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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가 흔적 더듬다
(광산김⇨양간공⇨사온승공⇨석정가문)
2019. 9월(추석)
광김석정연구회
(光金石亭硏究會)- 1 -
머 리 글
어릴 적부터 ‘우리 가문은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다‘라며 늘 자랑스러워 하셨던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럼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어떤 분이셨고,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왜 천관산 밑에 둥지를 틀게 되셨는지 등이 늘 궁금해 왔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의 역사라곤 선반위에 방치된 족보하고 어렴풋이 생각나는 기억들뿐 이였
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들과 미래의 세대들이 우리 뿌리의 근본을 살펴보고 쉽게 이
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시조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예부터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 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화수를 떠서 예를 갖춘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 후 세계화와 핵가족화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치부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 쉽게
알 수 있겠습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족보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를 중심으로 우리 문중(어은선조 중심) 선
조들의 과거를 더듬어 갔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의 시조이신 신라 말 왕자 공이신 1
대조 흥광께서는 나라가 어지러워 평장동으로 이주하신 이후로 우리의 역사는 시작됩니
다, 고려 초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선조들께선 고려시대 내내
중앙무대인 조정의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등 명문집안으로 살아오신 역사적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중부의 무신정변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
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어느 분부터 정착해 오신지는 알 수 없지만, 18대조 함 선조
자료에는 창녕에서 씨족을 형성하여 세세로 살아오셨다고 합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 19대조 성욱께서는 고려 유신의 충절을 지키기 위
해 아들들을 데리고 창녕 산중으로 피신하였으나, 태조의 부름으로 다시 성균관 대사성- 2 -
으로 복귀하셨고, 혹시나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 아들 두 분을(치온, 경온) 1450
년경에 창녕에서 장흥(행원)과 함평(좌량촌)으로 각각 떨어져 살게 하셨던 것으로 추정
됩니다. 함평으로 이주하신 19대조 경온과 아들이신 자분, 자보, 자궤 모두가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하였다 하여 한 때 그 마을을 좌랑촌(현재 월산리)이라 부르기도 했습니
다. 22대조 세걸께서는 1515년경 천관산 아래의 명당 기운을 보시고 후손의 번창과
각종 사화로부터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 그 아들(22대, 훤)을 함평에서 석정으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자료에는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문인으로 분류돼 관산으로 유배를
당하시는 흔적이 있으나, 어떤 연고인지는 몰라도 이때부터 석정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으로 짐작해 봅니다.
그 후 27대 상경께선 19세에 무과급제후 오랫동안 선전관으로 계셨으며, 당시 인조
반정 후 공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큰 환란이 있을 때 무악재에서 큰 공을 세우셨지
만, 제수된 벼슬을 모두 버리시고 1640년경에 낙향하여 어은동에 첨모당을 짓고 노년
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그 후 대대로 평촌(석정) 집성촌에 일가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
르렀습니다. 그 후손 중에는 37대 치제 영엽께서는 을사조약 등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군사를 일으켜 호남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셨고, 후학과 가문을 빛내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셨던 37대 소석 노현 교수, 지역의 지식 플랫폼의 역할을 했던 유천제를 지
으신 괴정 광흡, 현대에 와서 한국화가로서 이름을 드날린 40대 천두 등 전국 각지에
서 명문가문의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많은 후손들이 가문을 빛내주고 있습니다.
본 자료의 역사적 맥락의 이해를 돕기 위해 큰 즐기에 따라 고대와 신라말, 고려시
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의 시대에 따라 선조들의 활약상을 기술하였습니다. 또한 최
대한 근거에 의한 기술을 원칙 위에 삼고 대대로 내려온 근거 없는 말들은 가급적 지
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출처 대부분이 한자체 문장을 취하고 있어 가능한 한 원문을
살려두었으며,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나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처음 시
작한 41세 선일의 초고를 참고하였으며, 여러 곳의 문헌들을 검색하여 우선 자료수집
수준에서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두고 우리 일가들이 함께 수정, 보
완하여 잘 다듬어 나가면 자랑스러운 가문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당당히 남겨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2019. 9. 13(추석) 어은동 선산 성묘길에서- 3 -
∥ 차 례 ∥
제1장 고대사와 신라말 -----------------------------------------------4
▫ 고대사, 후기 신라, 후삼국시대 ----------------------------------4
▫ 1세 ~ 2세 -----------------------------------------------5
제2장 고려 시대 -----------------------------------------------7
▫ 태조 왕건, 고려전기, 고려 중기, 고려 후기 -------------------------7
▫ 3세~18세 ------------------------------------------------9
▫ 광산김씨 5대파조 ------------------------------------------15
제3장 조선시대 -----------------------------------------------19
▫ 조선초기, 전기, 중기, 후기, 말기 -------------------------------19
▫ 19세~31세 ----------------------------------------------24
제4장 대한제국(근대) -------------------------------------------36
▫ 근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36
▫ 36세~40세 ----------------------------------------------37
제5장 석정가 일가도 ------------------------------------------47
▫ 1세 흥광~28세 여종 ---------------------------------------47
▫ 29세 남길 가계도 ------------------------------------------47
▫ 29세 남준 가계도 ------------------------------------------47
- 진필, 유필, 영필 ---------------------------------------47
▫ 29세 남억 가계도 ------------------------------------------49
◼ 시진첩 ---------------------------------------------------50
※ 참고문헌 :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광산김씨대종회, 규장각, 보훈처 공훈전자사료
관, 승정원일기,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자료센터,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흥신문 등- 4 -
제1장 고대사와 신라말1) □ 고대사
- 구석기 시대 : 한국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
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다. -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 기원전 6000년 이
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1500년 무
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
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
전 233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고조선은 기
원전 108년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여 여러 나라
로 나뉘었다. - 삼국 시대 :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삼국시대를 맞
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삼국 시대의 여러 국가를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
다. 이들 세 국가는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하였고, 특
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곤 하였다. 신
라의 힘은 점진적으로 커져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
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을 달성
하였고, 이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전직 고
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어 698년 동
모산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 후기 신라
- 나당 전쟁(羅唐戰爭)의 마지막 해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以南)을 완전히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
1) 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역사”
그림 1 한국의 역사(위키백과)- 5 -
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侍中, 중시)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
되었다. 신문왕은 녹읍(祿邑)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 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
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 9세기에 들어서 왕위 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각
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
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워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칭하며, 조정으로부터 자립하였다. - 중하대 신라 시대에는 대동강 이남의 통일로 전쟁이 줄어들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
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 문화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 후삼국시대
-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는 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과 궁예의 신
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 신라 말기(9세기 말)에 들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
기에 이르렀고,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901년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
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광산김씨 ⇨ 양간공파 ⇨ 사온승공 ⇨ 석정가(우리문중)
<1세> 김흥광(金興光) : 평장사(정2품)
- 우리 광산김씨의 시조는 신라 왕자공 흥광이시다. 흥광은 신라가 국란이 일어날 것
을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광주) 서일동(현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선조의 세거지인 광산(광주와 동- 6 -
일)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갔
다. 그의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평
장사(정 2품)를 12명이나 역임하여 세
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이라 불렀
다고 한다.(신라계 김씨 보책에는 45
대 신무왕 3자로 기록됨. 또는 49대
헌강왕 3자설도 있음)
- 경주김씨계의 원조인 김알지는 65년
(신라 탈해이사금 9) 경주 계림(鷄林)의 소나무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왕이 ‘김’이라 지어 주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전하고 있는데, 신라 초기의 김씨 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알지의 제7대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종(分宗)되고 <김씨대
종사(金氏大宗史)>에도 266본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
략 50여 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신무왕계(神武王系)의 광산, 무열왕
계(武烈王系)의 강릉김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경순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 김씨의 본관은 무려 600여 본이 나와 있으나 시조가 뚜렷이 밝혀져 있는 것은 약
1백여 본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여러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
(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金海) 김씨 계(系)와 신라의 알지(閼知)를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 김씨 계(系)두 갈래로 크게 나눠지며, 지금 사용되고 있는 김씨는 거의
모두가 수로와 알지계에서 갈리어 나간 것이라고 한다.2)
2) 다음(Daum)의 성씨유럐 설명란에서 발췌함
그림 4 평장사 전경 그림 3 신라왕자 유허비
그림 2 평장동 전경- 7 -
<2세> 김 식(金軾) : 각간공(角干公), 평장사(平章事) 정1품
- 각간이란 신라시대 관직의 품계가 17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최상의 1등
급 벼슬이다. 각간은 시대에 따라 이벌찬(伊伐粲), 이벌간(伊罰干), 간벌찬(干伐粲),
각찬(角粲), 서불갑(舒弗胛)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벼슬이름인데 오늘날의 관직과
비교한다면 장관급보다 위인 국무총리와 동일한 위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 신라시대에는 골품제를 엄격히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바 17위계 중 1품에서 5품
까지는 진골(眞骨)이라야만 할 수 있는 벼슬자리인 것으로 보아 왕족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며, 아버지이신 시조공 흥광(興光)께서 신라의 왕자였음을 여기서도 한번 더
증명하는 것이 된다.3)
제2장 고려 시대4)
□ 태조 왕건
-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475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왕
조이다. 우리나라가 ‘코리아(Korea)’로 불린 것은 약 1000년 전인 이 고려 시대
(918~1392)부터다. 고려를 드나들던 서역 상인들이 ‘고려’를 ‘꼬레아’라고 부르던
데서 한국의 영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만큼 고려는 국제화
되고 개방적인 나라였다. 여성의 지위가 조선에 비해 훨씬 높았고, 문화적으로도 역
동적인 다원사회였다. - 고려는 개국 초, 각 지방호족에게 토성(土姓)을 나누어 주어 자기 지역을 다스리는
본관제를 시행했고, 지방관을 파견한 주현을 통해 다른 속현을 다스리는 독특한 지
방 지배체제를 갖췄다. 고려는 전기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양인을 늘렸고, 과거제를
도입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후기 권문세족의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새로운 세력에게 왕조를 내줬다. 한국사에서는 이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 □ 고려전기
- 고려는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 현재의
3) 광산김씨대종회, 작성자 뒷들지기
4) 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역사”- 8 -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아,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
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
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
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자 하였다. - 거란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
하였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하
였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 11세기에 이르러 고려 사회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가 향상 되어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났으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
려는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 고려중기
- 강조의 정변, 서경 천도 운동, 삼국사기, 삼국유사, 무신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
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
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때로 여
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
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다. - 12세기 중반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후로는 최충헌, 최
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 한편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 9 -
려-몽고 전쟁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
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
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 결국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
장경을 조판하였다. □ 고려후기
-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새로이 등장
한 권문세족은 불법 행위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
되었다. -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
(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과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 기반 마련이
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 공민왕 때
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고려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 왜구와 홍건적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의 이성계는 정도전을 위시한
신흥 사대부들과 결합하였고,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권문세족을 압박하는 개혁을 확
대하여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
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3세> 김 길(金佶) : 삼중대광 또는 벽상삼한 삼중대광(정1품)
- 김길은 덕망과 학문이 탁월하여 태조 왕건을 도와 민족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크
게 공을 세워 삼중대광 또는 벽상삼한삼중대광(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 초상화를 벽
에 붙여 공을 치하)의 지위에 있었다. 중앙정부에 있는 최고기관으로서 왕의 소칙을
받들어 심사하고 의정을 의결하는 대신이다. - 최근 학자들의 논문에 의하면 3세 김길께서 중국사서인 책부원구(冊府元龜:중국의
사료집)의 외신부 조공조에 보면 "청태원년(934년) 8월에 고려조의 조공사 김길의 - 10 -
선박이 청주(靑州:지금의 山東省)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이는 김길이 후백
제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태조를 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 고려 때 정 1품의 품계는 삼사(三師)의 태사, 대부, 태보 또는 삼공(三公)의 태위, 사도, 사공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5)이 있다.
<4세> 김 준(金峻) :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
- 좌복야란, 중앙정부 최고기관인 상서령 행정기관에서 6부를 감독하고, 대정을 총리
하는 고려시대의 품계
<5세> 김 책(金策) : 좌복야, 한림학사, 평장사 (정2품)
- 964년(광종 15) 갑자(甲子) 3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실시하였을
때, 조익방(趙翌榜)에서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어 급제를 축
하하였으며, 또한 특별히 의봉문(儀鳳門)을 열어 말(馬)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 벼슬은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좌복야(左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6)
<6세> 김정준(金廷俊) :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평장사(정2품)7)
-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고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을 거쳐
1040년 권지승선(權知承宣), 1043년 우승선(右承宣)이 되었다. 1049년(문종 3)
중추원사 판어사대사(中樞院使判御史臺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박인수(朴仁壽) 등 급
제자를 선발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의 외할아버지다. - 1051년 최충(崔冲)이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로서 내사시랑 왕총지(王寵之)와 함께
급제 이신석(李申錫)이 씨족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등조하지 못하게 청하자, 문하시랑 김원충(金元冲)과 더불어 이에 반대하여 관직에 나가게 하였다. - 1053년 참지정사(參知政事), 1055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內史侍郎平章事上柱
5)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하여 정1품의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신설한 얼마 뒤 그 위에 ‘벽상삼
한(壁上三韓)’을 가호(加號)하여 이루어졌다. 얼마 뒤에 ‘벽상삼한’이 제거됨으로써 삼중대광이 되었다가, 다시
가호하여 본래의 명칭으로 되돌아가는 등 몇 차례의 변화과정을 거쳤다. 6)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집필자 김동섭
7) 참고: 고려사, 고려사절요- 11 -
國)에 이어, 1057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에 이르
렀으며, 1059년에 평장사로 치사(致仕)하였다.
