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산
回想錄, 12 어페터 리덜 투 (a platoon leader to) 동막골
경기도 연천군 동막골은 약 20km에 이르는 깊은 골짜기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신탄리 신망리 연천읍 동쪽으로 고대산(832m) 중심으로 남쪽으로 지장봉 능선을 따라 대관봉(800m), 삼각봉(815m) 등 동과 서로 즐비하다.
CPX(command post exercise) 지휘소 연습시 우리 부대는 실 병력이 기동을 했다. 대광리에서 출발 신탄리를 걸쳐 고대산(832고지) 정상을 완정군장(20kg)을 매고 넘는데, 왜소한 몇 몇병사가 힘에 부치자 필자는 소총 (M1소총, 4kg) 3정을 받아들고 넘었다. 그리고 동막골로 접어들었다. (훈련은 전투다) 절경이 험악해 보이면서도 신비하기도 하다. 어쩌면 도적의 소굴이 될 법도 한곳이다 걷고 걸어도 마을은 보기 힘들고 깊은 골짜기의 연속이었다. 적막감이 없잖아 있는 곳이다. 불현듯 무장공비가 출몰할 것 같기도 하고, 귀신에게 홀려 갈 것 같은 음침하기도 했다. 중식은 반합에 휴대한 주먹밥을 먹었다. 꿀 맛이다. 그리고 휴식시간에는 군용 건빵에 수통에서 께낸 물 한 목음이 천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또한, 봉지 안에는 아기별 사탕이 맛이 감미롭다. 훈련은 내 목숨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가보지 않고는 머라 표현하기 힘들 것 같다. 현재는 동막골 유원지로 개발되어 많은 여행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연천군은 삼한시대는 진범군에 속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지배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는 삭녕군이 었다. 필자의 최천로 분은 소벌뚜기 경주최씨로 좌의정 우의정 6조 판관을 지내고 녹봉으로 받은 곳이다. 조선 시대는 1416년 (태종14년 )연천현으로 고쳤다. 연천읍은 38선의 90%가 북한지역이었다. 6.25로 80% 의 면적이 남한지역이다. 인구는 4만 6천 명 이다.
6.25 때는 미 제3사단그리고 필린핀 1개 대대와 중공군 38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연천군 동막리 동막골은 높은 산과 깊은 골이 지세를 이루어, 드라마 왕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웰컴투(welcome to) 동막골이라는 영화는 실체는 없고 연천의 동막골에서 따왔다. 6.25 전투의 현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팩션(fiction)으로 그린 영화다. ~웰컴 투:레슬링에서, 상대편의 등을 공격하는 기술의 하나.~
연천군 대광리 신망리 신탄리는 필자의 소대장과 정보장교, 인사장교를 지냈다. 인사장교, 군수장교. 정보장교 (필자) 신탄리는 경원선 철도 중단점(신탄리역) "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청량리에서 의정부 ~ 동두천~전곡~ 연천~ 철원~ 평강~ 원산으로 이어진 철도였다.
신탄리역 신탄리는 6.25 이전에는 38선 이북지역이다. 마을 주민은 100여 가구 즘 된다. 사상적으로 의심가는 지역이라 보안대 요원이 파견된 곳이다. 이곳은 규암 노천광산 지역이다. 규암에는 70%가 석영이다. 석영에는 27.5%가 규소다. 석영은 유리 원료다. 규소는 세라믹 원료다. 전기 부도체로 전자장비 우주선 등에 쓰인다. 당신 8톤 트럭에 1십만원 했다. 당시는 큰 돈이다. 특히 당시 민통선을 통과 검수관이 정보장교였으니,(소대장 보직 끝나고 정보장교를 했다.) 1시간만 지체시켜도 시간이 돈이기때문이다. 필자를 대하기를 하늘에 별같이 대했다. 공휴일에는 부대장과 후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어쩌다 고물수집하는 사람이 민통선을 숨어들어 박격포탄 105미리 폭탄(6,25 때 쓰였던 폭탄)을 수거, 분해하여 신주를 수집하다 폭탄이 터져, 비참한 모습이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대광리는 사단 예하 연대 지휘부 (3개 부대, 사단 직할 부대 등)가 있어 군인 가족들이 많아 교통요지이면서 음식점과 유흥주점 잡화점 야체점 숙박업소 등 다소 많다. 필자도 민박을 했다. 해서 공휴일에는 문화 생활이 동료들과 다방에서 tv 봤다. 1 시간이지나면 다시 커피를 시키지않으면 퇴출이다. 대광리에서 소대장 시절(필자)
연천읍은 교육, 행정, 교통, 문화 등 연천군의 중심 도시다. 그리고 포천 기갑여단 전차 사격장이 있어 미군이 들일 때도 있다. 읍내는 군인 면회 오는 손님 등이 있어 소비도시다.(20사단, 28사단, 군단 직할부대 등) 필자는 어쩌다 읍내까지 원정 가기도 했다. (당시 군장병까지 이동인구가 일일 5천명)
필자는 1년쯤있다가 gp 장으로 갔다. 20사단 내에서 소대장 경연대회에 사격과 필기시험에서 1등을 했다. 그리고 음어 조립 및 풀이, 군단 경연대회에서 1등일하기도 했다.(나중에 정보장교) 연대장이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6.25 때 현지 임관했는데 고향이 제주도 애월읍 신엄리 분이었다. 이름이 임홍대 분이였다. 인사 주임은 오현고 선배에 육사 출신에 세화리 분이다. 성함은 고재천이였다. 대대장 분도 6.25때 현지 임관 했는데 나를 무적이나 앗겨줬다. 그런데, 연대장은(1973년) 운이 나빠서 였는지, 수색중대 인사계가 운전병을 데리고 군사분계선 상의 화살머리 gp (남북유해발굴지역) 너머. 짚차 타고 월북 사고로 보직 해임과 동시 제대 하셨다.(운명은 장난이였나 봅니다.)
