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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폴란드 기에트르츠바울드의 성모발현:
우리들의 성모님[바티칸 공인]
기에트르츠발데의 위치와 역사
기에트르츠바울드(Gietrzwald)는 기에트르츠바울드 주 수도이며,
비에살(Biesal) 기차역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폴란드 북쪽 올스친(Olsztyn)과 오스트로다(Ostroda) 사이에 있다.
빙하시대에 형성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다양한 지형, 막대하고 풍부한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호수와 강은 가장 중요한 자연자원에 행당한다.
기에트르츠바울드가 자리 잡고 있는 기와브스카강은
파스웨카강의 오른쪽 지류에 해당한다.
마을을 설립한 디트리히(Dietrich)가
마을 이름을 디트리히스바왈드 라고 명명했다.
기에트르츠바울드 마을의 설립을 위한 헌장이 공표된 후,
나무로 지은 예배당을 세웠으며
얀 스테르첸 신부(Father Jan Sterchen)가 이 마을에서 사목활동을 수행했다.
1455년 예르치 폰 슐리에벤이 이끄는 '튜턴 족 기사단'이 마을을 침공했으며,
전쟁 중에 마을과 예배당이 모두 파괴되었다.
16세기 중엽까지 안정된 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학교 하나와 여관 하나가 있었다.
여관 주인 예르치 쿠니그는 1645년까지 이 여관을 소유했다.
1783년 이 마을에는 전부 57개의 가옥이 있었으며
1807년 이 마을을 침공한 프랑스 군대는
철저하게 약탈하여 쑥대밭은 만들어 버렸다.
기에트르츠 바울드의 나무로 지은 첫 번째 교회는 1352년에 세워졌으며
1500년에 고딕식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1568년 성모 마리아의 탄생지 베들레헴에 헌정되었다.
기에드르츠바울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폴란드 왕국이 러시아와 프러시아 및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던
1877년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모발현
1877년 6월 27일과 1877년 9월 16일까지 성모 마리아는
당시 13세인 유스티냐 차프린스카와
당시 12세인 바르바라 사무로프스카에게 발현했다.
6월 27일 유스타냐는 첫 번째 영성체를 하기 위한 시험을 본 후
엄마와 함께 교회를 막 떠나고 있었으며,
바로 그때 종탑의 종이 울리면서 '삼종기도'(Angelus) 소리가 들려왔다.
유스티냐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단풍나무 위로 밝은 광채를 보았으며
한 아름다운 부인이 아기를 안고
천사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인 6월 28일 유스티냐는 친구 바르바라와 함께
바로 그 자리를 찾아와 로사리오 기도를 암송했으며
성모 마리아가 이 두 소녀 앞에 발현했다.
이러한 발현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날마다 계속되었다.
1877년 6월 30일 성모 마리아는 폴란드어로
"너희들이 날마다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단다" 라고 말했다.
폴란드어로 말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당시에 폴란드가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7월 1일
"나는 원죄 없이 잉태한 가장 복된 마리아다" 라고 알려주었다.
그 이후부터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두 소녀들과 합류했으며,
그들 중 몇몇은 투옥된 사제들, 실종자들,
그리고 폴란드의 자유에 대해 여쭈었다.
다른 이들은 병자들의 치유 특히 알코올 중독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성모 마리아는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암송하기 바란다.
너희 모두의 기도 덕분으로 사제들은 석방될 것이고
병자들은 완쾌될 것이며
폴란드는 독립을 되찾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아울러 성모님은 자신이 발현한 바로 그 장소에
'원죄 없이 잉태한 자'의 동상과 함께
교회를 지을 것을 신자들에게 부탁했다.
아울러 숲의 가장자리에 샘물을 축복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신자들에게 기적의 물을 마시라고 격려했다.
당시 프러시아(독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 나뉘어졌던 폴란드는
기에트르츠바울드를 기점으로 재통일되어
다시 한 번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성모발현의 역사
1352년 5월 19일 : 기에트르츠바울드 마을을 설립한 디트리히(Dietrich)는
마을 이름을 처음에는 디트리히스바울드라고 했다.
