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저장음식의 대명사 장아찌
짠맛 때문에 식탁 밖으로 밀려났던 장아찌. 요즘 들어 고급스러운 상차림에 빠지지 않는 감초가 됐다.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개운함, 입맛 돋우는 장아찌밥상 한 상을 차렸다.
장아찌는 채소를 간장·고추장·된장 또는 식초 등에 담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게 만든 밑반찬이다. 김치 버금가는 우리나라의 대표 저장음식이다. 고기 집에서 흔히 보는 마늘장아찌부터 밥반찬으로 대표 격인 깻잎장아찌까지, 흔하디흔한 장아찌가 요즘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케일, 상추, 감자, 가지 등 이것도 장아찌가 되나 싶은 채소들이 장아찌계에 이름을 올린다. 장아찌밥상이라는 메뉴가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장아찌를 선보인다는 창녕군 영산면 도리원을 찾았다. 도리원은 전통음식점이면서 창녕생태귀농학교, 유아·청소년의 농촌체험장을 운영하는 영농법인이다. 권수열(55) 도리원 대표는 우리나라 전통음식 중 장아찌 분야 유일의 인증 명인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두바이, 베트남 등으로 수출도 하고, 청와대 납품까지 하는 도리원은 이미 전국적으로 소문난 장아찌 명가다. 도리원 마당에 들어서자 달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4~5년 된 장아찌부터 최근 담근 장아찌까지 모두 28종 60t이 익어가는 지하 숙성고에서 올라오는 냄새다. 장아찌가 이렇게 달달한 냄새를 풍겼던가? 입맛 돋우는 새큼함까지 더해져 침을 꿀꺽 삼키게 한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건강한 ‘밥도둑’ 권 대표가 도리원의 장아찌 11종을 보여준다. 마늘, 마늘종, 양파, 오이, 명이, 무, 매실 등 장아찌들이 맛깔스럽게 담겼다. “이 정도면 흔한 장아찌”라고 한 11종 중 눈으로는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늘게 채 썰어 담근 고추채장아찌는 통고추장아찌만 봐온 눈에는 낯설다. 또 흔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가죽과 더덕장아찌도 알아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고도 낯선 한 종이 있다. ‘궁채장아찌’란다. 궁채? 처음 듣는 채소 이름이다. 권 대표가 그제야 웃으며 ‘산상추’라는 중국 채소라고 알려준다. 중국 궁에서 먹던 귀한 채소라고 해서 ‘궁채’라고 부른단다. “장아찌는 야채라면 다 담글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먹거리가 귀했던 옛날에는 채소 없는 겨울철 밥반찬이었죠. 이제는 고기밥상에 빠지지 않는 필수 메뉴가 됐어요.” 조연에서 주연으로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장아찌는 영양가치도 충분하다. 재료가 된 채소의 종류에 따라 비타민, 칼슘, 철분, 인 등 영양소와 베타카로틴, 안토시아닌 등 유익한 색소성분까지 무시하지 못할 영양분이 있다. 거기다 식이섬유소와 발효식품으로서 장점도 있다.
다양한 레시피로 진화하는 장아찌 간장과 식초 장에 담가 달고 새콤한 간장장아찌류, 매운맛의 고추장장아찌, 구수한 향으로 식욕을 자극하는 된장장아찌, 비린내 나지만 감칠맛 나는 젓갈장아찌까지 장아찌 레시피는 의외로 다양하다. 전통적인 레시피는 염장이 첫 단계다. 삼투압으로 수분을 뺀 후 절임장에 담그거나 묻어 장아찌를 만든다. 하지만 현대식 장아찌는 염장단계를 거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짠 음식을 꺼리잖아요? 건강을 챙기기도 하고, 반찬 아끼려는 시대도 아니고. 원물 그대로맛과 향을 살리려면 소금에 절이지 않고 장아찌를 담그는 게 좋아요.” “염장하지 않는데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나?”라는 물음에 권 대표는 “냉장고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저온에 두면 된다는 얘기.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장과 설탕, 식초 등의 배합 비율은 입맛에 따라 조절 가능하다. 간(?) 맞추는 데 자신이 없다면 시판되는 절임장을 이용해도 된다. 먹기 직전 참기름, 깨소금,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해 무치면 또 다른 맛을 낼 수 있다.
모자람 없는 밥상, 장아찌밥상
드디어 시식 시간. 침 삼키며 눈으로 보던 장아찌 한상에 불판 고기가 등장하자 참았던 식욕이 폭발한다. 특유의 매운맛이 순해진 마늘과 양파장아찌가 달달하게 넘어간다. 낯선 생김새로 정체 분간이 어려웠던 고추채장아찌는 맵싸한 맛으로 고기를 잘 넘어가게 돕는다. 마침 도리원 주방장님이 장아찌쌈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며 나선다. 깻잎에 상추, 그 위에 명이장아찌 한 잎을 포개고 고기 한 점을 올린다. 끝이 아니다. 마늘, 고추채장아찌까지 한 손 가득 올린 후에야 입으로 향한다. 쌈장이 없어도 모자라지 않은 고기장아찌쌈이다. 장아찌밥상에 밥이 빠질 수 없다. 흰 쌀밥 한 솥이 상에 올랐다. 장아찌 종류를 가리지 않고 뭘 올려도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빨간 매실장아찌 한 조각, 야들야들하게 삭은 된장콩잎장아찌 한 장에 밥이 술술 넘어간다.
전처리 과정이 식감 살리는 비법 시식이 끝나고 권 대표에게 좀 전에 맛본 콩잎장아찌의 부드러움에 대해 물었다. 거칠 수밖에 없는 콩잎이 너무 부드러워 물어본 것. 권 대표가 단순하지만 뜻밖의 비법을 공개했다. “장아찌의 맛은 사실 식감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소의 전처리 과정이 중요하다. 부드럽고 아삭한 장아찌의 식감은 절임장을 붓기 전에 한 단계를 더 거치면 된다. 보통 깨끗이 손질한 후 절임장을 부어서 완성한다. 절임장에 채소 부피를 줄이고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리는 건데, 거꾸로 해라. 절임장을 붓기 전에 채소의 숨을 살짝 죽이는 것이 비법이다.” 단순해서 놀라운 명인의 비법은 채소의 숨을 살짝 죽이고 담그라는 것. 채소를 나른하게 만드는 방법은 재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소금물에 살짝 데치거나, 소금물에 30분 정도 재우면 된단다. 숙성 시간도 줄이고 채소의 부피가 줄어든 만큼 절임장의 낭비도 줄일 수 있 다고. 권 대표는 즉석에서 양배추장아찌 만들기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채소의 기운을 빼면 하루 정도 실온에 뒀다가 냉장저장한 후 2~3일 후 바로 먹을 수 있단다.
도리원 창녕군 영산면 온천로 103-25 ☎ 055)52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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