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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ean`s Study (딘스 스터디) 원문보기 글쓴이: yimy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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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질서] 빛과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 공존하는 질서 |
햇살이 땅 위의 모든 만물을 비춘다.
그 햇살을 받은 땅 위의 만물들은
모두가 제각각
자신들만의 고유한 색상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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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질서 속에 숨겨진 영적 비밀 |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거나 또는 계시를 얻는 것과 흡사하다. 심지어 필자의 경우는 동일한 형상(속성)을 지닌 듯 보인다.
야훼께서는 우리들에게 온전한 계시를 비추신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 곧 믿는 자이던 믿지 않는 자이던 모든 이들은 야훼의 온전한 계시를 경험하게 된다. 계시라는 단어를 은혜라는 단어와 바꾸어서 적용하더라도 의미는 동일하다. (수치로써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수치적인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야훼의 온전한 계시를 100%라 해보자.
계시가 어떤 사람에게 임하여도 그 사람의 연약함[다른 표현? 예를 들어, 죄성 등]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그 계시를 다 받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그 계시의 90%가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사라졌다면 나머지 10%의 계시만이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래도 그 10%의 계시는 그의 삶 속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양상은 야훼께서 계획하시고 세우신 창조의 질서에서 비롯된 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변의 어떤 지체가 “큰 은혜를 입은 영적체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변화가 미약한 것에 대해 우리는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줄로 믿는다. 이 부분이 필자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도전이요 경고 메시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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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빛의 영역과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영역 |
더더욱 분별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빛이 물체를 비추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영역이 그 물체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둠의 영역과 빛의 영역이 서로간에 이루는 경계선이 그 물체의 윤곽선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윤곽선은 물체의 입체적인 느낌을 살려주는 필수요소로서 작용된다. 평면에 그려진 그림에서는 생명감을 느끼기가 어려운 반면 입체적인 조형물에서는 생명감을 느끼기가 용이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입체적인 조형물 또는 그림들을 보고 “사실적 묘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적 묘사라는 표현에는 “생동감 또는 생명”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서 비롯된 영적 시야가 좁기 때문에 우리는 늘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왜 어둠을 만드셨지? 그냥 빛만 있게끔 내게 임하시고, 내게 있는 모든 어둠을 제거하여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방금 전에 서술했던 내용을 토대로 질문에 답을 한다면 “내게 빛의 영역과 동시에 어둠의 영역이 공존하기 때문에 고로 나의 존재감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 더불어 생명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동시에 공존하지 않는 상황, 곧 빛의 영역만이 있거나 혹은 어둠의 영역만이 있다면 그 공간 내에 있는 우리들의 존재감은 어떻게 느껴질까?
이전에 올린 글 “☞ 우리가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이유는?”을 통해서 이미 설명한 바가 있듯이, 우리의 존재감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야훼께서는 우리와 서로 교통하며 함께 동행하는 삶을 원하셨지, 강렬하게 내뿜는 야훼의 빛 속에 우리들의 존재감이 묻혀서 마치 야훼 혼자만이 계시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를 원치 않으셨다.
창1:2의 당시에는 “땅”이 있었으나, 그 땅에는 어떠한 존재감 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창1:3의 부분에서 빛이 어둠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그러면서 빛이 비추는 영역과 빛이 닿지 못하는 영역이 공존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의미는 곧 “존재감이 있는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기 원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존재감을 갖는 이들은 동시에 빛이 닿지 않는 영역을 가져야만 했다.
우리와 우리들의 삶에 빛의 영역과 함께 공존하는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영역은 분명 우리 사람들에게 주어진 “(창세 때부터의)연약함”이다.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일부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일부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바를 몰라서 갈팡질팡하기도 하며,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다스리면서 빛 되신 야훼 하나님께로 더욱 힘써서 나아가는 삶을 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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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께서 창조의 질서를 세우신 의도 |
따라서 본시 야훼께서 우리 사람들을 지으시고 “빛의 영역과 동시에 어둠의 영역”을 계획하시고서 허락하신 궁극적인 이유(들 가운데 그 하나)는 “우리 사람들이 빛의 인도함을 따라 어둠의 영역(사람의 연약함)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지길 원하셨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을 향해서 말씀하셨던 야훼의 말씀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을 보더라도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영역, 곧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자로 우리들은 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야훼께서 태초에 “사람을 향해 세우신 창조의 질서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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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질서” 안에 숨겨져 있는 “미혹 or 속임”의 덫 |
그런데 우리에게는 “창조의 질서” 안에 무서운 덫이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바로 “미혹 또는 속임”의 덫이다.
