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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1세기 패러디의 내적 원리들
서정적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 ‘단편들’의 퓨전적 융합
21세기 패러디스트의 욕망은 후기자본주의의 생산·소비 양식인 대중성과 대량성, 그리고 의미의 무정부성을 닮아있다. 대주매체와 기술복제를 기반으로 하나의 텍스트는 순식간에 수 개의 텍스트로 증식되고, 증식된 텍스트는 다시 그것들의 조합수만큼이나 서로 다른 텍스트들로 생성된다. 이러한 텍스트들 간의 확장성과자기 증식성은 패러디텍스트들을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질적인 원텍스트들의 조합이 낯선 차이를 형성하고, 차이의 차이가 한 텍스트 안에서 뛰놀기도 하면서, 조합과 차이의 유희를 통해 패러디텍스트는 대량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본질과 가상, 현실과 원텍스트, 원텍스트와 패러디텍스트, 패러디스트와 독자, 나아가 안과 밖, 앞과 뒤의 경계를 뒤섞어놓곤 한다.
190년대 이후 우리 시에서 수많은 원텍스트의 파편들을 직조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패러디의 실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패러디는 대중문화적 감수성에 서정적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 비극적 수사를 가미해, 다채롭고 극적인 단편들의 다성적 울림을 꾀한다. 양적인 합체가 아닌 질적인 ‘융합’으로, 기계적인 조합이 아닌 화학적 ‘화합’으로, 자연스런 어울림과 서정적인 내면성을 성취해낸다. 현실 체험을 텍스트 체험으로 대신하며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패러디적 감수성의 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일찍이 유하는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람』에서 메타시네마적인 패러디 유희를 통해 실재the real와 영화the reel 간의 경계에 대한 회의적 물음을 던진 바 있다.
나는야 할리우드 카드였으므로, 할리우드 여배우 이름이나 외우며 사춘기의 전부를 허비했지 저수지의 개, 같은 날들이라고 비웃지 말게 난 모든 종류의 진지함을 경멸했어, 그게 나의 화환이고 마마야 과연, 이름 속에 갇혀 있는 게 진리일까? 비비안 리의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잠깐 깨달음을 얻은 적도 있었지 하나 나의 상상력은 자꾸만 썩은 물이 고인 저수지처럼 음습한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아 심지어 불량 불법 비디오에 나오는 모든 배우의 이름을 알고 싶어 이발소 그림, 화신극장의 쇼걸, 만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해적판 레코드 위에서 희미하게 광란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바기나에 난 점이 인상적이었던 포르노 배우…… 폐기물의 환희…… 뭐 그딴 것들, 내 청춘의 독서목록이랄까 나는야 쓰레기의 이름으로 붐비는 지하 도서관, 내가 택한 건 향기 없는 진리보다 지금 이 순간 독버섯의 매혹,
―유하, 「드루 배리모어, 장미의 이름으로」 부분
인용시에서 유하는, 제도화된 욕망의 양산과 그 절대적인 악의 징후를 일련의 상업영화나 불법비디오에서 읽어낸다. ‘나는야 쓰레기의 이름으로 붐비는 지하 도서관’이라며 자조할 때 그는, ‘세운상가’로 비유되는 상업과 자본이 한복판에서 성장한 ‘헐리우두 키드’ 세대의 불법 비디오적 감수성의 도래를 선언한 셈이다. 장미로 비유되는 영화배우 ‘드루배리모어’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휘발성’으로 인해 시적 자아에게 매혹적인 동시에 허무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장미’는 가상의 영화, 즉 영상 이미지의 비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패러디텍스트에 원텍스트가 발산하는 비디오적 현실들, 즉 영화 「장미의 이름」, 「헐리우드키드」, 「저수지의 개」, 「개 같은 날들」, 그리고 문화공보부의 홍보용 광고와 그밖의 불량 불법 비디오의 영상 이미지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독자들은 영화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만으로 수편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읽어야 한다. 이러한 영화 끌어들이기는 더 이상 ‘끌어들이기’가 아니라 일상 그 자체로 발산되는 ‘현실의 틀’이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독자들 또한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영화인지 시인지, 허구인지 실제인지 혼란스러움을 경험하게 된다. 혼합과 중첩의 패러디 유희를 한층 강조한 시다 현실 체험을 앞서는 스크린 체험과, ‘향기 없는 진리’보다는 ‘독버섯의 매혹’이 일상 그 자체였던 시인 자신의 성장배경과 그 문화양식을 패러디 형식으로 집약시켜 보여줌으로써 텍스트화된 21세가 우리 현실을 재현하고 자신의 일상을 점검한다.