이 마을의 설립을 위한 헌장 공표 후, 나무로 지은 예배당을 세웠으며
얀 스테르첸 신부가 이 마을에서 사목활동을 수행했다.
15세기 : 초석을 놓아 기반을 다진 부지 위에 회랑이 없는 성지를 마련했다.
1500년 : 부주교 얀 발데가 성모 마리아 탄생지를 위한 기도와 함께 성지를 봉헌했다.
1790년 : 주교 이그냐치 크라식키가 성 요한 사도 및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 등 새로운 명칭을 교회에 부여했다.
19세기 : 교구 사제 요제프 요르단이
교회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기반과 벽을 강화했다.
이전의 직사각형 모습의 성지를 현재의 가톨릭 십자가 모습으로 변경했다.
종전의 나무로 된 탑을 허물고 고딕 양식의 벽돌 탑을 세웠다.
교회의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고 탑에는 판금을 입혔다.
1877년 6월 27일 : 유스티냐가 첫 영성체를 위한 시험을 마친 후
엄마와 함께 집으로 오던 중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1877년 6월 28일 : 유스티냐의 친구 바르바라 사무로프스카 역시
로사리오 기도를 암송하고 있던 중에
교회 앞 단풍나무 위에 천사들에 둘러싸여
아기 예수를 안고 옥좌에 앉아 있는 '빛나는 부인'을 목격했다.
두 소녀들은 "누구세요?" 라고 물었으며 그 부인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가장 복된 마리아다" 라고 일러주었다.
"하느님의 어머니, 무엇을 원하세요?" 라고 다시 묻자
"너희들이 날마다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단다" 라고 말했다.
1877년 6월 30일 : 유스티냐가 "성모님, 무엇을 바라세요?" 라고 물었을 때,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은 네가 로사리오 기도를
날마다 바치는 것이다" 라는 답변을 들었다.
1877년 7월 1일: 바로 이날 기에트르츠바울드 교구의 어린이들은 첫 영성체를 했다.
첫 영성체를 한 유스티냐가 단풍나무 아래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면서
"누구세요?" 라고 묻자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한 가장 성스러운 성모 마리아다"라고 말했다.
1877년 월 3일 : 두 소녀들은 성모님께
"아픈 사람들이 여기에 오면 치유될 수 있나요?" 라고 묻자
성모님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며
그런 다음에 아픈 사람들은 치유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픈 사람들에게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도록 알려주라" 라고 일러주었다.
1877년 7월 10일 : 잡지 <순례자 Pielgzym>는
기에트르츠바울드의 성모발현을 1년 전인 1876년에 있었던
마르핀겐(Marpingen)의 성모발현과 처음으로 비교했다.
1877년 7월 28일 : "누군가가 거짓 맹세를 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라는 질문에
성모님은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으며
그런 사람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그렇게 한다" 라고 말했다.
1877년 8월 1일 : 바르바라가
"버려진 교구에서도 조만간에 사제를 모셔올 수 있나요?" 라고 묻자,
성모님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한다면, 그때에 교회는 박해 받지 않게 될 것이고
버려진 교구에서도 사제를 모실 수 있단다" 라고 말했다.
1877년 9월 8일 : 저녁 7시 경 성모님은 샘물을 축복하면서
"이제 병자들은 치유를 위해 이 물을 마실 수 있다" 라고 말했다.
그 이후부터 순례자들은 치유의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1877년 9월 16일 : 저녁 5시경 성모님은
작은 교회에 자신의 모습을 그린 성화를 배치할 때 축복해 주었으며,
그런 다음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축복해 주었다.
마지막에 "열심히 로사리오 기도를 바쳐라!" 라고 말했다.
교구의 관리관 겸 주교 필리프 크레멘츠(Bishop Filip Krementz)는
성모발현 증거를 기록하고 순례자들과 사제의 관찰을 수집하고
해당 교구의 사제에게 구체적인 보고를 지시하는 한편
성모발현 과정에서 목격자들의 상태와 행동을 파악하기 위해
대표단을 기에트르츠바울드로 파견했다.