<7세> 김양감(金良鑑) :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 문안공(文安公)8)
-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
사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 1074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
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登州)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
(明州)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참지정사판상서병부사(參知政事判尙書兵部事)·권판중추원사(權
判中樞院事)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
章事)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
(判尙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올랐다. 1090년(선종 7)에 문하시랑으로
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李景泌) 등을 뽑았
는데, 그 답안이 격식에 맞지 않아 주사(主司)에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저자라고 전하기도 한
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8세> 김의원(金義元) : 금자광록대부, 검교태자대사 호부상서(정2품)
- 김의원(金義元:1071~1148)은 나주(羅州) 광양(光陽)사람으로, 아버지 김양감(金良
鑑)은 수대보문하시중감수국사(守大保門下侍中監修國史)를 지냈고, 어머니 최씨(崔
氏)는 상서우복야중추원사(尙書右僕射中樞院使) 최연하(崔延嘏)의 딸이다. 17세에 성
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으나, 부음(父蔭)으로 장사랑군기주부동정(將仕郞軍器注簿同
正)이 되고,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과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연주(漣州)의
수령이 되었다. - 예종(睿宗)대에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어, 여진과의 전투에서 웅주(雄州)와 길주
(吉州)를 지키는데 공을 세워 길주도병마원(吉州道兵馬員)이 되고, 형부원외랑(刑部
員外郎), 호부낭중(戶部郎中)을 거쳐 공부시랑(工部侍郎)이 되었다. 인종대에는 병부
8) 참고: 고려사, 고려사절요, 송사(宋史)- 12 -
시랑지다방사(兵部侍郎知茶房事), 예빈경지어사대사(禮賓卿知御史臺事), 호부상서동
지추밀원사(戶部尙書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가, 이자겸의 난 후 일족이라는 이유로
(金義元의 두 번째 부인은 仁州李氏인 李資仁의 딸이다) 양주사(梁州使)로 좌천되었
다가, 곧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수령이 되었으며, 인종10년(1132)에 공부상서안
북대도호부사(工部尙書安北大都護府使)로 치사(致仕)하자 호부상서겸삼사사(戶部尙書
兼三司使)에 임명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특진(特進)을 더하였다. - 『고려사(高麗史)』권101, 열전(列傳)14에 김의원(金義元)이 있으나 이는 동명이인
(同名異人)이다. 또 『고려사(高麗史)』권 97열전 10에 김약온(金若溫)이 있는데, 초
명(初名)은 의문(義文)으로 광양현인(光陽縣人)이며 시중(侍中)양감(良鑑)의 아들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의
원과 형제사이가 아닌가 추측된다. - 묘지명은 그의 큰아들인 문림랑시상서공부원외랑(文林郞試尙書工部員外郎) 광중(光
中)이 지었다.9)
<9세> 김광중(金光中) : 간의대부 비서감, 상서우승(정3품)
10)
- 과거에 급제한 뒤 1163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
가 되었다. 당시 압록강 하류의 섬에는 인주(麟州)와 정주(靜州)의 주민들이 드나들
며 농사를 짓고, 여진인들도 섞여 살았다. 공을 세우려고 섬을 공격하여 여진인들의
막사를 불사르고 여진인을 내몬 뒤 둔전(屯田)을 설치하며 군대를 주둔시켜 지켰다. 이로 인하여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1165년에는 정주별장 원상(元尙) 등이 금나라에
잡혀가기도 하였으며 금나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하여 1167년 둔전을 혁파하고 수
비군도 철수하였다. - 1168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 김영윤(金永胤)과 함께 장영재(張令才) 등
진사 27인과 명경 4인을 뽑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비서감(秘書
監)·상서우승(尙書右丞)에 올랐다. - 1170년 정중부의 난이11) 일어나자 수많은 문신들이 화를 당했는데, 평소에 사랑하
9)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김의원 묘지명
1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전(고려사, 고려사절요)
11) 고려시대의 무신. 본관 해주(海州).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고, 의종 초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
軍)을 지냈다. 의종의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과 반란을 모의하여, 1170년(의종 24)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이르렀을 때 이의방 등과 함께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정중부의
난, 혹은 무신의 난). 이로부터 무신정치가 시작되었다. 1179년 무신 경대승(慶大升)에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13 -
여 구사(驅使)로 부터 대교(隊校)로 보충시켜 주었던 박광승(朴光升)의 밀고로 살해
되었다. 부인은 인천이씨(부는 참지정사 이식의 따님)
- 김광중 처 이씨묘지명(金光中妻李氏墓誌銘)
12) : 본 묘지는 마멸이 심하여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는 곳이 많다. 우선 묘지의 주인공인 경원군부인 이씨(慶源郡夫人 李氏)
는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 門下侍中) 정(頲)의 손녀인 것은 확실하나 그의 아버지
의 이름은 마멸로 인해 확인할 수 없다. 또 묘지에는 임인(壬寅)년에 70세로 작고하
였다고 되어있을 뿐이지만, 그녀가 이정(李頲)의 손녀라면 이 임인년은 1182년(명종
12)일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생몰연대는 1113년~1182년이 된다. - 그리고 그녀의 남편 이름도 마지막 글자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김광중(金光中)’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여겨진다. 김광중(金光中 : ?~1170)은 과거에 급제한 뒤
1163년(의종 17)에 급사중(給事中)으로 서북면 병마부사(兵馬副使)가 되었고, 벼슬
은 간의대부(諫議大夫)·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는데,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박광승(朴光升)의 밀고로 정중부에게 살해된 인물이다. 경원군부인 이씨(慶源
郡夫人 李氏)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음을 본 묘지로 확인할 수 있다.
<10세> 김 체(金蒂) : 순안현령(종5품)
- 일찍이 아버지가 말몰이를 하던 박광승(朴光升)에게 은혜를 베풀어 박광승을 대교
(隊校)에 충보시켰는데,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자 박광승은 은인인 김광중을
밀고하여 죽게 하였다. - 뒷날 김체가 순안현령(順安縣令)이 되었는데, 마침 배순석(裵純碩)이 군사를 모은다
하므로 김체는 군사를 훈련시켜 협력하였다. 이때 박광승이 제고사(祭告使)가 되어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박광승의 아버지를 울주에서 잡아오고, 이어서 박광승도 붙잡
아 부자를 상견하게 하였다. - 그리고 박광승의 아버지를 먼저 죽이면서 “네 아비의 죽음을 애도하는가?”라고 물
었다. 이에 박광승이 “그러하다.”고 대답하자, “아버지를 아끼는 것은 매한가지이거
늘 어찌해서 너는 은혜를 배반하고 나의 아버지를 살해하였는가?”라고 힐책하였는
데, 박광승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박광승의 팔을 베어 군중(軍中)에 두고, 여
러 고을로 돌린 뒤에 죽였다.13) ※견고려사열전(見高麗史列傳)에 의하면 “배순석이
12)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김광중처 이씨 묘지명
13) 네이버 지식백과 김체[金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4 -
군사를 모집하므로 公이 군사를 훈련하여 접응하러 가다가 박광승이 제고사로 온다
는 말을 듣고 먼저 광승의 아비를 잡아 원수를 갚았다”라고 전한다. - 현령은 외관직으로 고을의 수령을 말하는데 외관(外官)은 지방관서의 직위로서 각
도(8도)에 관찰사 또는 감사 1명과 도사 1명을 두었고 각 고을에 따라서 부윤, 목
사, 대도호부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수령을 두었다.
<11세> 김주영(金珠永) : 호부상서상장군 (정3품)
- 고려 후기의 문신, 벼슬은 금오위중랑장동정행대정(金吾衛中郎將同正行隊正)을 지
냈고, 동지추밀원사와 호부상서상장군에 추증되었다.14)
- 고려 조의 관가 상서성 중앙최고 행정기관에 속한 국가 재정과 호구(戶口)를 맡아
관장하고 지금의 재무부와 내무부를 합친 곳이 호부상서이다.
<12세> 김광존(金光存) : 홍위위 별장동정, 이부상서겸판예부사 상호군(정3품)
- 벼슬은 홍위위 별장동정 이였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문하성사와 이부상
서겸판예부사 상호군에 추증되었다.
<13세> 김대린(金大鱗) : 문하시랑 평장사(종2품)
- 고려 후기의 문신, 금자광록대부 예빈경과 문하시랑평장사와 판병부사에 추증되었
다. 부인은 익양군부인 광주김씨로 부친은 호장보윤 김준령이다. - 광산김씨 파보 : ①문정공파→김태현(15세), ②문숙공파→김주연(14세), ③양간공파
→김연(14세), ④낭장공파→김규(14세), ⑤사온직장공파→김영(17세)
<14세> 김 연(金璉) :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 ※良簡公派祖
- 양간공 연(良簡公 璉)은 양간공의 파조로 1215년(고종3)~1291년(충렬왕18) 고려
중기의 문신, 초명은 중룡(仲龍), 아버지는 증문하시랑(贈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
(俊령)의 딸이다. -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섭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
14) 광산김씨 약사, 40쪽- 15 -
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1255년(고종43)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하
였고, 네 고을에 치척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 1275년(충렬왕2)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동정(東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어느 날 밤에 홀연
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
(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1781년(정조6)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신유년(1261년) 호적과 화상찬
(畵像贊)이 있었으나 화상찬은 1592년(선조26)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 1261년(원종3)에 발행된 호적(戶籍)이 후손 부필(富弼)의 종가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이다. 묘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좌는 큰 아들 정경공[사원(士元)] 우측에는 참지정사공[사형(士亨)]과 함께
설단하였다.(단향일 : 음력 3월 1일)
광산김씨(光山金氏) 5대파조(大派祖)
⑴ 문정공 파조(15세 김태현(金台鉉), 文正公派祖, 1261∼1330, 70歲) 고려 후기 문
신. 자는 불기(不器), 호는 쾌헌(快軒), 또는 설암(雪菴),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
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 수
(須)이며, 어머니는 옥구군대부인(沃溝郡大夫人) 고씨(高氏)로 예빈경(禮賓卿) 정(?)
