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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임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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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노백헌 정재규
대산 강원기 추천 0 조회 199 17.10.04 1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노백헌 정재규


합천군 쌍백면 사무소에서 2킬로미터 쯤 들어가면 ‘묵동(墨洞)’이란 마을이 나온다. 묵동이란 마을 이름에서 ‘선비 고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 나가 마을에 선비들이 예전처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 뒤에 있는 ‘노백서사(老柏書舍)’가 선비 마을의 전통을 증명해 주고 있다.
‘노백서사’에 들어서자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공자가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늙은 잣나무를 뜻하는 ‘노백(老柏)’이란 말은 분명 공자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서사의 주인을 떠올렸다.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그는 노사 기정진의 뛰어난 제자이다. 노사 제자 중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 스승를 모신 장성의 고산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노백헌은 고려 문숙왕 때 광유후(光儒侯)로 봉해진 정배걸(鄭倍傑)을 시조로 하고 있는 초계 정씨 후예로 1843년 묵동에서 정방훈(鄭邦勳)의 아들로 태어나, 22세 때인 1864년 동향 선배 최유윤(崔惟允)의 권유로 4백리 먼길을 걸어 장성으로 노사를 찾아갔다. 이미 67세의 노령인 노사는 노백헌을 처음 보고 재주가 남다른 것을 느꼈다.

 

자신의 앞에 가까이 앉으라 권하고 “선비의 학문은 나를 위하는 것과 남을 위하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나를 위하고 남을 위하는 것인가를 분별하여 나갈 곳을 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照顧後面切忌貪前’(공부하는 법은 이미 배운 것을 완숙하게 익히고 절대로 앞으로 배울 것을 탐내지 말라)라는 독서하는 방법 8자를 써주면서 경계하도록 했다. 이때 묵동으로 돌아온 노백헌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산사에서 소학과 사서등을 읽으면서 뜻을 돈돈하게 해서 처음 읽는 것과 같이 독서를 하고 다시 방문을 하니, 노사는 노백헌을 시험해보고 “다만 내가 늙어 네가 크게 성취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면서 노백헌의 자질을 인정했다.


노백헌은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랐다. 조부인 구이헌(懼而軒) 언민(彦民)이 입구(口)자와 귀이(耳)자를 가르치자, 한참 듣고 있다가 “그러면 몸의 각 기관을 나타내는 글자가 다 있을텐데 그 글자는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했다. 조부가 “책에 있느니라”라고 하자“그러면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두 글자가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보는 것마다 묻고 때로는 책을 펴고 묻되 “아무 글자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음을 붙이고 의미를 공부해 나갔다. 이런 모습을 본 조부는 매우 가상히 여겨 “이 아이가 이제 겨우 다섯살인데 추리를 할 줄 아니 장래에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8세 전에는 본격적인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8세가 되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자 글의 뜻을 스스로 해독할 줄 알았다. 조부가 “학문은 글을 읽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소학과 사서가 다 네 스승이 된다”라고 하니 “나에게는 스승이 다섯명이나 있다”고 하면서 소학과 사서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친 친구인 지와 정규원은 노백헌의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뛰어난 문장을 지녔으니 보통 선비로 대접할 수 없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백헌은 노사의 손자인 송사 기우만과 친분이 두터웠다. 송사는 학문이 깊고 덕이 높아 노백헌의 유익한 친구였다. 서로 친밀하여 스승을 모실 때 같이 질문하고 물러나면 서로 토론하고 해서 이로부터 식견이 높아졌다.


25세때 달성 향시에 합격하고 대과에 나아갔다. 이때 정승인 김병시가 노백헌의 숙부와 친분이 있어 한번 보고자 했다. 노백헌이 “정승집에 출입하는 것은 해괴한 일이거늘 하물며 시험보러 와서 청탁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시험을 보고 난 뒤 한번 보고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숙부의 명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나라일이 날로 그릇됨을 보고 다시 과거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1860년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조정에 제출하고 개화를 주장하자, 이때 노백헌은 유학의 큰 변란이라고 여겨 도내 유림들을 규합하여 임금에게 상소를 하기를 “국가에서 유교를 높이고 선비를 기르는 것은 장차 도를 밝혀 세상의 아름다운 풍속을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유학이 쇠퇴하고 이단이 발전하여 사람이 금수가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돌이킬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뜻이 없어지게 됩니다”라고 하면서 김홍집 등이 주장하는 것을ㄹ 규탄하면서 위정척사의 견해를 드러내었다.


