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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쥬신의 역사
쥬신 민족의 기원 - 바이칼호의 전경
우리 민족을 쥬신 민족이라 명명한다. 왜냐하면 배달민족이나 동이민족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분분하여 쥬신의 찬가에서는 이를 필자가 임의로 바로 잡고자 한다. 이에 대한 이의는 얼마든지 가증하지만 필자는 옥기시대로 대변되는 배달국이 사료가 미미하며 ㄷ공이는 참으로 좋은 뜻과 형상의 글자이나 중화인들이 경멸시하는 글자가 되었으므로 이를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여, 바이칼호를 거쳐 불함산으로 이동 정착하여 인류 최초로 튀어난 문화를 일구어 불함산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집단 정착 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BC6000년경에는 홍산문명을 이룩하고 이어서는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BC3898년에 배달나라를 세우고, 농경민족인 중화족을 제압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배달나라는 18대 1565년을 이어오다가 그 뒤를 이어 지위리환인 그 사위인 만인중의 인걸인 단군왕검을 내세워 쥬신국이 세워졌다.
-단군쥬신은 아사달을 도읍으로 제국을 형성한 후 다시 신진쥬신을 중심으로 마쥬신과 번쥬신의 세 단군이 넓은 지역을 나누어 신정을 실시했다.
-단군쥬신이 나약해지매 해모수의 부여와 동명왕의 가우리를 함께 계승한 고두막루칸이 제국을 아우르고 졸본부여를 일으켰다.
-부여가 일어나면서 제국의 권위가 크게 떨어져 지방 세력이 성장하였다. BC3세기경에는 황하 상류에 살던 동호족의 한 갈래가 흉노에 밀려 남하하였고, BC57년에 서울에 터를 잡아 나라를 세웠다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라(新羅)이다. 신라는 나중에 힘이 쇠퇴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오늘날 경주인 서라벌로 쫓겨갔다.
-BC37년에는 졸본부여에서 성장한 추모(고주몽)가 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지방에 이르러 가우리(고구려)국을 건국하고 그 나라가 점점 커져서 북만주 일대를 모두 다 통일하였다. 고주몽이 나라를 건국하고 나서 그를 도와 가우리를 세웠던 동료중의 한 사람인 가우리 건국공신 협보가 뜻을 세우고 일본지역으로 달아나 최초의 섬나라 다파라국을 일본지역에 세웠다.
-백제는 가우리 건국 과정에서 배신감을 느낀 황비 소서노와 그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가우리를 탈출하여 비류지역에서 세운 나라이다. 이후 백제는 요서 지역으로 옮겼다가 반도백제인 충청남도 아산 지역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온조가 독립하여 십제라 불리우는 한성백제를 건국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십제 즉 온조가 건국한 나라는 백제의 아우 나라이다.
-아산에 정착한 반도백제(비류백제)는 요서, 산동, 일본 지역을 포함한 넓은 해상 제국을 세우고 해상제해권을 누리며 각지에 담로를 두어 다스렸다.
-가우리(고구려)의 제국 통일로 중앙 정권에서 밀려난 옛 쥬신의 중신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한반도 남부로 밀려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문물이 뛰어나서 철기시대를 크게 발전시킨 이들로 김해를 중신으로 하여 경상남도에 6가야 연맹을 성립시켰다.
-가야가 신 영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일본 진출의 교두보로 설치한 것이 이른바 임나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왜곡시킨 임나의 본뜻을 잊지 말고 알아야 할 것이다. 임나는 우리말로는 참고 견딘다는 뜻이고 일본의 입장에서 정직하게 해석하면 주군이 있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가야가 일본에 진출하자 이후 앞을 다투어 백제 가우리 신라가 일본으로 진출했다. 가야 계통인 가라, 아라, 신라계통인 무라, 백제 계통인 곰, 담로 등과 관련이 있는 일본의 지명들은 모두 이 시기에 개척된 곳이다.
