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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인류가 그 재능을 동원하여 생각해낸 모든 기술은 자연의 창고에서 꺼낸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변환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변환과정에서 에너지는 문화와 인간 사이를 흘러간다. 여기서 에너지는 비평형 상태에서 잠시 생명과 그 부산물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고, 결국 분산된 상태의 쓰레기, 즉 무용지물이 된다.
기술이 복잡해지고 그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우리는 점점 기술을 자연과는 독립된 것으로 인식한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또는 어떤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 기존의 에너지원에 뭔가를 더해서 처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처럼 기술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사실, 기술은 결코 에너지를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기존의 유용한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기술의 규모가 크고 복잡할수록 에너지 소비량도 늘어난다. 기술 앞에서 우리는 가끔 탄복하기도 하지만 이들도 결국 자연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제1법칙과 제2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두 법칙을 다시 한번 설명해보겠다. 첫째, 세계 안의 풀질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다. 둘째, 에너지는 항상 유용한 형태에서 무용한 형태로, 또는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환된다. 기술은 바로 이 변환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우리는 기술이 우리를 환경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 생명은 폐쇄계가 아니다. 다른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주변환경과의 상호교환을 통해 살 수 있다. 주변환경으로부터 에너지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지 않으면 며칠 안에 우리는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기술은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리 끌고 가는데도 우리는 바로 이 기술 때문에 자연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이는 우리의 문화 패턴과 개인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자연의 에너지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또한 기술이 더 큰 질소를 창조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은 그 정반대인데도 말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유용한 에너지가 소비될 때마다 주변환경 어딘가에 더 큰 무질서가 생겨나는 것을 가르쳐준다. 현대 산업사회로 흘러 들어가는 무지막지한 양의 에너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엄청난 양의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술을 빨리 발달시킬수록 에너지 변환과정도 빨라지며 유용한 에너지가 빨리 분산될수록 무질서가 커진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조지 오웰식 악몽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행동양식이 만들어가는 세계가 실제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와는 다를 것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다. 오웰의 <1984년>에서 사람들은 전쟁은 평화이고 거짓말이 진실이라는 식으로 세뇌당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질서는 질서이고, 쓰레기는 소중하며,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은 같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에 젖어 있다.
세계가 혼돈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우리는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기를 꺼린다. 대신 기술로 몸을 단단히 감싸고 모든 비판을 방어하지만 기술이 우리 주변환경에 대해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더 더욱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옷도 잘 입고 잘 보호되고 있다는 허구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든 세계의 무질서한 파편 때문에 더욱 노출되고 더욱 위험에 빠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서 인간과 사회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즉각 회의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것이 정부의 새로운 계획이든, 에너지를 추출하는 새로운 방법이든, 새로운 약품이든, 사람들의 반응은 ‘좀더 두고 보자’이다. 표면적으로는 이익이 커 보일지 몰라도 우리 마음속의 소리는 의심에 차서 이렇게 속삭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조만간 이 기술도 뭔가 말썽을 일으켜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지도 몰라.’ 원자력은 저준위 방사능과 암을 일으킨다. 더 크고 더 빠른 자동차는 일산화탄소 중독과 오염을 야기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어디에는 적용되고 어디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된다. <기술사회>의 저자인 자크 엘롤에 의하면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 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 효과는 차라리 그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기술과 질서를 삶의 모든 활동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변환을 가속할 뿐이고 이에 따라 엔트로피 증대를 가속시킬 뿐이다. 과학자 유진 슈워츠는 그의 저서 <기술 과잉>에서 기술사회를 창조하는 우리의 노력을 거대한 다람쥐 쳇바퀴에 비유하고 있다. “이 쳇바퀴에서 기술자들은 같은 곳에 머물기 위해 더욱 빨리 달려야 한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와 달리 인간 쳇바퀴에서는 빨리 달릴수록 더욱 뒤떨어진다.