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선생은 한문학의 태두이시고, 저의 은사이십니다. 유풍연 교수가 지은 전기를 그의 최근 저작집인 "도암산고(島巖散稿)'라는 책에 실려 있어 이를 옮기면서 40여년 전 방은 선생을 그리며,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전기는 '방은 성락훈선생 40주기기념문집'에 실렸던 글입니다.
방은 성낙훈 선생 전(放隱 成樂熏 先生傳)
先生은 휘가 낙훈(樂熏)이고 호적 휘는 경조(庚祚)이며 자는 자목(子沐)이고 자호는 방은(放隱)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910년(庚戌) 음력 12월 1일 경상남도 함안군 山仁面 釜峰里 三足洞에서 부친 성만영(成晩永) 공과 모친 재령 이씨(載寧 李氏)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생후 1주년도 못되어 모친을 여의고 조모 현풍 곽씨(玄風 郭氏)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先生은 어릴 때부터 재질이 영특하여 3세 때 조모의 등에서 千字文을 외워 ‘成才童’이라 이름이 났다. 5세 때 서당에 들어갔는데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에 견줄 神童이라 칭송을 받았고 서당에서 배운 문장은 모두 줄줄 외워 13세에 이미 七書를 독파했다.
주위에서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권고로 1925년 15세 때 大邱의 大倫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그만두었고 1928년 18세 때 광주 안씨(廣州 安氏) 春和 공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1929년 19세 때 강원도 金剛山의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 방한엄(方漢巖) 선사에게서 불경을 공부하고 바로 佛經院 강사로 채용되었으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받고 곧 귀향하여 상장을 예제로 거행하였다. 1930년 20세 때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하면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2∼?) 선생을 만나 교유하였다. 나라가 광복된 뒤 1947년 37세 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中文科 조교로 근무하며 漢文實力이 탁월하니 교수들이 감복하면서도 기휘(忌諱)했다. 선생은 이때부터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1952년 42세 때부터 1953년 10월까지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史學科 전임강사로 재직하였다. 43세 때인 1953년 11월부터 1964년 4월까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5년 문교부에서 실시한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1964년 54세 때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동양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69년 3월까지 재직하였다. 1965년 55세 때에 민족문화추진회 설립에 진력하고 한국 고전 번역을 주관하였는데 특히 번역과 강의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많은 漢學者를 발굴하여 국역 참여를 권장하고 강의까지 맡겼는데 대표적인 분이 河性在이다. 또 동국대학교 역경원의 불경번역과 교열을 주관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조선왕조실록의 국역, 편집과 감수를 맡았으며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던 ‘가정의례준칙’ 심의위원을 겸임하였다. 1969년 59세 때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흥국탄광 채현국 사장의 한옥에서 동방고전연구원을 개설하여 漢文經典을 강의하였고 1974년 64세 때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7년 1월 1일(음, 병진 12월 1일)에 졸하니 향년 67세이고 경기도 광주군 광주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論著로 韓國儒敎史, 韓國儒敎思想史, 朝鮮時代性理學의 發達, 儒學思想의 近代的轉換, 韓國黨爭史, 東洋哲學의 硏究方法, 老子의 道德經, 孟子의 性善說과 荀子의 性惡說의 比較硏究, 荀子의 心學, 등이 있고 燃黎室記述 등 韓國古典과 元曉의 大乘起信論疏 등 많은 國譯書가 있다. 그리고 東文選과 新增東國輿地勝覽, 萬機要覽, 霞谷集 등을 국역할 때 교열과 편집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평소 선생의 뜻에 따라 문생들의 公議로 私諡하니 ‘博學多聞曰 文이요 敎誨不倦曰 長이라’ ‘文長’의 시호를 올렸다. 1979년 5월 5일에 선생의 문집 韓國思想論稿를 발간하였고 동년 6월 30일에 문생들이 鷺山 李殷相이 짓고 時菴 裵吉基가 쓴 墓碑를 세웠다. 2008년 8월 20일 문생들이 回想記와 論文을 모아 ‘放隱成樂熏先生三十周忌追慕文集’을 발간하였다.
先生의 고향인 慶尙南道 咸安郡의 남방에 艅航山 五峯山 防禦山의 三山이 우뚝 솟아있고 그 여맥이 북쪽으로 흘러 先生의 출생지 釜峰里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지방 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이 三山의 精氣로 인하여 이 지방에 儒佛道를 겸한 위대한 인물이 출현한다.’고 하였다니 아마도 이 예언의 주인공은 선생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특출한 재능으로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儒敎 佛敎 道敎 諸子百家 漢文小說 등에 박통하였고 특히 典故에는 누구도 추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강의할 때 韓國 中國 日本 등에서 간행된 여러 漢文字典에도 없는 난해한 어구나 문장을 질문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였고 그 出典까지 밝히니 당시 수강하거나 국역작업을 함께 하던 후배들이 모두 감복하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컴퓨터’ 또는 ‘걸어 다니는 사전(Walking dictionary)’이란 별명으로 통하기도 하였다.
전 학술원 회장 두계 이병도(斗溪 李丙燾, 1896∼1896) 선생이 放隱先生의 회갑연 축사 중에 선생을 가리켜 ‘漢文의 鬼神’이라 칭하였을 정도로 博覽强記 하였다. 8세의 연장인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 선생도 항상 난해한 漢文은 先生에게 자문하여 해결하였고 先生의 碑文에서 ‘환난의 역경에 처하여서도 민족의 지조를 굳게 지켜 청빈의 생활을 달게 여겼고 서구문화가 범람하는 세대에 동양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이 방면의 권위가 되었으며 전통문화의 참된 길을 밝혀 후진 양성에 일생을 헌신한 분이니 분명 우리들의 國寶였다.’고 기술하였다.
