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야스다 정원(旧安田庭園)
구 야스다 정원(旧安田庭園)은 도쿄도 스미다 구(墨田区) 요코아미잇쵸메(横網一丁目)에 있는 다이묘 정원(大名庭園)으로, 시오이리(潮入り) 회유식정원(回遊式庭園)이며, 작은 섬이 가운데 떠 있는 신지이케(心字池)를 산책로와 노목이 감싸고 있으며, 곳곳에 유키미도로(雪見灯篭)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는 인공적으로 조수간만의 변화에 따른 수위를 재현하고 있다.
1910년 간행된 도쿄 일대의 43곳의 정원을 소개한 메이엔고쥬슈(名園五十種)에서는 구 야스다 정원(旧安田庭園)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오오카와(大川) 강변에 있는 야스다 저택(安田邸)은 옛부터 비젠후(備前候) 이케다 가문(池田家)이 있던 곳으로그 유수청아(幽邃淸雅)함은 일찌기 도쿄 정원 애호가의 찬탄해 마지않는 명승이다. 현관 옆으로 난 길따라 들어가면 오오카와(大川)의 물을 끌어들인 넓은 연못이, ・・・・정원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이 연못가를 따라 나무, 언덕, 축산 등이 남쪽에서 동쪽에 걸쳐 병풍을 세운 것처럼 늘어서 있어, 그 사이에는 다리도 있고, 탑도 있어, 연못 한쪽에 튀어나와 있는 도쿄 바닷가 스사키(洲崎) 닮은 갯벌같은 곳도 있고, 천길 절벽같은 산허리를 한 형상도 있어, 그 경치가 천변만화(千變萬化)라 할 만하다. 이를 자리잡아 내다보이는 곳은 동강주(東江州)・・・・쿠사츠(草津)에서 바라보는 비와코(琵琶湖)를 바라보는 듯 저 스사키(洲崎)같이 툭 튀어나온 곳은 카라사키(唐崎)에서 본 듯도 하고, 저쪽 츠키야마(築山)에 수목이 무성한 모습은 독수리(鷲)의 태산(太山) 형상이라고 하는 히에이잔(比叡山)을 닮아 그 절벽 아래 수목은 오오미야(大宮)나 하시도노(橋殿)를 연상하게 한다. 만약 이 너른 연못을 지관(止觀)의 바다로 비유한다면, 연못 한가운데 나카시마(中島)는 비와호 한가운데 치쿠부시마(竹生島)에 비하고 싶다. 오른쪽 오솔길로 걸음을 옮겨 ...중략...거기에 이어서 4-5평 넓이로 작은 돌들을 깔은 자갈밭 모양의 물가가 있어 거기에는 츠키미 등명(雪見形燈明)이 있다. 옆으로 이즈이시(根生川石)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 오오카와(大川)의 조수(潮)가 드나들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길은 점점 높아져 츠키야마(築山)로 오르게 되는데, 아담한 언덕 정도이지만,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멀리서 보면 야트막한 산을 보는 듯하다. ... 중략... 폭 3척, 길이 2칸 이상의 큰 돌다리가 저쪽 산으로 건너가게끔 놓여 있고, 길은 다시 낮아졌다가 높아지는 지점에 도리이(鳥居)가 보이는 것이 장관이다. 다시 연못가로 나가면 물은 더욱 넓어지고 나카시마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 마치 히코네(彦根) 근처 치쿠부시마(竹生島)와 꼭 닮았다.
에도시대에는 혼죠마츠다이라 가문(本庄松平氏)인 히타치 사카마번(常陸笠間藩), 훗날 단고 미야즈번(丹後宮津藩)의 시모야시키(下屋敷)였다. 겐로쿠(元禄) 연간(1688-1704)에 혼죠 무네스케(本庄宗資, 1629-1699)에 의해 다이묘정원으로 조성되었다. 안세이(安政) 연간(1854-1859)에는 스미다가와(隅田川)로부터 물을 끌어와 시오이리(潮入) 회유식 정원으로 정비되었고, 메이지(明治) 시대에 들어서면서, 구 오카야마번주(旧岡山藩主) 이케다 아키마사(池田章政, 1836-1903)의 저택이 되었다.
1879년, 야스다재벌(安田財閥)을 창업한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郎, 1838-1921)가 혼죠요코아미쵸(本所横網町)의 구 다야스 저택(旧田安邸)을 매입하여, 1884년 본가를 지었고, 2년후인 1886년에는 남북으로 붙어 있는 대지를 더 구입하였으며, 1891년에는 이케다 저택(池田邸)까지 매입하여 요코아미쵸니쵸메(横網町2丁目)의 7-11번지를 모두 매입하게 되었다, 현재 구 야스다정원(旧安田庭園) 이외에는, 현재 병원, 학원 혹은 공원으로 남아 있다.
