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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강씨임계정 원문보기 글쓴이: 대산 강원기
殷烈公墓所神道碑銘(原文) 은열공묘소신도비명,(원문)
公諱民瞻(공휘민첨) 殷烈其諡也(은열기시야) 公少有慷慨大志(공소유강개대지) 年纔十五(년재십오) 學于鄕校(학우향교)
早知爲學之方(조지위학지방) 治時書禮樂(치시서예악) 無不周徧(무불주편) 剏立四敎堂(창립사교당) 以文行忠信(이문행충신) 敎鄕子弟(교향자제) 人莫不尊崇焉(인막불존숭언) 剏世祠于州西牛芳山(창세사우주서우방산) 奉安先世眞影(봉안선세진영) 命僧徒守直(명승도수직) 公甞讀書于此(공상독서우차) 穆宗八年乙巳(목종팔년을사) 公年四十三(공년사십삼) 擢文科製述乙科(탁문과제술을과) 在文憲公崔沖榜下(재문헌공최충방하) 登將仕郞(등장사랑) 翌年丙午(익년병오) 拜文林郞都校令同正外補安邊都護掌書記(배문림랑도교령동정외 보안변도호상서기) 顯宗元年庚戌(현종원년경술) 出爲隘守鎭將(출위애수진장) 蓋以公有文武兼材也(개이공유문무겸재야)
是時(시시) 妖后釀亂(여후양란) 蕃臣康兆(번신강조) 乘機行廢(승기행폐) 顯宗又不理于政(현종우불리우정) 國內洶洶(국내흉흉) 邊陲空虛(변수공허) 契丹虜主聖宗(계단노주성종) 懷不測者夂矣(회불측자치의) 乘玆以問罪爲名(승자이문죄위명) 勒步駿四十萬(륵보준사십만) 掃境以前(귀경이전) 王以康兆禦之(왕이강조어지) 被執而死(피집이사) 公以鎭將(공이진장) 輿統軍使趙元(여통군사조원) 收散卒守城(수산졸수상) 城賴而完(성뢰이완) 十一月(십일월) 契丹又長驅而前(걸단우장구이전) 連陷州郡(연함주군) 旌旗蔽空(정기적공) 無人備禦(무인비어) 十二月進犯西京(십이월진범서경) 燒宮室殺掠人民(소궁실곡경인민) 中郞將蔡知文(중랑장채지문) 引兵救之(인병구지) 丹兵東下(단병동하) 丹主次于城西佛寺(단주차우성서불사) 禮部侍郞姜邯贊(예부시랑강감찬) 勤王南遷(근왕남천) 巡儉使卓思政(순검사탁사정) 誘將軍大道秀(유장군대도수) 曰君自東門出(왈군문자동문출) 我自西門出(아자서문출) 左右挾攻(좌우협공) 則蔑不勝(즉멸불승) 恩政率麾下兵(은종솔휘하병) 開門夜遁(개문야둔) 大道秀亦出東(대도수역출동) 門外始知見欺(문외시지견기) 又力不可敵(우력불가적) 遂率磨麾兵(수솔마휘병) 降于契丹(강우계단) 諸將解氣(제장해기) 城中洶懼(성중흉구) 公與統軍使趙元(공여통군사조원) 收散兵閉門固守(수산병폐문고수) 以四十萬强敵(이사십만강적) 不得侵入(부득침입) 遂解圍東下(수해위동하) 辛亥(신해) 公年四十九(공년사십구) 拜都官試員外郞(배도관시원외랑) 賜緋衣魚袋(사비이어대) 明年壬子(명년임자) 以都官詩員外郞(이도관시원외랑) 出爲部州防禦使(출위부주방어사) 訓鍊州郡兵(훈련주군병) 五月女眞大擧入寇(오월여진대거입구) 先迫淸河縣(선박청하현) 上遣公及都部署文演等(상견공급도부서문인등) 督州郡兵擊走之(독주군병격주지) 是歲契丹又侵氾天朝(시세계단우침범천조) 皇命本國(항명본국) 以徵兵爲韶(이징병위소) 王以公爲副元帥(왕이공이부원수) 大捷有功(대첩유공) 癸丑(계축) 知起(지기) 居注書內史舍人兼戶部侍郞(거주서내사사인겸호부시랑) 丙辰(병진) 拜史部舍人(배사부사인) 賜紫金魚袋(사자금어대) 陞破猛將軍上騎都(승파맹장군상기도) 尉丁巳(위정사) 