묘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좌는 큰 아들 경공[사원(士元)] 우측에는 지정사
공[사형(士亨)]과 함께 설단하였다.(단향일 : 음력
3월 1일)- 16 -
의 딸이다. 용모가 위장수려(偉壯秀麗)하고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다. 나이 15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부(詞賦)의 걸출(傑出)한
문장을 숙부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이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이라 칭
찬하였다. ⑵ 문숙공 파조(14세 김주정(金周鼎), 文肅公派祖, 1228∼1290, 63歲)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지숙(之叔), 아버지는 증문하평장사(贈門下平章事) 경량(鏡亮)이다. 1264
년(원종6) 문과에 급제하였고 해양부록사(海陽府錄事)를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고 1274년(충렬왕1) 좌사의대부(大府卿 左司議大夫)로 승진되었으며, 1278년(충
렬5)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 원나라에 들어가서 각군(各軍)
의 공물(供物) 받는 일을 없애고 김방경(金方慶)이 큰 공이 있음에도 억울하게 유배
(流配)된 것을 상소하여 석방케 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⑶ 양간공 파조(14세 김연(金璉), 良簡公派祖, 1215년∼1291, 77歲) 고려 충렬왕 때
의 문신. 初名은 중룡(仲龍), 1238년(고종 25 戊戌)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善
政)하였고 네 고을에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
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 1) 경상도 도지휘사(都指
揮使)가 되어 동정(同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戰艦) 900
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1781년(정조 5) 고창
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
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⑷ 낭장공 파조(14세 김규(金珪), 郎將公派祖) 구휘(舊諱) 찬(贊) 고려 충렬왕때 무신.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 광주김씨
(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이다.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에 들어가
낭장동정(郎將同正)이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웠다. ⑸ 사온직장공 파조(17세 김영(金英) 司온直長公派) 고려 후기의 문신, 고려조 말기에
사온서직장(司온署直長)을 지내고 조선조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에 설단(設壇)하였다.- 17 -
<15세> 김사원(金士元) : 상의회의도감사, 첨의찬성사(정2품)
- 김사원(金士元) 고려후기(1257~1319) : 1310년(충선왕 2) 6월 권신(權臣)인 태
안부원군(泰安府院君) 이대순(李大順)의 부인 위씨(韋氏)가 영평궁(永平宮)과 노비문
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언부전서(讞部典書)로서 산랑(散郎) 이광시(李光時)와 함께
그 안건을 주관하여 위씨에게 노비를 주지 않았다. - 이에 이대순이 모함하여 장형(杖刑)에 처하고 귀양가게 하였다. 1311년 평양윤(平
壤尹)이 되었으며, 12월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1316년(충숙왕 3)
4월에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고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
다. 시호는 경정(景貞)이다.15) 부인은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향의 딸이다. - 고려사절요 제23권 / 충선왕(忠宣王) 경술 2년(1310), 원 지대 3년 ○6월에 원
나라에서 팔찰(八扎) 등을 보내 와서 황후를 책봉한 조서를 반포하였다. 팔찰이 언
부전서(讞部典書) 김사원(金士元)과 산랑(散郞) 이광시(李光時)를 가두었다. 과거에
대순(大順)이 위득유(韋得儒)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위씨가 영평궁(永平宮)과 더불어
노비를 다투니, 대순이 황제에게 아뢰어 제서(制書)를 내려 헌부로 하여금 판결하게
하였다. 광시가 그 안건을 주관하고 위씨에게 주지 않으니, 대순이 성내어 팔찰 등
을 시켜 황제의 명령이라 핑계대고 사원(士元) 등에게 장형을 행한 후 귀양보냈다. - 고려사절요 제23권 / 충선왕(忠宣王) 신해 3년(1311), 원 지대 4년 ○원 나라에
서 사자를 보내어 연호를 고친 조서를 반포하였다. ○찬성사 홍선(洪詵)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와서 순비(順妃)에게 고
고(姑姑)를 하사하였다. 모든 관원들이 순비의 집에서 연회를 열고 예물로 축하하였
다. ○이지저를 예안군(禮安君)으로, 김문연을 언양군(彦陽君)으로, 김사원(金士元)을
지밀직사사로, 채홍철(蔡洪哲)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16세> 김 진(金稹) : 예문관대제학, 치춘추관사상호군(정3품)
- 호는 적재(迪齋)요 충렬왕(忠烈王) 8년(八年) 임진(壬辰) 1292년에 생하여 정미(丁
未) 1307년 16세에 추장제술과(秋場製述科)에 탁문과(擢文科)하여 충혜왕(忠惠王)
임신(壬申) 1332년에 중현대부 성균제주(中顯大夫成均祭酒)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
使)를 겸(兼)하고 계유(癸酉) 1333년에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
관사 상호군(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과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고 충혜왕(忠
15)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8 -
惠王) 임오(壬午) 1342년에 지공거(知貢擧) “과장의총책”(科場의總責)으로 인재(人
材)를 가장 많이 뽑았고 시호(諡號)는 장영공(章榮公)이다. 사실(事實)이 고려사(高
麗史)에 있다 충숙왕(忠肅王) 후(後) 2년 계유(癸酉) 1333年에 작성된 호적(戶籍)이
있다
- 배(配)는 영가군부인 복주 권씨(永嘉郡夫人福州權氏)니 부(父)는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 윤명(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 允明)이요 조(祖)는 추밀원 부사병부상 상장군
제(樞密院副使兵部尙上將軍濟)요 증조(曾祖)는 병부상서 상장군 득공(兵部尙書上將軍
得公)이요 외조(外祖)는 삼중대광 세자 사(三重大匡世子師)인 충렬공 안동 김방경(忠
烈公安東金方慶)이며 충렬왕(忠烈王) 21年 을미(乙未) 1295年 생(生)이다. - 묘(墓)는 풍덕부 망포리 제일동 응봉 하 양마 교상 자좌 합폄(豊德府芒浦里第一洞
鷹峰下養馬橋上子坐合窆) 현 개풍군 흥교면 조문리(現開豊郡興敎面照門里) 이니 실
전(失傳)하였다가 순조(純祖) 무자(戊子) 1828년 후손 성은(後孫性溵)과 수(燧)등
(等)이 묘(墓)를 찾아 수호(守護)하게 되었고 후손(後孫) 첨추 상모(僉樞相模)가 갈
문(碣文)을 찬(撰)하고 재관(在寬)이 서(書)했다. 경인(庚寅) 지난 이후(之亂以後) 남
북 분단(南北分斷)으로 성묘치 못하다 을유(乙酉) 2005년 조고(祖考)의 사당 숭덕
사(祠堂崇德祠)에 배향(配享)하였다.16)
- 자(5) : ①광리(典理判書公), ②영리(判軍器監事公), ③성리(司醞丞公), ④안리(版圖
判書公), ⑤천리(密直副使公)
<17세> 김성리(金成利) : 사온승동정 판전의사사(정3품) ※사온승공파 - 고려 충숙왕(忠肅王) 1324년생이고 사온승동정(司醞丞同正)이니 공민왕(恭愍王)
135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판전의사사(判典義司事17))와 통정원 사온승동정(司
16) 광산김씨 대종회 인물정보란 발췌
17) 서지정보, 발행처 : 행원재(杏園齋) 석인본, 2권 2책, 1976년 간행. 〇해제 : 『광산김씨사온승공파보(光山金氏司
醞承公派譜)』는 전남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에 있는 행원재(杏園齋)에서 1976년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을 살펴보
면 도시조는 신라 김알지(金閼智)로 하고 있고 1세조는 신라 왕자 김흥광(金興光)이다. 그는 당시 신라가 어지러
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광주 서일동(光州西一洞 ; 현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를 옮겨
살았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이곳을 본관으로 삼아 지금까지 세계를 이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문은 이희
익(李憙翼)이 썼고 발문은 후손 김창수(金昌洙)가 썼다. 발문을 보면 광산김씨 사온승공파는 전남 함평과 무안 및
장흥을 세거지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산김씨는 문정공파 · 문숙공파 · 양간공파 · 낭장공파 · 사온
직장공파 등 5개의 대파가 있는데 사온승공파는 14세 양간공김연(金璉)파에서 분파한 소파에 속하며 파조는 김
성리(金成利)이다. 김성리는 김흥광의 17세손으로 그의 부친은 장영공 김진(章榮公 金稹)이며 4남1녀 중 셋째아들
로 태어났다. 김성리는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벼슬은 판전의사사(判典醫寺事)와 통정원 사온승동정
(司醞丞同正)을 역임하였다. 묘지는 잃어버려서 현재 전남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에 설단(設壇)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문중의 여러 문헌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의식의 흐름을 엿볼 수 있으며 역사 · 인
구 · 민속 · 문화 등을 고찰할 수가 있어 여타 문헌들보다도 독특한 묘미가 있다.- 19 -
醞丞同正)을 역임하였다. 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父는 낭장(郞將) 신검(信儉)이
요. 配는 칠원윤씨(漆原尹氏)로 父는 충의공(忠義公) 길보(吉甫)요, 祖는 판서(判書)
수(秀)며 曾祖는 우찬선(右賛善) 양삼(養三)이요. - 문학이 절륜(絶倫)하고 효우가 독실하여 사림의 추중한 바 되었다. 묘는 실전(失傳)
하여 1974년 함평군 대동면 나막리에 설단 하였으나, 1976년 3월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 후백림암자(後栢林庵子) 좌원(坐原)에 이단(移壇)하였고 실적비(實蹟碑)가 있
다.
<18세> 김 함(金涵) : 판전교시사(정 3품) 당상관18)
- 충목왕(忠穆王) 병술(丙戌) 1346년생이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다. 配는 경주이
씨(慶州李氏)로 父는 형부전서(刑部典書) 정보(廷俌)요. 祖는 소감육(少監毓)이며 曾
祖는 월성군(月城君) 경중(敬中)이요. 己丑 1409년 8월 8일에 졸(卒)하니(63세)
墓는 위와같다. 려말이후(麗末以後)로 세세로 창녕(昌寧)에 거주(居住) 하니 창녕지
(昌寧誌)에 사실(事實)이 있다. - 판전교시사는 고려시대 전교사(典校寺)의 최고 관직으로 정3품의 관직임. 아들은
성옥, 원길, 광련
제3장 조선 시대
□ 조선 초기
-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위화도회군
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 군권을 장악하고,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
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는 공
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년, 1400년)이 발생하였
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당성이 결여된
집권으로 쇠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해 나가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육조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18) 광산김씨 대종회 인터넷족보 열람(장성대보를 근거로 작성)- 20 -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복귀시키는 등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는 노력
을 하였다. 그러나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
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들었다. - 이때 구성된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 제도는 성종 때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
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되어
영조때까지 서얼의 관직 임용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많은 서얼들의 자유로
운 활동의 제한 및 사회적 차별을 유발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유신(遺臣)을 자처하며 새 조정에 협력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중
반 이후 서서히 고려 유신 세대는 사라졌고, 그 아들, 손자 세대는 새 조정에 출사
하게 되었다. □ 조선 전기
-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
역인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 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
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
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
를 정비하였다. 또한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고 국가의 의례서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또한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
예들인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
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 21 -
□ 조선 중기
- 고려 말기의 온건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후예이며 학맥 상으로는 정몽주의 후예들이
었던 사림은 세조 대에 김종직 등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래 꾸준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김종직은 비록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탈을 비난했지만, 이후 성종 대에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파 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하면서 서서히 영향
력을 확대한다. 동시에 이들 사림은 향촌에서 향약과 소학 등을 보급함으로써 지역
적 기반을 다져놓기도 한다. -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
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
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
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
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
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
-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
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국토- 22 -
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
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 조선 후기
-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 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
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
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
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의 강력한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이 강화되고 붕당정치의 힘은 약화되었다. -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로 이어진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
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
制)를 시행하였다. - 1800년 8월 18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
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
표적인 경우다. -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
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
워져 갔다. 이와 전후하여 서양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었고, 최제우가 창시한 동
학(東學)이 창시되었으나 모두 박해를 당하였다. - 23 -
□ 조선 말기
-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
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
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
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
다. 이어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 1882년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884년 12월 4일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개화정
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진보
적인 사상을 반영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
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
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
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
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
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
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집강소
(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
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 일본은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력- 24 -
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
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
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종은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10
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
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
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
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을 단행하였다.
<19세> 김성옥(金成玉) : 정헌대부 이조판서, 성균관 대사성(정3품)
- 공민왕(恭愍王) 병오(丙午) 1366년생으로 1389년에 문과(文科)에 올랐고 이조(李
朝) 태조(太祖)때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
(追贈) 받았다. 配는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로 父는 판관수동(判官秀東)
이요, 祖는 목사욱(牧使勗)이며 曾祖는 전성군사의(全城君思義)요 丁巳 4월 18일에
卒하니, 墓는 나주군(羅州郡) 삼장산(三壯山)이라 하나 실전(失傳) 되어 己巳 1929
년에 설단추모(設壇追慕) 한다. 토지수용령(土地收用令)에 의하여 나막(羅幕)으로 이
단시(移壇時)에 祖와 考를 병설단(倂設壇)하였다가 丙辰 1976년 3월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杏園里) 후백리암자(後栢林庵子) 坐에 이단(移壇)하고 실적비(實蹟碑)를 세웠
다.19)
- 조선 태조 이성계는 요동을 정벌하려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
고 권력을 잡아 창왕을 옹립 하였다가 다시 정몽주와 같이 힘을 합쳐 공양왕을 내세
웠다. - 태조는 조준과 결탁하여 사전에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자기들
의 신흥세력 기반을 굳게 하였다. 고려에 충성을 바친 정몽주는 이성계와 같이 공양
19) 광산김씨 대종회 인터넷족보 발췌- 25 -
왕을 세웠는데 이성계의 위력이 나날이 커져서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우선 조준을 제거하려 하는 동시에 고려조를 끝까지 떠받들고자 하다
가 이방원의 문객 조명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 되었다. - 태조는 1392년 2월 15일에 조선왕 사대정책과 숭유배불 주의로 고려 말기에 부패
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 성옥은 치온, 경온(3부자)을 데리고 창녕(선대가 살던 곳으로 추정) 산중으로 피신
하였으나, 조선조 초대왕 태조의 부름으로 다시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고, 치온은
장흥(행원 추정)으로 하향, 경온은 함평(월산리)으로 갔다. - 유학을 전공하는 학교가 서울의 성균관을 최고학부로 하였으며, 경인(京因) 5개처
에 5부학당을 두었다. 오학(五學)은 중부지방 중학, 서부지방 서학, 동부지방 동학, 남부지방 남학, 북부학당 북학이 있다. 향교는 각주, 부, 군, 현에 일읍일교를 두었
다. - 아들은 ① 치온(장흥 행원) ② 경온(함평)을 두었다.