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은 결국 문제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새로 등장하는 문제는 과거의 문제보다 해결하기가 더 힘들다. 왜냐하면 사건이 전개될 때마다 엔트로피는 늘어나고 유용한 에너지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질서를 유지하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는 더 큰 비용이 든다. 문명 전체에 기술을 전파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와해되어 간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문제는 커지며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따라서 무질서도 늘어난다. 이 모든 과정은 지수 함수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세계의 위기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기본 기술이었다. 이것은 땅 속에서 캐낸 석탄의 에너지를 변환시키기 위해 발명되었다. 새로운 에너지 환경의 신기술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이 시기에 새로운 에너지 환경의 기술적 초석이 놓인다. 많은 실험과 다양한 파생기술이 연이어 나타난다. 파생기술의 단위비용은 그 기술이 개선되어감에 따라 점점 싸진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계속 전파되어가면서 전체 시스템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은 늘어나고, 엔트로피 값은 극대점을 향해 나아가며, 에너지 흐름의 전과정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는 일은 더욱 비싸지고 복잡해진다. 과거의 에너지 흐름으로 인해 생겨난 무질서는 계속 축적되며 그 압력은 더욱 거세져서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 더욱 큰 제약을 가한다. 초기 단계에 사회가 의존하게 된 수준만큼의 에너지 변환을 이 기술은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며 결국 임계점에 도달한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에너지 환경에 창출된 기술은 한계까지 왔고 이제 엔트로피 분수령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최근 <뉴스위크>는 “혁신”이라는 제목의 커버 스토리에서 편집자의 입을 빌어 이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어느 정도 미국의 기술적 우위가 둔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미국은 더 이상 프론티어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원에 기댈 수 없다.... 이미 이들 자원은 탐사되었거나 일부는 고갈되었다.”
어떤 형태의 에너지 흐름 전체에 있어서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은 공동의 에너지원과 부합한다. 경제체제, 수송 및 통신 시스템, 도시의 위치, 형태, 기능 등은 모두 공동의 에너지 흐름에 의해 좌우된다. 이 에너지 흐름이 엔트로피 분수령에 도달하고 새로운 에너지 환경이 창출되면 과거의 에너지 흐름에 사용되던 낡은 형태의 기술은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니면 에너지원이 고갈됨에 따라 쓸모없게 된다. 사회의 에너지 기반이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갔을 때 발생한 기술적, 제도적 변화만 살펴보아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을 변환하는 것으로 살아가던 문화는 세계를 끊임없는 계절의 순환으로 파악했다. 나고,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과정은 질적인 과정이다. 에너지원은 생기와 다채로움으로 넘쳤다. 재생가능한 자원의 측면에서 볼 때 질서와 쇠락은 세계가 나아가는 방식을 일깨워주는 지침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초기 기독교의 세계관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재생가능한 자원에 입각한 에너지 환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을 재생불가능한 에너지 환경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해보자. 석탄과 석유는 무생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작은 단위로 분해될 수 있고, 아무리 작아도 각 부분은 전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석탄 먼지 하나는 그 구성에 있어 석탄 덩어리와 다를 것이 없지만 나뭇잎은 그 줄기나 뿌리와 크게 다르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은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쉽게 계량화된다. 정확한 측정도 가능하다. 가지런히 늘어놓을 수도 있다. 반면에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은 끊임없이 변화고 흘러간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들은 항상 생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밀한 측정이 어렵다. 뉴턴 패러다임은 수학공식, 측정에 대한 강조, 위치와 거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데 안성맞춤인 패러다임이 되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무한한 진보라는 개념이 어떻게 해서 세계 전체를 하나의 가계로 보는 사고와 손을 잡았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답 역시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에서 찾을 수 있다. 사상 최초로 거대하고 끝없는, 비축된 태양 에너지가 나타났던 것이다. 사회가 걸신들린 것처럼 이 에너지 창고를 파먹고 있는 동안 순환과 계절의 개념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수십억 년 동안 비축된 에너지의 노다지를 캤는데 매일 태양이 떠서 우리를 비추고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시간은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석탄광맥과 유정 속에 들어 있는 태양 에너지를 우리가 얼마나 빨리 뽑아낼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함수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뉴턴 패러다임에서 시간은 사람의 마음대로 빨라졌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손에 넣자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기댈 필요가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분산, 쇠락, 무질서 등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에너지는 창조될 수 있는 것이며 물질적 진보는 보장된 것이었다.