이 당시 고산 임헌회의 제자인 신두선(申斗善)이 삼가 현감으로 부임을 했다. 신두선은 부임하자 마자 노백헌을 방문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을 물었다. 노백헌이 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자 신두선은 “남쪽에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선비를 보았다”고 하면서 선생으로 초빙해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때 노백헌은 ‘격몽요결’과 ‘대학’ ‘가례’등을 교재로 삼아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면 학칙을 엄하게 하고 직접 몸으로 시범을 보이면서 학문을 독려했다.


노백헌은 남명 선생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하고 뇌룡정이 폐허로 남아 있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겼다. 현감에게 청하여 다시 중수하고 규약을 정하여 봄 가을로 강회를 열고 석채례를 행하여 남명 학문의 요체인 경의지학(敬義之學)을 강조하니 마을의 유풍이 진작되고 ‘영남학문’을 말할 때 반드시 삼가를 첫손으로 꼽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노백헌은 통곡을 하며 산으로 들어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임금이 원수에게 갇혀 계시니 어찌 평소와 같이 먹고 마시고 할 수 있겠는가. 선비가 비록 초야에 파묻혀 있다고 하더라도 500년 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종사가 위태롭고 임금이 포로가 되었는데 어찌 탄식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동지와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재촉했다. 그리고 바로 정산(定山)으로 달려가서 면암 최익현과 함께 영호남 유림들에게 포고문을 띄워 노성 궐리사(闕里祠)에 모여 의거를 약속했지만, 외부 방해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성에 들러 스승 노사 묘소에 참배하고 산중에 평생 은거하면서 살 궁리를 했다.


이로부터 5년 후 나라가 망하고, 왜놈들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란 돈을 마련해 선비들을 포함한 지역의 유지들에게 주고자 했다. 노백헌도 그 대상이 되었으나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은사라는 말 자체가 가증스럽다. 이것은 나의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다. 선비는 죽음을 당할 지언정 모욕은 당할 수 없는 것”이라며“차라리 내 목을 베어가라”고 하면서 완강히 거부했다. 이듬해 2월 13일 쌍백 묵동의 노백서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였다. 장례 때는 동료들과 문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해 지은 만사가 천여장이 되었다고 한다.


문인 권재규(權載奎)가 지은 노백서사 기문에 보면 “물계(勿溪)의 소덕동(小德洞)에 우뚝솟은 삼칸 집은 우리 사문 정선생이 은거하여 수양하시던 집이다. 이곳은 일찍 노사 기선생이 지나간 적이 있으므로 첨과당(瞻過堂)이라고 한다. 이곳이 모두 노백서사이다, 그것은 선생이 1870년(경오) 생일저녁 꿈에 지은 시를 인용한 것이다. 그 집은 높지만 깊이 숨어 있으며 형세는 깊지만 앞이 열리어 있다. 그리고 지척에 있는 마을은 서로 가로 막히어 보이지 않으며 구름을 문으로 삼고 산을 울로 삼고 있으니 이곳은 참으로 노백헌 선생께서 은거할 만한 곳이라고 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망한 나라의 선비로서 지조를 지키려고 했던 노백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노백헌은 ‘애산(艾山)’이라는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칠년병(七年病) 삼년애(三年艾)’라는 말에서 취한 뜻으로 ‘칠년 묵은 병에 삼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말이다. ‘노백헌’이라는 호보다 먼저 스스로 지은 호로 ‘평소에 미리 구해놓지 않으면 급히 구하려고 하면 얻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학문 지향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나이에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도 싶다. 지금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백서사도 오랜 세월 만큼이나 퇴색돼 찾는 이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


19세기 우리나라 유학은 영남 계열의 한주학파(寒洲學派)와 기호 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 등

 4학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당시 강우지역도 이들 학파의 학자들과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학문을 계승하는 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노백헌 정재규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의 3대 문인 중 한 사람으로 노사학파의 중심 인물이다. 강우지역인 합천에 살았던 노백헌이 기호계열 노사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점은 그가 지금 우리 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큰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노사학파 인물들은 같은 기호계열의 연재학맥, 간재학맥을 이은 인물들로 부터도 학문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노사학파의 성명이기설(性命理氣說)이 당시 기호계열의 학자들이 신봉하던 주기설(主氣說)을 비판하고,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노백헌의 스승 노사 기정진은 생전에 자신이 저술한 성리설이 당시 학계를 주도했던 기호학파의 이론인 율곡의 주기설과 배치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노사는 자신의 성리학에 관한 대표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879년 1월에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는데, 이때 노사의 부름을 받은 제자가 김석구(金錫龜) 정의림(鄭義林) 그리고 정재규(鄭載圭)였다. 이후로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노사학파의 3대 제자라고 불렀다.