拜中大夫(배중대부) 陞太僕卿(승태업경) 戊午(무오) 契丹將蕭湃押將步兵四十萬來侵(계단장소배압장보병사십만래침) 上以姜邯贊爲上元師(상이강감찬위상원사) 公爲副元師(공위부원사) 率兵二十八萬八千餘人(솔병이십팔만팔천여인) 屯寧州至興化鎭(둔영주흥화진) 選奇兵萬餘伏於山谷(선기병만여복어산곡) 又以大繩貫牛皮(우이대승관우피) 塞城東大川以待之敵兵果志(새성동대천이시적병과지) 決塞伏發(결새복발) 奮擊大破之(분격대파지) 蕭排押既敗興化(소배압기패흥화) 引兵從問道復趨京帥(인병종문도복추경수) 公追及於慈州來口山大破之(공추급어자주래구산대파지) 趙元又擊於黑灘(조원우격어흑탄) 斬獲萬級(차획만급) 王親作詩曰庚戌年間有虜塵于戈深入漢江왕친작시왈경술년간유노담아심입한강빈) 當時不用姜公策(당시불용강공책) 擧國皆爲左紝人(거국계위좌사인) 是歲(시세) 承命奉太祖梓宮(승명봉태조재궁) 移安于負兒嶽香林寺(이안우빈아악향림사) 己未(기미) 丹兵過龜州(단병과구주) 公與姜邯贊邀擊東郊(공여강감찬요격동교) 兩軍相持數日(양군상지수일) 勝負未決(승부미결) 適金宗鉉來救(적금종현래구)忍然風雨南來(인연풍우남래) 旌旗北指(정기북지) 乘勢奮擊(승세분격) 勇氣百倍(용기백배) 丹兵大奔(단병대분) 官軍追擊之(관군추격지) 涉石川至盤嶺(보석천지반령) 僵戶蔽野浮獲人口馬駝甲胃兵杖不可勝數(강호퍠야부획인구마타갑위병장불가승수) 排押因遁去(배압은둔거) 與丹兵戰鬪者數矣然未有若比之甚焉(여단병전투자수의연미유악비지심언) 公等凱還獻浮獲(공등개환헌부획) 上親迎于迎不可波驛(상친영우영불가피역) 結彩柵設音樂(결채책설음악) 宴賜將士(연사장사)
以金花八枝(이금화팔지) 押兩將之頭(압양장지두) 親執觴以酬(친집상이수) 燿公爲銀靑興祿大夫鷹揚上將軍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탁공위은청록대부응양상장군상주국천수현개국남식읍삼백호) 八月六日(팔월육일) 陞同知中樞密院事(승동지중구밀원사) 十二月十六日(십이월십육일) 轉右散騎常侍(전우상기상시) 二十日(이십일) 賜推誠致理翊裁功臣號庚申(사추성치리익재공신호경신) 三月十六日拜兵部商書兼太子太夫(삼월십육일배병부상서겸태자태부) 閏十二月二十七日承命奉太租柛宮(윤십이월이십칠일승명봉태조신궁)
自負兒嶽還葬于顯陵賜金紫興祿大夫(자빈아악환장우현릉사금자흥록대부) 辛酉春二月(신유춘이월) 五冠山崩(오관산붕)國人疑其有灾(국인의기유재) 十一月十二日(십일월십이일)公卒于館(공졸우관) 是顯宗(시현종) 十二年而享年五十九(십이년이향년오십구) 訃聞(부문) 上震悼(상진도) 綴朝三日(철조삼일) 贈太子太師(증태자태사) 賜謚殷烈(사익은열) 其致侑之辭曰(기치유지사왈) 頒爵酬庸(송작수용) 信古今之令則(신고금령즉) 愼然惟禮(신연유례) 惟邦國之通規故玆推誠致理翊裁公臣金紫興祿大夫兵部商書上柱國天水懸開國男食邑三百戶臣姜民瞻(유방국지통규고자추성치리익재공신금자흥록대부병부상서상주국천수현개국남식읍삼백호신강민첨) 氣稟 山河(기품산하) 才兼文武(재겸문무) 早勝名於柱籍(조승명어주적) 常委任於戎機(상위임어융기) 摧其敵以成其勞(최기적이성기노) 勤勤報效(근근보효) 出則將而入則相(출측장이입측상)事事尤長(사사우장) 常猷足堪(상유족감) 奈何不幸(나하불행)遽至云亡(거지운망) 一勳尤深(일훈극심) 百身難續(백신난속) 空懷 倬以無益(공회탁의무익) 乃叙舜於崇資(내어순어숭자) 靈不昧 兮(영불패혜) 知余念也(지여념야) 且命禮官禮葬于郡甘泉洞辰坐 之原(차명례관례장우군감천동진좌지원) 知余念也(지여념야) 且命禮官葬于禮山郡甘泉洞辰坐之原(차명례관장우예산군감천동진좌지원) 文宗(문종) 追念其功(추념기공) 圖形壁上(도형벽상)