1877년 9월 16일 : 마지막 성모발현이 있었다.
1878년 : 성모발현의 정당성을 규명한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보고받은 후,
주교 필리프 크레멘츠는 신부 프란치스체크 히플러가 연구한 내용을
"기에트르츠바울드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나타난 성모발현: 공식문서를 바탕으로"
(The Apparitions of Our Lady in Gietrzwald to the Catholic People
According to the Official Documents)
라는 제목으로 독일어와 폴란드어로 출판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주교의 대표단에서는 성모발현이 거짓이 아니라는 점,
목격자인 두 소녀들 역시 정상적으로 행동했다는 점 등을 확인했다.
또한 이 두 소녀들은 이득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겸손하고 진실하며 순수했다고 보고했다.
1927년 9월 18일 : 성모발현 50주년을 맞아
수많은 순례자들이 기에트르츠바울드로 몰려왔다.
'바르샤바 신기록 사무국'의 집계를 보면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폴란드 전역에서 왔다.
1945년 : '라테란회'(Order of Canons Regular of the Lateran)가
성지의 관리를 맡았다.
1967년 9월 10일 : 성모발현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교황 바오로 6세의 칙명으로
C. 보우틸라(C. Wojtyla -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폴란드 수석 추기경 스테판 비스진스키가 성지를 방문했으며
수석 추기경은 기적의 이콘에게 왕관을 수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저희들은 당신 성전에 황금 왕관을 수여하나이다.
'바르미안 땅'(Warmian Land)의 성모님이시여,
어머니이신 당신께서는 이 땅을 통치하실 수 있나이다.
저희들 모두는 폴란드 평화와 단합정신을 부여해 주신
당신의 모정어린 헌신에 전적으로 전념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당신 앞에 무릎을 꿇나이다.
지고하신 주님의 복음말씀, 하느님과 백성에 대한 애정,
충만한 애정의 모든 요구에 저희들이 언제나 순종할 수 있도록
당신께서 저희들 모두를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돌보시고, 언제나 받아주시고, 언제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저희들은 언제 어느 때든 당신께 올 수 있기를 바라나이다."
동시에 교황청에서는 폴란드 바르미아 교구에서 9월 8일
특별한 미사 고유문'과 '성무일도서'와 함께
'기에트르츠바울드에 있는 교회를 소바실리카 수준으로 승격시켰다.
1977년 9월 112일 : 에트르츠바울드 성모발현 100주년을 맞아
추기경 카롤 보유틸라 위원장과 '폴란드 주교회의' 대표단을 비롯해
수많은 신자들이 모였다. 추기경은 이렇게 기도했다.
"기억 하소서. 복되신 성모 마리아여,
당신의 모정어린 친절에 의탁했던 어느 누구도
실망했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나이다."
"따라서 당신 가슴의 호소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저희들은
당신의 종이자 저희들의 수석주교의 건강을
당신의 관대한 양손에 의탁하나이다.
수석주교의 충성과 헌신을 굽어 살피소서.
수석주교는 사제이자 주교로서 수년 동안 당신께 봉사했나이다.
수석주교가 건강을 회복하여 쳉스토호바(Czestochowa)의 성모
바실리카 축제가 개최되는 바로 그날에 당신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수년 동안 폴란드의 교회를 이끌 수 있게 하소서."
너무 아파서 축제 개최 당일에 참석할 수 없었던
수석주교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축제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바르미안의 주교 요제프 드르자즈가는
기에트르츠바울드의 성모발현에 대한 헌신이
기독교적인 믿음과 윤리에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승인하는 한편
기적적이고 신성한 발현사건의 본질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현재의 성지]
제대 위 성모상은 16세기에 제작되었고,
7월 27일은 성모발현 기념일이다.
기에트르츠바울드는 마을 전체가 순례지로 되었다.