유하가 텍스트화·허구화·가상화에 매혹된 시적 주체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패러디를 활용하고 있다면, 박정대는 좀 더 나아가 텍스트화된 현실에 젖어 살고 있는 시적 주체의 몽환적 내면을 표출하기 위해 패러디를 활용한다.
1. 워터멜론 슈가에서
물이 끓고 있다. 가습기 같은 내 영혼, 「아스펜 익스트림」이란 영화를 보고, 눈이 쌓인 설원을 생각했어야 되는데 진로 소주 한 병의 위력에도 휘청거리는 아스펜 아스피린 같은 혼몽한 겨울밤. 비명처럼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옛날처럼 나는 늙었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오늘은 누가 또 미국의 송어낚시를, 피워무는지 몰라도 무섭도록 그리운 건 담배 한 개비 속에 떠오르는 춥디추웠던 그 골방의 기억뿐,//(중략)
2. 페루여관에서
그 거리를 지나 당도한 골목 끝에 섬처럼 여관이 하나 떠 있었다. 여관은 검객의 차양모 같은 지붕을 뒤집어쓰고 낡은 간판을 펄럭이고 있었는데 여관의 이름이 취생몽사였는지 동사서독이었는지 난초 잎사귀 속의 호랑이였는지 호텔 바그다드였는지 폐루여관이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암튼 그들은 지친 육체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한 가엾은 한 쌍의 새였다. 동사가 티브이를 틀었고 서독은 침대 위에 무너져 오래도록 누워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누워 있었는데 동사와 서독 사이로 바람이 불고 바람은 화병에 그려진 벵갈호랑이를 피워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박정대, 「단편短篇들」 부분
박정대의 『단편들』이라는 시집에는 숱한 텍스트의 단편들이 혼재해 있다. 소설, 영화, 음악, 명함 등 장르들도 다양하다. 인용시 역시 마찬가지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와 『워터 멜론 슈가에서』, 「마지막 활강」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스키 영화의 고전 「아스펜 익스트림Aspen Extreme」, 로맹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영화 「동사서독」과 「바그다드 카페」 등에서 파생된 단편들을 잇대가면서, 우울하면서도 자조적인 시인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패러디를 통해 주체의 파토스적 내면과 서정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21세기 패러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시 제목에서 ‘단편’은 여러 의미의 ‘단편短篇, 斷片, 斷編/斷篇’을 환기함으로써 짧음, 조각, 단절, 모음 따위를 떠올리게 한다. 원텍스트들의 파편들이라고나 할까. 시인 스스로가 다른 시에서 언급한 바 있는 ‘취생몽사’적 글쓰기 혹은 ‘자동기술법’적 기술 또한, 단편들의 내면적 융합과 화합에 한 몫을 담당한다. 시간과 공간의 모호함, 착각 혹은 중첩, 불명료한 지시대상들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몽환적 직조는, 사실 초현실적이라기보다는 텍스트화된 일상적이고 정서적인 내면 상태를 표출하기 위함이다. 몽롱함과 혼란스러움을 가장한 허구적 플롯으로 삶에 대한 허무와 환멸과 애증이 배어나도록 하는 박정대 특유의 단편화 방식인 셈이다. 그 전략은 위악적 가장假裝, 자리바꿈, 드러나거나 감추어진 텍스트의 단편들, 요설과 조소의 혼합, 텍스트와 현실 사이에 내재하는 모호한 결핍 들을 활용해 시와 대중문화, 사실과 허구,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이 경계를 허무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단편들의 융합과 화합이라는 퓨전적 패러디라 할 수 있다. 패러디를 통해 주체의 내면성과 서정성을 표출하려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우며, 이는 1980~90년대의 짜깁기식 혼성모방적 패러디와 변별되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주체의 자기증식에 기여하는 ‘다시 쓰기’
패러디는 대상화되고 물화物化된 원텍스트를 기반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잘 잘려진 사실이다. 원텍스트에 대한 애정과 증오, 확신과 갈등, 집념과 좌절을 기반으로 패러디스트는 원텍스트의 불안전성을 보충하면서 역설적으로 원텍스트를 낯설게 보이도록 한다. 원텍스트를 재기능refunction화함으로써 자기증식으로서의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패러디들에서 그러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수는 이미 발표한 여러 편의 자기 시를 짜깁기하여 한 편의 시를 만드는 자기반영적인 혹은 자기순환적인 패러디를 선보인 바 있다. 이후, 자신의 텍스트를 페러디한 데서 한 걸음 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빌려 수많은 패러디 주체로 자기증식을 거듭한다.