署以第一功臣(서이제일공신) 公甞以本州搖役煩多(공당이본주요역번다) 納采邑四理(납채읍사리) 爲充公用州人服其德(위충공용주인복기덕) 建祠于晉州大坊(건사우진주대방) 行春秋之亨(행춘추지형) 萬曆己酉(만력기유) 後孫諱籤(후손휘첨) 以本道監司(이본도감사) 重修其祠(중수기사) 天啓辛酉(천계신유) 賜額殷烈(사액은열) 仁廟甲申(인묘갑신) 洪景濂以本州牧(홍경겸이본주목) 重修其祠(중수기사) 且妥眞影于牛芳祠(차타진영우우방사) 行生辰其祀此卽公之所剏世祀(행상진기사차즉공지소창세사) 以甞讀書之處也(이상독서지처야) 建宗禎壬午(건종정임오) 後孫大遂宰本州時(후손대수재본주시) 重募遺像(중모유상) 且重修古祠(차중수고사) 俾士林相俎豆之禮(비사림상조두지례) 英廟丁酉(영묘정유) 後孫錫復(후손석복) 移建于斗芳(이건우두방) 行春秋之亨(행춘추지형) 正廟庚戌(정묘경술) 後孫諡憲靖諱世晃(후손시헌정휘세황) 重慕遺像(중모유상) 嶺之淑德之士(영지숙덕지사) 閭閣賤隷莫不敬而歌詠焉(여객천력모불경가영언) 公之魏勳(공지위훈)
遺澤切於人(유택절인) 何其重且大耶(하기중차대야) 公之先祖諱以式(공지선조휘이식) 以兵馬元帥(이병마원사) 有名於高句麗(유명어고구려) 晉之姜此始焉(진지강차시언) 考諱甫能(고휘보능) 娶居昌大姓愼弘之女(취거창대성신홍지여) 高麗光宗十四年癸亥十一月二十九日(고려광종십사년계해십일월이십구일) 生公于晉州治東玉峰山下開慶鄕(생공우진주치동옥봉산하개경향) 公生一男(공생일남) 諱旦(휘단) 文科史部尙書是生二男(문과사부상서시생이남) 諱恒密直使(휘항밀직사) 諱輔代言密直有一男(휘보대언밀직유일남) 諱輔文上恪府院君是生一男(휘보문상각부원군시생일남 諱雲翼(휘운익) 是生一男(시생일남) 諱元吉(휘원길) 代言生二男(대언생이남) 諱貞叶左丞(휘정두좌승) 諱貞吉判事(휘정길판사) 左丞生一男(좌승생일남) 諱呂翼判三司事(휘여익판삼사사)
是生三男(시생삼남) 諱元鑑太子詹事(휘원감태자첨사) 諱元鑽寶文閣直學士(휘원찬보문각직학사) 諱元鐫贈戶部事判事生一男(휘원전증호부판사생일남) 諱仲翼密直副使(휘중익밀직부사) 是生二男(시생이남)諱元咸兼議平理事(휘원감겸의평리사) 諱元益典議(휘원익전의) 以下藩昌(이하번창) 文章學士(문장학사) 公御名宦直節忠孝(공어명관직절충효) 蔚然爲東方大族(울련위동방대족)此豈非公之功德啓之哉(차기비공지공덕재지재) 公(공) 甞從事詩書禮樂之文(상종사시서예악지문) 射御非其所長(사어비기소장) 然臨大乳決勝負(연임대유결승부) 措國家於泰山之安(조국가어태산지안) 拯民生於豺虎之口(증민생어시호지구) 生以帶將相之印(생이대장상지인) 歿以亨百代之祀(몰이형백대지사) 是非特東邱罕比(시비특동구지한비) 求之於唐宋(구지어당송) 赤無過當者(적무과당자) 於是肆爲銘曰(어시사위명왈)
高山仰止(고산앙지) 有石巖巖(유석암암) 小人所視(소안소시) 君子所膽(군자소담) 和璧非寶(화석비보) 賢哲小箴(현철소장)
篤降神人(독강산인) 靖國之漸(청국지점) 能文能武(능문능무)
忠義盡命(충의진명) 蠢爾西羌(준이서강) 梟獍抱含(호경포함)
長驅而前(장구이전) 官府火慆(관부화도) 國危一髮(국위일발)
擧國傷謄(거국상등) 道秀失敗(도수실패) 將士離心(장사이심)
