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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그릇된 수치심에 맞서 싸우기/디모데후서 1:3-14
예전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차가 없던 시절이라 교회에 가려면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의례히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서로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자네 어디 가는가?’ ‘응 저기.’ ‘저기가 어딘가?’ ‘응 가는 데가 있어. 자넨 알 것 없어.’ 그러면서 어물쩡하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당 간다.’ 소리를 못하고 그저 ‘저기 간다.’ 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성경찬송가를 꽁꽁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 간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가기는 가야 될 것 같은데 그 사실을 떳떳이 공개하기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신앙이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성경찬송을 보란 듯이 들고 다니면서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게 떳떳이 교회 간다고 밝힐 때 그 신앙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왜 이 사람은 교회당 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을까요? 물론 신앙이 없어서 그렇겠습니다만 사회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일반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고 기독교인들이 많으면 부끄럽지 않을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남자인 입장에서는 조금 창피하게 여겨질 수 있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교회 간다고 떳떳하게 말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어느 경우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 전도사님이 이런 현실을 타개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동네 유지들을 다 초청하여서 거나한 식사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청주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함께 참석하니까 꼭 참석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네 유지들이 다 모였습니다. 충청북도 경찰국 보안과장이 온다고 하니까 파출소장이 안 올 수 없었습니다. 충청북도 교육청 국장이 온다고 하니까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안 올 수 없었습니다. 청원군수가 온다고 하니까 면장이 안 올 수 없었습니다. 청주에서 중요한 공직에 계신 기드온 협회 장로님들을 대거 초대한 것입니다. 판사도 왔고 검사도 왔습니다. 전도사님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높은 사람이 많다. 믿는 사람은 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교회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교회에 가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저-기 간다고 해야 하고 교회 다닌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신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하고 긍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을 그릇된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그릇된 수치심과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는 가운데 두 번이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8절에서 볼 수 있는데,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했습니다. 이 말은 디모데를 향하여 주님을 증언하고 주를 위하여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돌이켜 볼 때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스승이 감옥에 갇혀서 쓸쓸하게 지내고 고생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12절에 나오는데요,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향하여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스스로 나도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에 가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 그 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이 상을 받도록 힘쓰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수제자인 디모데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잘못된 부끄러움, 그릇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도 수치심을 일으키는 일들을 반복적으로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주정뱅이와 탐식가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성전 파괴자로 부르기도 했고요, 위선자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법정에서 바울은 네가 미쳤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독선적이다. 자기밖에 모른다. 조상도 모르고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다 하는 말들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수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도할 때 문도 안 열어주고 인간취급도 안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볼 때 수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신앙생활은 연약한 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놀릴 때 수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수치심은 거짓된 수치심인 줄 압니다. 수치심으로 느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이런 그릇된 수치심에 맞서서 싸워야 하고 그래서 그릇된 수치심을 벗어 버리고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긍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수치심을 벗어버리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수치심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움츠러들고 주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수치심과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주님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마지막 그 순간에 주님이 우리를 부끄럽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해서 피하신 다든지,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고 하신 다든지, 네가 나를 부끄러워했으니 이제는 네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큰 낭패입니까?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주님은 그 날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부끄러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로마 시민조차도 당하지 않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을까요? 그 분은 자신의 죄목을 목에 걸고 사람들이 쳐다보고 조롱하는 가운데 온 예루살렘 거리를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돌아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릴 때는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수치를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치를 감수하고 대신 지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자기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되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고 그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마지막에 우리도 구원대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라도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그 귀한 사명을 등한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곳에 가서는 내가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한다는 것을 숨기고 믿지 않는 자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 잘못된 수치심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수치심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긍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릇된 수치심에 맞서 싸우면서 긍지와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될 수치심을 갖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은 한 마디로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보다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에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 때문에 수치심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때로는 바울처럼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창피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어떻게 볼까? 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창피를 당하는 것이 절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우리가 그 분을 올바로 전할 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반면 우리가 겁에 질려서 침묵한다면 주님은 모욕을 당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절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옥에 갇히는 것을 나약하고 패배의 표시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관점에 더 신경을 쓰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주님을 위해 헌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을 위해 옥에 갇힌 자들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관점에 신경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각에 신경을 쓰시고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릇된 수치감에 맞서서 싸우면서 기쁨과 긍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불신앙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믿는 자를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믿는 자를 알고,’ 주님이 천지의 창조자요 천지의 주관자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 주님은 분명히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신대로 언제나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알기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먼저 모든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알기에 우리는 부끄러워할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줄 것을 믿기에 우리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앙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까? 주님이 누구인지를 자꾸만 생각하시면서 그릇된 수치심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에게 해 주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으면서 그릇된 수치심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주님께서 나의 수치심을 다 제거하여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수치심에는 앞에서 말씀드린 그릇된 수치심이 있습니다. 수치심으로 느낄 필요가 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그릇된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이 수치심과 더불어 또 하나의 수치심이 있는데 정당한 수치심입니다. 당연히 느껴야 할 수치심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혹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 정당한 수치심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분명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수치심이 우리를 괴롭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용서하시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를 하셨을 때 어떤 여자가 울면서 자신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이 여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죄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를 향하여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분명 자신의 많은 죄로 인하여 수치심을 느끼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눅 들어 살았을 것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꼭 자기한테 하는 것 같이 몸 둘 바를 모르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죄는 용서되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장래는 평안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과거를 용서하심으로 바로 지금 장래의 평안을 주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인은 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더 이상 수치심을 품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용서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치심을 느끼며 산다고 하면 그것은 죄를 용서해주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께서 그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주눅 들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주님이 다 용서하셨다는 믿음을 갖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수치심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그 수치심을 몰아내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수치심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우리를 나약하게 만듭니다. 주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러한 수치심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어떻게든지 없애버려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45:17) 또한 바울도 말했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10:11)
사람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고 모든 조롱과 비난을 퍼붓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비탄함과 감정적인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주려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 있는 줄 믿습니다. 그들은 끝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진실하고 결백하다고 밝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는 자는 어느 누구도 부끄러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수치심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