자넨 소냐를 만나
무릎 끊고 땅에 입맞췄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외돌토리다.
그때
우들우들 몸떨리고
눈앞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나는 그만 거기 주저앉고 말았다.
내 머릿속에 있을 때는
그처럼이나 당당했던 그것이
즈메르자코프 그 녀석
그 바보 천치에게로 가서 그 모양으로
걸레가 되고 누더기가 되고 끝내는 왜 녀석의
똥창이 됐는가.
견딜 수가 없다.
어디를 바라고 나는 내 풀죽은
돌을 던져야 하나,
페테르부르크 우거에서
이반.
―김춘수, 「라스코리니코프에게」 전문
김춘수의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민음사, 1997)는 시집 한 권 전체가 편지형식의 패러디 시집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백치』,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 『가난한 사람들』 등의 소설 속 주인공이 또 다른 주인공들에게 말을 건네는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 제목은 ‘~에게’라는 소설 속 주인공을 수신자로 하고 있으며 시적 화자는 일인칭의 ‘나’다. 때문에 시의 끝부분에 가서야 첨가된 발신자의 이름과 장소(시간)를 통해 ‘나’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인용시에서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이 『죄와 벌』의 ‘라스코리니코프’에게 편지를 보내는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반과 라스코리니코프는, 신이 없다면 인간이 부도덕한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는 무신론적 이성주의자라는 점, 살인과 연루되었다는 점, 여자를 사랑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이 (즈메르자코프에게) 살인을 교사한 반면, 라스코리니코프는 스스로가 살인을 실천한다. 이반이 형의 약혼녀 까테리에나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했다면, 라스코리니코프는 소냐의 사랑으로 구원까지 받는다. 이러한 텍스트적 맥락을 전제로 패러디텍스트를 해석해보지만 그 시적 상황과 그 의미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의미의 불분명성은 패러디스트 김춘수의 의도이기도 하다. 그때, 거기, 그처럼, 그것, 그 녀석, 그 바보 천치, 그 모양으로 등 의도적으로 불분명한 지시어를 남발하고 있는 데서도 그 의도는 두드러진다. 독자로 하여금 자의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그 지시어를 채워 넣어 읽으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대체로 ‘나’로 상징되는 인간의 이성적 심판 혹은 존엄성의 좌절되는 상황에 부합해 해석하면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패러디텍스트의 의미를 미확정성으로 개방해놓는 효과를 자아낸다.