-비류백제가 일본 지역 통치 과정에서 백제 황통의 계승을 위해 전 담로를 제압하고 세운 나라가 바로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천황 국가이다. 이때의 토벌장군인 경진주는 백제의 대장군이었으며 천황 선선저도 백제에서 파견된 백제 황족이었다.
-신무왕은 현지처를 취한 선선저 황자를 대신해 백제에서 보낸 새로운 천황으로서 일본열도 동부정벌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안정시켰다.
-신라 왕자 천일창의 일본열도 공략 이후 혼슈 지방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 간의 다툼이 격화되었다. 그런데 가우리도 곰벌을 근거로 세력다툼에 뛰어들어 일본열도가 전화에 휩싸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제는 경행왕을 파견하였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신라에 망한 마한 유민의 왜 열도 이주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세오녀가 바로 비미호이고 그 딸이 신공 여왕이다.
-해상 제국을 이루었던 비류백제는 대가우리의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본국 곰나루를 빼앗기고 일본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왕이 일본의 응신천황이다. 응신은 나라백제를 세우고 그곳을 중심으로 본국의 곰나루백제를 지배하였다.
-곰나루백제의 혼란을 틈타 신라는 왜 열도에서 세력 만회하려고 했다. 이 때 신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본의 개혁이 이른바 다이카 개신이다.
-부여 천도 후 내정을 정비한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자, 신라는 가우리의 중원 통일을 위한 전 민족적 협력 제의를 물리치고 당과 야합하여 결국 백제를 멸망시켰다.
-본국 백제의 멸망을 본 나라백제는 전 국력을 동원해 본국의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파견군과 본국 홍기군과 불화가 있어 부흥전쟁이 실패하였다.
-백제 멸망 후 당은 중국인의 숙원인 가우리 정벌을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가우리를 침입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가우리의 강력한 힘에 막혀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던 것이다.
-가우리는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권좌에서 밀려난 남생이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어이없게 자멸하고 말았다.
-쥬신의 전통을 계승한 가우리는 이 때 우리 민족 관련 기록들을 민족 보호 차원에서 모두 소각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그 후의 우리 역사가 크게 왜곡되었다.
-가우리 자멸 후 그 유장인 대조영, 이진충 등이 협력하여 당에 대항하면서 민족 부흥을 내걸고 대진국을 건국하였다. 대진국은 그 영토와 건국 정신에서 가우리 계승 정신을 뚜렷이 하였다.
대씨 가우리 건국
-AD699년 대중상 황제에 이어 황위에 오른 대조영은 이 해에 개원하여 천통이라고 국호를 대진국이라 하였다.
-옛 가우리를 이끌던 고씨들이 적극적으로 새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대씨가우리는 곧 안정을 찾게 되었으나 북국의 강력한 흑수부와의 협상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천 년에 걸친 부여족(고씨가우리)에 대한 원한으로 흑수부가 새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까닭이었다.
-대조영은 조각을 단행하고 태자 대무예를 보내 당과 상호 승인 협정을 맺은 뒤 황제의 외삼촌인 대무예를 주당 초대 대사로 파견하였다.
-AD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대무예가 제위에 올랐다. 모든 이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 하였으나 제위를 노리던 대문예는 역모를 꾀했고 이에 실패하자 당으로 달아났다. 이 와중에 역모에 연루되어 흑수부의 대칸 예속리기가 처형되므로 어렵게 민족 통일이 달성될 수 있었다.
대당 징벌 전쟁
-당에 대한 징벌전을 벌이기에 앞서 대무예는 당의 동맹국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인의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동맹을 맺었다. 장문휴를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당조의 목을 조여 가던 중 신라의 이적 행위로 인하여 눈물을 머금고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장문휴는 산동지구의 가우리 유민들로 등주군을 조직하고 산동을 중심으로 한 점령 지구를 지키게 하였다. 이적 행의를 일으킨 신라군을 무참하게 섬멸하였다.
