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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 은 역사에 대하여 | 18.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
02. 공광규 파주에게 | 19. 오세영 노래하리라 |
03. 곽재구 김치찌개 평화론 | 20. 유치환 울릉도 |
04. 김광섭 나의 사랑하는 나라 | 21. 윤동주 별 헤는 밤 |
05. 김규동 용광로에 불을 | 22. 이근모 고려인 |
06. 김남조 무명 영령은 말한다. | 23. 이근배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
07. 도종환 6월이 오면 | 24. 이길원 철조망에 걸린 편지 |
08. 박두진 청산도 | 25.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09. 박종래 우리는 하나 | 26. 이육사 광야 |
10. 변영로 논개 | 27. 전봉건 뼈저린 꿈에서만 |
11. 서정주 풀리는 한강 가에서 | 28. 정호승 백두산 |
12. 손해일 고슴도치의 사랑 | 29. 조지훈 안중근의사 찬 |
13. 송수권 풍장(風葬) | 30. 조태일 국토서시 |
14. 신경림 끊어진 철길 | 31. 한석산 나의 조국 |
15.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32. 한용운 님의 침묵 |
16. 신석정 대숲에 서서 | 33. 허영자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
17. 심 훈 그날이 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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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역사에 대하여 / 고은
우리 민족
4천년 동안이나 미완성입니다
대개 역사가들은 고려에 이르러
민족이 완성되었다 합니다
아닙니다
통일신라 통일 아닙니다
통일신라야말로 분단입니다
그야말로 종속이었습니다
깊이깊이 분열이었습니다
일제 40년
남북분단 40년
이제야말로
우리 민족 완성될 때입니다
재통일이 아니라
첫 통일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어렵습니다
이번 통일은
남북뿐 아니라
동서남북 남동동 북북서까지
구석구석 잔뿌리까지
4천년 이래 생전 처음이자
온전한 통일입니다
4천년의 미완성으로 완성합니다
추가령지구대 들국화 하나하나여
내가 그대들을 노래할 날
그날이야말로
우리 민족 크리스마스입니다
선통일이여
후통일이여
지금 잘못되면 큰 죄입니다
어린이 앞에서
애국자여 그대들은 무엇입니까.
02.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 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 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알겠군
자유를 보여주려는 단군할아버지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03. 김치찌개 평화론 / 곽재구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04. 나의 사랑하는 나라 / 김광섭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혀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05. 용광로에 불을 / 김규동
남과 북이 손잡는 날 우리는 사람이 된다
북조선 사람이 남조선 사람 끌어안고 울 때
그때 진정 사람이 된다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얼마나 설움 많은 세월을 보냈느냐고
어이어이 울어댈 때
반도 삼천리에 햇살이 퍼져
이슬 머금은 산천초목은 일어선다
웃음도 눈물도 하나로 뒤범벅되어
조선의 아들딸들은 새사람 된다
이 땅의 참주인 된다
아, 다시 사는 그 세상
돈 때문에 죽는 일도 없고
돈 때문에 괄시 받는 일이 없고
돈 때문에 거짓을 행할 일도 없는 세상에
온몸으로 누리게 된다
사랑하리라 무릎 꿇고 뉘우치리라
그러면서 천년만년 아름답게 살리라
남에서 북에서
용광로는 끓어 넘쳐
이제 같은 시각 같은 비등점에서
넘치는 쇳물을 흘릴 준비는 되었다
쇳물을 쏟아 붓자
쇳물 흘려 부어 한 덩어리가 되면
다시 흩어짐 없는 한 덩이가 되면
우리는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되고
빛나는 눈동자 껌벅이며
조국은 새롭게 일어선다
벗이여 불을 당기자 용광로에
남에서 북에서
흐르는 쇳물 쏟아부을 준비는 다 되었다
불을 당기자 더욱 세차게
이제야말로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우리들의 용광로에 불을 당기자.