公能侳敵(공능좌적) 自倍勇敢(자배용감) 追泊龜州(추박구주)
天日侵陰(천일침음) 指揮有方(지휘유방) 泰山爲盟(태신위맹)
當天電地(당천전지) 風雨從南(풍우종남) 旌旗指北(조기지북)
我師呼喊(아사호함) 左右摧擊(좌우최격) 虜在于坎(노재우감)
僵尸蔽野(강호적야) 兵氣凜凜(병기늠늠) 非余之功(비여지공)
神助天感(신조천감) 塵淸海晏(진청해안) 拯我林林(승아임임)
王曰非姜(왕왈비강) 擧國左拰(거국좌임) 寵賚維何(총뢰유하)
彩棚親臨(채봉친임) 拜謝受濫(배사수람) 兼賜崇帙(염역숭질)
如不勝堪(여불승감) 胙之茅土(작지제토) 矜式士林(금이사림)
眞影在堂(진영재당) 俎豆誠恁(조두성임) 卷我東邱(권아동구)
永世刻念(영세각염) 鳳山環泡(봉산환포) 墓儀有儼(모의유엄)
世泰民康(세태민강) 邢魔盡鉗(형마진겸)
은열공 신도비
公의 휘는 민첨이오 은열은 그 시호이다, 公은 젊어서부터 강개 (慷慨) 한 큰 뜻을 두어 나이 겨우 十五세에 향교에서 글을 배울 때 일찍 공부하는 법을 알게되어 시, 서, 예, 악,(詩, 書, 禮, 樂,)을 닦아 두루 익히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교당(四校堂)을 창립하여 문, 행, 충, 신 (文, 行, 忠, 信,) 으로써 고을의 子弟들을 가르치니 사람이 다 존숭(尊崇) 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세사(世柌)를 진주 서쪽 우방산(牛芳山)에 세워 선세진영(先世眞影)을 봉안하셨고 승려(僧侶) 들에게 수직(守直)을 명하시고 公은 일찌기 이곳에서 글을 읽으시였다. 금종팔년 기사년(穆宗八年 己巳年), 公의 나이 四十三세에 문과제술을과(文科製述乙科)에 뽑히어 문헌공 최충방막하(文憲公 崔冲榜幕下)에 있으면서 장사랑에 오르고 이듬해 병오년(丙午年)에 문림랑도교령동정(文林郞都校令同正)을 배명(拜命)하셨고 외임으로 안변도호장서기를 보직하였으며 현종 원년 庚戌에 애수진장(隘守鎭將)으로 나서시게 된 것은 公이 문무겸비한 재주가 있었든 까닭이라고 하겠다. 이때 요사스럽고 간사한 왕후가 난을 빚어내니 번신강조(藩臣康兆)가 기회를 타서 폐위시키고 현종왕이 또 정사를 잘다스리지 못함에 국내는 흉흉했고 변방은 수비가 없어 거란 오랑캐의 임금 聖宗(성종)이 불칙한 마음을 먹은지가 오랜지라 이 기회를 타서 문제(問罪)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보병(步兵) 기병(騎兵)四十만을 거느리고 국경안을 쓸어 나오거늘 왕이 강조(康兆)로써 이것을 방어토록 하였으나 康兆가 잡혀 죽게되니 公이 애수진장(隘守鎭將)으로서 총군사 조원(趙元)과 흩어진 군사를 정비하여 성을 지키니 성은 신뢰할 수 있을정도로 완전하였다. 十一월에 거란군이 또 멀리서 처들어 오는그앞에는 州나 郡이 모조리 잇달아 함락되었고 기치(旗幟)는 하늘을 덮었다. 방어하는 사람은 없고 十二월에는 서경까지 침범하여 왔으며 송도궁실(松都宮室)을 불사르고 인민을 죽이며 재물을 약탈하니 중랑장 채지문(蔡智文)이 군사를 이끌고 이것을 구원함에 거란의 군사가 동쪽으로 내려가고 오랑캐의 임금은 모름지기 평양성 서편 佛寺에서 진을 친지라 예부시랑 강감찬은 왕을 남으로 파천토록 권했다. 