선생의 성품은 소탈하고 외모는 神童이라 불리던 존재와는 걸맞지 않게 奇人 스타일의 복장에 金弘道의 풍속화에 나오는 촌로와 같았다. 솔직하고 가식 없이 순수했으나 글에 대해서만은 무자비할 만큼 엄격했던 분이다. 연민 이가원(淵民 李家源)이 熱河日記를 번역할 때 원고를 교열하던 선생이 새빨갛게 고치는 바람에 어리둥절하여 무안해 하였고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 1903∼1977)도 漢文에 있어서는 넓죽 절할 만큼 존경하였다고 당시 민족문화추진회 사무국장이었던 이계항(李啓晃)은 선생에 대한 일화를 회상하였다.
선생은 생존 시 항상 “漢文의 종자가 떨어지게 되었다.”고 걱정하였다. 광복 이후 편협한 국수주의적인 국어 학자들 때문에 나라의 어문정책을 한글전용이라는 목표를 내세워 학교에서 한문교육을 추방하고 50년이 지나온 오늘날 국민들은 文盲 아닌 漢盲이 되었고 전통문화는 단절의 위기를 맞았으며 인성교육의 부재로 패륜아가 매일 속출하고 있으니 국민들에게 끼친 그들의 죄과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시기에 기존의 漢文學者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에서 사라지고 후진에게는 가르치지 않으니 漢文의 종자기 떨어져가고 있음을 선생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에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에서 春秋左氏傳 史記 唐宋八家文 通鑑節要 東文選 國譯演習 등을 강의하여 한문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漢文敎育에 진력하였으므로 당시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많은 문생들이 그 뒤 전국의 大學과 中․高等學校 또는 기타 직장에서 漢文敎育을 담당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국역연수원에서 수강한 학도와 선생의 자택이나 동방고전연구원 등에서 수강하여 大學이나 관계기관에 진출한 전문가들이 수백 명에 이르고 있으니 선생의 ‘漢文의 種子가 떨어지겠다.’고 하던 염려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평생 학문적으로 교유한 분은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 우인 조규철(于人 曺圭喆), 우전 신호열(雨田 辛鎬烈), 연민 이가원(淵民 李家源), 심재 조국원(心齋 趙國元), 동초 이진영(東樵 李鎭泳), 용전 김철희(龍田 金喆熙), 하재성(河在性) 등의 원로 漢學者와 조지훈(趙芝薰=東卓),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 노산 이은상(鷺山 李相殷), 김두종(金斗鍾) 박종홍(朴鍾鴻) 등의 기라성 같은 현대의 知性과 學者 들이었으며 이들과 고전 국역을 함께 할 때도 항상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교육계나 학계에 진출한 문생으로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宋俊浩 李吉培 金冑熙 閔丙秀 李成茂 宋恒龍 金都鍊 趙駿河 李東歡 林熒澤 朴龍雲 鄭奭鍾 鄭求福 金容傑 李鍾福 李鍾燦 金得洙 李範稷 朴魯昱 權永大 李慶植 柳豐淵 朴椿 玄季順 朴定子 夫英愛 등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先生은 평생 술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술은 막걸리 소주 맥주 정종 등 청탁을 가리지 않았고 안주는 김치 한가지면 족했으며 때로는 소금으로 하였는데 술집에서는 곧잘 酌婦와도 희롱할 정도로 가식이 없는 솔직하고 순수한 분이었다. 先生은 강의시간에도 항상 얼굴에 주기가 띄어 있었고 어쩌다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강의의 열의가 저조했다. 그런 날에는 강의가 끝나면 “柳君 술 안 살레?” 하시므로 필자는 자주 술을 대접하는 처지였는데 이렇게 즐긴 술로 인하여 선생이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통하고 송구할 뿐이다. 필자는 선생의 문하에서 정확히 6년 반 동안 수학하였으나 昇堂도 못한 처지여서 감히 評傳을 쓸 적격자가 못되지만 전통문화연구회 편집자의 청탁으로 이상과 같이 선생의 행적을 약술하였다.
선생은 몇 세기에 한 번 출현할 수 있는 천재적인 특이한 인물이고 특히 東洋學에서는 희대의 박학다식한 학자이며 평생을 후진교도에 진력한 교육자이니 분명 우리 학계의 태산북두로 영원히 추앙될 분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孝慶 玹慶 裕慶 麟慶 恒慶이고 한 딸은 李元述에게 출가하였다. (2008, 9)
첫댓글 벌써 방은 성낙훈 선생님의 40주기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문생으로 올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지만 낙암 선생과 답십리에서 수학하던 시절은 특히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회갑연에서 낙암께서 광화문에서 택시승객이 새치기하는 것을 내리게 하시고 타셨다는 일화를 소개하여 선생님의 강직함과 곶은 태도를 말씀하여, 그 때 주변의 선생님들께서 축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칭찬하는 때가 엊그제 갔습니다. 평생 '불수소절'을 인생의 생활태도를 정하고 사는 것도 이 때 배웠습니다. 더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또한 선생님의 가름침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자괴할 뿐입니다.
40주기는 2008년입니다.엊그제 묘소를 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