.
왕상1:38-39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가서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하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에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형제님, 노새를 읽다보니 좀 궁금해지는데요~
레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솔로몬의 왕의 등극식 때는 다윗의 노새를 탄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노새는 암컷 말과 수컷 나귀를 교배하여 태어난 잡종이면서 1대만 낳고 번식이 안되는 특성이 있다고 하거든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요~
율법으로는 나귀나 노새나 부정한 짐승인데, 어떤 자의 짐을 메느냐? 그것은 누구의 손에 붙잡혀서 길들어지느냐? 문제입니다. 세상의 군왕이라면 자신의 권세와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군마를 타겠지만, 다윗의 겸손(낮아지고 길드려짐)은 자신을 낮추는 본으로 부정한 짐승을 타는 것은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나귀를 타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세상적으로 종교적으로 세워진 에루살렘 성전을 거처로 쉼의 처소로 삼지 않고, 버려진 자들인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집이 거처가 되고 쉼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겠지요. ~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다 자부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실상을 티끌과 같은 존재로
@하나이어라 부인된 사람은 내가 나귀였고, 내가 노새처럼 부정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에 쌓인 부정한 짐승을 보고 내가 어찌 저런 부정한 짐승을 잡아 먹을수있겠습니까? 반문하는 것처럼 ~ 스스로 율법적으로 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고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부정한 존재로 취급하여 업신여기는 율법사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같은 짓을 어연중에 행할 수 있습니다. ~ 스스로 부정한 존재로 말할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로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 무슨 판단이 앞서기보다는 "나 같은 인간"도 짐꾼으로 쓰시는데, 하물며 이 형제와 자매야!! 더 귀하게 하시지
@하나이어라 주님은 율법으로 정하다고 분별하는 조문에 속에서 정한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부정하다고 하는 것의 목을 꺾어서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성이 다스려진 짐승이 바로 거듭나서 주님을 태우고 다니는 수레가 될 때 ~ 충성된 종아!! 이제는 종이라 하지 않고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하나이어라 아멘입니다. 형제님~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참으로 저도 아멘^^~
지체들의 증거와 교통을 통해 멀리서도 기쁨 위로 격려를 얻습니다.^^
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이사야 56:4-5
저도 참견좀 해보자면^^ 노새의 고자의(번식않됨) 기능 양면이해가 주님의 말씀만 전달 (바울사도)선포와 자기길로가는 자의(일생)
무자손의 징벌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