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1) 아버님 영결식
이제 며칠 있으면 아버님 기일이 돌아 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정리하여 가족들의 홈피에 올린다.
홈피가 구식이어서 사진이 한 장씩 밖에 올라가지 않음으로 부득이
이 불로그에 먼저 올려 복사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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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1970년 11월 6일
충북 진천군에 있는 이월 초등학교 교정에선
푸치니 작곡 나비부인 중에서
허밍 코러스가 구슬프게 울려 나왔다.
이월 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이시다가
부산 출장중 돌아가신 아버님 휘 泰자 元자의
영결식이 거행 되고 있었던 것.
아버님은 22세때인 1942년
천안시 천동 국민 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32세되던 1951년에 역시 충북 진천군의
초평 초등학교 교장으로 처음 부임하셨다.
통산 28년 9개월동안 교직에 몸 담고 계시다가
부산 출장중 사고로
11월 3일 오전 1시에 별세 하신 아버님.....
작년까지도 지켜지던 <학생의 날>이
없어진 첫해 이지만
평생을 학생들과 함께 하셨던 아버님께서는
생전의 기일까지도 <학생의 날>과 함께 하셨다.
슬하에 10남매
해병대 요원으로 월남에 파견된
셋째 병욱이가 빠진 가운데서
9남매의 오열속에 영결식이 거행 되었다.
<금일 고 윤태원 교장 선생님의
영결식을 거행하매 유족, 조객 여러분들과
학부형 교직원 및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같이 슬퍼 하는 바입니다.>
박일정 장례 위원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저희들은 애통하는 마음을 한데 모아
장례 위원회를 조직하고
고 윤태원 교장선생님의 영령을
추모 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진천군 초등교육회장 박경준씨는
<우리는 충북에서
위대한 교육동지 한사람을 잃었으며
우리는 정을 나누며 진심을 토로하던
훌륭한 벗 한사람을 잃었으며
이고장에서 뚜어난 향토 선구자
한사람을 잃었습니다>
또한 신옥현 진천군 교육장은
<선생께서는 그동안 연구 학교 육성을 위해서
그 좋아 하시던 술까지 끊어 가시며
온갖 정열을 교육에만 바치셨으니
대패를 들면 일류 목수요
징과 뫼를 들면 일류 조각가 이요
붓을 들면 일류 도장공이요
가위를 들면 일류 전지사였으니
그 다기 다예 하신 솜씨와
불덩어리같은 교육애가
이월의 기적을 낳게 하셨으니
선생께서 작업복 차림으로
페인트통을 들고 작업을 하고 있으려며는
잡상인이 교장 선생님 어디 계시냐고 묻고 갔다니
선생의 평소 근면 하심을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조사를 했다.
재학생 대표인 신헌목 양은
<아침 일찍 저녁 늦게 교문을 들어서고 나갈 때 마다
우리는 손수 연장통을 들고
또는 페인트통을 들고 작업복 참림으로 열심히
아름다운 학교 공부 하기 좋은 학교
환경을 만드시기에 정성을 기울이시는 모습을
수 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대목에선 울음이 터졌다.
<아름다운 이층 교실을 짓기 위해
그 얼마나 애를 쓰셨는데
이토록 아름다운ㅁ 교실을 다 지어 놓으시고
새 교실에서 공부 하는 저희들을 보시지도 못하시고
왜 벌써 가셨슴니까?>
아버님은 그런 분 이셨다.
축구 승마등 만능 운동 선수이자
서예 회화 조각, 그리고 음악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계셨다.
언젠가 당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시는걸 목격 했을때
그리고 비석에 새기기 위해서 붓글씨를 쓰실때
이월 국민 학교앞에 동물 들을 조성하는걸 보았을때
(나는 죽었다 깨나도 저건 물려 받지 못할것이다)
이렇게 생각 하면서 아버님께 심한 컴프렉스를 느꼈다
지금도 술만 취하면 내가 흔히 부르는 노래
<서림산에 오른빛이....>로 시작되던
천동 국민 학교의 교가와
<취란 우거진 두태산의....>로 시작되는
초평초등학교 교가도 아버님께서 작사 작곡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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