<20세> 김경온(金景溫) : 이조좌랑(정6품)
- 본관 광산. 시조의 20세손. 대사성 성옥(大司成成玉)의 둘째 아들. 태종조에 이조
좌랑을 지냈고 1450년경 경남 창령에서 학교면 월산리로 이거 정착하여 광산김씨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부인은 전주최씨 승철(承哲)의 딸이다.20)
- 아들(3형제) : ①자분 : 통정대부 행(行) 종성부사, 함평군 청계동과 무안 금산 ②
자보 : 이조좌랑 정 6품, 무안군 낙안 ③자궤 : 이조좌랑 정 6품
- 함평군 학교면 월산리 송정(松亭) : 이 마을 토광묘에서 청동기 유물인 꺽창(銅戈)
이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볼 때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상
확인할 수 있는 성씨로는 광산김씨가 제일먼저 입촌했다. 첫 입촌자는 태종 때 이조
좌랑을 지낸 김경온(金景溫)이며, 그는 아들 자분(自芬 1419년), 자보(自普 1421
년), 자궤(自簣 1424년)등 3형제와 더불어 1450년경에 입촌했다. 그의 후손은 이
마을에서 4~5대 동안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며 살았으며 자분의 후손은 현 학교면
금송리 금산으로, 자보의 후손은 대동면 금곡리 나막으로, 자궤의 후손은 장흥군 관
산으로 떠나 지금은 그 후손이 이 마을에 단 1호도 살지 않는다. 이후 본관을 알 수
없는 박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데 그 후손이 하나도 없어 밝힐 수가 없으며 박씨
20) 함평문화원 인물란 열람- 26 -
에 이어 충북 충주에서 낙향한 충주지씨들이 약 300여 년 전에 들어왔고 그 뒤에
청주 한씨 등 여러 성받이가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무안현
좌랑촌면(佐郞村面)에 속했고 좌랑촌이라 불렀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이 마을을 개
촌(開村)한 김경온이 이조좌랑을 역임했고 큰 아들 자분이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
여 종성 부사를 역임했으며 둘째 자보가 병조좌랑 셋째 자궤가 음사로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한 마을에서 좌랑벼슬 셋이 나오고 부사벼슬이 나왔다 하여 촌명을 좌랑
촌이라 했고 면명도 좌랑촌면(후에 좌랑면,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다는 것이
다. 현달한 인물을 배출했던 광산김씨들이 마을에서 떠난 후 송정(松亭 1789년 호
구총수지명)이라 했는데 이는 마을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한데서 붙여진 이
름이라고 한다. 그때 무성했던 소나무중 현재 2그루가 남아있어 매년 정월 보름 때
당산제를 지냈는데 근년에 이르러 제를 지내지 않는다.21)
◼ 김치온(金致溫)
- 진사(進士)로 고양현감(高陽縣監)이요. 단종(端宗)이 선위(遜位)하매 장차대(將次大)
화가 임박하였음을 예지하고 벼슬을 버리고 장흥으로 하향하여 추강(秋江) 남효온(南
孝溫)과 설암(雪巖) 김혼(金琿)와 더불어 도의로써 사귀다가 단종대왕의 흉변을 자탄
(自嘆)하되 내가 魯陵舊臣으로 일찍 三相文臣과 같이 못은 것이 한이라하고 못내 애
통해 하였다. 配는 貞夫人 水原白氏니 父는 判恩粹요. 曾祖는 縣監이였으며, 墓는
長興郡杏園後山中嶝艮坐요 後孫이 世世로 長興邑杏園에 산다. 태조 건국 1392년
2019년-1392= 627년 장흥읍 행원 정착 추정
- 계유정난 : 1453년 수양 대군(후에 세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사건. 세
종의 큰아들 문종은 병약하여 단명하고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
다. 수양 대군은 김종서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동생인 안평대군도 죽인 뒤 단종
을 영월로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려 죽이고 왕이 되었다.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
육신 등을 처형하고 정난에 공이 큰 한명회, 신숙주, 권람, 홍달손 등을 공신에 책봉
하였다.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하는 사림인 김종직은 조의제문(弔義帝文, 초나라 왕
인 의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을 지어 이 사건을 비난함으로써 무오사화가 일어났
다.22)
21) 출처,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월산리(月山里, Wolsan-ri) 작성자 한맹
22) 네이버 지식백과, 계유정난(癸酉靖難)- 27 -
<21세> 김자궤(金自簣> : 이조좌랑(정6품) ※ 어은 선산 최고 선조
- 1424년~1494년 본관 광산. 자 공포(功圃). 호 지헌(芷軒). 시조의 21세손. 좌랑
경온의 셋째 아들.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부인은 宜人 한산이씨 정진(廷震)의 딸이
다.23) ※ 묘는 무안 좌량면에서 토지수용계획에 의해 어은 선산으로 이장(1994년, 辰洙)
- 이조정랑과 좌랑의 권한 : 이조에서도
특히 정랑(정 5품)과 좌랑은 인사 행정
의 실무 기안자로서 권한이 컸는데 이
들을 합쳐 전랑이라 일컬었다. 전랑은
삼사(三司 : 홍문관-경서를 다룸. 사헌
부-정치를 잘하고 못함을 다룸. 사련원
-임금을 간(諫)하고 백관을 탄핵)에서 명망이 특출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는데 전랑
자신이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전랑을 지낸 사람은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대체로 재상에 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마련이다. 선조 때 신의겸과 김효
원이 전랑직을 둘러싸고 다툰 것이 동인, 서인의 분당을 가져온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 김자분(金自芬) : 좌승지
- 1419~1481. 본관 광산. 자 희포(希圃). 시조의 21세손. 좌랑 경온(景溫)의 맏아
들. 14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부사를 지냈으며 사후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아내
는 경주최씨 경렬(景烈)의 딸이다. ◼ 김자보(金自普) : 병조좌랑
- 1421~1484 본관 광산. 시조의 21세손. 좌랑 경온의 둘째 아들. 병조좌랑을 지냈
으며 아내는 언양김씨 정권(鼎權)의 딸이다.
<22세> 김세걸(金世傑) : 종성부사(鍾城府使) (종3품)
- 김세걸(金世傑) 조선 전기의 문신.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기묘사화(己卯
士禍)에 연루되어 관산(冠山) 당동(추정, 선대로부터 들었음)으로 유배됨.24) 부인은
淑人(정3품 하) 晉州河씨. ※무안 좌량면에서 국가 토지 수용계획에 의해 어은으로
23) 함평문화원 인물란 열람
24) 한국고전종합DB에서 발췌
그림 5 이조좌랑 김자궤(21세) 묘(2019.9.13.)- 28 -
이장(1994년, 辰洙)
- 기묘사화(己卯士禍) : 1519년(중종
14년) 일어난 사화(士禍).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
림파들이 다시 한번 정계에서 밀려 나
간 사건으로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이 극형을 당했고 나머지 사림
들도 대부분 귀양가거나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 밖에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
광필, 안당 등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던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정계 복귀는 다시 한 세대가 더 걸리게 되었다. 조선 4대 사화 중 가장 큰
사화라는 이름에 들어맞는 사화다. 무오사화는 처음부터 사림파가 죽을 짓을 자초했
고, 갑자사화는 오히려 훈구파가 더 크게 화를 당했으며, 을사사화는 외척 세도가
간의 권력 다툼에 더 가까웠다. 반면 기묘사화는 왕과 대신들이 작정하고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 종성은 조선시대 대한 13도 행정구역(함경남도에 있음)이며, 외관직(外官職)과 지방
직(地方職)이 있었다.
<23세> 김 훤(金暄) : 성균진사(정7품) → 석정으로 이주(1515년경)
- 30세에 진사, 65세 졸, 휘(諱)는 휜, 자(字)는 휘서, 호는 지암(止菴), 부인 의인
(6품) 수원백씨
- 생원과 진사란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
에 <줄여서 생진과(生進科)라고 한다.>
급제한 유생을 말한다. 그들 중 오경사
서(五經四書)의 문제에 합격한 사람을
생원이라 불렀고, 시부(詩賦)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라고 불렀다. 생원, 진사는
하급 관직 <참봉(參奉), 도사(都事) 등에 한해 취직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성균관
에 들어갔으며, 또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문과는
생원이나 진사가 아닌 사람도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생원이나 진사가 시험을 치르
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생원과 진사의 자격은 유생(儒生)들이 매우 명예롭게 여겼
그림 6 종성부사 김세걸(22세) 묘(2019.9.13.)
그림 7 성균진사 김훤(23세) 묘(2019.9.13.)- 29 -
으므로 생원이나 진사로 평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았다
- 진사란,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인 진사시 합격자에게 주어진 칭호임. 조선시대
에 진사시(進士試)를 통해 배출된 진사(進士)는 23,776명으로 추산된다.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대부분은 진사로 존
재하였다. 진사가 된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문에도 영예로운 일이어서 진사 칭호
만으로도 향촌 사회에서 지위를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천거를 통해
서 관직에 나갈 수도 있었다.25)
- 장흥군 관산읍 송촌리 2구 평촌
마을은 관산읍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위치하고 있
다. 40여가구 중, 20호가 광산
김씨, 장흥위씨 12호, 나주나씨 5
호, 김해김씨 2호, 기타 4호 등
이다. 이곳 마을의 광산김씨는 원
래 1515(乙亥)년에 지암(止菴) 김
훤(金 暄, 1475~ ?) 선생이 함평군 학교면 도화동에서 방촌리 새터(新基)마을의
남동쪽 방향으로 300미터에 위치한 비래嶝 아래 석정에 입향(入鄕)하여 터를 잡고
살다가 현 장소로 350여년 전에 이주했다고 전한다. 이후 1932~1935년 제3대
고읍면장 계은(桂隱) 위대량(1884~1951)이 주도한 마을 앞 유천농장 간척사업으로
300두락의 농토가 조성되고, 1972년 대평마을은 송촌3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
다. 2000년 후손들은 석정 비래嶝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광산金氏 유허비(遺虛碑)
를 근수(謹竪)하였다. 마을 입구 건너편 외동리 75-1번지, 23번국도(장흥대로
1433)변에 정남진농협쌀공동사업소(RPC)가 위치한다.26)
<24세> 김 충(金忠) : 고산27)현감(종 6품)
- 부인 淑人(정3품 하) 광주이씨, 아들은 ①수성, ②안성을 두었다. - 현감은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강화작업의 일환으로 설치하였는데 원래 그
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26) 2019.8.30.일자 장흥신문에서 발췌(장흥군 평촌마을 소개란)
27) 1895년 이전에는 고산현이었으며 갑오개혁 때 고산군이 되었다. 이후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전주군에 병합되
어 사라졌다. 면적은 422.18㎢이다. 현재의 완주군 고산면 등 동북부 6개 면이 옛 고산군에 해당한다.
그림 8 현재 석정의 모습(2019.9.13.)- 30 -
전신은 고려 예종 이후부터 지방에 파견되었던 감무(監務)이다. 지방수령 중 가장 낮
은 직급이나 전국적으로 140인이 파견되어 지방에 파견된 수령(守令)의 다수를 차
지하고 있다. 임기제한 1,800일이며 절제도위(節制都尉)의 군직(軍職)을 겸임하였는
데 후기에는 점차 감치(减置)되어 120여 인까지 줄고 있다.28)
<25세> 김안성(金安性) : 병절교위(종 6품)
- 부인 宜人(6품) 한양조씨, 아들 인호를 두었다. - 조선 시대 서반(西班) 종6품 하(下)의 품계명. 조선 태조 원년(1392) 7월에 제정
공포된 신관계 조직에 종6품 하(下)로 수의교위(修義校尉)가 보이는데, 이것이 세조
12년(1466) 1월에 병절교위(秉節校尉)로 개칭되었음.29)
<26세> 김인호(金仁豪) : 선전관(종 5품)
- 1566년생(명종 21년), 자는 사언(士彦), 부인 淑人 금
성나씨(錦城羅氏), 아들 상경을 두었다. - 선전관청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호위하고 명령을 전달
하는 선전관으로 구성되었는데, 품계는 정 3품-종 9품
까지 있다. -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병
과(丙科) 5위(13/28)30), 시험명 : 기축증광용호방목(己
丑增廣龍虎榜目)
<27세> 김상경(金尙瓊) : 오위도총부 경력31), 충청도 병마우후(종4품)
28) 네이버 지식백과 : 현감(縣監)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9) 병절교위 [秉節校尉]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30)『기축4월○일증광용호방목(己丑四月○日增廣龍虎榜目)』(국사편찬위원회)
31) 경력(經歷), 조선조의 정四품 벼슬. 의금부(義禁府)등 관청에서 실제 사무를 맡아 보았다. 오위도총부 임무는 중
앙 군사조직인 의흥위•용양위•호분위•충좌위•충무위였는데, 전체적으로 이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그림 11 김 충(24세) 묘 그림 9 김안성(25세) 묘 그림 10 김인호(25세) 묘
그림 12 무과합격 원문- 31 -
- 자는 화중(華仲) 호는 어은(漁隱), 19에 무과급제 후 선전관, 중간에 모친상으로
잠시 낙향, 오랫동안(60살, 추정) 선전관 등으로 계시다가 이괄의 변란시 무악제에
서 큰 공을 세움.(2019.9.9.백인기), 부인 淑夫人(정3품상) 수원백씨, 아들 여종을
두었다.