시집 제목의 ‘들림’이라는 시어와 시집 전편에 걸친 ‘대화(편지)’ 형식은 그이 패러디를 이해하는 데 유효한 단서를 제공한다. ‘들림’이라는 술어는 소리가 들리다. 듦을 당하다. 병이나 귀신 따위가 옮거나 덮치다. 뒤가 끊어지다(바닥이 나다) 등의 다의적 의미를 내포한다. 김춘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를 ‘듣’고 텍스트 속에 끼어들 듯 ‘들린’ 것이다. 이 ‘들림’을 형상화한 형식이 대화체다. 텍스트 속 인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 인물들끼리 말하게 함으로써, 즉 작중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한 인물의 심리를 체험하고 그 내면을 육화시키고 있다. 시의 형태적 특징 자체가 대화성과 상호텍스트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때 패러디 주체로서의 ‘나’는, 원텍스트인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분열되면서 발화주체는 복수複數화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자신들이 속한 고유한 텍스트이 공간에서 튀어나와 또 다른 텍스트의 무한한 빈틈들, 규정되거나 완결되지 않은 채 쉼없이 자기증식해가는 패러디텍스트의 다중 주체들이야말로 21세기 패러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도 한 권 전체가 패러디 시집이다. 외국 시인들의 시구절을 제사나 프롤로그 형식으로 인용한 수, 본문에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야기를 풀어놓는 독특한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매 편의 시들에서, 짤막하게 인용된 외국 시인들이 시구절에 일상적인 우리 삶의 풍경들을 겹쳐놓음으로써 동시에 어긋나게 한다. 이성복 도한 우리 삶이 되풀이되듯 텍스트들도 되풀이된다고 하니 말해지지 않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가 상대를 통해 사랑하는 건 그가 이미 알았고 사랑했던 것들이었”(「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듯, 사랑이 자기반영과 자기복제라면 우리의 삶이나 삶을 향한 글쓰기란 하물며 어떠할 것이가, 라는 물음이 시집 전체에 담겨 있다. 되풀이로서의 반복구조가 삶의 다양한 풍경들 속에 반복되고 있음을 감지한 시인은, 그 되풀이를 가장 노골적인 되풀이 형식인 패러디를 통해 표출한다.
우리 숨쉴 때마다. 안 보이는 강물처럼 죽음은
희미한 탄식 소리 지르며 허파 속으로 내려간다.
―샤르르 보들레르, 「독자에게」
수레바퀴가 돌아도 중심은 돌지 않는다. 테두리가 돌면 중심 축은 나아간다. 중요한 건 이뿐, 테두리가 중심 축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 테두리가 돌기에 중심 축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중심 축이 나아가기에 테두리는 도는 것. 우리는 모른다. 누가 이 수레를 어디로, 언제까지 끌고 가는지 영원한 수레는 나아가고 헛되이 바퀴는 돌고 도는 것. 아 미치겠다. 보들레르야, 보채지 좀 마라. 네 헛소리가 자갈밭 구르는 수레바퀴 소리보다 크구나, 어째 그리 넌 말귀를 못 알아듣냐.
―이성복, 「45. 보채지 좀 마라」
시인에게 말을 걸어왔던 원텍스트에 의지해 자신의 말을 발화하고 있다. 이럴 경우 인용한 원텐스트와 본문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 제사 형식으로 인용된 보들레르의 시구절 “우리 숨쉴 때마다, 안 보이는 강물철머 죽음은/희미한 탄식 소리를 지르며 허파 속으로 내려간다”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감각적인 구절은, 본문의 “아 미치겠다 보들레르야, 보채지 좀 마라, 네 헛소리가 자갈밭 구르는 수레바퀴 소리보다 크구나. 어째 그리 넌 말귀를 못 알아듣냐”라는 대문호 보들레르에게 건네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위악적인 하대의 어조와 대조를 이루는데, 이 유쾌한 부조화 속에서 패러디 효과는 극대화된다. 제사 형태로 부분 인용한 원텍스트는 문장 자체만으로 시적 의미나 이미지가 선명하고 강렬하다. 반면 시의 본문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그 언어 형식 또한 산문적이고 거침이 없다. 일차적으로 이성복이 원텍스트에서 포착한 것은 일상(호흡) 속에 깃든 죽음의 청각 이미지(‘희미한 탄식 소리’)다. 이 청각 이미지를 패러디텍스트에서는 수레바퀴(축과 테두리의 회전) 속에 깃든 죽음의 청각 이미지(‘수레바퀴 소리’)로 보충해 낸다.
수레바퀴는 테두리와 중심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수레바퀴가 돌아야 중심축이 나아가고 누군가 수레를 끌어야 수레바퀴가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뒤집어서 바라본다. 중심축이 나아가야 테두리가 도는 것이고, 수레가 나아가야 수레바퀴가 돌고 수레를 끄는 사람도 나아간다는 것이다. 수레바퀴의 운동 원리를 뒤집어봄으로써, 삶이 죽음을 추동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 삶을 추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보들레르가 삶의 호흡에 깃든 죽음이 탄식소리를 들었다면, 이성복은 죽음에 깃든 삶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보들레르의 「독자에게」에 내표된 원저자의 욕망에, 이성복이 포착한 시적 통찰을 잇대놓음으로써 패러디스트의 욕망을 구현하고 있다.