노사의 3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노백헌은 한주 이진상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허유, 곽종석, 이승희 등 한주학파와 교유한 것은 물론 김평묵 최익현 유기일 등 화서학파와도 교유하였다. 그는 노사학파의 학풍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한주학파와 화서학파 등과의 교류로 인해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누구보다도 폭넓게 이해하였다.
노백헌은 마음을 항상 경(敬)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생각하는 것을 경으로 아니하면 생각이 천만갈래로 갈라져 정미로운데 이르지 못하고, 행동할 때 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행동이 천방지축이 되어 원대한 곳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경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경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으로 주재하는 것이 바로 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부 목표는 성현을 닮고자 하는데 두었다. 구차하게 큰 소리만 치는 사람들을 미워하였으며, 도를 굽혀 출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백헌은 1900년에 ‘노사선생언행총록’을 편찬한 것을 비롯해 ‘노사집’ 교정에 참여하였고, 뒤에 산청 단성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노사집을 중간할 때 일을 주도했다. 노사집이 간행된 이후에 송병선을 중심으로 하는 연재학맥 사람들이 노사의 학설이 율곡의 학설과 어긋난다며 노사집 훼판을 요구했는데, 노백헌은 이를 반박하며 노사의 학설을 옹호했다.
노사와 노백헌은 다른 주리파 학자들과는 달리 이(理)와 기(氣)를 이원(二元)으로 대립시켜 이해하지 않고, 일원적(一元的)으로 기(氣)를 이(理)속에 포함되는 분(分)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했다. 이를 연재학맥 사람들이 비판을 한 것이다.


이때 노백헌은 ‘변무문시제동지(辨誣文示諸同志)’라는 글을 통해 “도리는 무궁하고 시비(是非)는 지극히 공정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 “학문은 강론으로서 밝혀지며 말은 때로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앞의 성인이 펴지 못한 것은 뒤의 현인이 펴서 넓혀가는 것이요. 앞의 학설이 합치되지 못하면 뒤의 학자가 변별하여 밝혀가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새로운 학설을 세워서 앞의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라는 입장을 제시하면서 “스승의 성리설이 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며 그 바탕은 율곡에 있다는 것”을 천명했다.


결국 노백헌은 스승의 이기심성(理氣心性)에 관한 학설이 율곡의 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선현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러한 예는 주자에게서도 볼 에게 수 있다고 하면서 율곡의 뜻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해 주기의 설에 빠진 당시의 학자들에게 율곡의 뜻인 ‘이를 밝히는 것(明理)’라는 입장을 재천명했던 것이다.
노백헌은 이처럼 노사의 성리설을 충실히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정척사 실천정신도 계승했다. 노사학파의 위정척사 정신은 한말 의병활동으로 바로 연결돼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그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백헌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영호남의 유림들에게 포고문을 보내 조약의 부당성을 각국 공관에 알려 이를 호소하고 최익현과 함께 의거를 도모했다는데서도 알 수 있다. 또 얼마 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포고문을 작성하고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합천의 노백서사(老柏書舍) 기문에 “어진 사람은 도덕을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불행한 세상을 당하였을 때는 온 세상을 화기로운 봄바람처럼 구제하여 만물이 발육하게 하는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등지고 궁산(窮山) 절학(絶壑)으로 가서 자기 혼자 지조를 지키는 것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었겠는가.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수십 년전에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선생은 그 뜻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 자욱한 창가에서 혼자 괴로워하시며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없었으므로 이 노백서사를 신축하는 것은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불행한 시대를 살다간 노백헌의 고민을 알 수 있는 글이다. 만년에 노백헌은 서실을 짓고 송백과 같이 살기를 원했다.