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꾀어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가고 나는 서문으로 부터 나가 좌우로 협공하면 적군을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思政은 휘하군사(麾下軍士)를 이끌고 성문을 열어 도망쳤다. 대도수(大道秀)가 또한 동문밖으로 나아가서 비로서 思政에게 속은줄을 알았고 또 힘이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마하군사(麾下軍士)를 거느리고 거란군에게 항복하니 모든장수는 기운이 풀리고 성중 인심은 안정되지 못하고 부산한지라, 公은 통군사 趙元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정돈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으므로 강한 적군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고 드디어 포위망을 풀고 동족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辛亥년 公의 나이 四十九세에 도관시원외랑을 배명하셨고 비의어대(緋衣魚袋)가 下賜되었으며 이듬해 壬子년에 도관시원외랑으로서 부주방어사가 되시어 고을의 군사를 훈련시켰던 이해 오월에 여진이 한꺼번에 많은 오랑캐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먼저 청하면 (경남 영일면 일부)에 핍박하거늘 상이 公과 도부서 문연(文演)등을 보내서 훈련시킨 고을 군사를 독전(督戰)하여 적을 처서 달아나게 했고, 그 해에 거란이 또 천조(天朝)를 침범함으로 황제는 본국에 명하심에 징병(徵兵)까닭으로 조서(詔書)했으니 왕이 公으로서 부원수를 삼아 크게 승리한 공훈이 있었다. 癸丑年에 지기거주서내사사인에 호부사랑을 겸했고 丙辰년에 이부사인을 拜命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 下賜되었고 파맹장군사도위(破猛將軍士都尉)로 승진되어 丁巳에 중대부에 천배되어 대복경 으로 승직되었다. 戊午年에 거란 장수 簫徘押이 步兵四十만으로 침범해 왔으나 上이 강감찬으로서 상원수를 삼으니 군사 二十八만八천여명을 거느리고 寧州에 진을 치고 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만여명을 뽑아 산골짜기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의 동편의 큰냇물을 막고 적병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적병이 과연 당도함에 막았던 냇물을 터놓고 복병을 풀어 분투하여 적병을 대파하니 적장 簫徘押이 이미 흥화에서 참패 당하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부터 다시 서울로 달려가거늘 公이 추격하여 慈州來口山에서 크게 깨트리고 趙元 역시 흑탄(黑灘)에서 적수 萬餘級을 잡아 목베어 크게 이겼다. 