해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모 마리아의 성화와 기적의 샘을 찾아 성지를 방문하고 있다.
[메시지]
다양한 사람들의 건강과 구원에 관련되는 수많은 질문 중에서도
두 소녀들 또한 다음과 같은 것을 물었다.
"폴란드 왕국에서의 교회는 자유롭게 되나요?"
"남부 바르미아에 있는 버려진 교구에서도
조만간에 사제를 모셔올 수 있나요?"
그러자 소녀들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한다면, 그때에 교회는 박해 받지 않게 될 것이고
버려진 교구에서도 사제를 모실 수 있단다."
이와 같은 질문들은 폴란드 왕국이 1863년 1월 이후부터
제정 러시아의 지배로 가톨릭교회가 억압받게 됨으로써 입증되었다.
그 당시 제정 러시아는 '문화투쟁'(Kulturkampf, 비스마르크 시대에
1972년 부터 1986년까지 15년 동안 지속된 독일정부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투쟁) 기간에 분할된 폴란드의 프러시아 구역에서
그 영향력의 상승과 제재로 폴란드 왕국을 억압하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답변은 폴란드인들에게 위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모든 지역에서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기에트르츠바울드를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프러시아 당국에서는 즉각적으로
성모발현에 대해 단호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방 행정부, 독일신문, 일부 사제들은 주교 얀 오브락(Bishop Jan Oblak)을 중심으로
성모발현이 정치적 명분, 폴란드의 전국적 시위, 기만 및 미신이자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발전 및 공안에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폴란드 순례자들, 폴란드 신부들,
지역 교구의 사제 아우구스틴 바이치셀 신부에게 다양한 형벌을 가했다.
이러한 형벌에는 투옥, 벌금부과 및 봉사활동의 중단 등이 포함되었다.
[기적과 징표1]
바르미아 성모발현의 충격은 대단했으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윤리생활의 재탄생과
신자들의 인식의 고양이었다는 점이다.
성모발현이 있은 후 5년 동안의 변화를 정리한 보고서(1882.9.27)에서
신부 아우구스틴 바이치셀은 이렇게 말했다.
"저의 교구뿐 아니라 이웃의 모든 교구도
성모발현 이후에 더욱 열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점은 모든 가정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가족 모두가 다 함께 암송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
정기적으로 교회 미사에 참석하는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모발현의 훌륭한 효과는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으며,
그러한 효과는 또한 폴란드 왕국과 러시앙 스며들었습니다...
분명한 결과는 날마다 로사리오 기도를
합동으로 암송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남부 바르미아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대부분의 가정에서 바치게 된 것은 물론
첼프노, 포츠난 및 브로츠라브 교구의 가정에서도 바치게 되었습니다."
길바강(Gilwa River) 주변의 마을에서는 교구민 전체가
교회에서 아침, 오후, 저녁 등 하루에 세 번씩 로사리오 기도를 암송했다.
더 나아가 죄인들이 개종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으며,
성체를 자주 모시게 되었다.
[기적과 징표2]
치유의 샘물, 마을 주민들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믿음의 회복,
성모발현 100주년 기념식 개최 당일
폴란드의 수석주교 스테판 비스친스키 추기경의 치유 등이 있었다.
성모발현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미르미안의 주교 요제프 드르차츠가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도덕성을 가지고 성모발현 수혜자들의 진실성,
폴란드 전역에 걸친 기에트르츠바울드 성모발현의 축복 효과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안에 살아계신
단 한분 하느님의 위대한 영광에 이르는
'원죄 없이 잉태된 복되신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면서,
바르미안 교구 교회의 일반 사목국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들은 이제 기에트르츠바울드 성모발현에 대한
헌신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성모발현은 기독교 믿음과 윤리성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기적과 신성의 본질은 절대로 배제될 수 없습니다!"
기에트르츠바울드의 성모발현 성지
첫댓글 성모님의 발현 참 부러운 나라 폴란드입니다.
자세한 설명과 영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폴란드 출신이지요
성모님의 신심이 깊은 교황님과 폴란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