“성인이 송백은 뒤에 시든다 라고 말한 뜻은 무엇인가. 작은 것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절개를 지키고 하나의 의로운 일을 행하는 평범한 선비들도 해낼 수 있는 일이지만, 크게 말한다면 그 오묘한 도를 밝히어 떨어진 도를 계승하고 사악한 이야기를 저지하고 인심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 작은 몸으로 천하의 대세를 저항하는 것이니 어지로운 세상에 영웅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위태로운 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생은 잣나무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백헌의 의리를 말한 글이다. 문인 권재규는 다시 “선생의 마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선생의 도를 자신의 도로 삼으며 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단정히 하고 의리를 정밀하게 궁구하여 날마다 하는 일에 사용하고 오직 중행(中行)을 회복하여 만길이나 되는 벽처럼 서서 이것이 한사람으로부터 두 사람에게 행해지고 한 가정으로부터 두 가정에 행해진다면 완연히 뒤늦게 마른 잣나무가 될 것이다. 이것은 선생의 문하를 출입한 제자들의 책임이며 선생이 후세에 바라시던 것이니 이점 모르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하여 노백헌의 바람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노백헌 정재규. 1843년 합천에서 태어나 22세 때 장성 하사(下沙)에 있던 노사 기정진에서 수학하면서 노사학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15년동안 사사하면서 학문 종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3대 제자로 불리며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156번지에 있는 스승 노사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돼 있기도 하다.

▲노백헌 정재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경덕사. 합천 쌍백면 노백서사 뒷편에 있다. 작은 사진은 노백헌 학문과 사상이 담겨 있는 문집. 경상대학교 고문헌 도서관인 문천각에 소장되어 있다.

 

 

 

유학자 노백헌 정재규 의병활동

 

 

제83회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12일 조선조 최후의 성리학 거유인 노사 기정진선생의 수제자로 널리 알려진 유학자 노백헌 정재규 선생(사진·1843~1911)이 의병활동에도 참여한 것이 드러나 관심을 끌고 있다.


12일 향토사학자 추경화(총효례 실천운동본부 진주지부 대표)씨는 “항일투사열전 제3권을 발간하려고 자료를 수집하던 중 유학자로 알려진 노백헌 선생이 의병운동도 한 것을 발굴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정재규 선생이 의병활동을 했다는 거증자료는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1권 240페이지에 기록돼 있는데, 자료에는 ‘중앙에서 아관파천이 있은 후 1896년 경상도 서남 지방에서 안의(安義)의 학자 신암 노응규가 영도하는 의병진의 진주 입성이 있었다(중략) 유학자 애산(정재규 선생의 아호) 정재규가 의병활동에 가담하니 진주 일대는 의병의 세력으로 충만하고 항일의 함성으로 진동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 김상곤씨가 펴낸 ‘노사 기정진 연구’에도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정재규 선생의 기개 넘치는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
‘노사 기정진 연구’에 따르면 정재규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영남 선비들에게 포고문(布告文)을 내어 각국 공관에 알려 만국에 공법호소하며 왜와 담판하기를 촉구하였으며, 1906년에는 충남 논산 궐리사에서 면암 최익현을 만나 의거를 도모했다.


또한 정재규 선생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우리들은 죽지 않으면 포로다. 구차하게 사는 것은 하루하루가 수치다. 평생토록 성현의 글을 읽고 강론한 것이 무엇인데 오늘의 마지막날에 수치스러운 귀신이 되어 끝나는가”라고 통탄하면서 오로지 저항속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생전엔 수많은 제자들에게 애국애족을 가르쳤다.


정재규 선생은 문집을 49권이나 남겼고 전남 장성군 고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높은 학문을 짐작케 한다.
추경화씨는 “유학자이면서 의병활동도 한 정재규 선생의 새로운 면을 찾아내 기쁘다”고 말한뒤 “아직 정재규 선생이 아직 정부 포상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정재규 선생의 출생에 대해 추경화씨는 “원래는 진주 출생인데 정 선생의 손자의 본적이 합천 초계라서 김상곤씨의 ‘노사 기정진 연구’에 합천 태생으로 기록돼 있으나 실은 진주분”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진주보훈지청이 발굴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적자료는 있지만 미포상자 중에 정재규 선생도 포함돼 있는데 이자료에도 정재규 선생의 출신지는 진주이며 의병활동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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