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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극겸 문극겸의 자는 덕병(德柄)이며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그의 부친 문공유(文公裕)는 지문하성사 집현전 태학사(知門下省事集賢殿太學士)를 지냈고 시호는 경정(敬靖)이라 하였다. 문극겸은 처음에 백부(伯父) 문공인(公仁)의 음사 관계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국가 제도에 남색 괘자(藍衫)를 입는 관원들은 세 번 이상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다. 문극겸이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관직 없는 사람도 열 번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데 남색 괘자 입는 관원에게만 어째서 세 번으로 제한하는가?”라고 하고 다섯 번을 한도로 하자고 요청한 결과 조정에서 그의 의견을 들어주어 드디어 5차 응시가 예규로 되었다. 문극겸이 벼슬에 종사하면서도 학업을 중단하지 않아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정언(左正言)으로 되었다. 왕의 침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기를 “내시 백선연(白善淵)은 국권을 농락하여 상벌을 제 마음대로 하며 비밀리에 궁녀 무비(無比)와 추잡한 행동을 감행하였으며 술사 영의(榮儀)는 미신으로 왕을 유혹하여 백순(百順), 관북(館北) 두 궁을 설치하면서 사사로 재물과 돈을 저장하여 두고 기도하는 비용에 씁니다. 그는 백선연과 더불어 그 일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무릇 양계(兩界) 병마사(兵馬使)나 5도(道) 안찰사(按察使)가 대궐에 왔다 떠날 때에는 반드시 두 궁에서 연회를 베풀어 위로나 송별을 한 후에 각각 지방 산물(方物)을 헌납하라 하여 그 공납하는 수량의 다소에 따라서 지방관의 공적을 평가하여 줍니다. 심지어 지방에서 공납하는 비용을 집집마다 추렴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습니다. 지 추밀사(知樞密事) 최유칭은 중요한 관직을 맡아보는데 그 세도는 일국을 움직일 정도이며 재물에 대한 탐욕이 끝이 없어서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중상합니다. 그래서 누거만의 재물을 긁어 모았습니다. 백선연과 무비는 참형(사형)에 처하고 영의는 쫓아 내서 목자(牧子)로 삼으며 최유칭은 파직시킴으로써 국민에게 사죄케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상소는 그의 말이 왕의 내실에 관계되는 일에까지 언급되었으므로 왕이 대단히 노하여 그의 상소문을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최유칭이 대궐로 들어와서 자기의 문제를 대질하겠다고 청하니 왕이 문극겸을 불러 최유칭과 대질시켰다. 이때 문극겸의 말이 지극히 절실하고 대단히 정당하였으나 결국은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강직 당하였다. 처음 문극겸이 이 상소문을 초안하였으나 간의대부 이지심(李知深), 급사중 박육화(朴育和), 기거주 윤인첨(尹鱗瞻) 등이 서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극겸이 강직당하는 것을 보고도 심상히 여기고 일을 보았다. 그래서 그때 어떤 사람이 “같이 사귄 명사들이어! 낯가죽이 어찌 그리도 두터운가?”란 시를 지어 풍자하였다. 문극겸이 황주에 도임한 후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게 되었으며 정사를 잘 한다는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고관과 근신(近臣) 중에 그에게 숙감을 품은 자가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과오를 크게 만들어 왕에게 말하여 파면할 것을 청하니 임금도 역시 전일의 노염이 풀리지 않아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강직시켰다. 소관 관리들이 말하기를 “문극겸은 충직한 말을 하는 신하인데 거듭 외직으로 강직시킴으로써 말문을 막는 것은 의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되었고 후에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되었다. 정중부 난에 문극겸이 성(省)에서 수직하고 있었다. 사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쳐 숨었더니 어떤 병정이 발자국을 따라 그를 체포하였는데 문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전 정언(正言) 문극겸이다. 왕이 만약 내 말을 들었던들 어찌 오늘의 이 지경까지 되었겠느냐?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 주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그 병정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여러 장군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여러 장군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가 전부터 듣던 이름이다.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궁성에 가두어 두었다. 의종이 남방으로 가면서 마상에서 한탄하기를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후에 여러 신하들에게 관직을 임명할 때 문극겸을 석방하고 비목(批目)을 쓰는 임무를 주었더니 이의방(李義方)이 왕에게 고하여 그를 우승선 어사증승(右承宣 御史中承)으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문신으로 이공승 같은 사람들도 문극겸의 힘을 입어 화를 면하였으며 무관들도 그에게 옛일에 대한 자문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미구에 용호군 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임하였으며 재상으로 된 후에도 상장군 관직은 겸임하고 있었다.