- 인조 18년 경진(1640) 4월 9일(경신) 맑음 18-04-09[04] 병비가 변유 등에
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병비가 변유(邊宥)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윤탁을 무신겸선전관
으로,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을 도
총관으로, 정이중(鄭以重)을 도총부 도
사로, 김상경(金尙瓊)을 충청도 병마우
후(忠淸道兵馬虞候)로... 등을 제수하였
다.32)
- 이괄의 난33) : 이괄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인 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까지 무
신으로 활동했다. 그는 서인 세력이 1623년에 광해군을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인조반정 후 권력
을 잡은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 공을 세우고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괄은 후금이 북쪽의 국경을 위협해 국방 문제가 심각해지자 평안북도 병마절도사
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1624년에 문회와 허통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이 역모(나라
를 배반하거나 왕의 권력을 빼앗는 일)를 꾸몄다고 고발했다. 이에 이괄과 관련된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았지만 역모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나
중에는 이괄의 아들까지 한양으로 불러들여 조사하려고 하자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
다. 이괄은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와 한양을 점령했다. 그러고는 선조의 아들인 흥안
군을 새 임금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괄은 그를 배신한 부하 장수들에게 죽임을 당
했고,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반군도 진압당하고 말았다. -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반군이 한양을 점령했을 정도로, 이괄의 난은 기세가 높았
다. 하지만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관군의 대대적인 진압에서 벗어난 몇몇 반군들
은 조선을 떠나 후금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후금에 가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잘못한 일이라며 조선의 상황을 알렸고,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던
32) 한국고전번역원, 이봉순(역), 2008년
33) 네이버 지식백과 이괄의난 발췌
그림 13 어은 김상경(27세) 묘(2019.9.13.)- 32 -
후금은 이를 트집 잡아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 어은선생(상경)의 활동 : 선전관 제수 후 갑자 1624년 (이괄)의 변란에 임금을 모
시고 떠났다가 왕명의 지시로 서울의 적세를 염탐, 장안솔 만의 막하에 있었는데 적
이 머무르며 괄망하는 기색을 보고 안현(공주)에 가서 적의 후속부대의 길을 끊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1차 경력, 2차 우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선산 밑에서 닭도
치고 농사짓고 자손을 가르치고 또한 이곳에 첨모당(瞻慕堂) 어은 제각을 지었다. *
제각명(名) 첨모당(瞻慕堂)
- 어은 선생의 말씀 : 국가에 혹시나 변란이 있으면 군자(君子)된 도리로서 어찌 가
만이 앉아서 내 몸과 처자만 보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늙어서 시골에 있지마는
언제나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 - 소석 김노현의 비문내용 : “후손(後
孫) 노현이 조상의 어진 사적을 알지
못하는 이도 밝지 못하는 이도 밝지 못
함이요. 알면서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어질지 못하는 일이라는 고훈(古訓)을
잊지 않고 천리(千里)길을 달려와서 나에게 묘소에 표할 글을 요구하므로 내가 말하
되, 선영의 사적을 드러내는 일은 인지상정이나 삼가야 할 것은 너무 지나치게 과장
하여 발명하지 말고 의심나는 일은 궐하고 미더운 일을 전하여 사실을 평범하게 기
록하여 남들이 충신의사(忠臣義士)의 후손이라 한다면 이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는
가? 하고 일을 기록하여 세상에 알린다”.34)
34)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六/墓碣銘 都摠府經歷金公墓碣銘 幷序 선인지제(宣仁之際)。국가다간(國家多艱)。뢰유적개
지신(賴有敵愾之臣)。종사재안(宗社再安)。금야칙망(今也則亡)。사작당일충의제공어구원(思作當日忠義諸公於九原
)。도총경력김공기일(都摠經歷金公其一)。공휘상경자화중(公諱尙瓊字華仲)。광산씨계출신라왕자(光山氏系出新羅王
子)。명석상망(名碩相望)。위동방대성(爲東方大姓)。문안장영공존종(文安章榮功存宗)祊。대사성성옥시사국조(大司
成聲玉始仕國朝)。증리조판서(贈吏曹判書)。세승관음(世承官蔭)。고조훤진사저문행(高祖暄進士著文行)。증조충현
감(曾祖忠縣監)。조안성교위(祖安性校尉)。고인호무과보선전(考仁豪武科補宣傳)。妣금성라씨(錦城羅氏)。부판관수
(父判官袖)。덕배군자(德配君子)。의방훈자(義方訓子)。공생명종을축(公生明宗乙丑)。충효겸담략(忠孝兼膽略)。만
력계미등무과(萬曆癸未登武科)。선조내간(旋遭內艱)。애훼유제(哀毁逾制)。복(服)闋수선전(授宣傳)。갑자괄변(甲子
适變)。호가지공주(扈駕至公州)。효적최저(效績最著)。승명(承命)覘적(賊)。책원수두(責元帥逗)遛관망(觀望)。동부안
현(同赴鞍峴)。분신참획(奮身斬獲)。용좌적세(用挫賊勢)。원수상공시(元帥上功時)。공이륙순(公已六旬)。상(上)亟칭
기(稱其)矍鑠。수도총부경력(授都摠府經歷)。심제청주병우후(尋除淸州兵虞候)。공사왈(公辭曰)。천권성조(天眷聖
朝)。이치중회(以致重恢)。로신하력(老臣何力)。퇴복전려(退伏田廬)。혼적어초(混跡漁樵)。의진선묘(依進先墓)。상
추사기로(上追思其勞)。록진무훈(錄振武勳)。사금포이시탁용지의(賜錦袍以示擢用之意)。강호지지지종막회(江湖之
志知終莫回)。사호어은(賜號漁隱)。지금명기동(至今名其洞)。종모년모월간지(終某年某月干支)。장어은동선조신좌
(葬漁隱洞先兆辛坐)。부인수원백씨(夫人水原白氏)。진사광세손(進士光世孫)。희강녀(希綱女)。장동원(葬同原)。일
남여종부호군(一男汝宗副護軍)。손남길현감(孫南佶縣監),남준(南俊),남언(南偃),남우(南佑),남억(南億)。증현부
그림 14 현재 첨모당 전경(2019.9.13.)- 33 -
◼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양간공→영리(判軍器監事公)→김계휘(자)
-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1597년에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안성
군수가 되었다. 조정에 잠시 나갔다가 북인의 득세로 귀향하였고, 이후 계축옥사에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했다. -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조정에 출사했으나 병으로 다시 귀향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파천오자 어가를 맞이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조정에
출사했다. 이후 원자의 강학을 담당했고,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었으며 또다시
귀향하여 이이와 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세웠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79세의 노
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소현세자를 호위했다. -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낮은 직책을 전전했으나, 이귀와
함께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하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활약했다. 특히 향리에서 머
무르는 동안 아들 김집부터 시작하여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죄다 그의 밑에서 수학하
였고, 이들은 서인의 학문적인 계통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이 되었다. - 예학에 정통한 인물로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이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되었기 때문
에 형식적인 예법에 치우친 유교 원칙주의자들의 중시조 격인 인물이다. 1688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아들 김집도 뒤늦게 종사됨에 따라 부자가 문묘에 종
사되는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이 사람의 증손자가 숙종의 첫 번째 장인인 김만기와
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다.
<28세> 김여종(金汝宗) : 절충장군 행(行) 용양위 부호군(종4품)
- 부인 淑夫人(정3품상) 원주이씨, 淑夫人 밀양박씨, 아들을 ①남길(南佶, 현감) ②남
준(南俊) ③남언(南偃) ④남우(南佑) ⑤남억(南億)을 두었다.⇨ 실질적으로 이 5형제
가 평촌(석정) 문중(집성촌)을 이루는 씨족이다. - 조선시대 서반 무관의 관직으로 5위도 총부에 속한 용양위 좌위에 경기도, 서울, 동부 출신 군사로 조직 된 군대 부호군이다. - 규장각 원본: 兵批, 李旰爲同知, 李弘璧爲老江僉使, 金汝宗爲龜山召募別將, 李敏
진재(曾玄不盡載)。식지자성십세(式至子姓十世)。세풍은약(世風隱約)。돈상행의(敦尙行義)。가견원원이류장의(可見
源遠而流長矣)。후손로현숙석유아(後孫魯鉉夙昔有雅)。부려십사(扶藜十舍)。징위생석지명(徵爲牲石之銘)。소여해
자족제장현(所與偕者族弟張鉉)。명왈(銘曰)。 모유아훈(母有雅訓)。충효살신(忠孝殺身)。유이우시(有貳于是)。우하
성인(于何成人)。의유시자(宜有是子)。충용매륜(忠勇邁倫)。남(南)廵호가(扈駕)。안현수훈(鞍峴樹勳)。유공사상(有功
辭賞)。우공탁연(尤公卓然)。대수지풍(大樹之風)。이세동부(異世同符)。자질습사(子姪習射)。견공원도(見公遠圖)。
왈위신자(曰爲臣子)。기용전구(豈用全軀)。유천백년(有千百年)。충혼부사(忠魂不死)。곽소요(廓掃妖)氛。묵우종사
(默佑宗社)。- 34 -
章·金壽玉爲僉知, 金壽一·權脩·李煦·李
箕徵·李慣·尹以道爲副護軍, 洪處亮·金宇
亨爲副司直, 金世鼎爲副司果。
- 탁계집(濯溪集) 濯溪集卷之十 / 詩
次贈金汝宗光岳 朱子十九歲。把酒歌
遠游。與君同發軔。前路正悠悠
<29세> 김남길(金南佶), 남준(南俊), 남억(南億)
○ 김남길(토정대부 행(行) 광양현감, 종6품), 배 청풍김씨, 아들 리오, 수오, 건오, 취오, 광오를 두었다.
- 下直, 群山萬戶金南佶。金南佶이 하직함. 승정원일기 290책, 숙종 8년 5월 19일
(1682년)
- 全羅監司書目, 光陽縣監金南佶, 九月二十八日身死事, 승정원 일기 362책, 숙종
20년, 발생일 1694.10.7.(음)
○ 김남준(통덕량), 배 영광김씨, 아들 명오, 일오를 두었다. ○ 김남억(통덕량), 배 풍덕장씨, 아들 익오, 겸오를 두었다. ※ “뒷면”에 석정가 가계도를 세대별, 장자순으로 모두 정리했습니다.
<30세> 김리오(履五), 수오(秀五), 취오(就五), 명오(鳴五), 익오(益五)
○ 김리오, 배 단양우씨, 전의이씨, 아들 한중 한 대를 두었다. ○ 김수오(벽동군수, 만윤 부호군), 배 수원백씨, 아들 진려를 두었다. 무과급제(1583
년, 선조16에 군수하다. ○ 김취오. 배 남평문씨, 아들 한갑, 한민을 두었다. ○ 김명오(통덕량, 정5품), 배 문경최씨, 아들 광흡, 광협을 두었다.
- 정조 21년 정사(1797) 1월 2일(계묘) 21-01-02[15] 서울과 지방의 노인직(老
人職)을 가자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가자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보
성(寶城) -사서인으로 가의대부 김명오(金鳴五), 가선대부 김덕승(金德承), 통정대
부 함동익(咸東益) 등 2인, 절충장군 선진철 등 3인이다. ○ 김익오, 배 진원박씨, 아들 한추, 한원을 두었다.
그림 15 절충장군 김여종(28세) 묘(2019.9.13.)- 35 -
<31세> 김한대(金漢大), 진려(震礪), 한민(漢民), 광흡(光洽), 한추(漢秋), 한원
(漢元)
○ 김한대, 배 경주김씨, 아들 우피, 원필을 두었다. ○ 김진려, 배 나주나씨, 아들 홍필을 두었다. ○ 김한민, 아들 형필을 두었다. ○ 김광흡(처사35), 자 潤夫, 호 槐亭, 생몰년 1697~1742), 배 해남윤씨, 아들은 ①
진필(震弼) ②유필(有弼) ③영필(永弼)을 두었다.
- 광흡은 5, 6세 재동으로 칭하고 10여세 때 자혜(自解)를 3백수 하고 서(西)서 오
(五)경을 해독함. 3경은 역경, 시경, 서경(주역,시전,서전), 4서는 대학, 중용, 논
어, 맹자, 5경은 역경, 시경, 서경, 예정, 춘추, 7경은 시경,서경, 예경, 락경, 역
정, 논경, 춘추, 7서는 4서와 3경을 말함.