왕께서 친히 글을지어 말씀하시기를「庚戌 戊午年間에 오랑캐 풍진이 있어 兵水가 한강 깊숙이 들었으니 그때에 姜公의 묘책이아니였던들 온나라가 오랑캐가 됐으리라」 이해에 왕명을 받자와 太祖神宮(임금의 棺)을 모시고 부아악, 향림사(負兒嶽,香林寺)에 옮겨 奉安하다, 己未年에 거란군사가 귀주(龜州)를 지날 때 公이 강감찬과 함께 동쪽 들에서 맞아 싸우기를 수일,양편군사가 서로 승부를 결단치 못하고 있던중 마침 金宗鉉은 와서 구원하고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에서 몰아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었다. 이기세를 타고 분격하니 용기는 백배하여 거란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니 관군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이겨서 석천을 거느리고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적군의 시체가 들을 덮고 사로잡은 포로, 말, 낙타, 갑옷, 투구, 兵器를 얻은 것이 헤아릴수 없더라. 적장 簫徘押이 크게 패하여 도망하여 가니 거란군사와 싸우기를 수차하였으나 적의 패함이 이같이 甚한때는 없었다. 公등이 개선하고 돌아와 사로잡고 얻은 것을 바칠 때 上이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와 맞이했고 채색 비계장(고층건물 을지을 때 딛고 서기 위해 긴 나무와 널을 거쳐 놓은시설)을 맺고 음악을 베풀어 잔치하여 장수와 군사들에게 사찬(賜饌)하다. 또 금으로 만든 꽃 여덟가지를 두 장수의 머리에 꽂아주시고 친히 술잔을 들어 수작하시었다. 公을 발탁하여 銀靑興祿大夫應揚上將軍 , 上柱國天水懸開國男三百戶로 삼았고 八月 六日에 동지중추밀원에사에 승직되었다. 十二月 十六日로 우산기상시에 전임하셨고 二十日에 추성치리익대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庚申三月十六日에 병부상서겸 태자태부에 배명하셨고 윤十二月十七日에 임금의 명을 받자와 태조의 재궁을 모시고 부아악(負兒嶽)으로부터 현,릉(顯,陵)에 도로 환장(還葬)하셨고 금자흥록대부를 제수하였다,辛酉年(신유년) 봄 二月에 오관산이 무너지거늘 나라 사람에게 재변이 있지않을까 의심하더니 十一月 十二日에 公이 사관에서 작고하시니 때는 곧 현종 十二年이요, 향년이 五十九세이다. 나라에 부음이 전해지자 上이 놀라 슬퍼하시어 조회 三日을 철페하시고 태자태사를 증사 하셨으며 시호를 殷烈로 내리시고 그 치유(致侑)하신 글에 가로대 『舜을 펴고 공을 갑는 것은 진실로 예와 의제의 좋은 법칙이요, 마지막에 삼가 하여 전례로서 추장함은 오직 나라의 도규(道規)라. 그러므로 이 추성치리익재공신 금자흥록대부상서,(推誠致理翊載功臣 金紫興祿大夫上書), 상주국 천수현개국남식읍삼백호(上柱國 天水懸開國男食邑三百戶)로 발탁하여 제수하다. 신 강민첨은 기운을 산과 하수 같은 정기를 받았고 재주는 문과 무를 겸하여 일찍이 주적(柱籍)에 이름을 올렸다.
