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전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해 한 여인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의 활주로에 내려섰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고운 한복의 노인들이 큰 절을 올렸다. 아기씨라고 불리는 여인 그러나 38년 만에 다시 보는 고국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기씨는 일본으로 끌려가야만했던 고종의 외동딸이었다(1962년 1월 26일).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德惠翁主)
우리 한국 근대사를 어찌 눈물과 분노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망한 나라의 민중은 물론 왕족도 결코 비운에선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잊혀진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라는 인물입니다. 덕혜옹주. 아마도 낯선 이름일 겁니다. 덕혜옹주는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딸입니다. 왕녀에는 공주와 옹주가 있는데요. 왕과 정비에서 나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왕과 차비 또는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옹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덕혜옹주는 이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의 딸이 아니라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녀였습니다. 고종의 외동딸이자 조선에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누이동생이었던 덕혜옹주. 그녀는 왜 정신이상이 되어서 돌아왔던 것일까요.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 봅니다.
한국근대사에 영광과 굴욕을 함께했던 곳. 덕수궁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궁궐이었다. 나라를 빼앗긴지 2년 후에 어느 봄날(1912년 5월 25일). 비탄에 잠긴 덕수궁에 새 생명이 태어났다. 고종의 나이 환갑이 되던 해였다. 폐위된 고종이 가장 총애하던 궁녀 양씨가 고종의 딸을 낳은 것이다. 딸이 태어나자 고종은 양씨의 거처를 드나들기를 즐기며 종척들을 불러 모아 아기를 보여주었다. 삼칠일이 지나고 아기가 무사히 오십일을 맞이하자 고종은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아기를 데려왔다.1) 1912년 5월 이후에 왕조실록에는 작은 변화가 생긴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 관한 기술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이훈 동북아 역사재단 “공주도 아닌 그런 옹주에 관한 기사가 이렇게 많은 것은 역대 조선왕의 실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 합방 이후에 왕실이 갑자기 무력해지는 상황 속에서 고종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희망이었기 때문으로 생각이 됩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자리에 올라야 했던 고종.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왕위는 명성황후에게 난 순종에게 넘어갔다. 울분으로 지내던 말년에 늦둥이 딸이 태어난 것이다. 아기의 얼굴은 아버지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았다. 환갑에 얻은 딸은 늙은 국왕의 기쁨이 되었다. 덕혜 나이 다섯 살이 되던 해 고종은 덕수궁의 즉조당에 유치원을 세운다. 딸을 하루 종일 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덕혜를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생모 양씨의 신분이 낮았다는 것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왕족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 관리는 덕혜를 왕족에 넣기 위한 고종의 전략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당시 테라우치 총독이 의례적으로 고종을 배알하기 위해 덕수궁을 찾았다. 기지가 넘치시는 전하는 친히 총독을 데리고 즉조당으로 이끌었다. 전하는 뛰어노는 아이들 중에서 단연 기품 있고 귀여운 여자 아이를 앞으로 불러내어 ‘이 아이가 내 만년에 얻은 총아이요. 이 아이 덕분에 덕수궁이 기쁨에 넘치고 있소. 내 노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건 오로지 이 아이 뿐이외다.’ 전하가 말을 마치자 덕혜옹주는 총독을 향해 얌전하게 인사를 하셨다. 무뚝뚝한 표정에 군인 총독 테라우치도 순간 당황하여 ‘오 귀여운 따님이십니다. 이런 따님이 있으시니 실로 행복하시겠습니다.’ 총독은 옹주에게 덕담을 남기고 덕수궁을 떠나 관저로 돌아온 후 사람들에게 ‘저 귀엽고 천진무구한 옹주를 보고 난 이상 나도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군. 오늘은 멋지게 한방 먹었다.’라고 했다. 그 후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되어 덕혜옹주는 완전히 왕족에 들어가고 고종의 왕녀로 국내성에도 명백히 보고되었다.” 「이왕궁비사」곤도 시로스케 저
덕혜가 성장할수록 아버지 고종은 또 다른 고민에 빠져야 했다. 엄황귀비에게서 낳은 아들 영친왕 이은은 11살이 되던 해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졌다. 일본은 이은을 일본인으로 키웠다. 그리고 1916년 일본은 일본 황족인 마사코와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조선왕족이 일본인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민중들은 분노했다.
“이은이 원수의 여자를 취하다. 금일부터 영친왕으로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이었던 이은은 아비도 나라도 없는 금수인 고로.”
