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군, 일본군 리더십의 퇴조
구 일본군의 '군대내무령' 에는 다음과 같은 강령이 있다. 제2장 복종에서 '명령은 근엄하게 이를 지키고 이를 시행해야 한다. 결코 명령의 옳고 그른 것을 논하거나 원인과 이유 등을 질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라고 못박고 있다.
명령과 복종 관계에서 이 강령은 정답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명령이 정당해야 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군대는 명령에 의해 행동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를 악용한 초창기 국군에서는 정당하지 못한 것까지 명령으로 둔갑시켜 악용하는 폐습이 있었다는데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가령, 정당하지 못한 명령이란 지휘관 자신이 개인 용무를 위한 부하에의 지시를 말한다.
당시에는 후생사업이라고 해서 거의 모든 부대들이 영업행위를 하고 있었다. 군용 차량을 민간 차량으로 위장하여 수송영업에 사용하는가 하면 상당한 병력을 산판에 보내어 벌목에 종사 시켜 그 장병의 임금을 착복하는 일 따위였다.
심지어 6.25 전쟁 발발 전, 1949년 5월부터 채병덕 제2대 육군총참모장(당시 호칭)은 업자를 시켜 전략물자인 의약품 등을 북측에 보내고 그 대가로 명태 등을 받아 이북과 교역까지하는 통탄할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져 시끄러워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9월 31일부로 명태 교역에 정면으로 항거했던 제1사단장 김석원 준장과 함께 채병덕 총참모장을 파면시켰으나 왠일인지 6.25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10일부로 채병덕만 다시 제4대 총참모장으로 기용 복직시켰다.
그 무렵에는 명백한 불법 행위에까지 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에 정의감에 넘친 장교들은 반발을 했고 그로부터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는 파행이 연이어 자행되었다.
그러한 불법 영업 행위로 축재한 일부 장성들은 그 여력으로 승진가도를 달렸고 청렴을 기조로 하여 그런 행위를 비판, 정도(正道)를 향하던 일부 장성들은 도태되는 비극을 맞았다.
당시 모함에 의해 군복을 벗은 청렴 장성 가운데 중국군 육군소장과 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김홍일 장군이 있고 일본군 출신으로는 김석원 장군 등이 있다.
오늘날의 우리 국군은 다른 어느 선진국 군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자랑스로운 체제를 갖추었다. 군사제도를 비롯하여 전략 전술, 현대 장비 조작, 그리고 인력운영과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음은 참으로 대견스럽다. 나는 현재의 우리 국군을 세계 1급 군대로 평가한다.
그러나 1965년 10월, 육군의 맹호사단과 해병의 청룡여단이 월남전에 출진할 당시에는 모든 여건에서 지금과는 달리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령 기본 병기에 있어서도 미국 등 다른 선진국 군대의 기본 병기는 M14 또는 M16소총과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자동소총인데 반하여 우리는 고작 세계2차대전 때 사용하던 M1소총과 카빈소총으로 장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3류 군대로 빗댈수 있었다. 맹호사단과 청룡여단은 베트남전에 투입되면서도 제1진은 구식 장비 그대로 전투에 임했다.
특히 인사관리면에서 결정적인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육군의 인사운영의 침체로 장교들의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 당시에 있었던 문제점들을 되돌아 보면서 오늘의 선진 국군이 어떤 험로를 걸어왔는가를 아는 것이 앞으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교훈으로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 기술한다.