- 괴화나무(회화나무, 천연기념물 315,316,317 등록) : 유천제36)에 있는 회화나무
(槐化)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행복을 불러오는 등 중풍을 낫게 하고 온갖 지병
(감초)에 신효한 신비의 약나무다. 나라의 경사 때 또는 큰 벼슬할 때 기념으로 심
은 나무다. 괴화(槐化)=회화나무는 광흡의 호가 괴정으로 봐서 광흡선조께서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묘갈명 : 松沙先生文集卷之三十一 / 墓碣
銘 槐亭金公墓碣銘 幷序 a346_147b 傳云
泰山崩於前。麋鹿興於左而目不瞬。以吾所
聞。槐亭金公其人歟。嘗入試場。場屋夜驚。 士如奔波。而一人獨晏然若平常。視之公也。 公可謂千萬人中。常知有己者也。公生五六
歲。以才童稱。十餘歲。自解朞三百數。五書
五經。誦如己言。以至百家。一過眼無遺忘。少長。負抱屈行輩。幼有至性。晨昏定省。不敎而能。就
外傅。塾舍稍遠。父母使勿晨昏。公曰。餘力學文。夫子有訓。終不廢。事兄如事父。處族黨盡周睦。 鄕黨致信義。嘗有事先墓。諸宗莫出力。公獨擔夯不爲言。宗中皆服焉。每俗節具米肉。自族長老。以
及尊長。皆致禮。老吾及人。公有矣。丁憂。哀毁逾制。不腥終三年。考墓家距一舍。月三省。風雨不
以闕。內艱亦如之。此公 志行之大略也。生丁丑。卒壬戌。壽僅四十六。葬柳川亥坐。公諱光洽字潤
夫。槐亭號也。金系光山。爲東方臣擘。終始羅麗。或功存社稷。或冠冕士林。昭載史乘。降至諱聲
玉。入我朝官大司成。贈吏曹判書。子景溫。孫自蕢。幷吏曹郞。傳至振武功臣尙瓊。討逆适有勳。官
35) 처사 : 세파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선비는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
36) 유천제는 1735년 김진필 선조께서 세운 서실이다.
그림 17 유천제 앞 회화나무(2019.9.13.)- 36 -
至節度。寔公高祖。副護軍汝宗。通德郞南俊。通德郞鳴五。考以上諱。妣
聞慶崔氏考天翰。夫人海南尹氏喜壽女。貞純有婦德。墓同封。三男震弼, 有弼,永弼。三女適任馨德,魏師麒,張慶彩。五世孫魯鉉裁書。使其族姪
永悳將命。求顯刻於不佞。永悳蓋從余遊者也。義不可以牢辭。謹按其狀。 狀乃永悳再從祖㝡烈筆。雅實無華。其言足徵。銘曰。以公之才。兼公之
文。又秉公之行誼。胡不畀之永年。不于其身。 必于其孫。吾聞其瑤環珥
瑜。可知爲法家人。37)
○ 김한추, 배 인천이씨, 아들 상필을 두었다. ○ 김한원, 아들 정필, 몽필, 의필을 두었다. 제4장 대한제국(근대)
□ 근대
-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4년 1월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로 분류된다. □ 대한제국
-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
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
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구본신참' 성격의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
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23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게 ' 한반도내에 영토, 시설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것'을 강요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1905년 포츠
37)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5
그림 18 괴정처사 비석- 37 -
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되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
게 된다. 이어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폐기를 주장
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
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
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
해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軍隊害刪)하였다. -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
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
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60일간의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韓日
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경술
국치)
□ 일제강점기
-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는 일본 제국(이하 일제)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제1기인 무단 통치 시기, 제2기인 민족 분열 통치 시기(소
위 문화통치), 제3기인 민족 말살 통치 시기로 나뉜다.
<36세> 김노현(金魯鉉) 교수 : (31)광흡→(32)진필→(33)득문→(34)중운→(35)최엽
→(36)노현
- 김노현(1841~1915) 자는 공범(孔範) 호는 소석(小石) 배 수원백씨이다. 대사성(大
司成) 김성옥(聲玉)의 후손인 화오 김최엽의 아들로 1841년(헌종 7년)에 평촌마을에
서 태어났다. 연암거사공 위영경(1797~1871)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연재(淵- 38 -
齋) 송병준에 집찬(執贊)하여 성취하였다. 사서(四書) 오경(五經) 제자백가서(諸子百
家書)를 두루 섭렵하고 특히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지은 책을 힘써 익히고 이를
늙어서도 강독하였다. 칠순(七旬)이 넘도록 후생을 가르침에 전념하였으며 오직 영민
(英敏)하고 빼어난 제자를 길러 내는데 즐거움을 삼으니 公의 문하에서 위계룡(魏啓
龍), 정노수(丁魯壽), 김기찬(金箕贊), 임두석(任斗錫), 백수인(白守寅) 등 크게 대성
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다산재(茶山齋)에서 거처하면서 항상 존재 선생
을 우러러 그리워한 나머지 단(壇)을 쌓고 2월 보름이면 창주(滄州) 고사(故事)에
따라 제사를 모시면서 부시(賦詩) 윤강(輪講)하는 규례(規例)를 정하고 이를 실행하
였다.38)
- 근고득지(勤苦得之)하고 가소빈(家素貧)에 무이자력어학(無以自力於學)하고 어시이
교수(於是以敎授0로 생종위사(生從爲事) 향음향사사(鄕飮鄕射士) 상견예절문(相見禮
節文)은 여문종상여청습(與文從相請習) *문인(門人)이 설(設) 유천단에 모셨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석유고’집(1917년 발행)이 비치되어 있다. - 교수는 조선시대의 관직, 향교의 지도를 위하여 부(府)와 목(牧)에 두었으며 종 6
품관이다. 직무는 유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경기도에 11명, 충청도에 4명, 경상도
12명, 전라도에 8명, 황해도에 6명, 강원도에 7명, 함경도에 13명이 있었으며, 말
기에는 폐지됐다.39)
그림 21 액호 편액은 극암 이기윤(李基允 성산人,
1891~1971)이 썼다. 그림 22 소석 김노현 필적 (小石 金魯鉉 柳川齋 詩稿)
38) 2019.8.30.일자 장흥신문 발췌
39) [출처] “김선일화실 광산김씨 양간공 후 사온승공파 석정파를 중심으로”, 작성자 소천- 39 -
<37세> 김영엽(金泳燁) 의병장, (32)영필→(33)득신→(34)익운→(35)최갑→(36)의
현→(37)영엽
- 김영엽(1869.11.27.∼1910.2.13), 자는 여회(汝晦), 호는 치재(痴齋)로 김의현의
아들로 배는 수원백씨이다. 의적비가 장흥 예양산공원에서 세워져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40) 유공자정보 관리번호 3467, 성명 김영엽(金泳燁), 이명 金如晦 본적 全
南 長興 冠山 松村, 포상정보 :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80년, 훈격 애족장
- 공적개요 : 1906년 정석면(鄭錫冕)과 창의(倡義)를 모의(謀議)하고 1908 심남일
(沈南一) 의병진(義兵陣)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1910 백양사에서 (우해)遇害된 사
실이 확인됨. - 공훈록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
다. 관산(冠山)에서 대대로 내려온 양반의 집으로 문학과 행실로 유명했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선비를 찾아다니다가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깊게 교제하였
다. 한 번은 '사교도(邪敎徒)가 바른 도덕(儒學)을 능멸히 여기는 것'을 보고 수판(手
板)으로 때렸는데 후에 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이 일로 혐의를 받게 되어 송사에
게로 피신하여 몇 해를 산 일도 있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
하고 1906년 의제 정석면(義齋 鄭錫冕)과 함께 의거하였으며, 각 의진을 출입하면
서 계책을 일러주고 협조하였다. 이 때 신창영(申昌榮 혹은 申昌學)이 복흥(福興) 산
중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군율이 엄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달려갔다. 신창영은
김영엽의 능력을 인정하고 군사 반을 선뜻 떼어 주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06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적에게 체포되고, 다시 그의 의진이
김공삼(金公三)·박도경(朴道京)에 의해 수습되어 다른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도모한
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합진하여 적과 대전하였다. 그 후 전해산
(全海山)의 의진과 합진하여 대치(大峙)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였다. 대치 전투는
제 의진들과 연합하여 치른 것으로서, 이 전투에는 전해산·김영엽 의진뿐 아니라 홍
재도(洪在道)·신창학·심남일(沈南一)의 의진도 참가하였다. 그 후 자은촌(自隱村)에서
적과 교전하고 전해산 의진과 분진(分陣)하였다. 1908년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여
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심남일 의진에 입진하여 장흥(長興)·강진(康津) 등에서
왜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의진과의 연합전선을 전개하고 이합을 되풀
이하는 동안 다른 의병장과는 의기투합할 수 있었으나 유독 유종여(柳宗汝)와는 대
40)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발췌- 40 -
민관계에서 의견 차가 크게 벌어졌다. 끝내 유종여가 하수인 황운룡(黃雲龍)·정 섬
(鄭蟾)을 시켜서 1909년 2월 12일 장성 운문암(長城 雲門庵)에 유진하고 있던 김
영엽을 암살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공삼과 박도경이 호군장 손 형(孫 兄)을 시켜
서 하수인을 잡아 총살시켰으나 유종여는 그 후 행방을 감춰 알 수 없게 되었다. 정
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기려수필 138면, 의재실기, 호남절의록41)
- 김영엽(1869∼1910), 자는 여회(汝晦), 호는 치재(痴齋)로 김의현의 아들이다. 어
려서부터 호용(好勇)이 있었다. 족숙 소석 김노현 선생에게 수학하고 이후 송사 기우
만 선생에게 배웠다. 을사, 정미변란 뒤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남에 이르러 전남지
역의 각 의병진에 출입하여 계책을 세워 협조하였다. 1907년에 호남창의 맹소를 세
움에 있어 기삼연, 김준등 의병장과 합세하였으며 같은 해 의병 50명(총기 40정)과
더불어 장성, 순창에서 일어났다. 1908년에 남평 거성동 접전에서 능주, 나주, 영암
의 세 곳에서 공격해오는 왜병과 싸워 70여명을 사살하였다. 10년 전열 정비를 위
해서 장성, 백양사에 유진(留陣)하던 중 내부에 숨어든 반적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돌아가신 뒤 부인 수원백씨는 삼년상을 마치고 공을 따라 자결하였다. 1985년 정부
의 도움으로 의사의 묘역정화사업이 진행되고 묘비를 제막함에 이르렀다. 장흥군민은
의사를 추모하여 장흥읍 예양공원에 의적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그때 향리에서는 직계자손이 살 수 없어 타
지로 분산되어 살고 있으니 후예들이 받은 박해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42)
그림 23 김영엽 의병장이 기우만 선생에게 보낸 편지(1906.4.18.)
41) 전남도지(1968년 刊),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449·475·647·663·664면 공훈록공적조서
42) 2019.8.30.일자 장흥신문에 게재된 내용 - 41 -
- 1906년 4월 18일에 김영엽(金泳燁)이 기우만에게 보낸 편지이다. 1월 25일에 곡
성의 동산정(東山亭)에서 헤어진 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는
것과 귀신의 깃발이 사방을 메우고 있어서 사람의 발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2월에 내려올 때 3일 날 본 고을에 이르렀는데, 일본군들이 자
신이 올 것을 미리알고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의 정황을 말로 다할 수가
없다는 것과 백주섭(白周燮)은 잡혀갔다가 곤액을 당하고 지난달에 풀려났으며, 자신
은 금릉(金陵)으로 도피했는데, 저들이 의병들이 군사 활동을 할까 두려워서 자신을
잡지 못했다고 알리고 있다. 선생님께서 병간(屛間)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천낙주(千洛周)에게 대신 문하에 나아가게 했으니, 그에게 상세히 물어보면 아실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집필자 : 권수용>
김영엽전(⾦永曄傳)
→
독립운동사자료집(호남의병장열전)43)
김영엽은 자는 여회(汝晦)요 호는 치재(痴齋)다. 광산(光山) 사람으로 관산(冠山)에서 대
대로 내려온 양반의 집으로 문학과 행실로 유명하였다. 일
찍부터 공부에 뜻을 두고 이름난 선비친구를 찾아 놀아서
나에게 다닌 지 여러 해이었다. 시국에 대하여 상심(傷心)하
여 항상 불에 타는 것을 구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질 뜻이
있었다. 한번은 사교도(邪敎徒)가 바른 도덕을 능멸히 여기
는 것을 보고 수판(手板)으로써 때렸더니, 그 사람이 뒤에
병으로 죽으매 치재에게 혐의를 씌우므로 원수를 피하여 나
한테 와서 우거하기 해가 넘었다. 5적이 나라를 팔자 통분하여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다가 의
병들이 일제히 일어나자 각진(各陣)에 출입하면서 계책을 말
하여 협조하였다. 신창학이 복흥산 중에서 의병을 일으켰는
데, 모든 진은 약탈과 폭행을 함부로 하는데 홀로 군율이
엄정하여 백성들이 안심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신장(申將)은 뜻이 서로 맞아서 군무(軍務)를 위임하며 말하
기를“나는 군사를 통솔할 재주가 없는데 특히 의기로써 일
어났을 뿐이다. 군사를 모으고 양식과 기계를 모으는 모든 일은 내가 마땅히 계속할 것
이요, 행군하여 적과 싸우는 것은 자네가 스스로 맡으라.”하고 군사 반을 주었더니, 간
곳마다 침노하고 약탈함이 없게 하였다. 민간에서는 방금 의병이란 이름을 빙자하고 사
욕을 채우는 자들이 있어서 재물을 탐하고 백성에게 포악하게 하므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는데 그는 홀로 위로하고 어루만지니 다른 진이 올 때에는 모두 거절하다가도 치재
43)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발췌
그림 24 장흥 예양공원내 의적비- 42 -
의 군사가 온다는 것을 들으면 모두 술과 찬을 장만하여 환영하고 위로하였다. 성재가 해침을 당하자 김공삼. 박도경이 본진을 다시 수합하여 모든 진과 힘을 합할 계
책을 한다는 것을 듣고 흔연히 달려가서
“이것은 나의 본시 계획이다.”