영친왕에 이어 외동딸마저 일본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고종은 신뢰하던 시종에게 덕혜의 부마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2) 고종의 밀령을 받은 시종 김황진은 자신의 조카를 천거했다. 김장한이라는 소년이었다. 혼약이 이루어지기 직전 계획은 숲으로 돌아갔다. 사정을 알아챈 일본이 김황진을 궁궐에서 쫓아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작스럽게 고종의 사망이 발표됐다(1919년 1월 21일 향년 68세). 총독부는 뇌일혈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민중들은 고종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12년 전 성신여대 구양근 총장이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찾아낸 극비(極秘)문서. 고종의 사망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 설명서다. 국제사회에 일본강점의 불법성을 알리려는 고종의 계획을 눈치 챈 친일파들이 궁녀를 시켜 밤참에 독약을 타서 고종을 시해했다는 것이다.3)
구양근 교수 “당시 국민대회를 추진했던 단체들은 고종의 사망이 확실히 일제에 또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 매국노들의 독살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는 이 정보를 얻고 국민들에게 빨리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 국민에게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종황제가 독살 당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조선의 민중들은 분노했다. 고종의 국장에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났다. 왕족도 행동에 나섰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은 고종이 독살 당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탈출했다(1919년 11월 9일). 그러나 국경(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 걸리고 말았다. 덕혜 나이 8살. 그녀는 아버지의 독살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존재였다.
고종은 9남 4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자식들 대부분은 유아기에 사망했습니다. 장성한 자녀들을 보자면 명성황후가 낳은 순종 척(拓), 귀인 장씨가 낳은 의친왕 강(堈), 엄 황귀비가 낳은 영친왕 은(垠) 그리고 복녕당 양씨가 낳은 덕혜옹주. 이렇게 3남 1녀가 생존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외동딸 덕혜에 대한 아버지 고종의 각별한 사랑은 실록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왕실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덕수궁의 꽃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8살에 찾아온 아버지 고종의 독살사건. 이 사건은 덕혜옹주의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고종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조선의 민중들에게 덕혜옹주는 죽은 임금을 대신하는 존재로 떠오르게 되는데요, 덕혜는 당시 민중들에게 왕실을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3?1운동 발발 직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신문의 지면은 종종 덕혜의 기사로 채워졌다.
“금옥같이 애지중지 하시던 부왕을 여의신 아기씨께서는 어머님과 함께 창덕궁 안에서 기거하시며 낮에는 학우와 글과 글씨를 배우고 밤이면 어머님의 품에 드시어 멀리 부왕의 옛 자취를 꿈꾸신다. 전에는 피아노나 풍금에도 매우 재미를 붙이셨으나 부왕께서 한 번 승하하신 후로는 일절 그러한 풍악류에는 손을 대지도 않으신다.” - 동아일보 1920년 6월 3일자
기사에는 아기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 있다.
이훈 동북아 역사재단 “덕혜옹주는 아직 일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런 유일한 왕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1920년대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는 덕혜옹주의 동정에 관한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민족에게 있어서는 덕혜옹주가 조선 민족의 우상이 되는 기능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덕혜옹주는 아버지인 고종이 승하하고 2년 뒤에 바로 이곳 충무로에 위치한 소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1921년 4월 1일 덕혜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 일출소학교에 입학한다. 덕혜는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1925년 3월 24일 마침내 고종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덕혜의 일본유학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경성역 1925년 3월 28일. 고종의 분신으로 조선 민중의 사랑을 받던 덕혜에 대해 일본은 특히 경계했다. 일본은 덕혜를 조선민중의 관심에서 떼어 놓으려 했다. 그날 덕혜는 기모노를 입어야 했다.