원래 군은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따라서 임관서열과 능력위주로 평가된 승진과 진출의 기회는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일정한 정년제도를 적용하여 후진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정상적인 군사 운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세계 군사상(軍史上) 유례없이 95%의 장성진급을 독식한 군 초창기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성들은 군의 요직을 무제한 독점하고 있었다. 군사영어학교라고 하지만 그 자체가 다른 장교 양성기관의 1개 기에 지나지 않는다. 군사영어학교 전체 임관자는 110명으로 일본군출신 87명, 만주군출신 21명, 중국군출신 2명이다. 이 가운데 공산주의자 10명을 포함한 19명이 파면되었고 전사자 2명을 포함 사고사 등으로 27명의 사망자를 제외하고 78명이 장성으로 진급함으로써 장성 진급에 누락된 장교는 불과 5명에 불과했다. 이 78명 장성 진급자 가운데 대장 8명, 중장 26명이 배출됨으로써 이들의 고위직 독점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육군의 경우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이응준은 초대 총참모장을 맡았고 2대 채병덕에 이어지고 특별임관 신태영이 3대를 거쳐 채병덕이 다시 4대 총장으로 복귀한 후 장장 20년간 18대 김계원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 20년 사이에 6대 이종찬만이 특별임관자였다. 그러나 특별임관 신태영이나 이종찬은 같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군사영어학교 출신과 성분면에서 같다고 보아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채병덕을 비롯 정일권, 백선엽 등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성들은 각각 두 번씩 총장을 연임하였다.
합참의장의 경우 초대 이형근으로부터 9대 장창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13년간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독점하였다. 합참의장도 김종오는 3대를 연임하였으며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 등은 총장과 합참의장을 각각 중복 연임했고 특히 정일권과 백선엽은 총장 2회, 합참의장 1회를 연임함으로써 극심한 인사적체를 가져왔다.
이와같은 인사적체는 현대적 개념의 군사시스템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파행이었으며 이로 인한 폐단은 전체 장교들의 극심한 사기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궤를 벗어난 폐단으로 급기야 육사 8기생의 하극상 사건이 발생하여 군내부 뿐만 아니라 세상을 시끄럽게 했지만 육군의 일각에서는 당당한 욕구 불만으로 보고 그들의 탈선행위를 오히려 옹호하는 장교도 있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성들에 의해 군 수뇌직이 장기간 독점되었기 때문에 후진들은 진급과 진출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비능률과 함께 불평 불만이 군 전체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가령 육사 8기생의 경우 소위에서 소령까지 승진하는데 4년이 걸린 반면 소령에서 중령으로 한 계급 승진하는 데는 그 두배인 8년이 걸렸다. 소령까지의 빠른 진급은 육군의 증편 때문이었고 한 계급 8년의 정체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상위직 독식의 여파였다.
김종필 중령 등에 의한 육사 8기생 하극상 사건은 마침내 5.16쿠데타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하였다.
5.16이후, 인사적체로 인한 여러 폐해를 의식한 혁명정부는 계급정년, 연령정년, 근속정년 등 각종 정년제도를 포함한 인사법을 1962년 제정하였다. 이는 상당히 발전적 인사운영 체계로의 진입이었다. 그렇다고 군 인사운영이 정상궤도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들은 전자와 못지않게 인사의 파행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하극상 사건으로 군복을 벗은 예비역 중령 김종필 등 8기생들은 현역으로 복귀하자마자 모두 대령으로 특진하였고 장성 이상의 실세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김종필 대령 등 8기생 26명은 자신들이 제정한 인사법을 무시하고 육군준장으로 특진 이어서 예비역에 편입, 정치권력 제1선에 뛰어들었다.
이 무더기 장군 진급은 당시 영관장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주장하고 있었던 '5.16군사혁명의 대의명분' 이 훼손되어 불평불만의 소지를 만들었다. 박정희 자신 또한 정권을 장악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으로 소장에서 중장 그리고 대장으로 별 넷을 달았다.
프랑스의 드골은 준장이었다. 그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얼마던지 별을 더 달을 수 있었지만 끝까지 별 하나로 그쳤으며 프랑스의 영광된 대통령이 되었다. 그에 비하여 박정희 스스로의 대장 특진은 전례가 되어 그의 후광으로 성장한 하나회 정치군인 전두환 및 노태우 또한 스스로의 권력으로 줄줄이 별 넷을 달았다.
이상 기술한 내용들은 지난 우리 군의 부끄러웠던 족적이었지만 한편 한 국가의 건군과정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헤쳐나가야 하는가를 보여준 역사의 과정으로 소개해 둔다.
