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은 ‘그림이야기’ · 현대미술 이야기 · 1 - 12 回 |
12 回 엄마와 아기의 따뜻한 공간, 메리 커셋, 『아이의 목욕』 |
| ▲ 메리 커셋, 『아이의 목욕 (La Toilette)』, 1891-1892년, 캔버스 유채, 100.3x66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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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기의 따뜻한 공간, 메리 커셋, 『녹색 배경 앞의 엄마와 아기』 |
프랑스에 정착한 미국인 여성화가
19세기말, 세계가 아무리 현대화되고 있었다 해도 여성에 대한 사회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것, 특히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직업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극히 드문일이었다. 여성이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단지 취미이거나 사교계에서의 유용한 도구로써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근대화된 파리에서 조차 여성은 혼자서 대로를 활보하거나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없었고, 권위있는 관학미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메리 커셋(Mary Cassatt, 1844 - 1926)은 이러한 사회적 한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여성을 무시하는 남성우월적인 학원에서 미술을 배우느니 루브르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혼자서 그림을 공부하리라 마음먹고 고향인 미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다. 당시 파리미술계는 아카데미화풍이 여전히 대세였지만 인상파라는 혁신적인 그룹이 활동을 넓혀가고 있었다. 커셋은 드가(Edgar De Gas)의 소개로 인상파에 합류하게 되고, 이후 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인상주의 미술가들과 전시회를 함께한다.
메리 커셋의 그림
메리 커셋은 엄마와 아이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특히 유명하다.
| ▲ 메리 커셋, 목욕 뒤에 , 1901년, 캔버스에 유채, 100x65cm, 클리블랜드 미술관 | |
| ▲ 메리 커셋, 녹색 배경 앞의 엄마와 아기 , 1897년, 종이에 파스텔, 55x46cm, 오르세미술관 | |
서양미술사에 있어 ‘모자상’이라는 주제는 서구 종교미술에서 대표되는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를 그린 ‘성모자’ 도상과 직결되는 전통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커셋은 ‘성모자’의 도상이 아닌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일본 채색목판화 ‘우끼요에’에서 표현된 일상적인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엄마와 아기모습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 ▲ 기타가와 우타마로, 아이를 목욕시키는 여인, | |
우끼요에는 1860년대 중반 프랑스로 수입되어오던 일본 도자기를 포장하던 종이로 처음 들여와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당시 혁신적인 미술화풍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녀의 드라이 포인트 작품에서는 우끼요에의 영향이 더욱 드러난다.
| ▲ 메리 커셋, 램프 (The Lamp), 1890-1891년, 드라이포인트, 32.3x25.2cm, 시카고미술대학 | |
| ▲ 기타가와 우타마로, 목에 분을 바르는 여자 | |
사실 커셋의 주요작품이 모두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여성이 동료 화가들과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곳은 오직 미술관 안에서 뿐이었으며 여성이라는 사회적 제약으로 함께 활동하던 남성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혼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위해 돌아다닐 수 도 없었다. 그녀의 그림속 등장인물이 대부분 여성이거나 엄마와 아이 인 것 또한 당시 여성은 남자 모델을 고용하거나 친인척이 아닌 남자와 둘이서만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남성은 아버지나 오빠들 정도이다). 그나마 커셋이 미술교육을 받고 계속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준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이었다. 그녀는 결혼이 자신의 경력을 단절 시키고 화가로서의 작업을 방해받게 할 것이라 생각해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만약 커셋이 여성이 아닌 남성 화가였다면 가정생활을 묘사한 그림뿐만 아니라 어떠한 혁신적인 주제의 작품이 탄생했을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 후 이야기
커셋은 인상파가 해산된 뒤에도 르누아르와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1886년 미국에서 개최된 첫 인상파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하였고, 이후에도 그녀의 부유한 가정환경을 기반으로 한 인맥을 이용하여 미술품구매자와 인상파 화가들을 연결 시켜주는 등 인상파를 미국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그녀는 프랑스로 건너간 미국작가 1세대로써, 성장하는 미국의 화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조언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적인 사상과 화가로서의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커셋은, 1914년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력이 악화되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커셋은 1926년 파리 근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프랑스는 그녀가 미술에 기여한 공로를 치하해서 프랑스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egion d’honneur)훈장을 수여하였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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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回 아름다운 여인의 이중적인 초상, 제임스 티소, 『야망을 품은 여인』 |
| ▲ 제임스 티소, 『야망을 품은 여인 (L'ambitieuse)』, 1883-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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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의 이중적인 초상, 제임스 티소, 『야망을 품은 여인』 (A Woman of Ambition) |
오직 아름다운 여인만이 존재하는 그림
티소(Jacque Joseph Tissot, 1836.10.15.-1902.8.8.)는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낯선 작가에 속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전성기에 그린 그림은 역사나 종교화처럼 전통적인 맥락의 작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대 활동하던 모네와 인상파 화가처럼 혁신적인 아방가르드 한 주제나 기법을 구사하는 작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티소는 서사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화려한 파리지엔느의 삶, 아름다운 여인을 중심으로 말이다. 티소의 그림은 여인이 주인공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들. 그의 그림 속에는 아름답지 않은 여인은 없다.
19세기 패션 화보집 같은 작품들
먼저 티소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감상해보자
| ▲ 제임스 티소, 1877년,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 갤러리. | |
| ▲ 제임스 티소, 마드모아젤 L.L.의 초상 (빨간 상의를 입의 소녀) Portrait of Mademoiselle L. L. (Young Woman in a Red Jacket), 1864년, 캔버스에 유채, 124*99.3cm, 오르세 미술관 | |
| ▲ 제임스 티소, 벽난로 (The Fireplace), 1869년, 캔버스에 유채 | |
| ▲ 제임스 티소, 보트에 탄 여인 (Young Woman in a Boat), 1870년경, 캔버스에 유채, 48*74cm, 개인 | |
| ▲ 제임스 티소, 너무 일찍, 1873년, 캔버스에 유채, 길드홀 아트 갤러리. | |
| ▲ 제임스 티소, Specimen of a Portrait, seaside, 1878년, Oil on canvas, Cleveland Museum of Art, Ohio | |
| ▲ 제임스 티소, , c.1894, Oil on canvas,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 |
| ▲ 제임스 티소, 서커스 애호가 , 1883-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147*102cm, 보스턴 미술관 | |
여러분은 그림에서 무엇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가? 아마도 화려한 디테일을 세세하게 살려 표현한 여인의 의상일 것이다. 티소는 당대의 패션을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색조로 표현하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그림은 비평가들에게는 ‘졸부를 위한 천박한 그림’으로 치부되며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대중에게는 인기가 좋았다. 요즘 시대의 패션잡지 화보로 등장할법한 여인들, 특히 파리의 사교계 여인들을 우아하고 생기 있게 그려낸 티소의 그림은 대중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티소의 작품들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소비가 중심이 된 근대사회의 여성 상품화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오늘날 그의 그림은 근대사회의 단면을 솔직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재평가 되고 있다. 다음 두 작품을 감상해보자.
| ▲ 제임스 티소, 신부 들러리 , 1883-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7*101.6cm, 리즈미술관 | |
그림의 등장인물은 공들여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과 남자. 그리고 그들을 훔쳐보며 속닥거리는 주변인이다. 특히 두 번째 그림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대비되는 나이 많은 노신사가 그녀를 에스코트 하고 있으며, 그림의 제목 또한 <야망을 품은 여인>이다. 이러한 제목은 그녀의 표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얼굴로 주면을 둘러보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내 목표는 성공한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정작 그녀의 돈 많은 정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동반한 호사스런 미인은 그들의 사회적 성공의 징표이고, 이것을 또한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로 구현된 공허하고 퇴폐적인 사회의 자화상.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 빠르게 변해가는 근대화된 파리의 어두운 단면도 티소 그림의 일부인 것이다.
그 후 이야기
이미 눈치 챘겠지만 티소의 그림 속 여인은 같은 얼굴이 많다.
| ▲ 제임스 티소, 내 사랑, 1876년, 캔버스에 유채, 59.6*45.7cm, 개인소장 | |
| ▲ 제임스 티소, The Last Evening, 1873, Oil on canvas, Guildhall Art Gallery, London | |
| ▲ 제임스 티소, 미인의 타입, 1880년,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 |
계속해서 티소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캐틀린 뉴튼이다. 그녀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눴고 이혼 후 혼외 자식까지 낳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티소가 캐틀린을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티소는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그 사실 또한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았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티소와 어울리지 않은 여인과의 사랑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알맞은 것이었다. 티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요즘말로 일과 사랑 중 사랑을 택한 것이다. 티소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도 낳고 행복한 삶을 보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결핵이라는 병에 걸리게 되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편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고 만다.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애잔한 이야기다. 힘들게 이어온 사랑이 산산히 부서진 모습을 바라보는 티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티소는 캐틀린을 잃은 충격과 아픔을 종교에 의지한 듯하다. 이후 티소는 팔레스타인 등 성지를 순례하고, 종교화에 심취하게 된다. 말년의 티소는 화려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종교화를 그리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02년 세상을 떠났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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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回 순수한 화가의 영혼을 담은 그림,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
| ▲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1897년, 캔버스에 유채, 129.5*200.7cm, 뉴욕현대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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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화가의 영혼을 담은 그림,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
새로운 예술에 대한 관심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파리를 중심으로 한 예술의 흐름은 급변하고 있었다. 이상적이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아카데미의 전통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규범에서 벗어나 소외 되어온 미술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이른바 새로운 취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피카소, 브랑쿠시, 피카비아를 포함한 파리의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더 이상 규범화된 고전연구에 몰두하지 않고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작품연구에 매달렸다. 새로운 관심은 이들로 하여금 한 아마추어 화가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발견하게 한다. 바로 대표적인 나이브 회화 (Naive painting) 작가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5.2-1910.9.2)이다.