마을을 끼고 찬탄천 이흐른다. 발원지는 철원 평야의 소이산 이다 차탄천을 끼고 기찻길이 철원까지 연결된다. 연천읍을 조금 벗어나면 군남땜이 있다. 추억에 남는 것은 차탄천에는 메기, 송사리가 많다. 필자는 동료(2명)와 와야줄울 풀어 전기를 연결시키면 때거지로 잡아, 때는 만춘이라 실개천에 진달래 향기에 취하고 소주잔에 취해, 깨고 보니 생활관이었다.
신탄리 역장은 경상도 분인데, 근무 인원이 1인 3역이었다. 부인은 식당을 했는데, 필자는 아침과 저녁을 붙쳬 먹었다. 그런데, 사랑싸움인지, 역장은 부부싸움이 자주였던 것 같았다.
신탄리에는 미군 무선감청 분소(9명)가 있었다. 부대 안에는 농구장, 탁구장, 당구장, 영화관 등 문화시설이 잘 되여 있다. 영화는 수요일 금요일 6시 이후에 상연 되였다. 분소장이 미군 대위다. 내가 가면 양주와 양담배는 무료로 준다. 나는 p.x에서 라면 을 사고가면 무척이나 좋아했다. 분대원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감봉이다. 주둔지 경계는 걔들의 봉급 일부를 거출해 한국 군속이 선다. 개들은 근무시간에는 상하 관계가 뚜렷하지만, 일과가 끝나면 상하 관계가 끝난다. 거시한 말로 오후 5시가 되면, 양공주 아가씨들이 정문에 대기 하기도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유행의 1번지가 동두천이라 했다. 미 2사단 및 후속 부대까지 하면, 2만 명이 었다, 군속과 써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 많았다. 오후 4 시부터 미 2사단 정문에는 여자 남자 장사진을 이룬다. 모든 외제품이 퇴근하는 미군이 갖고 나오면 중계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깨비 같이 차려 입은 아가씨가 있는 하면, 양귀비 처럼 고운 아가씨도 있고 도깨비 같은 흑인이 있는가 하면, 해적 같은 백인이, 동두천 시내를 활보하는 모습은 정말로 이색적 이었다 그 들을 상대하는 양품점 등 역시 형형색의 차려 입은 옷과 레온 불빛은 정말로 찬란했다. 그 들의 발란한 몸 놀림은 한 편의 쇼를 보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기타 에피쇼트(episode)는 지면상이라 생략 합니다. 동두천과 의정부에는 tv 안테나가 가을철 하늘을 수 놓은 잠자리처럼 아름답게 만 느껴졌다. 그 곳에 간 날은 딴 나라에 온 것 같았다. 필자는 의정부 분소장 집에 자주는 아니지만, 갔을 때, 계약 결혼한 한국인 여성이 있었다. 사단 마다 위수지역이 있다. (비상시 1 시간내 부대에 복귀할 수 있는 곳) 그래서 기차, 버스는 검문소에서 경찰 보안요원 헌병 합동 검문소에서 검문을 한다. 서울로 외출할 때는 미군 분소장 차(車)에 동승하면 통과다.( 미군은 검문이 없다) 복귀할 때는 기차는 청량리역에서, 버스는 마장동에서 출발 했다 .(복귀는 검문이 없다)
분소장과 좋은 인연도 gp장으로 발령 밭으면서 끝 이었다. 때가 되면 필자는 "a platoon leader to 동막골" 시나리오(scenario)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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