삶과 그에 관련된 활동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에 합리적 근거를 부여한 것이 바로 뉴턴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도저네 직면해 있고 이제 곧 포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떠나 다시 한번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옮겨 가려는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
원자력 발전은 비용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사회적 및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킨다. 발전에 필요한 우라늄을 채굴하는 광부들이 암이나 기타 질병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우라늄 광산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도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원자로 자체도 안전하지 못하다. 스리마일 섬의 핵사고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수십 건의 고장 및 방사능 누출사고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을 뿐이다. 미국의 모든 원자로는 끊임없이 소량의 방사능을 주변환경으로 방출하고 있다. 물론 업계 사람들은 이 방사능이 법적 기준이하라는 사실을 재빨리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은 강하건 약하건 간에 모든 방사능은 잠재적으로 위험하다는 의학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방사능에는 적정량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방사능은 항상 지나치게 많다. 방사능 입자 하나가 암이나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발병과정이 매우 느려서 방사능 노출로부터 발병까지는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미래의 역병을 풀어놓는 일이 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원자력 발전소 1기당 매년 400~500파운드의 플루토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현 추세대로라면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 하나는 매년 40개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이러한 물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미국 전역의 원자로와 저장시설에서 700파운드의 플루토늄이 사라졌다.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은 미국 내 도서관 어디를 가든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플루토늄의 생산은 사람들에게 당신들 마음대로 핵폭탄을 만드시오 라고 권고하는 것과 같다.
그 외에도 핵폐기물 처리라고 하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원자력 연구개발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발전소 건설에 수십 수백억 달러를 투자한 지금도 과학계, 전력회사, 정부는 핵폐기물 제거방법을 모르고 있다.
아직 핵폐기물 발생량이 적은 오늘날도 폐기장에서의 누출과 사고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량이 계속 정체 상태에 머문다 하더라도 21세기가 되면 매 2년 혹은 3년마다 새로운 처리장을 만들어야 핵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폐기장 하나가 생길 때마다 25만 년 간 이를 추적 관리해야 함과 동시에 무장경비원을 24시간 배치해야 한다. 보통의 핵폐기물이 무해한 것이 되려면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
기술적으로 볼 때 핵융합 에너지는 핵분열 에너지의 반대이다. 핵분열은 원자핵을 쪼개지만 핵융합은 서로 다른 원자 2개의 핵을 결합시킨다. 핵융합 에너지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태양에서 계속 일어나는 반응이 바로 핵융합으로서, 이로부터 나오는 에너지가 수십억 년 간 지구에 쏟아져왔고 생명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인간은 수소폭탄을 통해 핵융합 반응을 배웠다. 과학자들은 이제 수소폭탄이 폭발할 때 나오는 가공할 양의 에너지를 핵융합 발전소라는 그릇 속에 남아 유용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물리학자이자 태양 에너지 예찬론자인 아모리 로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기술적 및 자원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핵융합 발전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핵융합 발전은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들고, 공사기간이 길며 중앙집중적이고 기술집약적인 발전방식이다.
로빈스는 분열이든 융합이든 원자력은 버터를 자르려고 톱을 들이대는 격이라고 말한다.
석유, 석탄, 우라늄, 태양에너지 등 여러 형태의 에너지는 하나만 따로 떼서 생각할 수가 없다. 환경에서 에너지를 추출해내기 위해서는 시추기, 트랙터, 발전소 등 재생불가능한 자원을 사용해야 한다. 에너지를 이용하는 일을 하려 해도 기계나 공장 등 재생불가능한 자원을 투입해서 만든 시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 자원의 고갈 자체는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물리적 한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고도의 산업경제가 유지되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주요 재생불가능한 광물자원은 거의 빠짐없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다.