실제와 환상이 교차하는 그림
| ▲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1897년, 캔버스 유채, 129.5*200.7cm, 뉴욕현대미술관 | |
나이브(Naive). 순진한, 천진난만한. 나이브 회화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의미하지만 아마추어나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일요화가(Sunday Painter)와는 구분된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고상한 취미의 사람들에게는 유치하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특유의 신선함과 직관적인 표현,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순수함이 느껴지는 나이브 회화가 주류로 받아들여지자 나이브 회화와 유사한 양식으로 그리는 전문 화가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나이브 화가 중 가장 유명한 작가는 앙리 루소일 것이다. 루소의 특별한 그림스타일만큼, 화가로서의 그의 이력도 특이하다. 프랑스 북서부 도시 라발에서 가난한 함석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은퇴하기 전까지 22년간 파리 세관 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그림이라고는 배워 본적 없는 40세의 점잖은 중년남성이었던 루소는 40세가 되는 1884년부터 미술관과 박물관에 다니며 작품들을 모사하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루소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부터 사망한 1910년까지 거의 매년 앙데팡당전에 그림을 출품하는 열성을 보여줬지만 돌아오는 평가는 야속하기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믿었으며 스스로 위대한 화가라고 확신했다.
| ▲ 앙리 루소, 뱀을 부리는 주술사 (The Snake Charmer), 1907년, 캔버스에 유채, 169x189.3cm, 오르세미술관 | |
| ▲ 앙리 루소, 꿈 (The Dream), 1910년, 캔버스에 유채, 298x204cm, 뉴욕현대미술관 | |
루소는 정글 그림을 많이 그렸다. 한때 루소는 자신이 멕시코 등 타국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하고 다녔지만, 사실 루소는 프랑스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의 그림은 파리의 식물원과 동물원에서 직접 스케치하거나 신문과 잡지의 삽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독특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루소의 정글그림들은 야자수나 온갖 화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매우 정교하게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형태가 이상하고 비례가 맞지 않아 보인다. 또한 루소는 잎사귀 하나하나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명확한 윤곽으로 꼼꼼하게 마무리했는데, 결과는 잎사귀를 오려다 붙인 것처럼 자연스럽지않은 인공적인 형태가 되었다. 마치 꿈속에서 보이는 풍경처럼 현실감이 떨어지는 그림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자신의 그림을 ‘근대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 이라고 믿었다 한다. 미술사적 지식이나 당시 유행하는 화파의 기법은 관심도 없던 루소는 자신만의 환상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독창적인 그림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그림에 대해 당대 미술가이자 평론가인 루이스 로이스는 말했다. “그의 그림이 불가사의하고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우리가 이전에 봤던 어떠한 것들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왜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루소는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 후 이야기
루소는 아카데믹한 사실주의를 동경했지만 실제로는 당대의 전위화가들의 지지를 받는 “20세기 미술의 대부” 로 칭송받았다. 자연보다 나은 스승은 없다고 단언하며 어떠한 유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평생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는 삶을 살았던 루소. 그는 1910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의 장례식의 조문은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20세기 초 전위미술 이론가로 큰 역할을 한 기욤 아폴리네르가 썼고, 이를 묘비에 새긴 것은 루마니아의 위대한 조각가 브랑쿠시 였다. 아카데믹한 전통적 기준이나 이성적 논리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을 바탕으로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이룩한 루소의 그림은 20세기 초에 등장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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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回 폭주하는 증기기관차의 소용돌이, 터너, 『비, 증기, 속도 - 위대한 서부 철도』 |
| ▲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 위대한 서부 철도 (Rain, Steam and Speed)』, 1844년, 캔버스에 유채, 91x121.8cm, 런던내셔널 갤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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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는 증기기관차의 소용돌이,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Rain, Steam and Speed) |
새롭게 해석된 풍경화
터너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768년 영국에는 장차 영국의 예술계를 이끌어갈 젊은 예술가를 양성시키기 위해 왕립 예술원이 창설되었다. 예술원의 수강료는 무료인 대신에 지켜야 일과와 배우는 방식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예술의 서열도 존재했는데 역사를 주제로 한 것은 최상위, 그리고 최하위에는 풍경화가 있었다. 하지만 터너는 평생 풍경화에 매료되어 이 분야를 발전시킨다. 터너는 그림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세부묘사는 생략하고 과감한 색채와 급진전인 방법들을 실험한 매우 독창적인 풍경화를 그려냄으로써, 풍경화를 미술의 주요 장르로 만드는데 누구 보다 공헌하였으며 다음세기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풍경화와 추상화의 경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4.23. - 1851.12.19.)는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대 변혁기의 영국에서 태어났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증기기관차는 과거 산업 혁명의 유물쯤으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1825년 영국에 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되고 증기를 뿜어내며 빠르게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처음 본 당시의 사람들은 이 달리는 육중한 고철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물론 터너도 마찬가지였다.
| ▲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 위대한 서부 철도 (Rain, Steam and Speed), 1844년, 캔버스에 유채, 91*121.8cm, 런던내셔널 갤러리 | |
터너는 이 새로운 교통수단을 탑승하고 새로 건설된 템즈강의 다리를 달렸다.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속도를 몸으로 직접 느끼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10여분 이상이나 견뎠다 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려진 작품인 걸 감안하면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단순히 증기기관차를 그린 것이 아니라 ‘비, 증기, 속도 (Rain, Steam and Speed)’ 가 주제인 만큼 터너는 온몸으로 이 세 가지를 느끼고 관찰한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그때로 돌아가 비속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달려 나가는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면, 직접 올라타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촉촉한 대기를 피부로 느꼈다면, 실제로 터너의 그림처럼 기차의 세세한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이 모든 것이 섞인 소용돌이와 같은 인상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비와 증기로 부옇게 된 대기 속을 뚫고, 마치 화면 밖으로 달려 나올 듯 그려진 증기 기관차를 묘사한 이 작품은 주제를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단 암시하는 듯 전체적인 이미지와 느낌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터너의 후기 작품으로, 추상화에 가까운 양식을 보여준다.
터너는 구매자가 아무리 비싼 가격에 그림을 산다고 하여도 자신의 진정한 걸작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은 절대로 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작품 중 스스로 ‘애인’ 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면서 절대 팔지 않고 끝까지 소장한 작품이 있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도 선정된바 있는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이다.
| ▲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838년, 캔버스에 유채, 91*122cm, 런던내셔널 갤러리 | |
이 작품은 영국의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이후 영국이 바다를 지배하며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활약한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묘사하고 있다. 영국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테메레르가 그 수명을 다하고 해체되기 위해 템스 강에서 정박지로 예인되고 있다. 낡은 테메레르와 앞에서 테메레르를 끌고 가는 근대문명의 산물인 증기선이 대조를 이룬다. 이 작품에서 테메레르는 마치 일생을 전쟁터에서 활약하다가 퇴역하는 노년병의 뒷모습처럼 구슬픈 비애가 느껴진다. 실제로 테메레르가 정박지에 도착할 때는 낮이었지만 터너는 배경을 일몰로 바꿔 그려 역사에서 사라지는 테메레르의 마지막 모습을 더욱 애잔하게 고조시켰다.
그 후 이야기
말년에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게 된 터너는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예술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긴 제목이 탄생하게 된다.
| ▲ 윌리엄 터너, 눈보라(Snowstorm), -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 호가 하위치 항을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 1842, 캔버스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 |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미완성으로 간주되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공허한 그림이라는 비판만 돌아왔다. 터너의 혁신적인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난해한 색채의 소용돌이로만 보여 졌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터너는 점점 더 내향적인 괴짜가 되어간다. 그는 부자였지만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이름도 바꾸고 아는 사람들과 연락을 끊은 채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록 터너가 세상을 떠날 당시인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의 작품을 품격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취급했지만 현재에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손꼽히고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테이트 갤러리와 테이트 브리튼이 주관하여 198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현대미술가중 가장 활동이 뛰어난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은 터너의 이름을 딴 ‘터너 상(Turner prize)’이다. 터너상은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예술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로 수상자는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과감한 기법과 혁신적인 시각으로 회화의 형식을 타파한 터너의 이름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으로 유명한 터너 상의 주인공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터너는 회화매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끊임없이 시도한 화가이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그림 자체가 주제라는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시작이라고 평가된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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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回 전쟁과 상실된 인간성, 그리고 희생자,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
| ▲ 고야, 『1808년 5월 3일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x345cm, 프라도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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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상실된 인간성, 그리고 희생자, 고야, 『1808년 5월 3일』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 |
참혹했던 학살의 고발
과거에도 지금도, 세계는 항상 전쟁 중이다. 이념과 종교로 인한 갈등은 언제나 차이와 공존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정당화 시켰다. 전쟁이 남긴 상처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민간인 학살이 아닐까. 18세기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 - 1828)는 1808년 5월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 현장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대표작 『1808년 5월 3일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이다.