하고 함께 약속과 계책을 정하였는데, 대개 급함이 있으면 합치고 완화된 때에 나누어
각기 군사를 모을 계획을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공(公)은 의기가 명백하고 말이 정확하니 각 진에 가서 이 계책을 말하여 한 마음으로
힘을 같이 하여 어려운 시국을 함께 건지도록 하시오.”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모두 이름을 듣고 흠앙하기를
“어찌 서로 보기가 늦었는고.”
하여 말에 따라 응낙하였으나 재물을 탐하여 사욕을 채우는 자는 모두 보기를 원치 않
았다. 전해산을 군문(軍門)에서 본즉 방금 적을 뒤밟아 행군하는 중이었다. 즐겨 일을 같이 하
기로 하여 대티(大崎)에서 한번 싸우는데 포탄을 피하지 않고 군사들과 수고로운 일까지
같이 하여 밥을 나르며 물을 기는 것까지 몸소 하매 군사들이 모두 심복하였다. 유종여
는 다른 데로 갈 수도 없고 그 위험하고 노고되는 것이 답답하고 싫어서 치재에게 앙심
을 품었고, 또 그의 제지로 제 마음대로 약탈과 폭행을 하지 못하므로 치재를 눈에 박힌
못(釘)처럼 생각하여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치재는 해산과 함께 남으로 가서 자은촌(自隱村)에 이르러 적을 만나 크게 부수고는 분
진(分陣)하여 돌아오매, 해산의 군사가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모두 허락하지 않
으며 “의(義)를 같이 하고 일을 같이 하는데 군사가 네 군사 내 군사가 없는 것이요, 또
전장(全將)은 계책 도략이 많아서 장수가 될 만하니 생사를 의탁할 만하다.”
하였다. 이미 돌아오매 세말(歲末)이 되었다. 군사들을 흩어 보내되
“각기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과세하라. 세후에 마땅히 비밀 기별이 있을 것이니 다시
모여라.”하고는
나한테 와서 과세하고 군사를 미처 모으기 전에 신장(申將)을 만나기 위하여 장차 순창
산중으로 들어가다가 마침 종여의 군사들이 치재를 버리고 이르지 않고 촌락에서 포학
을 부리는 것을 보았다. 주민들이 그의 오는 것을 보고 모두 환영하며 호소하였다. 이에 종여의 군사를 잡아서 곤장을 치고는 그 총과 칼을 빼앗으며
“이 물건들은 왜적을 막아서 위로는 임금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려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에게 포학을 부려서 적이 이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백성이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옳으냐. 나는 방금 백암(白岩)으로 들어가니 돌아가서 너희 대장에게 고하여
한 번 와서 서로 보고 잘못한 것을 빌면 흔연히 내어 주리라.”
하였다.- 43 -
종여가 본래 앙심을 품었던 차에 그의 방비 없음을 타서 쫓아 와서 행패하매 드디어 해
침을 당하였다. 주민들이 모두 모여서 통곡하기를 친척을 슬퍼함과 같이 하고 지금토록
말한 때에는 눈물을 떨어뜨린다. 김공삼·박도경이 변을 듣고는 손룡산(巽龍山)중으로 행
군하여 직접 하수(下手)한 2사람을 총살하고는 종여는 놓쳤더니, 신장(申將)이 선봉을 시
켜 종여의 뒤를 밟아서 총살하여 원수를 갚았다. 치재의 부인 백씨가 그 남동생과 함께 변을 듣고 왔다. 내가 관을 마련하여 주고 관 위
에 “호남의사치재김공지구(湖南義士痴齋金公之柩)’ 라고 써서 고향에 반장하게 하였다. 처음 해침을 당했을 때에 사람을 보내어 수렴하여 매장하려 하였더니, 가본즉 신장(申將)
이 이미 산 밖에 초빈(草殯)을 하여 두었었다. <송사 기우만 지음>44)
그림 25 당시 사진을 삽입
그림 26 장흥에서 왜적과 교전 장면(김선일 화실)
- 기사제목 : 湖南倡義所 馳告于 各廳 座下, 발신자 全羅北道 觀察使 李斗璜, 수신자 內部
大臣 宋秉畯 閣下, 湖南倡義所 馳告于 各廳 座下, 全羅北道 觀察使 李斗璜內部大臣 宋秉畯
閣下 管內 古阜警察署의 報告에 의한 義兵 金永燁이 酒幕 돌리기로 하여 淳昌巡査駐在所로
보내온 通文 別紙 寫本과 같다. 右 報告함. (別紙 通文 寫本). 南道義兵 金永燁 瀝血布喩
于淳昌郡分隊巡檢僉座 惟我朝鮮은 檀箕五千年禮義之邦이라 祖宗于堯舜孔孟之道로 文物이
彬彬야 君君臣臣父父子子가 各安其位고 興我寶藏寺民生이 賴厚니 鄰國이 莫敢窺測焉
더니 嗚呼라 豈忍言哉아 壬丁之事는 姑舍고 近來 十臣之賊이 惹引島夷야 販君賣國에
罪加春秋니 何必師士오 人人得以誅之可也 伊藤은 何爲凶物고 爲邦國賊으로 陰猾莫比고
隻船渡海야 侵掠我國니 君父也와 疆土也와 典章也와 政法也와 財源也에 盡㥘奪之고
使邦國無罪源源者로 勒率萬里內地야 欲盡殺니 邦民之事理도 見以知之와 邦人이 若有
知於此事理면 死魂이라도 不怨我國이오 怨倭國이 陰斬伊藤之頭足야 解其憤忿而雪其邦國
之恥矣리니 於天애 不畏嚴耶爾 所謂 開明者은 吾亦 未知何物리라 臣殺其君고 子殺其父가
44) 기우만, 개항기 을미사변 후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송사(松沙). 전남 장성 출
신.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44 -
開明耶아 萬國通和商路은 以物之有無로 易其所宜어늘 假之通和고 呑我政府奪我疆土典章
人物은 何事耶아 論其罪惡이면 食肉剝皮라도 罪猶餘狀이라 然이나 以吾聖上仁厚之德으로
好生惡殺샤 不忍加誅시고 養其虎惡샤 反爲入困야 束手毒飮에 血呼吐天리타도 無隙
此地 獸腸은 未知其故고 從皮內腐니 痛哉라 當日 譎禍萬古無雙之事로 瀝血呼天애 舌
骨俱枯고 生尸若臥에 魂不復身이라 玆故民怒神羞야 義旅是糾은 聲罪討復之義也라 今此
三畏公論이 繁閱이어늘 何盜保護之名야 欺岡萬國之公辨耶아 天怒諶悄시니 亡爾國爲計
라 不在多言고 速撤還야 爲邦國計可也로다 惜乎願我同胞兄弟아 且停盃고 聽我言라
爲倭肚而生可乎아 爲國君이 死可乎아 生於塗地야 與倭爲侮弄의론 寧死於君國而不若明我
義理也이라 天祚大宋애 弘濟艱難은 非一夫一婦의 所可志願이오 通全國之所大欲也라 特以巡
檢吏胥와 冒兵巡査隊도 亦我同胞兄弟로 生於韓長於韓야 受禀順氣을 以韓之君國으로 養形
賦命이라 皆是非兄則弟非弟則兄이라 何有骨肉相食之理哉아 但以貧寒之疾노 附彼救咽이
內心則全有秉彝良知也라 係彼出場야 殺我人고 回首歸家야 自爾思之면 自然 血淚가
未知下沾衣일 此心此事은 天之秉彛也라 古人云 貧視其所不爲오 窮視其所不取라 니 雖
有外面附彼 內心則堅定不移야 以吾兄弟로 不得相害則圖韓斥倭不力而爲矣라 何不知此理
고 兄殺弟弟殺兄애 搏掌大笑可乎아 欲哭無暇耳라 惟願胞弟兄巡檢巡査도 苦心血誠으로 斥
殺五百年 切齒之賊야 雪我君國之忿며 解我生靈之抑鬱을 千萬幸甚 戊申 十一月 初七日
金永燁 號痴齋. 湖南倡義所 馳告于 各廳 座下
- 統監(古谷) 副統監(佐竹) 大將(牟田參謀長) 憲兵隊長 石塚參與官 內部大臣 同次官 (回覽)
總理大臣 農商工部次官 統監(古谷) 副統監(佐竹) 大將(牟田參謀長) 憲兵隊長 石塚參與官 內
部大臣 同次官 (回覽)總理大臣 農商工部次官 局長 名. 統監(古谷) 副統監(佐竹) 大將(牟田
參謀長). 憲兵隊長 石塚參與官 內部大臣 同次官
(回覽)總理大臣 農商工部次官
- 全羅道를 徘徊한 賊魁 金永燁이 別紙 寫本과 같은 檄文을 淳昌巡査駐在所에 보내왔다. 右
報告(通報) 함. (注意) 總理大臣 內部大臣을 除外하고는 譯文을 添付할 것
- (檄文의 日譯文) 南道義兵 金永燁은 피를 뿌리며 淳昌郡 分隊 巡檢 僉座에 布喩한다. 돌
이켜 보건대 我 朝鮮은 檀箕 五千年 禮義之國이다. 堯舜孔孟의 道를 祖述한 以來 文物이
彬彬하여 君은 君답고 臣은 臣답고 父는 父답고 子는 子다워 各各 其 位에 安堵하고 我皇
이 寶祚를 밟으시니 鄰國이 敢히 窺測하는 일이 없었다. - 嗚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壬丁의 일은 姑舍하고 近來 十臣의 賊이 島夷를 惹引하여
販君 賣國하니 그 罪 春秋보다 더하다. 伊藤은 어떤 凶物인고 邦國의 賊이 되어 陰猾하기
比할 데 없다. 隻船으로 渡海하여 我國을 侵掠하고 君父 疆土 典章 政治 財源을 皆悉 㥘奪
하고 我國의 無罪源源한 者를 萬里內地로 勒率해 와서 盡殺하고자 하니 邦民이 만약 이 事- 45 -
理를 안다면 死魂도 我國을 怨望하지 않을 것이고 倭國을 怨望하여 伊藤의 頭足을 陰斬하
여 그 憤怒를 풀고 邦國의 恥를 雪辱하리라 너의 所謂 開明이란 者를 나는 아직 그것이 何
物인지 알지 못한다. 臣이 그 君을 죽이고 子가 그 父를 죽이는 것이 開明이냐 萬國의 通
商은 有無를 相通하는 데 있다. 그런데 通和를 빌리어 我 政府를 삼키고 我 疆土를 빼앗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 그 罪惡을 論하면 食肉剝皮도 오히려 不足하다. 그러나 我 聖上은 仁
厚한 德으로 好生 惡殺하시어 차마 이를 誅하시지 못하고 그 虎惡을 길러 도리어 淵에 빠
져 束手飮毒 血呼吐天하는 狀이 있다. 거기다 群小의 獸腸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從皮
內腐하니 痛哉痛哉라. - 當日의 譎禍는 萬古 無雙의 일로서 瀝血呼天에 舌骨이 俱枯하고 生尸는 누운 것 같고 魂
魄은 몸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리라. 玆故로 民은 怒하고 神은 羞하여 義旅가 糾明함은 罪를
聲討하는 뜻이라 이제 이 三畏의 公論을 깨닫지 못하고 保護의 이름을 盜用하여 萬國의 公
眼을 欺罔하면 하늘이 반드시 怒하여 너의 나라를 滅亡할 것은 多言을 要치 않는다. 너는
速히 撤還하여 邦國을 위해 꾀함이 可하도다. 嗚呼 我 同胞여 잠시 내말을 들으라. 倭가되
어 살 것인가 國君을 위해 죽을 것인가. 塗地에서 살고 倭와 더불어 侮弄하려거던 차라리
君國을 위해 죽어 우리의 義理를 밝힘만 못하리라. 天祚大宋의 널리 艱難을 救濟함은 一夫
一婦를 위한 것이 아니요 全國을 通한 大欲인 것이다. 特히 巡檢 吏胥 巡査隊도 또한 我
同胞 兄弟로 韓國에서 나고 韓國에서 자라 順氣를 받고 韓의 君國으로 敎養되었는 故로 皆
是 兄이 아니면 아우 아우가 아니면 兄이라 어찌 骨肉 相食할 理가 있겠는가. 다만 貧寒한
疾로 저 救咽에 붙였으나 內心인즉 全然 秉彛의 良知를 가지고 있다. 彼命에 의해 出場하
여 我人을 죽이고 回首 歸家하여 스스로 생각하면 自然 血淚가 滂沱함을 알지 못할 것이
다. 이 心事는 하늘의 秉彛라. 古人이 말하기를 貧視는 그 하지 않는 바요 窮視는 그 取하
지 않는 바라고 하니 비록 外面 彼에 붙으나 內心인즉 堅定하여 移動하지 않으며, 우리의
兄弟로 서로 害치지 못한다면 韓을 위해 圖謀하고 倭를 排斥하는 데 힘쓰지 않겠느냐. 어찌
이 理致를 알지 못하고 兄은 아우를 죽이고 아우는 兄을 죽여 搏掌大笑하겠는가. 오직 바라
건대 同胞 兄弟 巡檢 巡査도 苦心血誠으로 五百年 切齒의 賊을 斥殺하여 我 君國의 忿을
雪辱하고 我 生靈의 抑鬱를 풀면 千萬多幸이라. 戊申 十一月 初七日 金永燁 號 痴齋 湖南
倡義所 馳告于 各廳 座下
<40세> 김천두(金千斗) 한국화가,45) (32)유필→(33)득표→(34)제운→(35)최흥 →
(36)윤중→(37)식→(38)익수→(39)용문→(40)천두
- 한국 문인화의 거장, 소천(小天) 김천두(金千斗)화백이 2월9일 향년 90세로 서울
45) LIFE&PEOPLE, 권동철 미술칼럼리스트, 2017.2.15일자- 46 -
성수동 ‘산왕당(山王堂)’ 자택화실에서 별세했다. 화백은 1928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했다. 명문
광산김씨 양간공연의 후예로 본명은 김석중이다. 일본 구주대학 문학부 철학을 전공했고 현대미
술초대전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 아세아현대
미술대전 초대출품(동경), 북경아시아미술대전
(천안문고궁) 등에 활동했고 개인전을 39회 가
졌다. - 생전에 중용(中庸)을 자신의 예술철학에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 꼽았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늘
고요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작업에 몰두해왔
다. 평소 수려한 산수와 당대 유명한 스승들이
많아 배움의 길을 확장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며
고향 유천재(柳川齋)에서의 글공부 했던 유년시
절을 회상하곤 했다. - 다초 위복량 선생과 잠계 백형기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익혔고 남화의 거목 남농
허건 등에게 산수화의 기법을 배웠다. 또 월전 장우성에 인물, 화조 등을 사사받아
일생동안 김천두 화백 특유의 시·서·화의 고졸미(古拙美) 넘치는 정신세계를 추구했다. - 아들 김선홍, 김선두(중앙대 한국화과 교수), 김선일(한국화가)이 있다. 저서로 <소
천 한 시집> <시·서·화 삼절과 남종화 이론> 화집 <小天> 등을 남겼다.