06. 무명 영령은 말한다 / 김남조
나는
가고 싶던 곳 내쳐 못가고
예 와서 쓸쓸히 누웠느니라
나는
하고 싶던 말 못내 말못하고
기막힌 벙어리로 누웠느니라
포성이 하늘을 뚫는 싸움터
물밀 듯 밀고 밀어 원수를 쫓던 나날
내나라와 내겨레를 지켜야한다는
뜨거운 마음하나 솟구치는 불더미와 다를 바 없어도
칡넝쿨에 휘어 덮힌 산골 우물 모양
속 깊이 맑고 맑게 개피던생각
오가는 총탄 속에도 잊을길없어
눈아프게 삼삼히 보고 싶던 얼굴
그 사람도 나는 두고예 와서 검은 흙에 묻혔느니라
천지를 쪼개놓듯 치열한 전투에
빗발치듯 오가는 백천의 포탄
그 하나가 내 가슴을 쏘아 피 흘리던 날
마구 내 뿜는 선지피 흥건히 풀에 물들고
못 박히듯 내 생명 그곳에 멎을 때
서럽디 섧게 감기는 눈자위는
한줄기 하얀눈물 흘렸느니라
내가 죽은 후론 이름 모를 전사
이름을 모르매 새길 비문도없이
차라리 더 조촐한 내 영혼의 모습
하늘 푸르름을
이리도 시원스레 덮고 누워서
내 나라여
내겨레
내 사람아 편안하라
밤낮으로 빌고 빌며
하세월 이렇게 누웠느니라
07. 6월이 오면 / 도종환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 산천을 따라 밀 이삭 마늘 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08. 청산도(靑山道) /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09. 우리는 하나 / 박종래
사계절 조화롭게 금수강산 뿌리내린 유구한 역사
백두 한라 이어온 혈맥 단군의 후예
영원불멸의 혼불이여
오 ! 들리는가
광활한 만주벌판 우렁차게 호령하던
광개토태왕의 말발굽소리
세종대왕의 지혜 이순신 장군의 충정
대대 이어와 불덩이 되어 차오른 내조국의 얼
그러나 지금은 내 조국 내 겨레 등지고서서
오고 가지 못하는 이 아픔
이제는 오대양 육대주 넘나드는 세계가 하나인데
우리는 어이해 동강난 허리에 철조망 두르고
멈춰선 기관차의 녹슨 아우성 해방둥이보다 훌쩍 자란
무성한 들풀들만 흐느끼고 있구나
그러나 이제, 형제여 자매여!
산줄기 실개천이 어우러져 도도하게 흐르러
기적 이룬 민족의 젖줄 저 푸르른 물줄기 한강
은어 황어 노니어 은빛 금빛 푸르게 건져 민초의 한을 씻는다
봄바람은 서서히 뼈 철망 속 갈대숲에서 피어난다
여전히 하나인 하늘에 비구름도 새들도 오고 간다
그래 가리지 말자 남과 북 우리는 하나다
반세기 넘게 누운 세월 깨워 티 없이 맑게 씻어버리자
우리, 이제 손에 손 맞잡고 가슴 활짝 열고 달려 나가자
억압의 삼십육년 강점기에도
안중근의사는 육혈포로
유관순열사는 태극기로
윤동주시인은 펜으로 지켜온 이 나라
그 숭고한 혼 불 살려 힘 모아 줄달음치는 날
우리 조국 온 누리에 으뜸 되리라.