야훼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온전한 계시를 모두 비추셨다. 온전하신 이가 사람에게 임하셨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은 온전한 분과 그분의 온전한 계시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야훼 하나님의 계시는 온전한 계시의 일부분에 해당되는 지극히 작은 계시만이 드러난다. (이때의 작은 계시는 값없음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작은 계시를 본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의 계시가 마치 야훼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 전부인 듯 여길 수 있다. 그러면서 허다한 무리들은 온전한 계시를 비추신 야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작은 계시를 보여준 그 사람에게만 모여들게 된다. 그리고는 우상화가 시작된다.
야훼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그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는 볼 수 없는 자다. 그 연약함은 오직 성령님께서 알려주실 때에만 볼 수 있다. 왜냐면 성령님만이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명확히 (좌우의 날샌 검보다 더 예리하게) 구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실제 빛의 회절현상 때문에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만드는 경계는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의 능력으로는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알려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 된다면, 특별히 할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야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통해 약간의 교만함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우리가 대통령과 악수만 하더라도 우리의 태도가 순간 달리지는 것처럼…)
그러면서 성령님의 음성 듣기를 더디 할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이 전하는 (일부분의) 계시가 마치 야훼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 그 자체일거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 착각은 바로 교만함에서 비롯된 “미혹 or 속임”이다.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다른 이들과 합력하여 “일부분의 계시들을 모와 온전한 야훼의 계시”로 회복시키기보다는 자신 이외의 모든 이들은 배제하고 오직 자신이 전파하는 계시만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강요와 억압” 등의 행동이 나오게 된다.
그 순간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거짓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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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자 Vs 야훼의 음성에 청종하는 자 |
먼저 필자는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에 대해 너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를 바란다. 은사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Absolutely Not! “이라고 말하고 싶다.
“야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오직 그의 음성을 듣고 청종하는 자(삼상15:22) 일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야훼의 음성을 듣고 청종하는 이에게는 그의 입술과 그의 행동을 통해서도 엄청난 기적과 표적들이 나타날 수 있다. 모세처럼, 사도 바울처럼, 엘리야처럼, 아브라함처럼, 에녹처럼……
그리고 예슈아께서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청종하는 아들이었을 뿐, 어떤 은사자로서 사역하시지 않았다.
은사를 주심은 은사자 자신들이 “부분적인 계시를 전하는 통로”임을 “성령님의 가르침”을 따라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서 (상대의 연약함을 정죄, 판단하지 아니하면서) 성령 안에서 서로간에 정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서로 합력하여 “온전한 야훼의 계시”를 이루길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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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항상 함께 하는 이유는? |
한시라도 정신을 잃고서 목표를 상실한 사람처럼 방종하면, 우리는 미혹 당하는 삶 속에 빠질 우려가 매우 높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
어떤 이야기가 생각난다.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작은 땟목이 있었다. 그 위에는 사자와 뱀과 사람이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표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구출될 수 있었다. 구출된 후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정신을 잃지 않고 구출되는 순간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저 무서운 사자와 뱀이 나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언제 나를 덮칠지 몰라서 늘 긴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내용이 다소 틀릴 수는 있겠으나, 의도는 유사하리라 믿는다.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삶 속에 빛이 닿지 못하는 영역을 만드신 야훼 하나님의 그 의도는 진정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길 바란다. 그 아비는 자녀가 “나태하고 게으른 자”의 모습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 앞에 저주”를 놓으신 것 아닐까?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는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기보다는, “그 순간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자 원하시는지를 물어보라”고 필자는 강권하고 싶다. 야훼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어려움 조차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신뢰하고서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자리로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 그의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지 않을까?
비단 어려움에 있어서만 위의 경우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은사자를 통해 주시는 계시 조차도 일부분임을 인지하고, (그 계시를 무시하지 않은 상황에서) 야훼께 다시금 물어보고 이해를 구하는 자의 모습을 갖게 되기를 강권하는 바이다.
계시를 주시는 분이 원래 야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의중을 듣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분의 의중 가운데 일부분을 전달하는 이의 해석은 역시 일부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도처에 깔려있는 “미혹의 덫”을 주의하기 바란다. 은사자가 전달하여 주는 야훼의 계시조차도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이 직접 야훼께 다시 묻고 나아가서 온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음성을 사모하면서 듣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그렇지 않아도 yimychan님 생각하며 궁금해 했었는데 feel이 통했나 봅니다.
바쁘신데 글 감사하고 건강 잘 챙기세요.
샬롬^^
^^ 감사합니다. 아멘.
선거 홍보용 초대형 현수막 제작을 돕다보니 다소 바쁜 시간들이 되었습니다. 카페를 둘러본다고는 하지만 변변히 댓글 달기도 다소 벅차더라구요. 그래도 광야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감기가 참으로 독하네요. 광야님도 건강 챙기시길 바랍니다. 예슈아 하마쉬앜의 기쁨과 평강을 바랍니다. 샬롬~~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속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정의와 공평과 긍휼을 나누며 맡아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똑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신데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기를 기도합니다.
평안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