문극겸은 미혼한 딸이 있었는데 이의방의 아우 이인(隣)에게 시집 보냈다. 이런 관계로 인해서 계사(癸巳)년 사변에 일가 친척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좌간의 김신윤(金莘尹) 등이 상소하기를 “승선의 직무는 왕의 목구멍과 혀와 같으니 왕의 말씀을 출납하는데 국한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으로 말하면 대(臺)와 성(省)의 직무를 겸임하여 궁중에서 일을 보고 있으니 겸임 관직을 해임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튿날 간관이 침전 앞에 엎드려 견결히 간하니 그제야 왕이 이준의를 위위 소경(衛尉少卿)으로, 문극겸을 태부 소경(太府少卿)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어느 날 근신들이 왕에게 축배를 드리는 연회를 베풀고 밤중까지 끝나지 않았는데 좌석이 약간 떠들썩하여졌다. 이때 문극겸이 왕에게 간하기를 “이것이 바로 먼저 왕의 폐위당하게 된 원인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왕에게 내전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였다. 그리하여 연회를 파하게 되었던바 이준의가 노하여 욕설을 하였다. 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임명되었고 여러 번 승직되어 지 원사(知院事)로 올라갔다가 송유인(宋有仁)과 사이가 좋지 못한 관계로 수 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로 좌천되었다. 그는 사공으로 임명된 후부터는 봉급을 받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모친 상사를 당하여 1년 만에 기복(起復) 명령을 받고 전 직위로 돌아 온 후 얼마 못가서 참지정사(添知政事)로 있다가 중서시랑, 평장사 판 호부사 태자태보(中書侍郞平章事判戶部事太子太保)로 올라갔다. 처음에 예관(禮官)이 태후의 기일이 동짓달이라 하여 10월에 팔관회 예식을 거행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상부(相府)에 문의한즉 문극겸이 말하기를 “팔관회는 태조께서 시작한 것으로서 천지의 신명을 위한 것이니 후대의 왕으로서는 다른 사건으로 그 기일을 변경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태조께서 신명 앞에 빌기를 ‘바라건대 대대로 동짓달에는 국상이 나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불행하게 기고가 생긴다면 이것은 국운이 장차 쇠진하여 가는 징조나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나라가 통일된 이래로 동짓달(11월)에는 나라의 기고(國忌)가 없었는데 이제 이런 일이 있는 것은 국가의 재앙으로 보겠으며 또한 10월에 팔관회를 차린다는 것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니 예관의 요청을 허락하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더니 그의 말대로 하였다. 15년에 판예부사(判禮部事)로 되었는데 그때 한문준(韓文俊)은 관등의 순위(班次)가 제2위(位)에 있었고 그 다음이 문극겸이며 또 그 다음이 최세보(崔世輔)였다. 그런데 이제 한문준이 총재(수상)로 되었으니 문극겸은 응당 아상(亞相)의 자리에 앉아야 될 일이다. 그러나 최세보의 윗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자진하여 먼저 그 자리를 사양하고 최세보로 하여금 판 병부(判兵部)로서 아상(亞相) 자리에 앉게 하고 자기는 그 다음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세보 역시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문공(文公)에게서 참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어찌 감히 그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예부(禮部)가 병부(兵部)의 윗자리라 하여 판 예부(判禮部)로 임명하여 아상(亞相) 자리에 두고 최세보를 다음 자리에 두었으므로 식자들이 그들의 자리 사양을 칭찬하였다. 이듬해에 중서문하(中書門下) 두 성(省)과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하고 미구에 권판 상서 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로 있다가 19년(1189년)에 죽으니 나이 68세이었다. 왕이 3일간의 조회를 멈추었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문극겸은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인자하고 충직하여 바른 말을 잘하였으며 식찬은 두세 그릇에 넘지 않았고 의복은 무늬 있는 좋은 옷을 입지 않았다. 세 번이나 과거에 대한 직무를 맡아보아 명사들을 많이 선발하였으므로 당시 유능한 재상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세도 재상의 청을 잘 들어주며 잘못을 살피지 않았고 인물 고선에서 착오가 많았다. 또 자기의 어린 자제들에게 한 자리씩 벼슬을 주었으며 자기의 종(僕從)을 각처로 보내 전장을 많이 장만하였으므로 그때의 공론이 이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왕이 일찍이 시(詩) 한 수를 지어 문극겸에게 주기를 “한 치(寸) 마음속에 만사가 덮치더니, 남은 건 근심 걱정만이 나날이 깊어 갈 뿐. 옅은 생각 짧은 지혜 이 근심 끊기 어려워라, 천 오리 백발만 이미 머리에 그득하였네!”라고 하였는데 문극겸이 화답하기를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 몰래 다가오니, 나라 위한 이 궁리 저 생각 날이 갈수록 깊어지네. 아! 망극한 임금 은혜 보답도 못한 오늘, 무정할손 백발은 이미 머리를 덮었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모두 다 쇠진하여지는 자의 기상이라고 논하였다. 마침내 왕은 폐위당하였으며 문극겸도 얼마 후에 죽었으니 시구(詩句)에 나타나는 조짐이 아니라고도 말 못할 일이다. 그가 죽은 후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아들은 문후식(文候軾)과 문유필(文惟弼)이다. 문유필은 벼슬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까지 이르렀는데 그의 처가 자기 집 사환꾼(家臣)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었다. 그래서 최충헌이 그 사환꾼을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문유필의 5대손은 문달한(文達漢)인데 따로 그의 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