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옥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을 특별히 선정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 중에 한 권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가 아닐까 싶다. 과거 정치 강연을 할 때면 가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고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를 언급하곤 했다.
“나는 그에게서 직접 배운 바는 없지만 항상 그를 마음의 스승의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만큼 여러 차례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관과 역사철학으로 정립해 왔다라고 밝혔다.
김대중은 부인에게 보낸 ‘옥중서한’에서 토인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관계에서 파악한 역사철학이 나에게 많은 깨우침과 신념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아시다시피 나는 그의 저서를 거의 읽었는데, 그의 역사파악의 기본 시점(視點)은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문명의 발생ㆍ쇠퇴ㆍ붕괴가 결정되어 가는 거대한 드라마라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에게서 직접 배운 바는 없지만 항상 그를 마음의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과 친지들이 이 유례없는 고난의 도전에 처해서 우리의 후회없는 응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토인비의 교훈을 중심으로 내 의견을 적어 봅니다. 첫째는 약한 내 자신의 확신을 위해서, 다음에는 당신과 자식들의 도움을 위해서입니다. (주석 8)
그는 토인비가 영어로 3천 쪽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인류문명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틀로 해석한 데 크게 감명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의 개시 이래 지상에 발생한 문명을 20여 개로 분류하면서, 문명이 성장ㆍ쇠태ㆍ해체ㆍ사멸의 과정에서 공통적인 리듬과 유형적인 현상을 발견하고, 또한 문명간의 접촉과 계승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토인비는 여기서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사관을 제시한다.
토인비의 문제의식은 문명의 운명, 특히 서구문명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면서,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지상문명의 배후에서 신의 의지를 예감하는 종교관과 결부되어 있다. 김대중이 이 책에 빠져든 것도 이와 같은 토인비의 역사관에 공감한 까닭인 듯하다.
도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응전을 한다고 해서 그 당대에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이래 인류의 죄악사에 대한 예수님의 응전은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당대에는 참담한 실패로 귀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우리의 일시적인 환각이었을 뿐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 종래의 징벌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하느님으로서의 진리 설파, 십자가상에서의 인류죄악의 대속, 죽음에서의 부활로 이루어진 일련의 응전은 인간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상최대의 승리였습니다.
우리 역사에서의 사육신ㆍ최수운ㆍ전봉준ㆍ안중근ㆍ윤봉길ㆍ이봉창ㆍ기독교 박해의 순교자들 모두 그 당대의 성공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국민 누구도 그들이 자기 당대의 최고 성공자였던 신숙주나 이완용보다 실패한 이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그들의 이름이 없다고 가정할 때 그것이 얼마나 우리 역사를 적막한 황무지로 만들며, 얼마나 우리의 긍지를 빼앗는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응전은 운명적으로 유한한 자기당대에서의 성패에서 결승의 깃발을 꽂는 근시안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의 양심에 충실한 응전자에게는 일시적인 좌절은 있어도 영원한 패배는 결코 없다는 신념속에 사는 것만이 우리의 생의 태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석 9)
김대중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사관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정립한다.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극한과 시련을 겪으면서 거기에 응전할 수 있는 철학과 신념의 근거가 바로 토인비의 문명사관이 “궁극적으로 지상 문명의 배후에서 신의 의지를 예감하는 종교관과 결부되어” 있다는 그 정신이 바로 김대중 자신의 역사관과도 부합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김대중은 감옥에서 부인과 세 아들 그리고 며느리에게 편지를 쓰고 아직 어린 손녀들과 친지ㆍ동지들의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많이 쓴 편지는 역시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동지이자 부인인 이희호에게였다. 세상의 수많은 부부 가운데서도 이들 부부처럼 부부 이상의 동지적 관계도 흔치 않을 것이다. 김대중은 인간적 극한 상황에서 신앙심으로 자신을 격려하고 가정을 지켜준 부인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시하였다.
오늘로 내가 집을 뜬 지 만 8개월이 되었소, 그동안 당신과 가족 친구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습니까? 당신에 대해서는 감사한 말뿐이오. 하느님이 돌보셔서 우리 가족과 형제들이 모두 그분 사랑 아래 모이게 되었으며, 믿음을 통해서 난관을 극복해 왔으니 크신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나는 자랑스러운 아내, 사랑스러운 자식들,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들을 가지고 있으니 참 행복하오. 형제들에게도 사랑하는 마음 뿐이오.
나는 내 운명이 어떻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 뜻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매일 기구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해도 그분을 사랑하겠소. 나는 모든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해도 그분을 믿겠소. 모든 과학자들이 그분의 부활을 조롱해도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소. (주석 10)
김대중은 1982년 3월 1일 전두환의 5공 출범 1주년 기념 대사면조치의 일환으로 무기형에서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58세의 중년에게 무기형이나 20년형의 의미는 ‘오십보 백보’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크게 생색을 내면서 ‘은전’을 베풀었다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수형 생활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문ㆍTVㆍ라디오는 여전히 금지되었다. 어느 때는 하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 사 마실 수 있도록 요청하여 교도소장이 몇 차례 이를 들어 주었는데, 안전기획부에서 알게 되면서 그마저 금지시켰다. 그럴수록 커피에 대한 마음 간절했지만 ‘금지’의 푯말은 치워지지 않았다.
수형생활 1년 쯤이 지난 1982년 1월 6일, 58세의 생일을 맞아 세 아들이 면회를 와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아비는 감동해서 편지지에 36행의 즉흥 시조를 지었다.
옥중단시
면회실 마루위에 세자식이 큰절하며
새해와 생일하례 보는 이 애끓는다
아내여 서러워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
이 몸이 사는 뜻을 뉘라서 묻는다면
우리가 살아온 서러운 그 세월을
후손에 떠넘겨주는 못난조상 아니고저
추야장 긴긴밤에 감방안에 홀로누워
나라일 생각하며 전전반측 잠못잘 때
명월은 만건곤하나 내마음은 어둡다
둥실뜬 저구름아 너를 빌려 잠시돌자
강산도 보고싶고 겨레도 찾고싶다
생시에 아니되겠으면 꿈이라면 어떨까
지난겨울 모진추위 눈물로 지샛는데
무정한 꽃샘바람 끝끝내 한을 맺네
우습다 천지이치를 심술편들 어쩌랴
내게도 올것인가 자유의 기쁜날이
와야만 할것인데 올때가 되었는데
시인의 애타는 심정 이내한을 읊었나
가족이 보고싶다. 벗들이 보고싶다
강산도 보고싶고 겨레도 보고싶다
그렇다 종소리퍼지는날 얼싸안고 보리라.(하략) (주석 11)
우리의 전통적인 정형 시조라고 하기에는 격식이나 시어(詩語)에 걸맞지 않는 표현이 적지 않지만, 한 양심수가 옥중에서 자식들의 세배를 받고 쓴 즉흥 시조라는 점, 그 마디마디에서 통절함이 배어 있다. 글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함을 느끼게 한다.
주석
8) <김대중 옥중서신(1)>, 제12신, '토인비에게 배우는 도전과 응전'
9) 앞과 같음.
10) <김대중 옥중서신(1)>, 제5신, '부활에의 확신'
11) 앞의 책, 401~4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