재생불가능한 자원이 사회를 통해 흐르는 것은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소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나무와 물고기는 생명체이고 번식을 통해 많은 개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을 소비하는 속도가 새로 태어나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고엔트로피 경제체제는 재생가능한 자원을 너무 빨리 소비해 버리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을 재생불가능한 자원으로 만들어버린다. 화석연료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인류는 필요한 에너지를 거의 전부 나무, 물고기, 풀밭, 경작지 등에서 얻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에너지원들의 생산성은 극대점에 달했고 이제 하락하고 있다는 증거가 나와 있다. 1967년 이래 세계의 산림 생산성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어업은 1970년 정점에 달했으나 이제 긴 역사를 자랑하던 많은 어장에 고기의 씨가 말라버렸다. 연간 곡물생산을 kg단위로 계산해서 얻는 경작지 생산성도 1976년에 최고에 달했다. 1인당 양모, 양고기, 쇠고기 생산량은 모두 감소하고 있다.
재생은 광물자원의 고갈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주 제시된다. 재생은 이미 전세계 안티몬 수요의 반을 충당하고 있다. 철, 납, 니켈의 경우는 1/3, 수은, 은, 백금의 경우는 1/4을 충당한다. 그러나 재생도 열역학 제2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광물이든 재생될 때마다 그 일부는 불가피하게 손실되어 회수가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재생효율은 대부분 금속의 경우 30% 정도이다. 그리고 재생은 또 한 번의 오염을 유발하며, 원료의 수거, 수송, 변환에도 막대한 에너지가 든다. 대체재와 마찬가지로 재생도 기하급수적인 금속수요증가라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파국을 잠시 늦춰줄 수 있을 뿐이다.
재생과 마찬가지로 보전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재생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보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어떤 보전 계획도 한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계획은 기존의 고에너지 소비 체제에 맞추어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소비체제에 조금이라도 제약을 가하는 보전계획은 에너지 흐름 여기저기에 심각한 왜곡 현상을 발생시킬 뿐이다.
편의를 위한 도구로 등장한 에어컨은 이제 필수품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에너지 흐름이 유래없는 속도로 증가하는 가운데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에서 캘리포니아의 홀리데이 인 호텔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지역에 세워진 건물들은 창문이 열리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완전히 폐쇄된 환경에서 1년 내내 쾌적한 냉낭방을 공급할 수 있는 전력이 공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동온도조절장치의 온도를 높게 설정하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끔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수십만 개의 건물에 달려 있는 수백만 개의 창문을 바꾸는 것뿐이다. 이렇게 하려면 엄청난 에너지, 자원, 시간, 인력이 든다.
전력 소비를 줄이려는 이 운동에는 다른 의미들도 담겨 있다. 신축 건물의 냉방시스템은 정부가 설정한 한계보다 더 낮은 온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을 규정에 맞는 온도까지 올리려면 어떤 건물에서는 공기를 가열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끝없이 많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많은 시스템은 에어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설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습도가 낮아야 하고 공기는 서늘해야 한다. 에어컨을 꺼버리면 작동이 불가능해진다.
자동온도조절장치의 설정온도를 바꾸면 생물학적, 심리적 영향도 나타난다. 우리는 에어컨에 철저히 적응이 되어서 인류 역사의 99%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온 온도와 습도가 이제는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덜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근로자보다 더 시원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의 생산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엔트로피 법칙을 피부로 느낀다.
이것은 수만 가지 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예를 들었다고 해서 최대한 보전을 해야 할 절대적 필요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전은 그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에너지의 흐름을 약간 낮출 수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사회는 그 반대방향, 즉 에너지의 흐름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기존의 고에너지 소비구조 하에서 보전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찮을 수밖에 없다.