세종광성 문황제
-AD737년, 대흠무가 제 4대 제위에 등극하였다. 대흠무는 문치에 힘써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거란인 안록산을 사주하여 대당 분쇄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AD756년부터 시작된 대연국의 거듭된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이적치적 작전을 세워 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안록산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국을 세운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동이의 고지 산동 반도
-산동 반도는 동이족과 화산족의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흠무는 이정기를 요양황으로 봉하고 등주에 대가우리의 대표부를 설치하였다. 이정기는 산동 반도를 완전히 통일하고 당의 대동방 무역을 독점하였다. 대가우리와 교역이 늘어나 양국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반면 당은 이정기의 자비심에 의존해야 하는 비참한 상태에 놓였다.
이 시기 대가우리와 일본과의 무역도 대단히 활발하였으며 일본의 급격한 문화발전은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대가우리 대표부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나라로 개명하였다. 제나라의 제4대 이사도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당의 동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또한 신라의 이적 행위와 이사도가 피살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제나라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말았다. 모처럼 다물(多勿: 고토회복운동)했던 불쥬신의 청구땅(산동지구)은 다시 화산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동경천도와 대원의의 난
-그러면 제나라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던 대진국의 속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미 노령에 접어든 대흠무 황제는 당 토멸에 가장 큰 장애물인 신라를 제거하기 위해 남쪽 국경의 동경성으로 천도하고 남정군을 조직하여 대원의를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흠무 황제가 쓰러지자 대원의와 황자들 사이에 또 다시 황위쟁탈전이 벌어져 제나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황권은 막내 황자인 대숭린에게 돌아갔다.
불쥬신의 후예들
AD872년 부여족으로 구성된 거란 세라부에서 거란의 대영웅 야루철리지가 태어났다. AD901년 이리근(군사령관)에 오른 야루철리지는 AD906년 마침내 대망의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를 국부 즉 아버지(중국 발음으로 아보지)라 불렀다. 거란 전통의 3년 질립제를 해제하고 거란 제부를 완전히 통일한 아버지는 마침내 AD916년 황제위에 올라 대진국 정벌에 진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황숙 할저와 그의 두 아들이 대진국으로 거짓 망명하였고 황위를 노리는 대진국의 정보부장 대소현과 밀약을 맺은 뒤 돌아왔다.
대씨 진국 제국의 최후
AD925년 12월 아버지 황제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대진국 원정길에 올랐다. 거란군은 대소현의 안내로 진국의 요새들을 교묘히 우회하여 전광석화 같이 도성인 홀한성을 공략 대진국을 멸하고 동단국을 세웠다. 그러나 대진국의 각 지방군들이 기병하기 시작하여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한창 전쟁 중 격무에 시달려 아버지 황제가 죽자 태자이며 동단국의 왕인 인황왕과 거란의 병권을 쥐고 있던 둘째 황자 요골사이에 치열한 황위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 인황왕은 대진국 다물군의 공격목표가 홀한성임을 깨닫고 요양으로 천도하면서 홀한성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왕씨 가우리의 천하통일
AD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호족들과의 정략적 결혼 정책을 통해 국력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또 대가우리가 망하면서 망명해온 유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국력을 키워나갔다. 이때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후 백제의 견훤이 왕자 신검 등에게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여 왔다. 또 신왕 김부가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의탁하였다. 왕건은 나머지 신검군을 섬멸하고 AD963년 마침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대김(金) 제국
시조 김함보로 부터 시작된 김나라는 왕씨 가우리 및 대요제국(거란)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다. AD1115년 정월 김아구타는 황위에 올라 국명을 대김제국이라 하였다. 대김제국이 대요제국과 최후의 승부를 겨루어 승리함으로써 천하의 주인 자리는 불쥬신계에서 다시 신쥬신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국력이 강력했던 동이의 제국 김나라는 AD1234년 몽골(원)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나약한 세습왕의 친정체제로 돌입함으로써 결국 출육환도하게 되었다. 이때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은 출육환도에 반대하고 왕족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여 반몽 정권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려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려몽 연합군은 AD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몽골의 요청에 따라 고려는 기꺼이 응해야 했다.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일본 원정은 일본 일대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는 해안을 자주 침입하던 왜구 토벌하는 잇점도 얻을 수 있었으니 아주 허망한 전쟁만은 아니었다.