‘게임-가상-유희’ 욕망을 자극하는 테크노 형식의 패러디
디지털과 테크놀노지,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미 21세기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가상의 온라인 공간을 공유한다. 대중들은 스스로를, 일방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소비자Consumer에서 생산과 소비에 영향을 끼치고 시장을 변화시키는 쌍방향적이고 능동적인 소비자Prosumer로 탈바꿈시켰다. 후기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테크노 형식’의 시적 형상화에 귀기울이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라,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 전자 언어의 새로운 요소들을 패러디함으로써 시 쓰기의 테크놀노지화를 실험하는 주역들이다.
1. 모니터, 혹은 이중二重 자아自我
한참 동안 어둡다가 무대가 서서히 밝아진다. 무대 가운데에 소파 하나, 그리고 양편으로 모니터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얼궁리 지나간다. 무대 뒤의 벽면에는 큰 비디오 스크린, 소파와 모니터 두 개가 놓인 무대가 다시 거기 비추인다. 무대가 밝아진 후에도 계속하여 정적, 그리고 무대의 좌, 우측 끝에는 위로부터 길게 내리쳐진 휘장, 사람이 비치게 되어 있다. 거기 각각 한 사람씩 배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다음의 대화를 한다./(중략)
-카드를 뽑아보세요
-탄환은 머리에 박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이 두 장이라서
-증식하는 이마주 쪽이라서
-당신은 어느 쪽이지요?
-공장은 이마주를 증식시킵니다
-그쪽입니까?
-그쪽입니다
-파편들 하나하나가 다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파편들 하나하나가 다 나타났다가요?
-사라집니다. 매번 왔다가는 작별을 고하지요.
-매번 왔다가요? 죽음입니까?
-당신도?
-당신도?
―성기완, 「환생 幻生, 혹은 죽음에 이르는 병」 부분
성기완은 그의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문학과지성사, 1988) 1부의 ‘들어가는 말’에서 현대인의 욕망을 ‘테크노로 가는 모양’으로 형상화해낸다. 이 ‘테크노로 가는 모양’은 기능조차 지워져버린 기능하는 나사, 운동성은 있으나 방향성과 의식이 없는 정충, 자르고 섞은 살점들처럼 튕겨 다니는 리듬들, 목숨을 쫓는 붉게 켠 의식의 눈동자들 등으로 변주된다. 갈 곳 모른 채 기계적으로 부유하고 요동치는 이미지들이다. 이 ‘테크노로 가는 모양’들이란 곧 그의 시의 주체이자 주체의 언어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특히 ‘나사’화된 욕망은 반복적인 기계음, 강렬한 리듬, 빠른 비트, 단속적인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테크노 형식에 의지해 인간의 내적 엑스터시를 자극하려는 그의 패러디적 욕망과 맞닿아 있다.
위의 인용시는 원래 무려 13쪽에 해당하는 긴 시다. 음악적 구성 과정, 연극 및 영화 양식, 지미 헨드릭스와 가사 인터뷰 형식들을 ‘자르고 섞어cut&mix’ 쓴 시다. ‘삭히지도 않고’(채화시키거나 내면화시키지도 않고) ‘토막낸 익명의 살점들’(의미를 무화시키는 단속적인 파편들)처럼 ‘튕겨다니’(혼성적 목소리)는 ‘테크노로 가는 모양’을 테크노적 패러디 형식으로 재현해내고 있는 듯하다. 인용 부분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제사 형시긍로 인용한 니체의 “그러니 타락하라./목숨은 목숨을 낳을 뿐”이라는 구절과 “일러두기: 이것은 타락의 한 형식이다”라는 시 본문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성기완은 ‘복제를 눈앞에 둔 주형틀’에서 생산되는 자신의 시 형식을 ‘타락의 한 형식’이라고 일컫는다. 또 다른 시 구절에 빗대어 말하자면, 거울에 되비친 자기 자신의 해골바가지이고, 판박이 종이에 각인된 말없는 풍경 혹은 인물들이고, 존재의 강사들이고, 너의 그림자다. 테크노와 인간, 가상과 현실, 환幻과 죽음과 삶이 혼종교배되는 세계다. 특히 ‘모니터, 혹은 이중 자아’라는 소제목을 통해, ‘모니터’로 상징되는 잡종hybrid적 혼합 혹은 배치의 형식이 주체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테크놀로지와된) “공장이 이마주를 증식시키”듯, 패러디는 텍스트를 증식시키고 텍스트는 이미지를 증식시킨다. “파편들 하나하나가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죽음과 환생幻生’이 되풀이되듯, 텍스트의 파편들이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텍스트이 욕망은 다시 생성되고 다시 부정되기를 반복한다. 테크놀로지화된 복수複數적 패러디의 복수複數이기도 할 것이다.