10. 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11. 고슴도치의 사랑 / 손해일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지만
껴안을수록 아프구나
남북분단 60여년
입버릇처럼 통일과 화합을 외치고도
이념의 날선 가시
속절없이 상처 주고받는
고슴도치의 사랑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젖은 숲 덤불에 웅크린 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자존의 기 싸움
미움이 깊어질수록
어쩌자고 자꾸 그리움도 쌓이는데
이정표 스치듯 빠른 물살에
더욱 멀어지는 뒷모습
우리 이제 다시는
피 흘리지 말아야 하리
번뇌를 삭발하듯 곧추선 가시를 접고
비무장지대 황토밭 고랑이나
무성한 억새밭에
한 바람 훈풍으로 섞여야 하리
12. 풀리는 한강가에서 / 서정주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럭이같이
서리 묻은 섯달의 기럭이같이
하늘의 어름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밈둘레나 쓱니플 같은 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보라함인가
황토 언덕
꽃 상여
떼 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13. 풍장(風葬) / 송수권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는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
입으로 불어 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선 웬수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이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14. 끊어진 철길 / 신경림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는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15.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6. 대숲에 서서 / 신석정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버레소리 젖어 흐르고
버레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드라
성글어 좋드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드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17. 그날이 오면 / 심 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8.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9. 노래하리라 / 오세영
내 아름다운 조국
대한민국을 노래하리라
수 억 만 년 전
까마득히 하늘이 처음 열리고
이 땅이 생명의 감동으로 전율하던 날
지구의 동쪽, 찬란히 해 뜨는 곳에 한
목소리가 울렸나니
그로 하여 한 민족이 태어났고
그로 하여 한 세계가 깨어났노라
아아, 한국어
그가 꽃을 부르면 꽃이 되고
그가 구름을 부르면 구름이 되고
그가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사랑을 부르면 또 사랑이 되었나니
수 천 년
이 신성한 땅의 주인들은
그 어느 곳보다 밝고, 아름답고 순수하게
그들의 생존을 영위해 왔다
비록
태양의 율법이 그러한 것처럼
역사의 배면엔
가끔 엷은 그림자가 드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꽃이 가장 꽃답게 피고
짐승이 가장 짐승답게 뛰놀고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 왔던 땅이
이 말고 세상 그 어디에 또 있으랴
지금 세계사는
고단한 역사의 능선에서 밤을 맞고 있으나
우리는 신성한 우리의 모국어로 이 밤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세계를 새롭게 명명할 것이다
아아, 한국어
그 순결한 언어로
내 아름다운 조국
대한민국을 또 노래하리라.
20. 울릉도 / 유치환
동쪽 먼 심해선(沈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만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沈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21. 철조망에 걸린 편지 / 이길원
어머니,
거친 봉분을 만들어 준 전우들이
제 무덤에 철모를 얹고 떠나던 날
피를 먹은 바람만 흐느끼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총성은 멎었으나
숱한 전우들과 버려지듯 묻힌 무덤가엔
가시 면류관
총소리에 놀라 멎은 기차가 녹이 슬고
스러질 때까지 걷힐 줄 모르는 길고 긴 철조망
겹겹이 둘러싸인 덕분에
자유로워진 노루며 사슴들이
내 빈약한 무덤가에 한가로이 몰려오지만
어머니,
이 땅의 허리를 그렇게 묶어버리자
혈맥이라도 막힌 듯 온몸이 싸늘해진 조국은
굳어버린 제 심장을 녹일 수 없답니다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그렇게 마시고도
더워질 줄 모르는 이 땅의 막힌 혈관을
이제는 풀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식어버린 제 뼈위에 뜨거운 흙 한줌 덮어줄
손길을 기다리겠습니다
무덤가에 다투어 피는 들꽃보다
더 따뜻한 손길을
22.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23. 별 헤는 밤 윤동주 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24. 고려인 / 이근모
시베리아 북풍한설 내 핏줄을 얼게 해도
해오름달이나 매듭달이나 언제나 멈춤 없이
흘러 흘러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핏줄은 얼지 않았는데 마음이 얼었습니다
천 년의 바람과 천 년의 구름이 자리한 하늘 아래
혈의 정체성을 찾아 대를 이은 혼불이 광야를 누볐습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산천
나의 세포 되어 마음 구석구석 자리 틀고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혈맥으로
백두까지 한라까지 뻗을 수 있기를 염원하였습니다.
하얀 순백의 옥양목에 떨어뜨린 쪽물처럼
그 혈흔, 시베리아 벌판에 점을 찍고
한민족 영혼으로 승화해 왔습니다.