최무선
두 차례에 걸친 해적 소탕전으로 일시 주춤했던 왜구들이 다시 고려 해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AD1334년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고 일본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내전에 돌입하여 왜의 백성들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도적떼가 되어 고려의 해안을 침입했다.
최무선은 왜구들을 바다에서 원천 봉쇄하고자 화약과 화포 발명에 진력하여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AD1389년 박위는 전선 1백여 척을 이끌고 나아가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이성계의 혁명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한족들이 몽고를 몰아내고 명을 건국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는 옛 땅 회복이라는 고려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급기야 고려는 AD1388년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정벌 철회를 주장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고야 말았다.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이성계는 문신을 우대하였고 그 결과 조선의 군사력은 점차 무력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아버지의 화약 제조법을 더욱 개량 발전시켜 훗날 이순신 함대를 통해 그 위력을 증명하게 된다.
조선 해군과 이순신 장군
조선은 한동안 태평세월을 맞이하자 당파싸움을 일삼았다. 반면 일본은 AD1460년 영주들 간의 혈전이 시작되어 약 120년간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계속 되었다. AD1536년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성장하여 전국을 통일하고 시야를 밖으로 돌렸다.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정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의 진술이 엇갈려 설왕설래하다가 조선은 결국 AD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장군의 혁혁한 해상재헤ㅐ권을 가지므로 왜적을 막아내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건져 내었다.
*위대한 배달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쥬신국은 배달국 제18세 커붉단한웅 [倍達國 第18世 居弗檀 天皇]이 사위인 왕검 단군에게 나라를 양여함으로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이 탄생하였다.
-배달국 개천(開天)후 역년 1518년: B.C 2380년, 거불단(커불단 또는 커붉단) 태자는 배달국 제18세 한웅으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 동안 배달국[倍達桓國-밝달한국]은 천해(天海-바이칼호)로부터 동쪽으로 옮겨와 �류호로 부터 영고탑 까지 드넓은 북만주를 정복하며 정착에 성공하였다. 또 중국 산동성 일대에 대한 중화족들과의 마찰도 여러번 있었으나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거불단 한웅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정책을 바꾸어 서서히 남만주(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와 함경도일대)일대를 욕심내기 시작하였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남만주일대는 기마민족이 서쪽으로부터 이동하여오기 훨씬 전부터 먼저 정착하여 살고 있던 농경토족(農耕土族)들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의 고기(古記)에 보이는 웅족(熊族)이다.
-웅족의 웅(熊)자는 곰이라는 뜻인데 이 글자는 우리의 옛말로 지신(地神)을 의미하는 선택적인 글자이므로 웅족(熊族)은 곰족이 아니라 감족이라고 발음한 듯하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해 보이는 이들 호족과 웅족 간의 결합은 새로 침략해 온 배달국족은 하느님을 부모로 하는 천손족(天孫族)과 토착세력인 농경토족을 지신족(地神族)으로 하여 하늘과 땅이 절묘하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웅족의 이웃에 또 하나의 종족이 보이는데 고기(古記)는 이들을 호(虎)족이라고 쓰고 있다. 호(虎)는 호랑이를 뜻하므로 상대적인 곰(熊)족과 분쟁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虎)족과의 싸움에서 밀리게 된 웅족은 북쪽의 강국(强國)인 배달국과 협상을 제의하여 웅족의 공주를 거불단한웅에게 시집보내어 동맹을 한다. 이에 거불단한웅은 지신(地神)의 지위에 있는 녀(巫女)를 황후(皇后)로 맞아들이고 동맹을 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웅족을 위기에서 구해냈다고 본다.