서정학의 시적 상상력의 모태도 테크놀로지화된 삶이다. 테크놀로지화된 대중문화의 여러 요소들은 그의 시의 소재일 뿐 아니라 언어 형식까지를 결정짓고 있다. 비디오와 전자오락, 텔레비전과 공상과학, 판타지와 만화 등의 형식들이 시적 상상력의 토대를 이룬다.
POPULOUS*
프로그램에서: 나의 역할은 신이다
신의 종족 곧 나의 인간들을 번성시켜야 한다
악마의 종족 인간들 적을 물리쳐야만 한다
많은 성과 마을들을 지어야만 한다
바닷물은 위험하다 나의 종족들에게 그것은 치명적이다
나는 땅을
산을 깎아내려 평지를 만든다 종족들은 그곳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번영을 누린다. 그들은 꿈꾼다 난 느낄 수 있다
모니터 가득 그들의 존재 흰 점을 늘리는 꿈
그것,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중략)
VILLAGE: 56
CASTLE: 38
KNIGHT: 5
SCORE: 10300
또 다른 세계 방식은 같다 (세계의 존재 방식의 비밀)
*ⓒ 1989, 1990, 1991 ELECTRONIC ARTS.
ⓒ 1989, 1990, 1991 BULLFROG.
―서정학, 「컴퓨터, 꿈, 키보드」 부분
‘*’표의 각주를 참조해보면, ‘populous’(인구가 조밀한 인파가 많은, 군중이 붐비는)는 컴퓨터 게임과 관련된 고유명사인 듯하다. 게임이름이나 게임 종류, 혹은 제조회사일 수도 있겠다. 어찌됐든, 이 게임의 주체는 신神이다. 신은 자신의 종족을 위해 마을과 성가 기사를 늘려야 하고, 악마의 종족과 악마의 기사들을 무찔러야 한다. 이러한 신들이 전쟁은 모니터 속에서 흰 점(신의 종죽수)을 늘려야 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모니터 속 ‘신의 세계’는 철저히 레벨화, 점수화되어 있다. 그리고 일정 점수 이상을 획득하면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게임의 법칙이다. ‘다른 세계(다른 레벨)의 존재방식(게임규칙) 또한 다르지 않다. 인용시에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의 세계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 장엄한 신들이 전쟁 속에서 인간의 현실은 왜소할 뿐 아니라 심지어 존재감조차 없다. 인간의 세계는 신들이 세계로, 현실세계는 철저히 프로그램화된 게임의 세계로 대체된다. 게임 속 가상적 주체도, 패러디텍스트 속의 패러디 주체와 오버랩된다. 이러한 주체는 원텍스트의 가상현실에 의해 사물화되고 메카니즘화된 주체이자, 내면까지도 테크놀로지화된 주체다.
컴퓨터의 전자언어를 모방하여 패러디의 테크놀로지화를 실험하는 이러한 패러디 형식은 후기자본주의의 테크놀로지화된 구조를 반영한다. 결과적으로 시의 장형화 산문화, 단편화, 분열증화, 비속화, 다성화, 짜깁기화, 부조리화, 유희화를 초래하기도 하는데,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하는 대량복제의 소비사화에서 시정시를 쓴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역설적 동기를 함의하기도 한다. 성기완이 언급했듯, 시인에게 있어서 테크놀로지화된 패러디란 시의 타락한 형식이자 시의 죽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루카치가 소설을 일컬어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으로 인한 ‘타락한 사회의 타락한 형식’이라고 명명했던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정끝별, 『패러디』, 모악, 2017, 66~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