-엔트로피와 산업시대
경제학자들은 영원하고 무한한 물질적 진보의 패러다임을 신봉하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과 기계가 가치를 창출한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린다. 그러나 인간의 에너지, 기계적 에너지 또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가 뭔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소비될 때마다 전체 환경은 더 큰 무질서와 쓰레기가 생겨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제2법칙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해도 결국 그것은 쓰레기 또는 분산된 에너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처럼 인간이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지 결국에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유용한 물건을 ‘영원히’ 축적해나간다는 의미에서의 ‘물질적’ 진보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생산성의 개념을 잠시 생각해보라. 우리가 인간 또는 기계의 노동을 통해 에너지나 일을 증가시키는 엔트로피는 감소하고 상품의 가치는 상승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환경의 다른 곳 어딘가에 더욱 큰 무질서가 창조된다고 엔트로피 법칙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생산성이 형성된다는 것은 에너지 흐름이 커지고 궁극적으로 사회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무질서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과 교환과정의 각 단계에서 어떤 일이 행해진다는 것은 인간과 기계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말이다. 에너지의 일부는 제품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버려진다. 그러므로 경제활동과정에서 더 많은 재화를 축적한다는 것은 더 많은 에너지가 낭비된다는 뜻이다.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경제적 과정의 단계는 계속 증가한다. 즉 생산과정 전체에 걸쳐 점점 더 많은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축적되는 무질서로 인해 사회는 더욱 심각하고 장기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머핀을 먹는다고 하자. 오늘날 석유화학에 의존하는 농업의 에너지 효율은 매우 낮다. 그러나 일단 밀이 익고 수확되면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가공공정을 또 거치기 때문에 이 미친 짓은 여러 단계로 희석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머핀을 만들기 위해 거쳐 가야 할 에너지의 단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재생불가능한 자원으로 만들어져 화석연료로 추진되는 트럭이 밀을 실어 나른다. 2)밀은 대규모로 중앙집중화된 빵공장으로 간다. 그곳의 기계들은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밀을 가공해서 머핀을 굽고 포장한다. 이 공정에서 밀을 3)정제하고 4)표백한다. 이러한 공정을 거치면서 말끔한 흰색을 띠지만 주요 영양소가 소실된다. 5)밀가루에는 니아신, 철분, 티아민, 리보플라빈이 첨가된다. 6)제품이 트럭에 실려 긴 시간을 이동한 후 빵가게에서 며칠 혹은 몇 주씩 손님을 기다려도 변질되지 않도록 방부제가 첨가되고 7)황산칼슘, 인산 제1칼슘, 황산암모늄, 효소, 브롬화칼륨, 오오드칼륨 등 반죽을 좋게 하기 위한 컨디셔너가 들어간다. 8)그리고 나서 빵을 구운 후 9)골판지 상자에 넣는데 10)이 골판지 상자는 손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상자와 머핀은 11)석유화학 제품으로 된 비닐봉지에 들어가고 12)역시 석유화학 제품으로 된 끈으로 봉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머핀 포장은 13)트럭에 실려 이동한다. 14)가는 곳은 냉방이 되고 형광등으로 조명이 되고 항상 배경음악이 흐르는 식품점이다. 15)마지막으로 소비자들은 2톤짜리 금속덩어리(승용차)를 끌고 가 머핀을 사고 16)머핀을 토스터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는 상자와 비닐 포장지를 버린다. 이것은 17)고형 폐기물로 처리되어야 한다. 머핀은 130칼로리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것을 얻기 위해 이토록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전체과정에서 수만 칼로리의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을 둘째 치고라도, 의학적 증거에 따르면 첨가제와 섬유소 부족(정제된 밀가루로 만든 빵에는 섬유질이 없다)으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결국 머핀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제조공정의 각 단계에서 분산된 에너지의 총량에 비료하면 하찮은 것이다.
식품제조공정에 들어가는 에너지 중 원료를 경작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20%에 불과하다. 나머지 80%는 가공, 포장, 유통, 준비에 소비된다. 앞서 말한 머핀과 관련하여 밀을 경작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18%에 불과한 반면 가공에 들어간 에너지는 33%에 달한다.