“고 고종 태황제의 만년 총애를 받고 이왕 전하의 특별한 우애를 받으시는 덕혜옹주는 아직 14살의 어린 나이로 주위의 사정과 여러 가지 관계로 정든 고국을 뒤로 두고 멀리 일본 동경 학습원으로 유학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 조선일보 3월 29일자
서울을 떠난 후 이틀 후 덕혜를 맞이하던 순간을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는 기억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내가 한국에 갔을 때 본 옹주와는 영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했던 눈초리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 ‘긴 여행을 하시느라 피곤하신가 보군요.’ 그러나 옹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먼 여행 오시느라 피곤하신가 봐요.’ 이번에는 한국말로 했다. 그러나 옹주는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고 미소조차 띠지도 않았다.” 이방자 저「지나온 세월」중에서
덕혜의 짐. 어린 소녀가 택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조선의 왕족을 일본인화 시키려는 일본의 의도에 14살 소녀는 반발하고 있었다. 당시 천황가와 일본 화족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던 학습원. 덕혜는 여자 학습원에 입학하게 된다. 덕혜가 일본으로 떠난 뒤 2달 후 조선일보는 덕혜의 학교생활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요사이 덕혜옹주께서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학교에 와서 오후 2시에 돌아온 후 여가에는 학습원 교수에게 불란서 말을 전심연구하시며 틈틈이 즐겨하시는 동요도 지으신다더라.” - 조선일보 1925년 5월 13일자
아버지를 독살한 나라에서 덕혜의 학창생활은 순조로웠던 것일까. 김문길 교수는 6년 전 일본에서 덕혜의 학창 생활에 관한 문서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문건이 덕혜옹주가 일본생활 할 때에 이야기 했던 것을 전부 적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아주 희귀한 문서 또는 문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문길 교수
덕혜의 학창생활에 관한 동창생의 증언을 일본의 향토사학자가 기록한 문서이다.
“덕혜옹주는 매일 보온병을 들고 학교에 왔습니다. 왜 그렇게 보온병을 들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덕혜옹주는 독살당하지 않으려고 보온병의 물만 마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일본에 끌려간 후 무엇보다 덕혜를 괴롭힌 것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기억이었다. 덕혜는 아버지처럼 자신도 언제 독살될 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덕혜에 관해 증언을 했다는 동창생을 누구일까. 일본의회정치의 아버지라 불리운 정치가 오자키 유키오의 딸이 증언의 주인공이다. 덕혜와 동갑내기인 소마 유키카 여사(당시 96세). 소마여사는 독살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는 덕혜에게 철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덕혜옹주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당신은 왜 여기에 있나요?”라고 말했습니다. 덕혜옹주는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늘상 입을 다물고 있는 아이였어요."
독살의 공포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 속에서 덕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일본생활 5년째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빈이나 비가 되었을 어머니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손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옹주는 검은 양장에 애통에 여이신 몸으로 쌓이시고 창덕궁에 들어가셔서 이전 어머니가 계셨던 곳에서 잠깐 쉬신 후 낙선제로 대비 전하께 배알하고 다시 한시에 거행하는 성복전에 참여를 하시였다.” - 동아일보 1929년 6월 3일자
성복전(成服奠)은 유족들이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의식. 조선왕실의 전통에 따르자면 덕혜는 마땅히 3년 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3년 전에 제정된 왕공가궤범(1926년 제정)을 내세워 왕족인 덕혜가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3조는 덕혜를 염두 해두고 만들어진 조항이었다.4) 결국 덕혜는 3년 상이 끝난 후에 입는 옥색 한복 천담복(淺淡服)을 입어야 했다.
"어머니 유해 앞에 비상히 애통하시는 모양은 각가히 모시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냇더라" - 동아일보 1926년 6월 3일
궁궐 내의 초상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던 일본은 장례 이틀 후 슬픔을 추스르지도 못한 덕혜를 서둘러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의 기억에 따르면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덕혜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가을학기가 시작해도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며 종일 누워있고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강도 높은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나가기에 놀래서 찾았더니 뒷문으로 해서 아카사카 방면으로 걸어가고 있거나 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신과 선생님에게 내진을 부탁했더니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 받았습니다." - 이방자 회고록 중에서
정신분열증은 사춘기에 많이 발병합니다. 그 발명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만 최근 학계에선 성장 시기에 겪는 가족 관계가 정신분열증에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린 덕혜가 감당하기엔 운명은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그녀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혼만이라도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자리엔 덕혜옹주와 특별한 관계인 한분을 모셨습니다.
【조선왕실의 후손인 이홍 씨(고종의 증손녀)입니다.
“저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손녀로 고종의 증손녀입니다. 덕혜옹주는 저의 고모할머님이 되십니다.”
댁내에서는 덕혜옹주를 어떻게들 말씀하시던가요.
“증조할아버지였던 고종황제께서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다는 얘기를 듣곤 했습니다.”
가슴 아픈 질문입니다만 덕혜옹주는 왜 어떻게 정신을 놓으시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우리 집안의 여성들은 내성적이고 인내심이 강한편입니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고모할머님이 참다 참다 결국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린 소녀에게 일본이 준비한 마지막 수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국내성은 덕혜의 발병 직후 결혼을 추진했다(1930년 10월). 조선 왕족을 일본인과 결혼시켜 조선이라는 나라에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덕혜의 배필로 뽑힌 청년은 쓰시마의 36대 도주. 도쿄대에 다니던 24살 소오 타케유키 백작이었다.