뉴스 속보 현장사진같이 생생한 그림
| ▲ 고야, 1808년 5월 3일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x345cm, 프라도 미술관 | |
1808년 5월 3일 새벽. 이곳은 마드리드의 외곽에 있는 프린시페 피오의 언덕이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시체가 산을 이루며 쌓여간다. 이것은 하루 전 5월 2일에 있었던 마드리드 시민 봉기에 대한 프랑스 점령군의 보복이었다. 그날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작업용 가위나 칼만 들고 있었다 해도 그 자리에서 사살 당하거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포로로 끌려갔다. 대부분 민간인이었던 이들은 마드리드에 있던 부대로 보내졌으며 그날 밤 모두 처형되 었다. 기록에 따르면 시체들은 8일 동안 썩도록 방치되었다가 한꺼번에 묻혔다고 한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이 사건을 기록한 일종의 고발장 같은 그림이다. 그림은 총살하는 군인들이 빠르고 확실한 처형을 위해 끌려온 사람들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순간을 포착 하고 있다. 함께 잡혀온 사람들이 눈앞에서 처형당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절망에 빠진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늘어서 있다. 닥쳐올 죽음을 공포어린 눈동자로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과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된 군인들 사이에 긴장이 느껴진다. 그림의 왼쪽 앞에는 이미 처형당한 사람들의 피가 낭자하다. 죽음을 맞이할 차례가 된 하얀 옷의 남자는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반면, 얼굴이 보이지 않아 마치 쳐다보지도 않고 총을 발사 하는 기계같이 표현된 군인들의 대비가 선명하다. 이 그림은 고야의 시대에 그려진 역사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당시에는 지도자나 정부를 찬양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영웅적으로 묘사된 백마를 탄 나폴레옹의 초상 같은 작품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야는 이사건의 증인으로서 전쟁의 희생자를 중심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고야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바닥에 놓인 랜턴의 조명을 집중시키고, 남자의 손바닥에 예수의 십자가 성흔을 그려 넣어 숭고한 순교자의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고야는 이 남자의 모습을 통해 조국을 위해 항거한 사람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념하는 스페인 민족주의의 상징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1808년 5월 3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는데, 그림의 혁신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야의 애국심에 대한 의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야는 프랑스와 사이가 좋았고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결국 <1808년 5월 3일>은 프라도 미술관 구석에서 점차 잊혀 지게 된다. 그러나 점차 화가들은 고야 그림들의 진보성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모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과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은 <1808년 5월 3일>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 ▲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Execution of the Emperor Maximilian), 1867-1868, 캔버스에 유채, 252*305cm 독일, 바덴 국립 미술관 | |
| ▲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1951, 패널에 유채, 110*210cm, 파리 피카소미술관 | |
고야가 <1808년 5월 3일>에서 보여준 죽음의 순간은 그림속의 사람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죽음의 순간을 보여준다. 인간이란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는 두 팔을 벌리고 두려워하며 한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죽음의 순간에 직면해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 남자가 곧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의 증인이 되어 200여년을 살아오며 우리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단지 1808년 5월의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사건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호소력으로 모든 무고한 희생을 항변하면서 말이다. <1808년 5월 3일>은 과거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단면이다.
그 후 이야기
고야라는 화가를 서양미술사의 계보를 이어가는 어떠한 유파에 속해 정의하긴 어렵다. 고야의 작품 양식은 로코코에서 낭만주의까지 변화하고 있어 초기작품과 후기 작품을 같이 놓고 보면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 ▲ 고야, 파라솔 (Parasol), 1777, 캔버스에 유채, 104*152cm, 프라도 미술관 | |
| ▲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Saturn), 《검은 그림(pinturas negras)》 연작, 1819-1823, 캔버스에 유채, 83*146cm, 프라도 미술관 | |
고야는 어쩌다 이렇게 끔찍한 그림을 그리게 된 걸까? 젊은 시절에는 주로 종교화를 그리던 고야는, 1774년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1789년엔 스페인 화가의 최고영예인 궁정화가가 된다. 그러나 고야는 전통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들을 신처럼 미화시켜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여느 궁정화가들과는 달랐다.
| ▲ 고야,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Family of Carlos IV),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336*280cm, 프라도미술관 | |
아마도 자신의 후원자인 왕과 그의 가족들을 이렇게 그려낸 궁정화가는 고야가 유일할 것이다. 한 미술비평가가 “복권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 점원의 가족들” 이라고 평한바 있는 이 작품 속의 사람들은 기품보다는 천박함이 더 어울리게 그려져 있다. 궁정업무에 시달리던 고야는 1793년 휴가차 세비야로 행하던 중 이름을 알 수 없는 심한 병에 걸려 그만 청력을 잃게 되고 남은 인생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 이 사건은 고야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 점차 어두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스스로 ‘킨타 델 소르도 (귀머거리의 집)’ 라고 이름붙인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집에서 은둔하며 섬뜩할 정도로 기괴하고 음습한 《검은그림 연작》을 그렸다. 말년의 고야는 파리와 보르도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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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回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 피테르 브뢰헬, 『눈 속의 사냥꾼』 |
| ▲ 피테르 브뢰헬, 『눈 속의 사냥꾼 (The Hunters in the Snow)』, 1565년, 목판에 유채, 162 Ⅹ 117cm, 빈 미술사 박물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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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피테르 브뢰헬 『눈 속의 사냥꾼』 (The Hunters in the Snow) |
평범한 인간의 재발견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들이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세기에 남을 명작들을 쏟아내고 있을 때, 플랑드르(현재의 북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포함한 북유럽의 화가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들 나름의 미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고대 유물에서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비례를 재발견 했지만, 북유럽에는 재발견될 고대 유물도 없었을 뿐더러 종교개혁의 바람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거장들처럼 근사한 종교화나 조각들을 만들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자연과 인간으로 눈을 돌렸다. 대상을 이상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기법으로 예술의 개혁을 이루어낸 북유럽의 거장들. 그들 중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평범한 사람들을 화폭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세상을 향한 신랄한 풍자가 담긴 블랙유머로 눈에 띄는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한 화가가 있다. 바로 북유럽 화가 중 유일하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안을 제시한 화가로도 알려져 있는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1525년경-1569년)이다.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그림들
브뢰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눈을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한 <눈 속의 사냥꾼> 이다.
| ▲ 피테르 브뢰헬, 눈 속의 사냥꾼 (The Hunters in the Snow), 1565년, 목판에 유채, 162 Ⅹ 117cm, 빈 미술사 박물관 | |
이 작품은 계절과 달을 나타내는 일종의 화보 달력과도 같은 연작중 하나인데, 총 6개의 시리즈 중 12월이나 1월로 겨울의 심연을 표현한 것이다. 세 명의 사냥꾼과 그들을 따르는 한 무리의 사냥견이 보인다. 아마도 이들은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귀가하는 중 일 것이다. 지친 어깨에 연장을 걸치고 눈 쌓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떼면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냥꾼 앞으로 언덕아래 마을과 저 멀리 보이는 눈 내린 산맥의 풍경이 펼쳐져있다. 이것은 브뢰헬이 그림의 시점을 위에서 내려다본, 짐작컨대 새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그렸기 에 가능한 것이다. 고된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냥꾼의 모습과는 반대로 언덕아래 마을사람들은 즐겁기 그지없다. 빙판에서 썰매, 스케이트도 타고 컬링과 같은 놀이도 하면서 겨울을 즐기고 있다. 그림의 후경에 그려진 험난한 산맥은 브뢰헬이 알프스를 가로질러 여행한 기억을 되살린 것인데, 저지대인 플랑드르 출신의 이 화가는 알프스 산맥에 꽤나 감명을 받았는지 그의 작품 곳곳에 험난한 산맥과 바위를 자주 등장 시켰다. (후에 그의 전기를 쓴 카렐 반 만데르는 “브뢰헬은 알프스를 넘어간 여행에서 모든 산과 바위를 삼켜 그의 캔버스에 다시 쏟아냈다” 고 기록했다.) 얼어붙도록 차가워 보이는 푸른색과 흰색이 지배적으로 사용되었고 군데군데 조화롭게 사용된 따뜻한 브라운 컬러가 그림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 작품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소박한 시골풍경을 그려낸 단순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브뢰헬이 그려낸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과의 파노라마는 이탈리아의 종교화 못지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브뢰헬이 인간을 소재로 한 그림을 모두 아름답게만 그린 것은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역시 그의 허무적인 풍자와 조소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다음 그림을 보자.
| ▲ 피테르 브뢰헬, 네덜란드 속담 (Netherlandish Proverbs), 1559년, 목판에 유채, 163 Ⅹ 117cm, 베를린 국립 회화관 | |
유명한 5인조 밴드 플릿 폭시스(Fleet Foxes)의 2008년 앨범 커버이기도 한 이 작품은 브뢰헬 만의 독특한 양식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왁자지껄한 마을풍경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 이 그림 속 사람들은 백 개 가 넘는 네덜란드의 속담을 각자 연기하고 있는 중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중앙에 있는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푸른색 망토같은 걸 덮어주고 있는데 부정한 남편을 망신 주는 플랑드르 습관의 표현이다. 기둥을 물어뜯는 사람은 위선을 뜻하고, 소등에서 당나귀 등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엎친데 덮친격이다의 표현이라는 식이다. 그밖에도 <장님을 이끄는 장님>, <게으름뱅이의 천국>등의 작품에서도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꼬집고 있다.