항상 군사일을 위임받아 적군을 꺾고 그 공로를 이루워 정성스럽게 공효(功效)를 보고했었다. 나가서는 장군이요, 들어서는 정승이라 일마다 더욱 장하도다. 떳떳한 경륜(經綸)을 넉넉히 감당함이여! 짐(朕)이 몸소 의뢰하였더니 어찌 불행히도 갑자기 떠났다. 한결같이 공훈이 더욱 깊으니 백사람의 몸이라도 대신하기 어렵도다. 헛된생각에 슬퍼함이 이로움 없고 이에 높은 계급(階級)으로 작위(爵位)를 내리나니 그대 영혼이 어둡지 아니한다면 朕의 상심(傷心)을 알리로다. 또한 예관에 命하여 禮山郡 甘泉洞 辰坐에 禮葬하노라.』
文宗께서는 그 功勳을 追念하시어 公의 형상을 공신각(功臣閣) 벽 위에 걸어 놓으시고 第一功臣號를 친히 쓰시었다. 公은 일찌기 진주고을 百姓의 부역(賦役)이 번거로울 정도(程度)로 많았으므로 下賜된 四十里 안 封地를 本州에 獻納(헌납)하여 公用에 充當케 하니 고을 사람이 그德에 感腹하여 晉州 大坊洞에 祠堂을 세우고 春秋로 祭亨을 奉行했다. 仁祖 甲申年에 홍경렴(洪景濂)이 본고을 牧使로 와서 그 祠堂을 重修하고 또 公의 影幀은 牛芳祠에 奉安하여 生辰茶禮와 忌祭祀를 奉行하니 여기가 곧 公이 世祀를 創建하시고 일찍이 글을 읽던 곳이다. 崇禎任午年에 後孫 大遂가 본고을 원으로 있을 때에 影幀을 다시 본뜨고 또 牛芳의 오래 된 祠堂을 重修하여 士林으로 하여금 서로 같이 祭祀를 받들게 했고 英祖 丁酉年에 後孫錫復이 祠堂을 斗芳山으로 옮겨 세우고 春秋祭享을 奉行케 했다.正祖 庚戌年에 後孫 謚號 憲靖 世晃이 다시 견상(遣像)을 본떠 모시니 嶺南의 어진 선비들과 여염집 賤한 奴婢에 이르기까지 敬慕하지 이니하는 이가 없었고 또 노래를 부르고 글로 옲었으니 公의 높은 功勳과 끼친 德이 그 얼마나 莫重했고 또 컸었으랴. 公의 先祖 諱 以式은 兵馬元師로 高句麗에서 名臣으로 이름 높으시였다. 진주강씨는 이로부터 시초로 한다. 公의 아버지 諱 甫能은 居昌大姓愼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高麗 光宗 十四年 癸亥年 겨울 十一月十九日에 公을 晉州고을 동쪽 玉奉山 아래 開慶鄕에서 나았고 公은 한 아드님을 두었으니, 諱旦은 文科部尙書요, 여기서 두 아드님이 태어나 諱旦은 密直使이이시고 諱輔는 代言이시다. 密直께서 한 아드님을 두시니 諱는 元吉이라 하고, 代言은 두 아드님을 두시니 諱는 貞叶이요, 左丞을하섰고 諱貞吉은 判事이시다, 左丞이 한 아드님을 두시니 諱呂翼은 判三司事이시고 여기서 세 아드님을 두시니 諱元鑑은 太子詹事요, 諱元鑚은 寶文閣直學士요, 휘원전 (諱元鐫)은 贈戶部事 이시다, 判事께서 한 아드님을 두시니 諱仲翼은 密直府事 이시고 여기서 두 아드님이 태어나 諱元咸은 첨의평리사(僉議平理事)요, 諱元益은 典議이셨다. 