나가도메 히사에 쓰시마 향토사학자 “덕혜의 정략결혼을 결정한 사람들은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했을 겁니다.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면 별 탈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1931년 5월 8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조선 민중의 우상이었던 덕혜가 일본인의 아내가 되는 날이었다. 조선의 민중들은 이날 비탄에 빠졌다. 동아일보의 기자는 분노를 기사 속에 숨겼다.
"덕혜옹주는 양장을 입으시고 자동차로 소오 백작 집에 이르러 11시 25분부터 순 일본식으로 초례를 지내셨다." - 동아일보 1931년 5월 9일
조선일보는 결혼식 사진에서 남편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이날 이후 일본이 의도한데로 덕혜의 관한 신문보도는 사라졌다. 조선의 덕혜를 잊기 시작했다. 결혼 후 덕혜의 정신병은 진정되었을까. 혼마 씨의 외가는 대대로 쓰시마 도주를 섬기는 가신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 히라야마는 덕혜옹주를 처음 만난 날 일기를 썼다. 결혼 직후 덕혜가 남편 소오 타케유키 백작을 따라 쓰시마의 시댁을 방문하던 날의 일이었다.
“11월 3일 화요일 흐림 : 오전 10시 백작의 거처에 들르다. 백작과 그림이야기 및 난초 이야기 등에 관해 장시간 담화를 하다. 이야기 도중 덕혜부인이 갑자기 들어왔다. 인사를 하자 말없이 답례만 있을 뿐 그러나 끊임없이 소리를 내어 웃기를 여러 번, 참으로 병적인 행동이다. 백작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탄식이 나올 뿐이다.”
졸업 후 영문학자가 된 남편 타케유키는 바깥세상과의 교류를 끊었다. 당시 일본 귀족들의 근황을 정리한 책(1933년 황실황족성감)에 젊은 부부의 편린이 남아 있다. 덕혜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지만 1932년 8월 14일 덕혜가 딸을 출산했다고 적고 있다. 마사에라는 일본 이름을 지었다. 덕혜만큼 고종을 닮은 아이었다. 시대는 광란의 어둠속으로 질주해갔다.
패망 후 일본국 신헌법의 시행(1947년 5월 3일)으로 화족제도는 폐지되었다. 소오 타케유키도 백작 작위와 재산상의 특권을 잃고 평민으로서의 새 삶을 살아야 했다. 하인도 이혼을 금지하던 화족제도도 모두 없어진 시대. 남편은 마음을 굳힌다. 덕혜를 위한 새로운 거처. 마츠자와 정신병원이었다. 입원생활 10년이 흘렀을 무렵 남편 소오 타케유키는 덕혜와 이혼하고 그해 새로운 아내를 얻었다.5)
덕혜공주의 결혼생활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이 패전한 후 남편인 소오 타케유키는 덕혜공주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이혼을 결정하게 되는데요, 이 때문에 조선왕실 후손들 사이에서는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증오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잊혀지고 일본의 남편으로부터는 버림받았던 덕혜옹주. 그때 그녀를 잊지 않았던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고종이 독살 당하기 직전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비밀리에 약혼을 시키려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덕혜옹주의 남편이 될 뻔한 김장한은 바로 이 소년입니다. 그리고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종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덕혜옹주이 시아주버님이 될 뻔한 인물 김을한. 해방이후 이 김을한이 조국에서 잊혀진 덕혜옹주를 찾아 나섭니다.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을한. 일생을 신문기자로 살았던 김을한(1905~1992)은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김을한이 선택한 인생의 반려자는 고종이 덕혜를 위해 세운 덕수궁의 유치원에서 덕혜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민덕임이었다. 1950년 1월 김을한은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한 때 제수씨가 될 뻔했던 덕혜옹주를 찾아 나선다.
김을한 저「인간 영친왕」중에서 “동경에 도착하는 길로 소오 백작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번호 책을 보고 번호를 안 것은 물론이다. 옹주의 근황을 물으니 입원중이라고 하면서 만나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아주 냉담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이틀 후 영친왕을 뵈었을 때 비로소 덕혜옹주는 영친왕이 매월 만원씩을 내어서 동경교외에 마즈자와라는 정신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나는 동경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쯤 가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안내해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 갔는데 한 병실 앞에 이르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추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여세의 한 중년 부인이 앉아 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옹주의 후신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 동안을 우둑 커니 앉아 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렀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할까?’”