| ▲ 피테르 브뢰헬, 장님을 이끄는 장님, 1568년, 캔버스에 유채, 154 Ⅹ 86cm,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 |
| ▲ 피테르 브뢰헬, 게으름뱅이의 천국, 1567년, 목판에 유채, 78 x 52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 |
이와 같은 작품 때문에 브뢰헬을 사회주의자를 넘어 인간혐오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브뢰헬은 모든 인간의 삶을 사실대로 정직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 인간자체를 경멸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농부들을 그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소작농의 옷을 입고 그들의 삶에 섞여 지내기도 했다) 어디 사람 사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기만 하던가. 브뢰헬의 그림이 인간을 조롱하는 우화라 할지라도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이상화 되지 않은, 그야말로 사람냄새 폴폴 나는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브뢰헬의 작품 의도는 꾸밈없는 인간 본연에 대한 관심.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 후 이야기
브뢰헬이 활동하던 시대는 구교와 신교의 종교적 문제가 즉각 정치적으로 연결되는 봉기와 무자비한 탄압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특히 1566년, 네덜란드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일으킨 카톨릭 성상파괴 운동에 대한 스페인의 보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철의 공작’ 알바공이 이끄는 스페인 군대는 네덜란드 민병대를 진압하고 만 명이 넘는 민간인을 이단자로 몰아 고초를 겪게 하고 그 중 천명이 넘는 민간인을 교수대로 보냈다. 말 한마디, 글 한줄, 그림 한조각도 조심스럽던 시대.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임종을 맞은 브뢰헬은 그의 아내에게 남긴 유언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그림은 모두 태워 없애라” 고 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남긴 사회 비판적 그림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현실을 미화시키지 않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본 브뢰헬. 그는 성직자와 고위관료들을 조롱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민중의 삶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의 눈에 비친 부조리한 세상은 화폭으로 옮겨갔고 그 이후에도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플랑드르의 거장 루벤스와 렘브란트도 브뢰헬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소장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다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으로 전해지다가 후에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으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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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回 미스터리한 파리지앵의 휴식, 조르주 쇠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
| ▲ 조르주 쇠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86년, 캔버스에 유채, 207.5 x 308 cm Art Institute of Chicag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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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조르주 쇠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비밀스러운 사람
우리에게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1859.12.2-1891.3.29)는 점으로 그림을 그린 점묘법 화가 정도로만 기억된다. 19세기 후기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치고는 알려진 에피소드도 거의 없다.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신중하고 소심한 성격의 쇠라는 다소 외톨이 같이 생활했는데, 가족과의 대화도 별로 없을 만큼 내성적이었다. (그는 마들렌느라는 여인과 함께 살면서 아들도 하나 있었는데 이 모든 걸 어머니에게 조차 비밀로 했다고 한다.) 동료 화가 드가(Edgar De Gas)는 언제나 중절모에 빳빳하게 다림질이 잘 된 양복을 입고 다니는 쇠라에게 ‘공증인’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Fry)는 (로저 프라이는 쇠라 사후 1910년에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Manet and Post-Impressionism)>라는 전시를 열어 쇠라, 세잔, 고갱, 고흐 등을 영국에 소개한 인물이다.) ‘다른 행성에서 지구로 떨어진 존재’ 라고 쇠라를 표현한 바 있다. 그만큼 쇠라의 짧은 인생은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만큼 비밀스럽고 베일에 가려져 있다. 1884년 쇠라는 파리 교외의 그랑 자트 섬 (Jatte는 불어로 얕은 볼이나 세면기를 뜻하는데 섬의 모양에서 나온 이름이다)의 모습을 그리기로 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점묘법이라는 색채학 개념을 바탕으로한 과학적이고 혁신적인 회화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그 주제는 제목처럼 일상적이고 소박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당대 생활상을 점묘법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단순히 해석하기에는 그 안에 너무나 많은 의미층을 지니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일요일 오후
| ▲ 조르주 피에르 쇠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년, 캔버스에 유채, 207.5x308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 |
햇살이 파리의 센강을 눈부시게 반짝이며 내리쬐는 일요일 오후. 여가를 보내려고 그랑 자트 섬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강둑에 듬성듬성 앉아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분명 많은 인물이 있는 야외 풍경을 그린 것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고요하다. 이것은 마치 사람과 풍경을 소재로 한 ‘정물화’ 같다고나 할까. 2×3m의 보기 드물게 커다란 화폭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고 경직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중앙에 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만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옆모습을 하고 있고, 서있는 자세도 움직임이 적은 정자세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쇠라가 고대 이집트 미술 (이집트 미술은 사람 얼굴은 라인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옆모습으로 그리고 자세는 똑바로 서있는 수직적이고 정형화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의 영향을 받아 순간의 기록을 고전적 영속성으로 표현하고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등장인물들은 서로 함께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각 개인별로 고립되어 있고, 양식화된 형태와 표정 없이 가려진 얼굴은 몰개성적으로 보인다. 쇠라는 개인을 묘사하려기보다는 사회계층을 유형별로 등장시키면서 현대사회에서 고립되어가는 인간의 심리와 인공적인 속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이다. 그림에는 48명의 인물이 있고, 8대의 보트, 강아지 3마리, 원숭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먼저 그림 오른쪽의 검은 양산을 쓴 여인은 ‘코케트’라고 해석되는데 요즘 말로 신분이 높은 요염한 여자라는 뜻으로 옆의 남자는 그녀의 부유한 정부일 것이다. 그녀가 애완동물로 데리고 있는 원숭이도 눈길을 끄는데, 원숭이는 그 당시 인기 있는 애완동물이기도 했지만, 매춘부를 지칭하는 속어이기도 했다. 그림 왼편 중앙에서 오렌지컬러 의상을 입고 홀로 낚시를 하는 여성 또한 몸을 파는 여성으로 해석된다. 그 이유는 프랑스어로 ‘낚시를 하다(pecher)’는 ‘죄를 짓다(pecher)’ 라는 단어와 스펠링이 비슷해서인데 쇠라시대에 유행한 말장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쇠라가 이런 뜻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림의 의도나 해석에 대해 침묵한 쇠라 때문에 수 십 년을 연구해도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답을 얻지 못한 현대인이 이끌어낸 이야기일수도 있다.
쇠라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이 스케치처럼 임의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에 비해 매우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과정을 통해 단단히 작품을 구성했다. 쇠라는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2년간 작업했는데, 최종작품을 위해 60여점의 습작으로 예비 작업을 했다. 그가 남긴 습작을 보면 인물의 배치와 관계, 전체적인 배경 풍경의 설정 등 작품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한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원근법의 불일치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쇠라의 작업실이 커다란 캔버스에 비해 너무 작아서 충분한 거리에서 작품을 살펴보며 작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쇠라는 이 거대한 작품을 점묘법이라는 실험적인 방법으로 끈기 있게 완성해 나간다. 그림에서 보이는 반짝이는 강물과 햇볕이 풀과 나뭇잎에 닿아 부스러지듯 눈부시게 표현된 효과는 일일이 수없이 많은 점을 칠해서 얻은 것이다. 2×3이라는 거대한 화면을 일일이 그 작은 점으로 찍어 채우는 과정은 생각만 해도 노동, 아니 고행에 가깝다. 쇠라는 화학자인 미셸 외젠 슈브린의 “색채의 동시적인 대비법칙” (색채의 인식은 그 색채 근처의 색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으로, 보색끼리의 색채가 함께 있으면 두 색채가 모두 더욱 선명하게 인식된다는 주장)에 영향을 받아 연구하여 이러한 작업방식을 생각해낸다. 쇠라는 컬러를 팔레트에서 섞는 대신, 순수한 원색의 점들을 찍어 대비시키면 감상자의 눈에서 생생하게 혼합되어 보여 지게 된다고 믿었다. 이론대로라면 그림 전체의 색점은 멀리서 보면 함께 융화 되어 보여야 하지만 사실상 개개의 색점은 결코 완전히 섞여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붓으로 칠한 그림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는 작품이 탄생했는데, 쇠라는 이 기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이후로도 계속 이 방법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쇠라가 추구한 과학적인 회화제작법은 매우 힘든 노동과 오랜 작업시간을 요하는 것이어서 그는 10년의 작가생활동안 오직 7점의 작품만을 남겼다. 작품에 대한 열정과 정성이 너무나 과했던 까닭일까. 1891년 3월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을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파리의 전위 예술가들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독자적인 예술의 길을 걸었던 쇠라의 죽음을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추모했으며, 동시대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비탄에 잠겨있다. 그의 죽음은 예술계에 엄청난 손실이다.”
그 후 이야기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이기도한 제8회 인상주의 화가전에 전시된다. 작품의 크기와 혁신적인 기법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인지 출품 작가들은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옆에 함께 걸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마지막 전시실에 홀로 걸렸고 소수의 옹호자를 제외하고는 논평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미국의 시선은 달랐다. 부유한 수집가이며 시카고 미술대학의 보관인이기도 했던 프레드릭 클레이 바틀렛은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대담한 혁신성과 우수함을 알아채고는 바로 사들인다. 구매한 그림에 너무나 만족한 바틀렛은 시카고 미술대학 미술관 관장에게 쓴 편지에 “운이 좋게도 프랑스 현대회화에서 최고라고 생각되는 그림을 얻었다네!” 라고 썼다고 한다.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그렇게 바틀렛과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뒤늦게 프랑스 현대회화의 대표작이 미국으로 건너간 걸 후회한 프랑스는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바틀렛이 구매한 금액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다시 구매하고자 했지만 그림의 가치만 더욱 올리게 했을 뿐 미국으로부터 그림을 돌려받지는 못했다.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1920년부터 지금까지 시카고 미술대학에 소장되어있으며, 시카고미술대학뿐만 아니라 시카고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각종 광고나 단행본의 표지,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그 이미지가 재생산되며 현재에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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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回 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 |
|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 (Le Moulin de la Galette)』,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31 x 175cm, 오르세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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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Le Moulin de la Galette)』 |
예술은 자고로 아름답고 예쁜것!