위에서 기술한 내용에서 보듯 우리 군의 상층부는 모두 일본군 만주군 출신으로 우리 장병들은 일본군대식 군제와 리더십하에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초부터 많은 장교들이 미국에 유학해서 새로운 군사제도와 군사사상에 접하면서 일본군대 리더십과 미국군대의 리더십이 상충하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여기서 전제하는 초점은 일본군 리더십은 무조건 나쁘고 미군 리더십은 좋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6.25한국전쟁 초기 일부 일본군대 출신 지휘관의 리더십은 그런대로 효과를 발휘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전투중 특출한 지휘관의 리더십은 매우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6.25전쟁 초전,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탁월한 전투지휘는 북한 인민군 제2군단의 남진을 지연시킴으로써 북한 인민군의 남침전략을 궤도수정해야 할 정도로 리더십을 빛냈고 김석원 준장은 진두지휘와 철저한 군인정신 면에서 귀감으로 전사에 남겼다.
그러나 일부 장성들이 승진을 의식하고 미군 장성에게 지나친 사대주의에 영합, 오로지 개인의 영달에 치우친 경우도 있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 군대는 일본군대의 삐틀어진 리더십하에서 많은 모순과 불합리 속에서 근무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6.25전쟁 기간 중 일본군출신 장성에 의해 개인 감정으로 희생된 장병이 상당수 있었음도 여기 기록으로 남긴다. 휴전후에도 초법적 폐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이라고 해서 폭행을 정당화 하지 않았다. 다만 폐습일 뿐이었다. 그 폐습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빈발했다.
그 대표적 예를 들자면 일본군 출신 육사2기 서정철 제28사단장에게 울분을 터뜨린 대대장 정구헌 중령의 하극상 사건이 있다.
육사8기생인 정구헌 중령은 나와 함께 1953년 미국에 유학, Fort Benning 육군보병학교 장교기본과정(Officers Basic Course)에서 함께 공부했다. 매우 합리적인 장교였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런데 그 정구헌 중령이 1959년 2월 18일, 대낮에 직속상관인 사단장 서정철 준장을 인격모독을 받던 현장에서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후 정구헌 중령은 군법회의에 회부 사형 언도를 받고 이슬로 사라졌다.
이 하극상사건은 일본군 출신들의 리더십 폐습인 일방적, 강압적, 폭력적인 사단장과 미국에서 새로운 개념의 현대적 리더십을 터득한 대대장과의 상충(相衝)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부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성들이 리더십 궤도를 수정하는 변화을 맞아 그 이후는 폭거적 지휘가 자취를 감추는듯 했다. 그러나 그 폐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창군 이후부터 1975년 초까지 모든 장군 계급에 일본군대식으로 각하(閣下)경칭이 붙여졌으며 심지어 대령급 부사단장에게도 부각하(副閣下)로 불리워지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 폐단을 인지한 박정희 대통령이 금지 지시를 내림에 그 후부터는 오직 박정희 대통령 자신만이 각하로 남게 되었다.
그무렵만 해도 일본군 만주군출신 장군들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 상관에 대해 발길질을 예사로해서 '쪼인트 깐다' 라는 괴상한 용어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부하의 인격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계급과 직책만으로 일방 통행식 지휘였으니 곳곳에서 하극상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의 우리 군이 정상적인 리더십으로의 발전하기란 단지 뜻있는 장교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에게도 새로운 리더십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돌파구의 하나는 1952년부터 시작한 한국군 장교의 미국 군사학교 유학의 길이 개방되었고 둘째는 1965년 월남전 한국군 전투부대 참전이 실현됨으로써 열리기 시작했다. 도미유학과 월남전 파병은 우리 국군 현대화와 1급군대로의 진입을 달성케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월남전 참전 지휘관들은 일본군 리더십과 미군 리더십의 상충 관계서 얻은 교훈을 거울 삼아 한국군 독자적 리더십 계발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