김을한은 한국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덕혜의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했다. 스스로 임금이고자 했던 이승만은 고종의 자녀들이 복귀하는 것을 꺼렸다. 고종의 아들, 딸은 해방이 되어도 귀국할 수 없었다. 덕혜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덕혜의 유일한 딸 마사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중부 내륙의 험준한 산 고마가타케. 이 산에 마사에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때는 마사에가 24살이 되던 해이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다음해였다. 이 기사가 장성한 마사에의 관한 마지막 흔적이다.6) 마사에는 1956년 고마가타케에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와 이곳을 찾았다. 마사에의 자살을 막기 위해 수색 작업에 나섰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정략결혼의 결과였던 덕혜의 딸 마사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꽃다운 나이에 이 세상으로부터의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덕혜는 단 하나의 딸이 사라진 것도 알지 못한 체 병원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병원생활도 어느 덧 15년이 흘러갔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렀다.
김을한 저「인간 영친왕」중에서 “‘안녕하십니까, 의장님.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김을한 기자입니다.’”
김을한은 다시 움직였다. 덕혜의 귀국을 간청하기 위해 박정희 의장을 찾았다. 박정의 의장은 ‘덕혜옹주란 대체 누구인가요?’라고 물었고 김을한은 조선 마지막 왕녀의 눈물겨운 처지를 설명했다. 박의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면서 무릎을 탁치며 ‘그거 안되지, 자유당 민주당이 다 못해도 나는 해야겠소.’라고 약속했다.
안천교수 서울교육대학교 “그렇게 박대통령이 했던 이유는 첫째 본인으로서는 전혀 덕혜옹주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가 없고 그러고 두 번째로는 본인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덕혜공주의 귀국을 손들어 주면 본인이 상당히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는 것 등을 의식하고 즉시 환국을 허락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두 달 후(1962년 1월 26일), 마침내 덕혜옹주를 실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내려섰다. 38년 만의 고국이었다. 황제의 딸로 사랑을 받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덕혜가 도착하자 덕혜의 옛 유모 변복동 씨가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변씨는 그 후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옹주 곁을 지켰다. 7년간의 병원생활 후 덕혜는 창덕궁 낙선제로 거처를 옮겼다. 전주이씨의 후손인 이공재씨는 낙선제에서 마지막까지 덕혜옹주를 모셨다. 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났을 무렵 낙선제로 한 일본인 신사가 찾아왔다. 홀로 찾아온 그 신사는 덕혜옹주의 옛 남편 소오 타케유키였다. 옛 아내를 한번 문안하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고종의 딸과 결혼하고도 끝내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이혼했다는 그를 이공재 씨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문 앞에서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이공재 씨 “만나봐야 할 이야기도 없고 만나봐야 할 필요도 없고 만나보면 오히려 덕혜옹주의 옛일이 생각이 나서 더 마음이 안 풀어진다. 더 악화가 될지 모르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일절 면회를 허용하지 않으니까... 돌아가시오’ 하고 간 일이 있습니다.”
끝내 아내를 만나 보지 못한 체 소오 타케유키도 1985년 조상들의 땅 쓰시마에 잠들었다. 1983년 KBS 취재 팀이 덕혜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해 두었다. 끝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덕혜옹주. 그리고 이날 덕혜가 정신이 맑은 날 썼다는 낙서 한 장이 공개되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그리고 덕혜는 떠나갔다.
38년만이 귀국이었습니다. 일본은 덕혜를 조선의 민중으로부터 떼어 놓고 그녀의 기억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그녀를 잊지 않았고 덕혜옹주는 생의 마지막을 고국에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녀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아버지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덕혜옹주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잊혀짐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
※ 글의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지 ※ 주 1) 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으니 양씨에게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내리다. 5월 26일 태왕전하가 복녕당에 왕림하다. 5월 27일 태왕전하가 종척들을 복녕당에서 접견하다. 5월 31일 새로 태어난 아기의 초이레날이므로 종척들이 덕수궁을 알현하다. 7월 13일 태왕전하가 복녕당에 가서 아기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돌아오다. 2) 이방자 저「지나온 세월」중에서 3) 친일파들은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렸다. 4) 193조 왕공족은 황족 왕족 공족 조선족 귀족이 아닌 친족의 초상에 상복을 입지 않는다. 5) 1955년 6월. 6) 1956년 8월 29일. |
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