요즘 복고가 대세다. 인간은 과거를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사실, 과거는 분명 그렇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41.2.25 ~ 1919.12.3) 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파리코뮌 유혈사태와 현대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파리, 특히 전통적인 것들이 남아있는 몽마르뜨를 사랑했고 보통 사람들의 선한 본성과 그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즐거움이 있는 삶을 예찬했다. 꽃, 유아, 여인의 누드, 강아지, 소녀들, 부유한 실내풍경 등 일생을 거쳐 오직 아름답고 예쁜 대상만을 그린 르누아르는 “모름지기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 이어야한다. 세상에는 불유쾌한 것이 이리도 많은데 또 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한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고된 일주일을 보내고 맞이한 휴일. 사람들은 친구들, 가족, 연인들과 모여 댄스홀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누구하나 즐겁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사람들 위로 기분 좋게 일렁거린다. 이것은 187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의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몽마르트의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 댄스홀의 풍경이다. (갈레트란 풍차의 소유주 가족이 풍차에서 구워서 팔았던 납작한 패스트리 스타일의 빵이다). 남녀가 짝을 이뤄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유쾌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의 신체는 일부분이라도 타인과 닿아있어 그림 전체가 매우 촉각적이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림의 외각은 인물이 잘려지게 처리하여 화폭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시킨 듯 하고, 그림을 보는 우리도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한다. 르누아르의 초기 인상주의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 (Le Moulin de la Galette)>는 정확한 형태와 묘사보다는 빛에 의에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체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인상주의의 그림이며,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중 하나로 손꼽힌다. 난해한 현대미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아름다운 화풍이며 오히려 진부한 스타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그림이 첫 선을 보였던 1877년 4월에 열린 3번째 인상주의 전시회 당시에는 스케치에 불과한 미완성 그림이라는 혹평을 감내해야 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빛이 인물들에게 떨어지는 모습을 얼룩덜룩 표현했고 태양이 비추고 있는 나무들도 납작하게 그려져 있다. 인물들의 묘사는 단순하고 평편하며 한 번의 붓질로 슥 마무리한 듯 보인다. 그러나 만약 르누아르가 각 세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해서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를 그렸다면 이 작품은 진부하고 생동감 없게 보였을 것이며 나무들 사이로 얼룩진 빛의 효과도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에 모델로 등장하기도 한 조르지 리비에르 (그림의 가장 오른쪽 앞에 모자를 쓰고 펜을 들고 있는 인물로, 르누아르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후에 그의 전기를 썼다.)는 한 비평에서 “그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이며 파리인들의 삶의 귀중한 기록이다. 그렇게 큰 캔버스에 평범한 삶의 일화를 표현한 것은 르누아르가 처음이다” 라고 쓰며 그림의 현대성을 치하했다.
르누아르가 몽마르뜨를 사랑한 이유는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르누아르는 어렸을 때 도시 재정비로 파리 중심에 있었던 어린 시절의 집을 잃었는데, 지리적으로 발전이 더뎠던 몽마르뜨에서 과거 자신의 집에서 느꼈던 친밀한 삶의 방식과 자연을 느끼게 된 것이다. 르누아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늘 18세기를 향한 향수를 표현했고 그것은 그의 예술적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그림은 르누아르의 환상이라고 이야기 된다. 르누아르가 이 그림을 구상하고 그리던 당시는 정치적 억압이 자행되던 시기였고, 특히<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의 배경인 몽마르뜨는 기존 정부에 저항하며 혁명을 외치던 레지스탕스 모임인 파리코민의 본거지였다. 1871년 5월, 1주일간 지속됐던 격렬한 전투 끝에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적어도 2만명의 혁명 지지자들이 죽었다. 그 후 프랑스는 반공화국 주의인 군주정권으로 돌아갔고 몽마르뜨는 급진좌파 폭동들과 부도덕함으로 대표되었으며 전투에 대한 속죄에 의미인 듯 몽마르뜨엔 사크레 쾨르 성당이 세워졌다. 가속화되는 산업화로 인해 과거의 삶의 방식이 사라지면서 대부분의 노동자 계층은 혹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고, 그럼에도 점점 더 가난해졌다. 정치적으로 날이 선 현실과 주위의 빈곤을 반영하지 않고 아름답고 행복하기만한 그림만 그리는 르누아르를 일부에선 현실도피자 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그 자신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가난과 끔찍하고도 매우 고통스러운 사회적 변화를 직접 겪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몽마르뜨의 만연한 가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부모가 일하러 나가고 혼자 방치된 몽마르뜨의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을 직접 추진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에 허덕일 때 역설적으로 가장 유쾌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 그림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억압적인 정부의 권의의식에 도전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가 현실도피적 그림인지, 아니면 르누아르만의 정치적 메시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건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이도록 그리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아픔보다는 아름다움으로 기억하듯이 말이다.
그 후 이야기
사실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라는 제목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에 스스로 만족해서 크기만 다르게 바꿔서 2번 그렸는데,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의 거대한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반 정도 크기로 현재는 개인소장이 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두 개의 그림 모두 1876이라 기록되어 있기에 어느 것이 먼저 그려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술계에선 작은 그림이 먼저 그려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 사이즈가 작아 주로 밖에서 작업했던 르누아르의 인상주의 스타일 화법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먼저 야외에서 완성한 후(큰 사이즈를 위한 스케치 정도로) 화실에서 큰 사이즈의 그림을 공들여 완성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 1990년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공개 되어 경매장에 나왔을 때, 당시 소더비 경매사상 가장 비싼 금액인 7천8백1십만 유로, 원화로 약840억에 낙찰되었다. (낙찰 주인공은 일본의 대부 료에이 사이토였는데 그는 8천2백 5십만 달러에 상당하는 고흐의 <가셰박사의 초상>도 소유했었다.) 작은 사이즈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사이토는 온도가 조절되는 금고에 넣어 7년간 보관했다. 그가 죽고 재정이 어려워지자 1997년 다시 소더비에 나온 작은 사이즈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는 이번에는 비밀리에 진행된 경매로 개인수집가에게 넘어갔다. 소유자에 대한 정보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고 있어 현재까지 그 그림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작은 사이즈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가 극소수 사람들의 심미안만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이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초기 인상주의의 대표작중 하나인 아름다운 작품이 개인 혼자만의 기쁨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이러한 작품일수록 공적 기관에 전시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겨야 한다고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에게 알려진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는 아름다움과 유쾌함, 행복의 이미지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1-19
|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1881년, 캔버스에 유채, 129.5 x 172.7 cm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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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回 신성화된 화가의 초상,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
| ▲ 알브레히트 뒤러, 『엉겅퀴를 든 화가의 초상 (Self-portrait at 22)』, 1493년, 유화, 56 x 44 cm, 루브르 박물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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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된 화가의 초상,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자화상』 |
화폭에 담긴 화가의 영혼, 자화상
자화상 (self-portrait)은 모델을 살 돈이 없는 화가들이 자신을 그린 것으로 그 유래를 찾기도 하지만,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 중에는 자화상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누구나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져 찬찬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경험이 한번 씩 있을 것이다. 사진이 일반화되기 오래전, 자신을 모델 삼아 그리는 자화상은 화가가 거울을 이용하여 그렸을 것이다. 잠시나마 들여다본 거울 속에서도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것 같은 경험을 하는데, 몇날 며칠 자신의 얼굴을 들려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그린 화가가 단순히 자신의 겉모습만을 그렸을 리 없다. 자화상은 화가의 삶이 가장 직접적으로 투영됨은 물론, 그림을 그리는 순간 화가가 가진 생각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긴 화가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렘브란트가 등장하기 이전, 서양미술사상 처음으로 예술가로서의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자화상을 그려내어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개척한 화가가 있다. 바로 ‘자화상의 아버지’ 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5.21. - 1528.4.6)이다.
뒤러의 세 가지 자화상
뒤러의 3대 초상화중 첫 번째 작품인 <스물두 살의 자화상 (Self-portrait at 22)>은 뒤러가 도제로서의 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송아지 가죽에 그린 자화상이다. 서양예술 역사상 화가의 이미지를 이보다 더 강조한 작품이 없을 만큼 자화상을 독립적인 분야로 만든 첫 번째 유화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 뒤러는 술이 달린 재미있는 모자를 쓰고 주름 잡힌 상의에 검정색 외투를 입고 아직 어린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풋풋한 남성미를 자아내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엉겅퀴인데, 독일에서는 ‘충절’을 의미하는 식물로, 당시 약혼을 앞둔 뒤러가 약혼녀에게 선물하기위해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장갑을 낀 자화상 (Self-Portrait at 26)>은 뒤러가 27살 때 그린 것이다. 당시 뒤러는 남유럽을 여행 다니며 이탈리아 미술을 익히던 시기였다. 그림 속 뒤러는 <스물두 살의 자화상>보다 좀 더 원숙해진 느낌으로 자신감 있는 시선과 확고한 듯 마주잡은 손으로 당당함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15세기 중반 남유럽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인 흑백의 줄무늬 의상과 모자를 쓰고 있다.
