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63편 1-6절
설교제목 : 광야에서
위기의 시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조금씩 여름의 열기가 물러나고, 이제는 조석으로 귀뚜라미가 몸을 비비며 울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가는 자연처럼 변화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이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 인간을 위협하고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전쟁과 코로나로 인한 경제 위기 또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주 잠시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높은 파도가 치고, 이어지는 비로 맘 편하게 놀지는 못한 듯합니다. 날씨 탓도 있지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놀 수만 없는 주변 상황과 마음의 상태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높은 파도가 치는 중에도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튜브를 끼고 마냥 신이 나서 놀았습니다. 지나치게 멀리 내다 보고, 이러저러한 근심이 많으면, 순간 속에 거하며, 지금 여기가 주는 의미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녹록치 않은 현실의 압박과 위기가 있지만,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순간을 의미있게, 명랑하게 채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의 상황
오늘 시편 63편의 표제는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시”입니다. 표제는 이 시를 광야의 경험 속에서 지은 것으로 상정합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광야체험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의 위협을 받고 광야로 도망쳐 목숨을 구걸해야 했던 시기입니다. 또 하나는 왕이 된 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국에서 쫒겨나 광야로 피신했을 때입니다. 11절에서 ‘왕’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다윗을 가리켜 왕이라 지칭하는 것을 보면, 이미 왕이 된 후의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두 번째 광야체험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압살롬의 반란 기간, 다윗은 광야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런 광야체험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사무엘하 12장 11절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충직한 신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의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고, 네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너의 아내들도 빼앗아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가 대낮에 너의 아내들을 욕보이게 하겠다(삼하 12:11)”
이 재앙이 바로 압살롬의 반란이었습니다. 이 쿠데타로 압살롬의 근친상간과 다윗의 왕권이 찬탈당합니다. 이런 상황을 노래한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 51편과 63편이 직접적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광야로 내몰린 것은 그가 왕으로서 교만과 자만에 빠져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갈, 엘리야, 계시록에서 용을 피해 광야로 도망친 여인은 박해의 상황에서 피신하거나, 우연히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광야에서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고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광야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에서의 광야는 철저하게 범죄의 결과로 내몰린 상황입니다.
팽창된 정신은 하나님과 같은 상태를 초래하기에 하나님과 부조화의 상태에 놓이고, 결국 의식은 과대한 상태에서 어그러진 행동을 합니다. 이런 팽창으로 인한 범죄에도 다윗은 다시 왕권을 복원합니다. 다윗은 단지 죄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죄에 대한 뉘우침, 회개를 통하여 이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자신에게 네 가지 걱정거리가 있는데, 마지막이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김형찬 옮김, 《논어》, 홍익출판사, p91-92]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 고치는 것은 회복을 가능케 합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발달해가는 상태에서 팽창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이런 팽창으로 죄를 통해 내몰리는 광야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또 다른 경험과 배움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신 8:2-3)”
광야는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배우는 학교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척박하고 외로운 광야를 경험할 때 우리에게는 이것이 나의 몸을 낮추게 하는 배움의 과정이자, 교육의 장이 됨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갈망의 배후
시인은 광야를 가리켜, ‘물기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라 부릅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갈망하며/개역개정),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앙모하나이다/개역개정).”고 고백합니다.
광야에서 아무것도 그 누구도 기댈 수 없을 때 신성함, 하나님과 접촉하려는 갈망은 긴박해집니다. 갈망이나, 결핍, 어떤 내적 요구를 경험한다면, 바로 그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언가가 존재해야 합니다. 랄프 에머슨Ralpgh Waldo Emerson은 우리의 결핍감은 “영혼이 엄청난 요구를 할 때 나타나는 미묘한 암시”라고 합니다.[에드워드 F. 에딘저 지음, 심상영 옮김(2018) : 《융심리학과 시편》, 한국 심층심리연구소, p148] 이런 갈망과 욕구가 생명의 작용과 타고난 반응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것은 영혼이 나의 결핍과 무지에 대하여 무언가의 필요를 요청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꿈에서 종종 꿈의 자아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인격상이나 무언가를 행동하기를 요청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이나 먹거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경우 실제로, 우리의 영혼은 그것이 고갈된 상황이며, 요청하는 것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누군가가 제안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저의 꿈에서 어떤 개발이 예정된 지역에서 어떤 집에 들어갔는데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제 손에 든 것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제 손에 있는 것은 나중에 제가 써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지 않고 대문을 나와 버렸습니다. 저의 분석가는 할머니가 달라고 하시면 주면 어떨까하고 하셨습니다. 자아의식이 생각하는 확고부동함과 방식은 낯선 인격에게 절대로 나의 것(정신 에너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심상은 나름의 목적 의미를 가지고 영혼의 결핍된 상황, 갈망을 가지고 말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요청에 수용적이라면, 비가 메마른 땅에 생기를 주듯 충족에 대한 갈망이 영혼에 생기를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망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융은 황무지(광야)에서 경험하는 목마름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 고려해 보라. “모든 욕구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결코 최선의 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다. ... 당신이 세상이 모두 바라는 것에 매달릴수록 당신은 여태까지 그 자신을 발견한 못한, 세상을 통하여 헛고생을 하는 보통 사람인 것이다. 마미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면 몽유병자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처럼 공허에 빠지게 된다(에딘저의 독일어번역). 보통 사람은 일반 대중이다.[C.G. Jung, Mysterium Coniunctionis, C.W.14, paras.189-192]
융은 모든 욕구의 배후에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피력합니다. 시인은 모든 것이 척박하게 버려지고 어떤 만족을 주지 못하는 내적 공허 속에서 결국 주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모든 목마름과 황폐함 속에서 일어나는 욕구 뒤에서 발견한 것은 영원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지상적인 만족을 가져다는 것을 모두 빼앗긴 후 가장 근원적 갈망을 발견합니다. 이런 황무지의 경험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갈망, 영원에 대한 갈망뿐임을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망과 결핍의 배후에서 영혼의 목마름의 소리를 듣고 영원에 대한 갈망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결같은 사랑
영혼의 갈망, 영원에 대한 욕구를 알아차린 후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내 영혼이 만족하니, 내가 기쁨에 가득 찬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63:3-6)”
시인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찬양하고, 주님을 기억하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자식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 나를 살게 하고, 내 영혼에 만족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임을 노래합니다. 외부세계에 누구도, 그 무엇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주님만을 기억하고 주님만을 생각하며 다시 주님과의 진정한 연결을 시도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맛보게 하십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