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그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였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시 여기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갔다가, 그곳에서 또 다른 마을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기 마을로 되돌아온다고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있었고 이와 같이 말했고 이와 같이 침묵했다.
나는 그 마을에서 다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있었고 이와 같이 말했고 이와 같이 침묵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다시 우리 마을로 되돌아왔다.'라고.(*1)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1) “이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pubbenivāsa-ñāṇa]의 비유에서
이처럼 그날 행한 행위가 분명한 것(pākatā)은 그날 갔던 마을 세 곳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해야 한다.
숙명통을 얻음은 마치 마을 세 곳을 간 사람과 같고, 세 가지 존재(tayo bhavā)는 마을 세 곳과 같고,
비구가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기울이고 앉아 있을 때
세 가지 존재에서 행한 행위들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마치 그 사람이 마을 세 곳에서 행한 행위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MA.ⅱ.323)
20.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말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말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대문이 있는 두 집이 있는데,
눈 있는 어떤 사람이 그 가운데 서서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2)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
(*2) “이 비유에 의하면, 죽음과 재생 연결(cuti-paṭisandhi)은 마치 대문이 있는 두 집과 같고,
신성한 눈[天眼]의 지혜[天眼通]를 얻음은 마치 눈 있는 사람과 같고,
신성한 눈[天眼]을 얻은 사람이 빛을 확장하여(ālokaṃ vaḍḍhetvā) 살펴볼 때
죽고 태어나는 중생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은 마치 눈 있는 사람이 두 집 사이에 서서 볼 때
두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과 같다.”(MA.ⅱ.324)
21.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마치 산속 깊은 곳에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호수가 있는데,
눈 있는 어떤 사람이 그곳 둑에 서서 조개껍데기, 자갈, 조약돌,
움직이거나 가만히 서 있는 물고기 떼를 보는 것과 같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 호수는 참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구나.
여기 이런 조개껍데기도 있고, 자갈도 있고, 조약돌도 있고,
물고기 떼도 있어 움직이기도 하고 가만히 서 있기도 하는구나.'라고.(*3)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4)
(*3) “눈 있는 자가 둑에 서서 쳐다볼 때
조개껍데기, 자갈 등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면서 앉아 있는 비구에게
네 가지 진리[四諦]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MA.ⅱ.324)
(*4) 이처럼 본경도 4선-3명의 구조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짧은 경」(M27) §26의 주해를 참조할 것
22.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두고 사문이라고도 하고, 바라문이라고도 하고,
목욕을 마친 자(*5)라고도 하고, 베다에 통달한 자라고도 하고,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6)라고도 하고,
성스러운 자라고도 하고, 아라한이라고도 한다."
(*5) ‘목욕을 마친 자’로 옮긴 원어는 nahātaka인데, √snā(to bathe)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바라문들은 보통 8살에 스승을 정해서 그 문하에 들어가서 20살까지 12년동안
자기 문파의 베다(본집, 제의서, 삼림서, 우빠니샤드)와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운다.
이런 과정을 다 마치면 졸업식을 하는데, 요즘처럼 졸업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강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것으로 공부를 마친 것을 표시하였다.
그래서 ‘목욕을 마친 자’는 바로 바라문이 배워야할 공부를 마친 자를 뜻한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생긴 것이다.
(*6) ‘수류띠에 정통한 자’는 spttiy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오염원들을 흘려보냈기 때문에 슈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라 한다.
말끔하게 씻었기 때문에, 제거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MA.ⅱ.324)라고 설명하고 있다.
23. "비구들이여, 어떻게(*7) 비구가 사문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가라앉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사문이다."
(*7) 이 이하는 어떻게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불리고, 바라문 등이라고도 불리는지 어원적으로 설명한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해로운 법들을 가라앉혔기 때문에(samitāssa honti) ‘사문(samaṇa)’이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내쫓았기 때문에(bāhitāssa honti) ‘바라문(brāhmaṇa)’이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목욕하여 씻어냈기 때문에(nhātāssa honti) ‘목욕한 자(nhātaka)’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통달하였기 때문에(viditāssa honti) ‘베다에 통달한 자(vedagū)’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들었고, 흘려보냈기 때문에(nissutāssa honti) ‘깨끗한 자(sottiya)’라고 하고,
그러한 해로운 법들을 멀리했기 때문에(ārakāssa honti) 성스러운 자(ariya)‘라고 한다.”(MA.ⅱ.324)
24.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바라문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내쫒았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바라문이다."
25.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목욕을 마친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씻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목욕을 마친 자이다.“
26.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베다에 통달한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통달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베다에 통달한 자이다."
27.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수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흘려보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수루띠에 정통한 자(깨끗한 자)이다."
28.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성스러운 자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멀리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성스러운 자이다.”
29.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아라한인가?
그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멀리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는 아라한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
앗사뿌라 긴 경(M39)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