-이리하여 배달국의 황후가 된 웅녀황비는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시조(始祖)가 되실 단군성조(檀君聖祖)를 탄생케 하였다.
*단군왕검의 면모
-옛 기록에 의하면 ‘왕검은 덕망(德望)이 천인(天人)과 같아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의 나이 14살 때 임검 웅씨(熊氏)왕이 그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그를 부왕(副王, 裨王)으로 삼아 임검을 대신하여 나라 일을 행하게 하였다.’
-웅녀황비(熊女皇妃)는 단군성상(檀君聖上)의 나이가 14살에 이르자 이제는 제왕이 될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황자(皇子)를 배달족의 나라로 보내어 이미 늙고 기력을 잃은 친정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이끌도록 하였다.
-단군(檀君)께서는 무려 24년 동안 배달족의 나라를 통치했는데 그 동안 늙은 외조부(外祖父)가 죽자 나라의 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나라를 일약 강국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이와 같은 사적을 단군세기(檀君世紀)의 기록에 의하면 ‘개천 1565년, 상달(上月-10月)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임검(壬儉)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檀木)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
-4천여 년 전 단군왕검의 나라는 청동기 문명이 기반이고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비파형 청동검과 고인돌이 있다.
-고조선은 특별한 부침은 없었으며 주변의 여러 세력과 싸웠으나 말기에 서쪽에서 온 연나라 왕족의 후손 위만이 세력을 확장하며 지배권을 차지한 것 같다. 그 후부터 위만조선이라고 하는데 위만의 경우 중국인이라기 보다는 쥬신계의 사람이 중원 쪽에서 재유입된 것 같다. 위만조선은 오래가지 못하고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와 싸우다 멸망했다.
뼈대 있는 우리나라
배달국 아는가? 신시를 아는가? 대쥬신제국을 아는가?
그 나라 이름은 밝땅. 밝달. 배달. 조선으로 밝은 동산이란 말이라네.
桓國 桓因 桓雄은 밝고 밝은 동방에 빛 태양을 상징한 숭고한 뜻이라네.
한님 하느님 하늘님 한울님 하나님도 일성 천신을 표현하는 우리말이라네.
밝음은 배이고 달은 동산이니 우리의 에덴이 삼위테베에 세운 배달국이라네.
*倍達國(배달국): 한국 다음의 나라로 신시에 도읍했기에 신시시대라고도 함.
*삼위테베(백두산 부근): 참 어려운 것이 역사이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기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명을 두고 수많은 고증이 필요하니 독자여러분의 이해를 청하는 바이다. 예를 들면 불경의 경우만 보더라도 석가 입적 후 500년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모여 결집을 통해 기록물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는가. 마치 필자가 지금 나의 조상이신 태종의 2자 효령대군의 5자 원천군의 행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하여서 도리 없이 눈에 보이는 것과 풍속으로 전해 오는 것과 언어 속에 묻어 있는 것들을 통하여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여러분에게 죄송하지만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선의 뿌리에 해당되는 역사로서 한웅과 단군이 함께 나오는 장면을 표현하면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이라는 말에서 '太白'을 '太伯'이라고도 쓴다. 이 "三危太白/伯"을 한결같이 "삼위산"과 "태백산"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이를 백두산 이라 고도 말하니 백두산은 아주 뒷날 나타나는 지명일 뿐이다. 아무튼 이 '三危太白/伯'을 두 개의 산으로 풀이하면 단군이 신단수에 내려온 곳이 거리가 너무 서로 멀어 어떤 행위를 할 적에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한 곳으로 모아서 이야기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三危'가 꾸밈의 말이거나, 고유명사라면 '太白/伯'이 그냥 '산/메'여야 한다. 고유명사로 볼 때에 '危'는 '峗'[魚爲切 虞爲切][위] 이며, 이 '三危/峗'는 신강성과 감숙성 근방의 돈황 남쪽에 있는 산일 것이다.