| ▲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Self-Portrait at 28)>, 1500년, 목판에 유채, 49 Ⅹ 67 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 |
화가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절정으로 드러난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은 곧 29살이 될 뒤러가 그린 것이다. 유럽회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에 속하는 이 작품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작품의 크기가 실물과 거의 흡사하고 치밀하게 세부를 묘사하는 북유럽 화풍과 인체를 부드럽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풍을 접목시켰다. 작품 속 뒤러는 멋진 모피코트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눈동자에 창문이 반사된 모습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뒤러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의 깊은 응시에 눈을 피하게 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림 왼편 ‘AD 1500’ 이라 표현된 부분에는 라틴어로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살의 나이에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내 모습을 그렸다” 라고 씌어있다. 이 작품은 뒤러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되는데, 당시 예수의 초상에서만 나타난 정면자세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두운 배경색, 왕이나 귀족 등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입었던 모피를 입은 모습 등이 그 이유이다. 실제로 뒤러는 자신의 예술적 사명이 예수의 사명과 같다고 믿었으며, 화가란 모름지기 신사이자 학자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예술가의 위치를 기능공에서 왕족과도 같은 지위로 격상 시 했다고 한다. 뒤러는 바로 이 그림에서 자신을 신성화된 모습으로 그려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화가의 상승된 지위를 보여주며 스스로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예술의 금자탑을 쌓아올리던 시절 북유럽의 거장으로 불리며 그들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 뒤러.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을 가진 뛰어난 자화상을 그려내고 판화로 자연을 묘사함에 있어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 뒤러는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관심사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연구로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라 불렸다한다. 뒤러는 사실주의라는 북유럽 미술의 특성과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여행에서 익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혁신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남유럽의 미술을 북유럽에 전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탈리아의 선진화된 미술을 북유럽의 동료 화가에게 전파하기 위해 힘썼으며 원근법과 이상적인 비례에 대해 책을 펴내기도 했다. 미술은 정확한 관찰을 통해 그려져야 한다고 믿었던 뒤러는 평생 자연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한 해안지방에 고래가 떠밀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연구를 하다가 풍토병으로 인한 열병으로 그의 나이 56세에 사망하고 만다. 참으로 ‘르네상스 인간’ 다운 죽음이다. 세공사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예리한 손끝으로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도 긴장시킬만한 실력과 열정으로 상승된 화가의 지위와 명예를 자화상에 담은 뒤러. 그의 자화상이 이토록 당당하게 보는 이를 압도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화가 자신의 이유 있는 자부심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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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回 혼란한 현실도 파괴하지 못한 평온한 화폭세계, 베르메르 『화가의 아뜰리에』 |
| ▲ 베르메르, 『화가의 아뜰리에 (The Art of Painting)』,1665년-1666년, 캔버스에 유채, 120cm x 100cm, 빈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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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현실도 파괴하지 못한 평온한 화폭세계, 베르메르(1632-75) 『화가의 아뜰리에』 |
일상으로 내려온 그림
17세기 중반은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기였다. 네덜란드는 1648년 가톨릭왕조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민주국가였기에 종교화가 금지되고, 성당 왕실 귀족계급 같은 미술 후원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부유해진 중산계층이 귀족과 교회를 대신해 예술의 후원자가 되었다. 자수성가한 새로운 계급은 성서나 신화적 주제를 찾지 않고 집안을 장식할 정물화나 풍경화, 또는 자신들을 그려주길 원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의 주제와 소유권이 민주화 된 것이다. 정물화, 해양화, 실내화, 동물화, 풍경화 등 그 양식은 사실적이고 주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종교나 신화에서 비롯된 거창한 주제에 가려져있던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능란한 기교로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이 생생하게 현실을 묘사해 냈는데, 그들 중 단순한 기술자의 경지를 넘어 거장의 반열에 오른 화가가 있다. 바로 “델프트의 스핑크스” 라고 불리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이다.
델프트의 스핑크스
베르메르는 1632년 네덜란드의 상업도시 델프트에서 태어났으며, 167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 날짜들만이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이야기 이며 나머지는 갖가지 추측과 의문으로 뒤덮여있다. ‘델프트의 스핑크스’는 1866년 베르메르 작품의 진가를 재발견한 프랑스 작가 테오필 토레(Etienne Joseph Theophile Thore)가 칭한 것으로, 그만큼 베르메르는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고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대략 35점 가량이며 그마저도 몇 점은 아직도 진위여부가 명확하지 않다. 작품 중 상당수는 제작연도가 쓰여 있지 않아 그림의 내용과 화풍에 의해 제작된 시기를 추측해 볼 뿐이다. 침묵하는 그의 작품처럼 베르메르는 자신에 대해서나 작품에 대해서나 남긴 말조차 없어서 베르메르가 어디서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그림 속 등장인물은 누구인지, 실제를 그린 것인지 아니면 상상해서 그린 것인지 끊임없이 우리를 궁금하게 할 뿐이다. 베르메르는 평범한 일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렸는데 떠들썩한 집밖이 아닌 고요하고 평온한 실내를 화폭에 담았다. 그의 작품에는 동일한 요소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등장인물은 많아야 두 명에서 서너 명이고 주로 부유해 보이는 한명의 여성만이 등장한다. 진주 액세서리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무언가를 읽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그림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빛이 나며, 지도나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실내의 바닥은 주로 검정과 흰색의 조합이다. 혼란스러운 외부세상과는 다른 평온한 가정의 이미지는 개인적인 삶을 소중하게 부각시킨다.
| ▲ 베르메르,<연애편지 (The Love Letter)>, 1666년, 캔버스에 유채, 38.7cm Ⅹ 43.8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 |
| ▲ 베르메르,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여인>, 1672년경, 캔버스에 유채, 45.5cm x 51.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
베르미어는 21살에 카타리나 볼레스와 결혼하여 1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4명은 영아기에 사망함) 이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장모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무척이나 시끄럽고 떠들썩했을 것이며 대가족의 생계비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베르메르는 지속적인 재정난 속에서 살았는데 가난이 그를 괴롭혀도 절대 팔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작품이 있다. 베르메르의 개인적인 걸작이기도 한 <화가의 아뜰리에(L'atelier de l'ariste)>이다.
| ▲ 베르메르, <화가의 아뜰리에>,1665년-1666년, 캔버스에 유채, 120cm x 100cm,빈 미술사 박물관 | |
<화가의 아뜰리에>이야기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조용한 실내.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전면의 커튼을 옆으로 젖혀주고 있는 듯하다. 커튼 옆 의자를 지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이제 막 모델을 그리기 시작한 패셔너블한 차림의 화가이다. 검정과 흰색의 모자이크 대리석바닥과 커다란 걸개지도,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조화롭게 구성된 고급스러운 공간이 보이며 테이블 위 여러 가지 물건들 건너 독특한 차림을 하고 있는 모델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화가의 붓질하는 소리와 모델의 숨소리만이 들릴 것 같은 고요한 공간. 그림을 들여다 볼수록 왠지 봐서는 안 될 사적인 공간을 본 듯한 느낌이 든다. <회화의 알레고리>, <회화의 기술>이라고도 알려진 이 작품은 17세기중반 네덜란드의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걸작이다. 단순히 화가가 포즈를 취한 모델을 그리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수 도 있지만 이 작품은 매우 다양한 의미 층을 가지고 있다. 먼저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걸개지도는 네덜란드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지도는 에스파냐, 즉 가톨릭왕조 합스부르크가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도에 섬세하게 표현된 주름 중에 유독 깊게 표현된 주름은 1648년 뮌스터조약으로 독립한 이후 남북으로 분열된 네덜란드의 국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오른쪽은 신교 네덜란드 공화국이고 왼쪽은 가톨릭 에스파냐 지방이다. (당시에는 지도의 남과 북을 횡축으로 제작하였다.) 지도 앞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상징인 쌍두독수리 장식이 있는데 불을 밝힐 초는 하나도 없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였던 베르메르가 에스파냐 정권의 쇠퇴와 함께 네덜란드의 가톨릭 또한 빛이 꺼진 것을 암시하고자 한 것이다. 지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델의 특이한 복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체사레 리파 (Cesare Ripa)의 <제 형상에 대한 도상학 또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머리에 월계관을 쓴 젊은 여인이 오른손에 트럼펫을 들고 왼손엔 겉장에 ”투키디데스“ 라고 쓰여 진 책을 들고 있다. 이 뮤즈의 이름은 클리오이다···” 1644년 홀란드어로 번역되어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이 책을 베르메르도 읽었을 것이다. 베르메르는 클리오를 통해 ‘역사’를 의인화 한 것이다. 화가의 뮤즈가 된 역사의 여신과 신교로 분열되기 전 네덜란드 지도. 화가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까? 과거 카톨릭 국가였던 조국을 역사의 여신을 앞세워 붙잡고 싶은 화가의 신앙심의 표현일까. 아니면 자신의 예술에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뒷모습의 자화상과 역사의 알레고리를 택한 것일까.
17세기 네덜란드는 정밀 관찰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던 문화가 융성했고 베르메르가 살던 델프트는 현미경, 렌즈와 같은 정밀기계 생산의 중심지였다. 베르메르도 자신의 소묘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를 사용했는데, 이 장치는 실제 과거 카메라 모형으로, 작은 상자 한쪽에 구멍을 뚫으면 외부정경이 상자 속 구멍을 뚫은 반대측면에 역방향으로 투영되는 장치인데, 이렇게 투영된 이미지는 초점을 벗어난 부분은 흐릿하게 나타난다. 베르메르는 이것을 이용하여 마치 카메라로 인물에 초점을 맞춰서 찍은 것처럼 탁자 위 물건 등은 흐릿하게 처리하였다. 베르메르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장면 옆에 소실점을 위치 시켰는데 이 그림의 소실점은 걸개지도 하단 왼쪽 모서리와 클리오의 오른손 사이에 맞춰져 있다. 베르메르는 이 부분에 실을 묶은 핀을 꼽아 바닥타일과 탁자 끝을 따라 클리오로 이어지는 사선을 캔버스에 표시하여 완벽한 원근법을 얻고자 했는데 실제로 그림에 핀 구멍이 남아있다. 그러나 반면 원근법에 어긋난 부분도 있다. 베르메르로 추정되는 화가가 너무 크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베르메르의 원근법계산이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화면 안에서 화가의 중요성을 강조해 보다 극적인 연출을 하고자 했던 베르메르의 의도로 생각된다.
