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경(秋水鏡) 장군 묘역
-전북 기념물 제94호-
*소재지 : 전북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103
秋水鏡 선생은 1529년에 태어나 1600년(선조 33년)에 죽었다. 자(字) : 청하호 (號) : 세심당(洗心堂)이다.
수경은 오현군 성덕산 칠성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에(才藝)가 뛰어나고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그의 나의 1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1591년(선조 24년)에는 중국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使)가 되었다.
그가 무강자사가 된 다음 해인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되자 그는 당시 명나라 구원병 이여송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봉양사>
그는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그동안 통솔하고 있던 무강병사 5만명을 이끌고 1592년
12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당시 왜적의 진지가 있던 곽산의 적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싸움에서 왜적에게 패하게 되자 개성으로 들어가 구원병을 청하고 흩어진 병사를 다시
규합하여 당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진주성으로 갔다.
그런데 진주성 전투에서 당시 조선군 지휘자 황진이 전사하고 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그는 왜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다시 전투지를 동래로 옮겼다.
그는 동래로 군대를 진격시켜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목을 마치 마대를 자르듯이 베었다.
그는 일찍이 그의 다섯 아들에게 훈계하기를(只願孝忠一代臣:다만 바라건대 효도와 충성을 하는 일대의
신하가 되라.)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다섯 아들은 아버지 수경의 훈계를 지켰던 것이다.
그는 임진·정유 양 왜란이 끝나고 비교적 평온을 되찾게 되었던 1600년(선조 33년) 전주로 돌아와 그 해 9월
9일 그의 나이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당시 정부는 그의 상례에 필요한 물품과 제물을 준비하여 보내고 이정란
(李廷鸞) 장군으로 하여금 상례를 성대히 치르게 하였다.
한편 조정은 그에게 정란공신의 훈을 내리게 하였다.
추수경(秋水鏡) 장군 묘역
이곳은 명나라의 장군 추수경(1530~1600)의 묘역과 장군의 영정을 모신 봉양사이다.
추수경 장군은 임진왜란(1592) 때 용호별군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 선조 25년(1592) 12월에 참전하여
아들 노. 적 형제를 선봉장으로 세워 곽산을 수복하고 평양, 개성, 한양, 동래에서 대승을 거둔 후 전주에
주든하였다.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자 장군은 전주방어에 사력을 다하던 중 안덕원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선조 33년
9월에 71세의 일기로 이 땅에서 순국하였다.
추수경 장군은 명심보감을 펴낸 고려조의 재상 추적의 7세손이며, 명나라 건국공신의 호부상서 추유의 5세
손으로 시호를 충장공이라 내리고 완산부원군이 증작되었으며, 호상공신으로 추서 되었다.
장군은 명나라 군사들이 환국할때 조상의 나라에 남기로 하고 전투에 참가한 5명의 아들과 함께 전주 북쪽
40리인이 곳 추동마을에 정착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묘역이 훼손되었다고 전하며, 봉양사는 2004년 11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가 죽은 뒤 다섯 아들들이 그의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를때까지 까치 한 쌍이 그의 묘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또한 호랑이 두 마리가 매일밤 여막을 지켜 주었고 여막 앞 땅에 있던 복숭아와 오얏나무
에 꽃이 3년상을 마칠때까지 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그의 묘는 완주군 소양면 만덕산에 있다.
그의 묘소 옆에는 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문의 내용은 전가선대부궁내부부첨사
(前嘉善大夫宮內府副詹事) 김병길이 글을 짓고, 글씨는 전숭록대부행이조판서원임규장각
(前崇祿大夫行吏曹判書原任奎章閣) 윤용구가 썼으며, 비석의 뒤부분의 전서는 가선대부전향산수
(嘉善大夫前香山守) 윤영구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