그림 27 푸른강변(소천그림), 1993
그림 28 거제도 풍경(소천그림), 1992- 47 -
제5장 석정가문 일가도(※28세 김여종까지 같은 선조)
(※순서 : 세대순, 장자순)
□신라국 김씨왕자 (1)흥광(興光, 광산김시조) ⇒ (2)식(軾) ⇒ (3)길(佶) ⇒ (4)준
(峻, 삼중대광좌복사) ⇒ (5)책(策, 문정공) ⇒ (6)정준(廷俊, 평장사) ⇒ (7)양감(良
鑑) ⇒ (8)약온(若溫), 의원(義元, 충정공) ⇒ (9)광중(光中, 간의대부, 비서감) ⇒
(10)체(滯, 순안현령) ⇒ (11)위(位, 문정공, 문숙공), 주영(珠永, 호부상서), 영(英,사
온직장공) ⇒ (12)광존(光存) ⇒ (13)대린(大鱗, 내하시중) ⇒ (14)규(珪, 낭장공), 연
(璉, 양간공) ⇒ (15)사원(士元), 사형(士亨) ⇒ (16)진(稹) ⇒ (17)광리(光利, 전리판
서공), 영리(英利, 판군기감사공), 성리(成利, 사온승공), 안리(安利, 판도판서공), 천리
(天利, 밀직부사공) ⇒ (18)함(涵, 판전교시사) ⇒ (19)성옥(成玉, 대사성) ⇒ (20)치
온, 경온(景溫, 좌랑) ⇒ (21)자분, 자보, 자궤(自簣, 좌랑) ⇒ (22)세걸(世傑) ⇒
(23)훤(暄, 함평→석정으로) ⇒ (24)충(忠) ⇒ (25)안성(安性) ⇒ (26)인호(仁豪) ⇒
(27)상경(尙瓊, 漁隱) ⇒ (28)여종(汝宗) ⇒ (29)①남길(南佶) ②남준(南俊) ③남언(南
偃) ④남우(南佑) ⑤남억(南億)
⇩
⓵ (29세)김남길(광양현감, 배 청풍김) ⇒(30)리오, 수오(무과급제, 벽동군수), 건오, 취오, 광오 ⇒(31)한중, 한대, 진려, 한갑, 한형 ⇒(32)우필, 원필, 홍필, 형필, 이필, 정필 ⇒
(33세)득려, 득태, 득조, 득명, 득훈, 득렴 ⇒(34세)명운, 지운, 남운, 석운 ⇒(35)최석, 최
윤, 최환 ⇒(36)권현, 기현, 길현, 종현, 권현 ⇒(37)영정, 영운, 영만, 영도 ⇒(38)문수, 봉수(광주일보 국장) ⇒(39)용환, 용암, 용삼, 용우, 용민, 용출(1956,나주시청 남평읍장),
현성 ⇒(40)세중
⓶ (29세)김남준(통덕량, 배 영광김) ⇒(30세)명오(통덕량) ⇒(31세)광흡(처사), 광협 ⇒(32세)
①진필, ②유필, ③영필 ⇩
■ (32세)진필(배 나주나) ⇒(33)득철, 득문, 득정(배 해남윤), 득표, 득수 ⇒(34)시운, 중
운, 시운, 수운, 경운, 중운, 규운, 길운 ⇒(35)최성, 최엽, 최권, 최진, 최전, 최윤, 최- 48 -
헌, 최열(호야당, 예술가), 최화, 최욱 ⇒(36)하중, 개현, 노현(1841,교수), 호현, 채중, 호
현, 후현, 구현, 구현, 우현 ⇒(37)영종, 영섭, 영헌, 영덕(문행), 영익, 영은, 영곤, 영헌
⇒(38)인수, 경수, 혁수, 동수, 종수, 연수, 현수, 돈수, 반수 ⇒(39)용원, 용형, 용윤, 용
희(건국대 센터장), 용신, 용철, 용섭, 용필(관산농협 이사), 용근, 용덕, 용전, 용두, 용춘, 용하, 용철 ⇒(40)호중, 삼중, 갑중(1954), 점중(1956), 개중, 신중, 일중, 대중, 엄중, 태중 ⇒(41)경식, 경구, 민구
2019 김선두교수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분 수상 박원순 서울시장
■ (32세)유필(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 배 청주김) ⇒(33세)득표 ⇒(34)효운, 제운, 하운, 갑운 ⇒(35)최중, 최덕, 최량, 최겸, 최흥, 최관, 최선, 최율, 최문, 용주 ⇒(36)경현, 석
현, 철현, 윤중, 장현, 진현, 달현, 후현, 기현 ⇒(37)영남, 영하, 영량, 식, 영기, 영각, 영상, 영오, 영원, 영각 ⇨(38)홍수, 복수, 춘수, 덕수, 익수, 겸수, 삼수, 권수, 정수, 복
수, 점수, 병수, 명수, 판수, 일수, 기수, 정수, 완수, 민수, 창수, 흥수, 판수 ⇒(39)용부, 용인, 용길, 용애, 용철, 용문, 용채(관산의회 의원), 용오, 용태, 용내, 용규, 용옥, 용학, 용선, 용준(육군대위), 용균, 용백(관산 부면장), 용갑, 성용, 용술, 오용, 상철, 성필, 성
천, 용근, 용배, 용관, 용일, 용갑, 용원, 용덕, 용우, 용구, 용삼, 용석, 용언, 용대, 용흔, 용정, 주일 ⇒(40)송중. 기중, 뇌중, 형중, 만중, 정중, 천두(1928,한국화가), 길중(검찰
청 서기관), 찬중(조달청 서기관), 성중, 현중(교장), 창중, 건중, 희중, 남중, 원중, 명중, 홍중, 영중, 은중, 봉중, 이중(향교 장의), 경중, 전중, 재중, 한중(문중묘 조성금), 완중, 기중, 려중(국세청 주사), 배중, 강중, 연중, 낙중, 민중(방사선과 의사), 신중, 일중, 정중, 양중(1949), 금중(1958), 재중, 길중, 상중, 관중, 인중, 동중, 대중, 주(1960), 석
(1963, 서울교회 목사) ⇒(41)선홍(1952), 선두(1958,중앙대 교수), 선일(1961,한국화
가), 선관, 민석, 경탁, 동욱(변호사), 구경, 동수, 도영, 선철, 선영, 선구, 현성, 훈백, 선
동(검찰청 주사), 선민, 선훈(청와대 용호위), 선국(교수), 선호, 선화, 선길, 선필, 도형, 대웅, 태헌, 광호, 선주, 선준, 대훈 ⇒(42)중일(한국화가)
■ (32세)영필(배 장흥위) ⇒(33)득신, 득한, 득연, 득원 ⇒(34)태훈, 오운, 려운, 철운 ⇒
(35)최갑, 최현, 최길, 최학, 최황, 최현, 최광 ⇒(36)의현, 성현, 필현, 규현, 병호, 은
호, 찬현 ⇒(37)영엽(1869,호남의병장), 영규, 영선, 영서, 영준, 영근, 영모, 영관, 영운
⇒(38)채수, 명수(중국 탄광안전감찰총국), 진수(1922, 장흥향교 장의)), 장수(장흥향교
장의), 근수(장흥향교 장의), 완수, 필수, 철수, 경수, 광수(1948, 미도파건설 상무), 상수
(1963), 승윤, 승습, 한수, 복수 ⇒(39)용율(1949), 용철(1962,중국 연변), 용일(1944, - 49 -
문임) 용업(1957,국민보험공단 차장), 용빈(1961,국책연구기관 본부장), 용찬(1958,전남
도교육청 부이사관), 용주(1965), 용경(1967), 용호(1965), 용화, 용철, 용범(동일건축
차장), 용석(1960,동부정밀 대표), 성용(1962), 용철(1959), 용득(1962), 민용, 명용, 금용 ⇒(40) 광남(삼성전자 선임), 우중(1989), 정호(1997), 태형(1996)
⓷ (29세)김남억(통덕량, 배 풍덕장) ⇒(30세)익오, 겸오 ⇒(31세)한추, 한원 ⇒(32)상필, 정
필, 몽필, 의필 ⇒(33)득권, 득중, 득홍, 득인 ⇒(34)봉운, 기철, 기봉 ⇒(35)최택, 재동, 재혁, 재만, 재철, 재출, 재섭, 재찬, 재덕 ⇒(36)순현, 화현, 량현, 하현, 치현, 오현, 창
현, 동현, 고현, 일현, 남현, 문현, 무현, 용현, 명현, 성현, 태정, 병현 ⇒(37)영준, 영길, 영삼, 영학, 영희, 영하, 영복, 영석, 영철, 영선, 영옥, 영덕, 영욱, 영진, 영주, 영본, 영
민, 영훈, 남훈, 영호, 영수, 영록 ⇒(38)종수, 동수, 해수, 공수, 정수, 일수, 계수, 경수, 종수, 복남, 태훈, 훈 ⇒(39)용필, 용희, 용아, 용인, 용제, 용옥, 용배, 용언, 용원, 용륜, 용선, 용태, 용식, 용오, 경인, 용석, 용일, 용기, 용기, 근배, 근식, 근석, 연훈, 연식, 인
수, 윤수, 용성 ⇒(40)민중, 대중- 50 -
■ 석정가문 관련 사진첩
그림 29 천관산에서 바라본 평촌과 석정의 모습
그림 30 항공 촬영한 평촌과 석정 주변의 모습- 51 -- 52 -- 53 -- 54 -
그림 60 인조 18년 김상경 충청도병마우후 제수함 그림 61 승정원일기 1680년 김여종 관직을 제수함- 55 -편집위원(석정연구회)
용업, 1957, 관산 용빈, 1961, 부산 선일, 1961, 서울
비 매 품 석정가 흔적 더듬다
기획 2019. 9. 13(추석)
1차 작성 2019.11.20
2차 작성 2020. 3. 1(예정)
광김석정연구회
서울 송파구 방이동 161-16 휴먼빌 3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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