이 아래로 後孫들이 繁昌하여 文章學士와 公卿名臣(공경명신)과 直節忠孝가蔚然(울연)하게 東方의 큰 겨레붙이로 되었다. 이어찌 公의 功德으로 啓示를 얻음이 아니랴! 公이 일찍이 詩, 書, 禮, 樂,의 총중(叢中)에 從事하여 활 쏘고 말타는 것을 그 長技로 한 것은 아니나 큰 난리를 當하여는 勝負를 決斷하여 國家를 泰山보다 平安하도록 조치(措置)했고 民生을 승냥이와 범같은 무리들의 입으로부터 救濟하였으며, 살아서는 장수와 정승의 印끈을 찾고 돌아가시어서는 百代의 祭享을 누리시니 이것은 다반 우리나라에만 比하여 드물다고 할 것이 아니라 唐나라, 宋나라 같은 옛나라에서 찿더라도 亦是 公보다 더하는 것은 妥當(타당)치 않을 것이다.
이에 감히 銘으로 지어 가로대, 『높은 산을 우러러보니 돌이 높고 높도다. 小人이 보는바요, 君子의 바라보는 바로다. 변화(卞和)가 주나라 초왕(楚王)에게 바친 구슬이 보배가 아니요, 賢人과 哲人의 잠언(箴言)이 보배로세. 厚한 神人이 내리심은 나라를 平安케 할 조짐이요 文도 能하고 武도 能하여 忠과 義로 목숨을 다하도다. 無知하고 事理에 어두운 西方오랑캐들이여,올빼미와 담비 같은 마음을 품고 멀리서 몰려와 닥치니 官府가, 화도(火熖)에 싸여 나라는 危機一髮로 되었구나. 온 나라가 간담을 상실하고 將軍道秀는 失敗로 돌아가고 將卒은 마음이 이탈(離脫)되었어도 公은 能히 敵軍을 꺾어 스스로 勇猛을 거듭하여 龜州까지 쫓아 몰아치매 하늘과 햇빛이 침음(沈陰) 하도다. 指揮함이 法度가 있어 泰山을 두고 굳게 맹서(盟誓)하니 하늘에는 우레가 치고 땅에는 번개가 쳐서 바람은 남으로부터 불고 깃발은 북을 가르키도다. 우리 軍士 歡呼聲과 高喊소리를 지르며 左右로 挾攻하니 오랑캐는 함지(陷地)에 빠졌고 쓰러진 시체(屍体) 들을 덮으니 우리 軍士의 기운이 늠름하도다. 내 功이 아니라 신명이 돕고 하늘이 感動함이로다. 티끌이 맑고 四海가 安定하니 百姓을건지도다. 王이 가라사대, 「姜이 아니면 온나라 百姓이 오랑캐가 될 뻔하였도다.」 그 얼마나 총애(寵愛) 하고 下賜 함이니 彩色비계장에 親臨하시와 金花八技를 주시니 과람(過濫)을 拜謝하고 兼하여 높은 階級을 주심에 감당치 못하는 듯 하였다. 封土 받음에 士林이 恭敬하도다. 影幀이 祠堂애 있으니 祭享이 誠實하도다. 우리나라를 돌보아 주시니 世代가 永久하도록 돌에 새겨 사모하도다. 鳳首山돌아안고 墓所의 裝備 儼然하도다. 世上은 泰平하고 百姓이 平安하니 간사한 마귀는 자취를 다 감추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