아,
나의 조국!
늘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엇이라 부릅니까?
왜 나는 당신의 혈맥 바깥처럼 존재해야 합니까?
내 핏줄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누구의 모어입니까
25.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이근배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 길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고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 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묏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이제 손에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나
한 식구 한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26.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27. 뼈저린 꿈에서만 / 전봉건
그리라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하나도 빠뜨리지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하나도 빠뜨리지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세로 파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 육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28. 백두산 / 정호승
백두산은 울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잠을 못 이루고
두만강을 따라 몇 번씩 몸을 뒤채이다가
온몸에 흰눈을 뒤집어쓴 채 백두산은 남으로 가고 있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의 사랑이 언제가 다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두만강을 건너 묘향산을 지나
백두산은 한라산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던 미인송들도
어깨의 눈을 털고 백두산을 따라가고
멀리 흰 비다폭을 펼친 듯 흐르던
백두폭포도 말없이 백두산을 따라가고 있었다
백두산 사슴떼들도 자작나무도
장백패랭이꽃도 바위종달새도
백두산을 따라가고 백두산이 한 번씩 발을 쿵쿵 내디딜 때마다
천지의 푸른 물이 출렁거렸다
그러나 그날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백두산은 휴전선 앞에서 울고 있었다
하늘 끝도 갈라진 휴전선을 뛰어 넘다가
무릎을 꺾고 쓰러지고 말았다
천지의 물은 그대로 쏟아져
평양과 서울을 휩쓸고 지나갔다
29. 안중근 의사 讚 - 조지훈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는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鴻毛)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날 하르빈 역두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 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줬을까
세월은 말이 없지만
망각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서 가지만
그 뜻은 겨레의
핏줄 속에 살아 있네
그 외침은 강산의
바람 속에 남아 있네
30.국토서시(國土序詩) /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닮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31. 나의 조국 / 한석산
이 땅에 뿌리 내린
오천 년 역사의 칠천만
단군의 위대한 후예들
참된 애국 혼을 불러일으킬
장엄한 웅비(雄飛)
누군가 자꾸만 흔들어 깨우는
큰 뜻 서린 천지 기운
조용한 아침의 나라
내 조국 내 겨레
두 갈래로 갈린 우리민족
한 핏줄 남과 북의 혈맥을 이어
온 겨레가 하나
배달민족의 투혼으로
영원히, 영원히 꺼지지 않는
동방의 등불 나의 조국
찬란한 내일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의 소망 인류의 희망
젊은이여 가슴을 펴라
조국이여 날개를 펴라
푸른 창공을 맘껏 비상하라
더 높이 더 멀리
온 누리로 뻗어 나가라.
너희는 모두가 세상의 빛이어라.
32. 님의 침묵(沈黙) 한용운(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黙)을 휩싸고 돕니다.
33.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 허영자
먼 옛날 하늘이 열리는 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베풀어 펼친
거룩한 홍익인간의 정신
그 지혜를 면면히 이어온 반만년입니다.
쑥과 마늘 쓰겁고 매운 맛을 이겨낸 힘으로
고난과 고통과 억압과 슬픔의 사슬
아리는 아픔을 견뎌온 이 땅 백성들입니다.
회오리바람 비바람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새 문자를 만들어 등불을 밝히고
시와 노래와 춤 청청한 신명으로
가꾸고 다듬어온 이 나라입니다.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여
나무여 풀이여 뭇짐승이여 벌레들이여 그리고 사람들이여
우리들의 살 속에는 피 속에는
흘러간 역사의 솔바람소리 맑게 배어 있거니
이제 즈믄 해의 닭 울음소리 새벽을 앞두고
백두와 한라가 두 손을 마주잡은 잔치에
둥둥 북소리 높이 올리며
흰옷입고 달려갈 배달겨레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빛도
우리들 소망 위에 영롱히 비치거니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하늘 중심을 겨누어 활활 타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