<화가의 아뜰리에>는 베르메르의 작품 중 가장 연극적인 구성의 작품이고 그의 작품 중 크기도 가장 크다. 대가족을 부양하며 끊임없는 재정난을 겪었던 가난한 화가의 삶과 비교되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그림. <화가의 아뜰리에>는 베르메르가 팔기위해 제작한 그림이 아닌 후원자나 잠정적인 의뢰인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용도로 그려진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엔 그림을 구매하고자하는 개인소비자들은 화가의 작업실에 직접 방문하여 화가의 작품을 보고 구매를 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의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베르메르도 방문객들이 왔을 때 언제라도 보여 줄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기술을 쏟아 부어 <화가의 아뜰리에>를 완성했을 것이다. 그림 속 자신을 투영한 뒷모습의 화가도 물감이 묻은 지저분한 작업복이 아닌 멋지게 쓴 베레모와 베어진 더블릿 상의, 붉은색의 속바지 등 그 당시의 최신식 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한껏 매력을 뽐내고 있다. 미래의 구매자에게 과시하기위해 팔지도 않을 그림은 6개월 이상 몰두하여 완성한 작품 <화가의 아뜰리에>. 이작품은 아마도 베르메르 자신에게도 특별한 의미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괴롭히던 가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 후의 이야기
166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때 베르메르는 델프트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가 되었으며 델프트 화가동맹 회장 직을 제안 받는 등 화가로서의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아마도 많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꼼꼼한 성격에다가 델프트 외 지역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년의 화가는 돈을 벌지 못했다. 베르메르의 일생 내내 네덜란드는 영국, 프랑스 같은 이웃나라와 전쟁 중이었는데, 전쟁이 빚은 암담한 경제상황이 미술시장을 급속히 침체 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재정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그로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결국 43세의 나이로 빚더미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베르메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족들도 <화가의 아뜰리에>만큼은 지키고 싶었지만 베르메르 사망 후 파산에 이른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작품을 회수당하고 만다. 이로써 그의 후손은 그의 작품을 한 점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그 이후 2세기 동안 그는 빠르게 잊혀져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진이 유행하고 사실주의가 지배적인 예술사조로 떠오르면서 사람들은 베르메르의 진가를 다시 보게 된다. 사진의 유사성을 지닌 베르메르의 작품과 일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예술사조가 베르메르의 명성을 나날이 높아지게 한 것이다. <화가의 아뜰리에>는 1813년 오스트리아의 귀족 체르닌 백작이 소유하게 되고, 그 후 히틀러의 눈에 들어 그의 소유로 있다가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히틀러가 탈취한 수많은 그림과 함께 지하창고에서 발견되었다. 히틀러는 <화가의 아뜰리에>를 특히 마음에 들어 했는데, 아마도 이 작품이 역사와 영광을 나타내고 있고, 자신의 정복에 대한 야심을 매우 우아한 방식으로 드러내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이 탈취한 미술품들로 거대한 규모의 미술관 건립을 계획하고 ‘국민을 위한 예술’ 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는데 그 책의 표지가 바로 <화가의 아뜰리에>에 였다. 만약 히틀러의 계획이 성공하였다면 <화가의 아뜰리에>는 자신을 게르만 예술의 구원자로 명명한 탐욕스러운 수집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히틀러가 죽고 그의 미술관 건립의 꿈도 사라졌으며 연합국은 발견된 그림들을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다. <화가의 아뜰리에>도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후 현재까지 빈 미술관에 걸려있다. 다양한 의미를 품은 채 수수께끼 같은 모습을 한 <화가의 아뜰리에>. 어쩌면 이 그림은 현실은 빈곤하고 파산의 충격으로 죽게 될지언정 자신만의 고고한 이상향과 세련된 그림스타일은 놓을 수 없었던 화가가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안식처는 아니었을까.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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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回 『야간순찰 (Night Watch)』에 등장하는 빛나는 소녀는 누구일까? |
| ▲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년, 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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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순찰』에 등장하는 빛나는 소녀는 누구일까? |
(1606-1669) 그 시절의 단체사진
| ▲ 프란스 할스, <하를럼시 성 게오르기우스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 1616년, 캔버스에 유채, 324 x 175 cm, 프란스 할스 미술관 | |
| ▲ 헤르브란트 반 덴 데크하우트, <집단 초상화>, 1657년, 캔버스에 유채, 163 x 1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
단체초상화(group portrait)라는 회화 장르가 있다. 17세기, 특히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장르로 카메라가 없던 시절 카메라를 대신해 오늘날의 단체사진처럼 한 캔버스 안에 가족이나 특정 구성원 모두를 그려내는 것이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무역으로 인한 번영을 기반으로 부유해진 시민들이 자신의 집을 장식할 그림을 사들이면서 일반시민을 상대로 한 미술시장이 형성된다. 그 시절 가장 인기가 많았던 단체초상화는 주로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초상화를 위한 돈을 똑같이 나누어 냈기 때문에 모두 같은 크기에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다소 어색하게 그려지곤 했다. 오늘날의 단체사진과 다르지 않게 말이다. 또한 단체초상화는 그 규모가 말해주듯 워낙 비싼 그림이었고, 단체초상화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다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기에 웃는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모두가 근엄한 모습으로 그려지길 원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형식과 표정을 담고 있던 단체초상화 중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단체초상화가 등장한다. 바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야간순찰 (Night Watch)』이다.
<야간순찰(Night Watch)> 이야기
1632년 그의 나이 25살에 암스테르담으로 화실을 옮긴 렘브란트는 도착할 당시 이미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고 <해부학강의>를 시작으로 더 큰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사스키아 아이렌보크와 만나 결혼한다. 상류층 여성과 유럽 곳곳으로 명성이 퍼질 만큼 유명한 화가와의 만남. 젊은 부부는 윤택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그의 나이 34살에 암스테르담 시경 본부로부터 <야간순찰>을 주문받았는데 그는 그의 모든 기법을 쏟아 부어 2년 만에 완성시킨다. 렘브란트의 초기 대표작인 <야간순찰>은 기존의 단체초상이 아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멈춘 것처럼 극적인 연출을 설정했다. 바로크적인 빛의 움직임과 등장인물들의 포즈를 통해 흥분되고 생생한 감정을 전달한다. 강렬한 조명이 비추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배경과의 대조로 보는 이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그림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인물들의 표정은 살아있고 그림 속 주요인물 중 정적인 것이 없어 전체적으로 사건과 움직임이 넘치는 화면을 만들어 냈다. 마치 축제에서 행진하듯이 화려한 의상을 입은 프란스 바닝콕이 부사령관에게 행진하라고 명령하는 순간을 담고 있는데, 명령을 내리는 콕의 입이 살짝 벌어져서 있어 명령을 내리는 그 찰나를 보여주고 있다. 대장의 명령과 함께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수는 깃발을 흔들며, 화약운반수는 달려 나간다. 진행형의 사건을 아주 적절한 시기에 완벽한 구도로 잡아낸듯하다.
<야간순찰>에는 총 34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18명만이 그림을 주문한 실제 인물이고 나머지는 렘브란트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 인물이다. 렘브란트는 그림의 생동감과 극적인 감정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려야하는 인물의 두 배가 넘는 사람을 집어넣어 군중으로 만든 것이다. 북을 치는 사람, 왼쪽 화약운반수로 나온 어린 소년, 대장인 바닝콕의 뒤에 가려진 총병 등의 조연들이 사건의 현실감과 극적 효과를 위해 조연을 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 방패에 보면 실제로 이 그림을 의뢰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공개 된지 8년 후 덧붙여진 것이다.)
| | | ▲ 렘브란트,< 야간순찰> 부분, 1642년,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
렘브란트가 만들어낸 조연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입고 신비로운 광채를 내고 있는 어린소녀이다. 누가보아도 민병대의 일원은 아닐 것이다. 이 소녀는 누구이며 렘브란트는 어떤 의도로 그림 중앙에 이 소녀를 그려 넣은 것일까? 소녀의 허리에 멘 벨트에는 닭이 매달려 있는데, 거꾸로 매달려 있어 발톱이 강조되게 그려져 있다. 새의 갈고리모양 발톱은 총사길드 컵의 표상으로 말하자면 시민군의 로고와도 같다. 렘브란트는 시민군을 의인화한 소녀의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자신의 작품이 전형적인 시민군 그림으로 보이지 않게 의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소녀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와 닮아있다.
| | | ▲ 렘브란트, <플로라(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4년, 캔버스에 유채, 101 x 12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 |
| | | ▲ 렘브란트, <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5년, 캔버스에 유채, 97.5 x 123.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스키아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여러 번 그려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렘브란트 의 삶과 예술인생의 여신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렘브란트가 야경을 그릴당시 플로라는 병에 걸리게 되고 야경을 완성한 그해에 30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렘브란트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아내의 빛나는 영혼을 소녀 얼굴에 담아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야간순찰>의 수난
<야간순찰>은 많은 일을 겪었다. 먼저 <야간순찰>의 제목부터 렘브란트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림에는 제목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18세기부터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불러왔다. 거기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 그림의 안료와 광택제 층이 무척 어두워져서 실제 그림이 나타내는 시간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시엔 주간순찰이 없어지고 야간순찰만 남아있어서 주간순찰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1940년대에 이 그림의 어두워진 광택제 부분을 깨끗이 청소하여 복원하여 밝아진 그림을 보고 그림의 제목을 정확히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간순찰> 또는 <시민군의 행진>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모두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에서 느끼던 원작의 아우라에는 미치지 못하여 거절당하고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이 유지되게 되었다. 또한 <야간순찰>이 완성되어 의뢰자들에게 공개 되었을 때 그림의 연극적인 스타일에 의해 기존 단체초상화와는 달리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나거나 어둠속에서 처리된 의뢰자들이 불만을 터트려 그림 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잘못된 것이다. 이 일화는 그의 제자 샤무엘 반 호흐스트라텐(Samuel van Hoogstrarten)이 그의 논문에서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에 등장한 조연들에 대한 불평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바로는 등장인물 모두 그림 값을 지불했고 이 그림이 회의실에 걸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의 <야간순찰>은 렘브란트가 처음 완성했을 때와는 사이즈가 다르다. <야간순찰>은 시민군 회의실에 70년 넘게 걸려 있다가 후에 암스테르담 시청 건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림이 할당공간에 걸기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그림의 아래쪽과 오른쪽, 왼쪽이 각각 상당부분 잘려나간 것이다.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바닝콕이 원작의 1/36 크기로 복제하여 소장한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림의 잘려나간 부분을 알 수 있다.)
| ▲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년,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
특히 가장 많이 잘려나간 왼쪽 부분을 때문에 원작이 가진 공간감이 부족해지면서 밖으로 행진하는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게 되었다. <야간순찰>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75년 윌름 드 라이크라는 실직상태의 교사가 검은 옷을 입은 바닝콕을 악마로 여겨 조각칼로 훼손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자구 밖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에게 이일을 시켰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1990에는 또 다른 정신이상자가 그림에 산을 뿌리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그림의 광택제 층까지만 산이 흡수되어 다시 그림을 복원 할 수 있었다.