이 '三危'는 그 뜻으로 보면 소덕(小德)/재하(才下)/무공(無功)이니 덕이 없고, 재능이 형편없고, 공적이 없는 사람이 공직에 있음을 말한다. 이런 말과 뜻으로는 산의 이름에 쓰기에 부적절하다. 또 다른 말로는 '봉래/영주/방장/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것도 전설상의 산이며 부상국에 있다고 말하니 산동성에 있는 어느 산들일지도 모르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흑수(黑水)가 발원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분명 천산산맥의 동북쪽 끝과 알타이산맥의 서북쪽 끝에서 만나는 오브(Ob)강의 샛강 이르티슈강을 흑수라고 본다면 그 삼위산은 3개의 높은 산으로서 천산(음산)과 알타이산(금산)과 샤얀산 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는 역사상 나타나는 지명을 들어 이야기했으니 소리로 풀어낸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먼저 홍익인간, 즉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높은 산일 것이다. 천산/설산/백산이든 알타이산이든 그런 높은 곳을 올라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말이 맞지 않다. 오히려 넓은 벌판이어야 백성들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곡식을 심어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太白/伯'[태백]은 '벌판/언덕'의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 에덴동산과 같은 성질의 곳이어야 할 것이다. 하여서 '太白/伯'[태백]을 비슷한 소리와 뜻으로 페르시아아서는 'tappe'라는 말이 있고, 터키[투르크]에서는 'tepe'가 있고,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에서는 'tepe?' 또는 'tepec'이 있다. 모두 '언덕[hill]'과 '산(mountain)'의 뜻이 함께 있다. 특히 'tepe?' 또는 'tepec'은 우리말의 [태백]과 매우 비슷한 소리이다. 그들은 [테베][테벡]라고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아마도 쥬신의 부여어나 고구려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三危/峗'[삼위]를 소리로 풀어봐야 하겠다. 우리는 [삼위]라고 한자에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현재 중국어로 [samwei]는 우리가 말하는 [samui]와 비슷하다. 이 'samui'에 'i'의 탈락과 구르는 소리의 'r'의 삽입으로 그 소리가 'samur'가 되었으며, 프랑스어로 'samour'로 적었을 것이다. [사무르]>[사무]>[삼우]>[삼위]로서의 소리의 변화는 가능하다고 본다. 이 'Samur/Samour' 강이 있다.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 코카서스 산맥의 동쪽 줄기로서 바자르뒤쥐(Barzardiouziou) 산의 북쪽에서 흘러 카스피 해로 들어간 강이다.
그런데 이 'Samur/Samour'라는 소리는 '三危/峗'[삼위]에서 페르시아어로 보면 아마도 sana'[se/nun/alef/he>sna']로서 '사뇌/칭찬/찬미/찬사'에서 유래했거나, 'sani'[sad/nun/ye/ein>sni']로서 '은혜/선행/능수능란한'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이것은 천하의 중앙에 있는 산이라는 곳으로서 한자로 숭산(嵩山/崇山/崧山)과 같은 뜻이다. 이 '崧'자가 '고려산'이라고 <옥편>에 나와 있다. 그래서 삼위산이 천산/금산/샤얀산을 가리키든, Samur 강이 있는 곳의 산을 가리키든, 한반도와는 상관이 없는 중앙아시아이며 쥬신의 터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태백'을 '삼위산과 태백산'으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삼위 테베' 또는 그냥 '삼위산'이라고 하거나, '삼위벌/벌판'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니 뒷사람들은 백두산을 신시의 땅이라 고집하지 말고 삼위테베를 연구하기 바란다.
*신시: 배달국의 도읍지로 삼위테베에 있었다. 필자는 테베를 동산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