식품가공산업은 금속, 화학, 석유에 이어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에너지 소비자이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식품가공은 전국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6%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업계 입장에서 보면 많을수록 좋을 것임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1963년에서 1971년까지 미국의 1인당 식품 소비는 2.3% 증가했다. 그러나 포장의 무게는 33.3% 증가했고, 포장의 개수는 38.8% 증가했다.
포장이 증가하자 새로운 업종이 탄생했다. 식품기술 전문가라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우리가 사먹는 식품에 인공색소, 향료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제품의 질감은 좋은지를 챙기느라고 바쁘다. 이들은 어떤 것도 그냥 두지 않는다. 매년 5억 달러어치의 합성물질이 우리가 먹는 식품에 첨가된다. 종류도 2,500가지나 된다. 1979년에 미국인은 1인당 9파운드의 첨가제를 소비했는데, 이것은 1970년과 비교했을 때 거의 두 배다. 400만 파운드의 염료가 매년 식품산업에서 소비되는데, 이것은 1940년의 16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짜 식품보다 합성된 인공식품을 더 많이 먹고 있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드는 단순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준다고 선전하는 편의식품과 가공식품은 사실상 인간을 더욱 큰 엔트로피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부엌에 있는 시간을 조금 절약할 수는 있겠지만 그로부터 얻는 이익보다는 가공식품을 살 돈을 벌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근로시간(인간의 에너지)이 더 크다. 식품가공에는 각 단계마다 에너지가 든다. 그리고 이 에너지가 각 단계를 통해 흘러갈 때마다 우리는 더욱 소수의 거대기업이 권력을 쥐는 것, 미국인의 식사내용이 더욱 불건전해지는 것, 재생불가능한 에너지가 더욱 많이 소비되는 것 등을 목격한다.
식품가공은 석유화학, 자동차, 트럭 및 항공수송, 합성섬유 등의 분야처럼 고에너지 소비시대의 전형적인 산물이다. 모두들 더 큰 가치를 생산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지구의 소중한 에너지원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더욱 질서있고 더욱 물리적으로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환상을 부채질한다. 왜냐하면 이 시스템은 부가가치 생산과 국지적 엔트로피 감소에만 관심이 있지 전체적인 에너지 분산이나 엔트로피 증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전세계가 미국의 농업 시스템을 부러워한다. 캔사스 평원지대에 끝없이 펼쳐지는 황금빛 밀밭, 위스콘신 주 시골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기계화 목장, 남캘리포니아 전지역을 덮은 과수원의 풍요함 – 세계 각국은 이 모든 것을 칭송하고 연구하고 모방한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이런 말을 했다. 옥수수 이삭 하나만 자라던 곳에서 두 개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미국의 농업이 모든 사람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40년 이래 미국의 농업생산은 매년 2%씩 성장했다. 1972년에 미국 농업은 사상 최대의 수확량을 기록했다. 농업장관을 지낸 클리포드 하딘은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인력으로 현대적이고 기계화된 사육 시스템을 통해 7만 5천 마리의 닭을 키우고, 자동 사료공급장치를 써서 5천 마리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이외에 어디 있단 말인가?
미국 농업은 이미 세계의 밀과 사료곡물의 20%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을 각국에 수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농업기술을 매우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 농업은 인간이 고안해낸 영농방식 중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다. 소 한 마리에 쟁기를 매서 밭을 가는 농부는 기계화된 현대 미국의 대형 농장주보다 투입된 단위 에너지당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한 구식 농부는 자신이 투입한 에너지 1칼로리당 10칼로리의 에너지를 생산한다. 물론 아이오와 주의 농부는 자신이 투입한 에너지 1칼로리당 6천 칼로리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체력 이외에 여기에 투입된 모든 에너지를 합산하면 이것은 엄청난 환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270칼로리짜리 옥수수 깡통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 농부는 무려 2,790칼로리를 소비한다. 이 중 대부분은 영농기계를 가동하는 데 들어가며, 그가 사용하는 화학비료와 농약도 에너지를 투입하여 생산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에너지 1칼로리를 생산하는 데는 10칼로리를 소비한 것이 된다.