<야간순찰>그 이후
<야간순찰>이 완성된 1642년은 렘브란트의 작품과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해이다.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었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셋도 모두 영아기에 사망했다. 렘브란트는 점차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바로크 양식을 버리고 내면을 묘사하는 조용하고 깊이 있는 스타일로 옮겨간다. 이후 성숙기에 들어선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심리적 통찰력이 넘치는 자화상 시리즈로 대표된다.
| | | ▲ 렘브란트, <자화상>, 1660년, 캔버스에 유채, 85 x 111cm, 루브르 박물관 | |
<야간순찰>은 분명히 렘브란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암스테르담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최고의 국보로 추앙되는 그들의 자부심이다. (<야간순찰>은 한 번도 국외로 나간 적이 없다.) <야간순찰>이 소장되어 있는 국립 암스테르담 미술관에는 렘브란트 뿐 만아니라 반 고흐,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 15-19세기 네덜란드 거장의 작품들이 5,000점이 소장되어 있지만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전시실에 교회제단처럼 꾸며진 특별한 곳에 위치한 작품은 바로 <야간순찰>이다. 미술관은 <야간순찰>이 훼손될 때 마다 복구되는 과정을 미술관 유리창을 통해 국민 모두가 볼 수 있게끔 했다. 국립미술관의 최고작품은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아닌 신민군의 초상 바로 <야간순찰>인 것이다. 사실 작품의 주제에 있어서의<야간순찰>은 네덜란드의 한 지역 시민군의 단체초상일 뿐이다. 만약 렘브란트가 당시의 일반적인 단체초상화의 형식으로 <야간순찰>을 그렸다면 그 작품은 아마도 다른 단체초상화와 함께 국립미술관이 아닌 역사박물관에 보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혁신적인 구상과 웅장한 연출로 네덜란드인의 깊은 애정으로 보존되는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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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回 『모나리자 (Mona Lisa)』는 왜 루브르 소장품이 되었을까? |
|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Mona Lisa), 1503~1506년,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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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Mona Lisa)』는 왜 루브르 소장품이 되었을까? |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그 존재만큼은 알고 있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인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건축, 조각, 해부학, 천문학, 무기제작, 자연사, 음악 등 분야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그야말로 르네상스맨(Renaissance man)의 전형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가 남긴 20여점의 완성작 중 <최후의 만찬>과 함께 순위를 다투는 명작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금자탑<모나리자>는 어떤 이유로 프랑스의 보물이 되어 루브르에 남게 되었을까.
<모나리자>가 그려지기 까지
피렌체 부근 토스카나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밀라노와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밀라노에서 그를 후원한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를 위해 궁정화가로 일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루도비코가 죽자, 1500년 4월 24일 밀라노에서의 18년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온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고, 이미 밀라노에서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으로 그의 명성과 경력은 최고조를 구가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산타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그곳 수도원에 정착한다. 그의 걸작 <모나리자>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모나리자>라는 이름과 그 대단한 명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모나리자>의 모델은 누구이며 왜 레오나르도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예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 (Giorgio Vasari)의 『뛰어난 화가 ㆍ 조각가 ㆍ 건축가의 생애(미술가 열전)』에 따르면 1503년부터 1506년까지 4년 동안 고심하면서 모나리자를 그렸으나 마치지 못했다는 일화와,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인 모나리자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모나는 마돈나의 약칭으로 부인이라는 뜻이므로 모나리자는 곧 리자 부인을 말한다). 모나리자의 실제모델이 레오나르도 자신이었다는 설과, 리자가 아닌 제3의 여성이라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리자외에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 한 근거는 더욱 없으므로 현재는 리자부인일 확률이 가장 높다. 이로써 우리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이며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왜 <모나리자>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상화라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 또는 왕가나 권력을 가진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력한 주장으로는 귀족가문이었던 리자의 아버지 안톤마리아와 공증인이었던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피에로가 직업상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거처했던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실크를 납품했던 리자 남편 프란체스코가 이 과정에서 레오나르도를 알게 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리자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주문자의 지위보다는 내면을 중시했다는 점과, 당시 신흥상인 즉 브루주아 계급이 중요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소비자로 등장하는 사회적 변화를 인지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레오나르도가 주문을 수락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모나리자> 이야기
<모나리자>의 모델인 리자는 피렌체의 한 부유한 상인의 부인일 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모나리자>는 동시대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다른 놀라운 점을 지니며 여러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기본을 정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 | ▲ 안토니도 디 푸치오 피사노, <지네브라 데스테의 초상>, 15세기경, 유화, 43×30cm | |
|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의 두폭화>, 1472, 유화, 33×47cm | |
16세기까지의 초상화는 인물의 뚜렷한 윤곽선, 형식적인 배경처리, 얼굴의 라인을 가장 잘 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측면 프로필구성으로 대부분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어느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먼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리자의 모습은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스푸마토(sfumato)기법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세상에 나오기 전 15세기 이탈리아의 여러 거장들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다소 딱딱하고 실제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어딘가 모를 어색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지식이나 묘사를 위한 인내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더 자세히 모사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는 현실적인 생동감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세부묘사나 윤곽선을 세밀하고 뚜렷하게 표현하는 대신 형태와 형태가 서로 뒤섞이며 경계가 흐려지듯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하여 무미건조하고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모나리자>의 입과 눈에서 표현된 스푸마토기법으로 인해 그림 속 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리자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 | |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얼굴 부분, 1503~1506년,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미술관 | | 처음 그림을 보면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눈과 입자락의 끝의 경계 표현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마치 녹아들 듯 흐리게 표현했기 때문인데, 표정이 변하는 찰나의 순간을 그려낸 듯 생동감 있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배경은 섬세하고 유려한 자연풍경으로 처리하였는데 의도적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지평선을 어긋나게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모나리자의 얼굴도 변하는 것처럼 보여 지게 하기위한 레오나르도의 의도이다.
모나리자의 머리 뒤에 소실점을 둔 원근법의 사용과 당시 유행한 딱딱한 측면 초상을 자연스럽고 편안한 3/4포즈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도 바꾼 것 또한 이후 라파엘로 등 다른 거장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눈썹이 없기 때문에 미완성 일까?
<모나리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배경처리에서 스케치 정도만으로 마무리된 미완성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우선 눈썹이 없다는 확연한 점에서 <모나리자>는 미완성 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에서 바사리가 모나리자를 묘사한 부분에서 리자의 눈썹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갖가지 추측이 제기되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지던 시대에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실제로 눈썹을 뽑아버리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애초에 눈썹이 없었다는 설, 원래는 눈썹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약으로 여러 겹 특수처리 하였는데, 가장 바깥에 그려진 눈썹이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갔다는 설, 그리고 잦은 복원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후에 바사리가 리자에 눈썹에 대해 남긴 기록은 바사리가 실제로 <모나리자>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류라고 판단되었지만, <모나리자>의 눈썹은 지워진 것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러 그려지지 않은 것 인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다. 눈썹이 없는<모나리자>에게 익숙한 우리로서는 만약 <모나리자>가 눈썹이 있었다면 지금과 어떻게 다른 얼굴일지, 신비로운 미소는 어떻게 달라질지 그저 상상해 볼 따름이다.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에 걸리기까지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모나리자 전시실 내부 | |
피렌체에서 머물던 레오나르도는 1513년 피렌체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로마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휘아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뿐만 아니라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끄는 최고의 거장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당시 예순을 넘긴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훨씬 젊은 동료들과의 세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노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들을 바라보는 레오나르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비해 점점 노쇠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그즈음 마침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1세가 레오나르도에게 손을 내민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프랑수와1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레오나르도의 재능과 솜씨에 감복해 있어서 만약 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온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한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던 레오나르도는 조수 두 명과 하인 한명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향한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몇 가지 챙겨서 가져갔는데, 그중에 바로 <모나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국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 레오나르도를 프랑수와 왕은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간지 4년 만에 프랑수와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임종을 바라보는 프랑수아 1세>, 1818년, 유화, 40×50.5cm | |
레오나르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태어난 피렌체나 24년간의 후원을 받은 밀라노가 아닌 프랑스 땅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프링수아 1세는 퐁텐블로성에 미술관을 꾸미고 <모나리자>를 포함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것은 후에 퐁텐블로 파가 생겨나게 함으로써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시작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 후 프랑수아1세는 <모나리자>를 파리로 가져가고, 루이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져다 놓았으며, 그 후엔 나폴레옹의 개인소장품이었다가, 전시품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루브르의 심장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그곳에 전시되고 있다. (1911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과도 같은 <모나리자>가 프랑스에 있는 것에 분개한 한 이탈리아 노동자가 대낮에 <모나리자>를 훔쳐 고국으로 가져갔다가, 2년 만에 다시 루브르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라파엘로부터 19세기화가 카미유 코로등 화가들은 끊임없이 모나리자를 모방하고 그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반대로 이러한 <모나리자>의 열풍을 조롱하는 작품들도 제작됐는데 오히려 원작의 명성만 더 높아지게 했다. 마르셀 뒤샹의 수염난 모나리자>가 대표적이다.
| | | ▲ 마르셀 뒤샹, <수염난 모나리자>, 1919년, 유화, 조르주 퐁피두센터 | |
그림이 그려진지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모나리자>에 대해 얘기하며, <모나리자>의 원작을 보기위해 예술적 순례를 떠난다. <모나리자>의 시작은 피렌체의 한 여성의 초상에 불과했지만,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의 모방을 통해 재생산되고 유명한 것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글로벌리즘 현상과 매스미디어에 의해 그 불멸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 중앙 J풀러스 | 전정은 |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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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정은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 석사.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어렵지 않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을 구상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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