오늘날 농업은 미국 경제 전체 에너지 소비의 12%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인력과 축력을 이용해 밭을 갈았고, 지력을 유지하고 기름지게 하기 위해 퇴비와 윤작을 이용했으며, 천적을 써서 병충해에 대항했다.
오늘날 첨단기계와 석유화학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복잡한 기계와 석유화학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에너지 흐름이 늘어날수록 농업은 더욱 중앙집중적이 되었다. 미국 농업이 에너지 수요를 충당하는 비용이 상승함에 따라 소규모 가족농장이 사라지고 대규모 영농기업이 들어섰다. 오늘날 29개의 영농기업이 미국 전체 경작지의 21%를 소유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무기질소비료의 사용량은 1950년 100만 톤에서 1970년 700만 톤으로 일곱 배가 되었다. 농약 사용량은 이보다 더 늘어났다. 비료와 농약은 모두 화석연료 에너지원에서 얻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식품은 땅에서 자랐다기보다는 석유에서 자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같은 양의 식량을 생산하는 데 매년 점점 더 많은 양의 석유가 소비된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에너지가 소비될 때마다 일부는 제품에 흡수되고 일부는 분산되기 때문이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미국 농부들은 에너지 사용량을 계속 증가시켜 왔다. 에너지의 일부가 수확량 증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더욱 더 많은 양이 낭비된 것이다. 약간의 수확량 증가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부분적인 엔트로피 감소는 전체 환경에서 발생하는 엔트로피 중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분산된 에너지는 우리의 지면을 오염시킨다. 비료에서 나오는 질산화물에 의한 오염은 수질오염의 1/2, 고형 폐기물에 의한 오염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 농업에서 농약도 중요한 에너지 소비자이다. 1950년 20만 파운드이던 농약 사용량은 1976년 16억 파운드로 늘었다. 이렇게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의존하는 영농기술과 관계가 있다. 미국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던 방식에서 단일 경작방식으로 옮겨갔다. 작물의 종류가 단조로운 환경은 해충의 천적을 끌어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병충해에 대항하기 위해 대량의 농약을 살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한마디로 실패였다. 엄청난 양의 농약을 뿌려대도 병충해에 의한 작물손실은 지난 30년간 전체 수확량의 1/3에 달했기 때문이다.
해충들은 계속해서 내성을 갖춘 유전자를 개발하고 있으므로 더욱 독성이 강한 농약이 사용되고, 이에 따라 해충들은 더욱 강한 내성을 개발한다. 이러한 악순환은 한 단계 넘어갈 때마다 더욱 많은 비용이 들게 되고 괴로운 일이 되고 있다.
농업 전문가 데럴 퍼거슨에 의하면 이러한 농약사용이 환경에 대해 장기적으로 미칠 형향은 ‘두려운 것’이다. 이 문제를 연구한 다른 학자들처럼 퍼거슨도 농약이 토양에 가하는 위협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기름진 땅 1온스에는 수백만 마리의 박테리아, 곰팡이, 해조류, 원생동물, 벌레 및 절지동물 같은 무척추동물이 살고 있다.” 퍼거슨은 또한 이 모든 생물체가 ‘토양의 지력과 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농약은 이러한 생물 자체를 죽일 뿐만 아니라 작지만 복잡한 이들의 생태계를 파괴하여 토양의 엔트로피 과정을 마구 가속화한다. 그 결과 토양은 침식되고 피폐해진다. 농약과 비료 등 화학물질의 사용으로 매년 40억 톤의 표토가 강물로 쓸려 내려간다.
표토가 침식됨에 따라 이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화학비료를 뿌려야 했다.
우리의 영농기술은 비료라는 형태의 막대한 에너지 투입과 토양침식 및 병충해 내성강화라는 대규모 에너지 손실이 맞물린 악순환의 고리에 덜미를 잡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