야스다 젠지로(安田 善次郎, 1838-1921)는 실업가이자 다인으로 아명은 이와지로(岩次郎), 야스다 재벌(安田財閥)의 장업자이며, 도야마번(富山藩) 하급무사 야스다 젠에츠(安田善悦,-1887)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스다 집안(安田家)은 당시 농사를 겸했던 하급무사였다.
1858년, 에도로 와서, 처음에는 완구상에, 다음에는 건어물상겸 환전상 가계에서 일했다. 25세에 독립하여, 건어물과 환전을 겸한 야스다 상점(安田商店)을 열었으며, 이후, 후지은행(富士銀行)을 거쳐 지금의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이 되는 야스다은행(安田銀行)을 설립하였고, 그 후에는 현재의 손해보험 재팬의 전신인 손보회사, 현재의 메이지야스다(明治安田)생명보험의 전신인 생보회사, 도쿄겐부츠(東京建物) 등을 속속 설립했다.
1870년대에는, 홋카이도(北海道) 최초의 사철인 쿠시로테츠도(釧路鉄道)를 부설하여, 유황광산 개발 및 수송, 가공을 위한 증기기관 연료조달을 목적으로 나중의 타이헤이요코하츠(太平洋興発)의 전신인 쿠시로 탄전(釧路炭田)을 개발했다. 북미로의 유황수술을 위해, 이전 작은 어항에 불과했던 쿠시로항(釧路港)이 특별수출항으로 지정되도록 하였고, 현재의 미즈호은행 쿠시로(釧路) 지점의 시초가 되는 네무로은행(根室銀行)을 설립하여, 어촌이었던 쿠시로(釧路)는 도내에서 동쪽지방 최대 도시로 급속히 발전했다. 이와 같이, 금융재벌의 기초를 쿠시로 유황광산 경영과 수출를 통해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젠지로(善次郎)는 금융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사적으로 사업을 경영하는 것을 경계했으나, 동향이었던 아사노재벌(浅野財閥) 창업자 아사노소이치로(浅野総一郎,1848-1930)의 사업을 지원하는 등, 아낌없이 사업 육성을 도왔다. 그의 이름을 딴 츠루미 임항철도(鶴見臨港鉄道) 야스젠역(安善駅)은 사실 아사노(浅野)가 명명한 것이다. 또한 젠지로(善次郎)는 일본전기철도와 제국호텔의 설립발기인, 동경전등회사와 남만주철도 참여, 일본은행의 감사(監事) 등 당대의 국가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젠지로(善次郎)는 금융업 뿐 만 아니라, 야스다상점(安田商店)으로서 부동산매매도 겸하고 있어, 도쿄에서는 부동산 거래를 통한 기업가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투자로서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은 1872년 전 욧카이치쵸(元四日市町), 지금의 니혼바시 잇쵸메7번지(日本橋1丁目7番) 일대의 수백평 땅이었다. 이후 이듬해에 걸쳐, 니혼바시(日本橋) 코아미쵸(小網町), 카야바쵸(南茅場町), 세토모노쵸(瀬戸物町), 칸다(神田) 미토시로쵸(美土代町), 스미다가와(隅田川) 건너 후카가와(深川)의 사가마치(佐賀町), 고마츠쵸(小松町) 일대의 토지를 매입했다. 이들은 모두 야스다상점(安田商店)의 지점 혹은 자신의 주거용, 투자 등의 목적으로 매입되었다.
젠지로(善次郎)의 사업의 중심은 1880년이후 야스다상점(安田商店)에서 야스다은행(安田銀行)이 되었지만, 은행은 금융 이외의 사업은 금지되어 있어, 대개의 부동산업무는 야스다상점을 통해 이루어졌고, 유력자로부터의 부동산 물건 취급 의뢰받는 경우가 많아 야스다은행(安田銀行)가 거래에 응하곤 해서, 이후 1896년 도쿄겐부츠(東京建物)를 창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76년에는 제3제국은행(第三国立銀行) 초대 행장에 취임, 1878년에는 도쿄부회(東京府会)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89년에는 칸다구(神田区)에서 도쿄시회(東京市会)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젠지로(善次郎)는 쿠시로(釧路) 지방개발의 공적으로 쿠시로구(釧路区), 현재의 쿠시로시(釧路市)로부터 표창받았다. 또한, 도쿄시에 자선사업비로 300만엔을 기부했으며, 도쿄제국대학에도 강당건설비로 100만원을 기부했다. 1902, 1909년에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도 기부하여 학원최초로 교빈(校賓)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9월 27일, 가나가와현(神奈川県) 나카군(中郡) 오오이소마치(大磯町) 별장 쥬라쿠안(寿楽庵)에 변화사 카자마리키에(風間力衛)라고 자처하는 남자가 나타나 호텔 건설관련 협상을 위한 면회를 요청했지만, 젠지로(善次郎)는 거절했다. 카자마리키에(風間力衛)는 실존인물이긴 했지만, 진슈의단(神州義団) 단장을 자처한 아하시 헤이고(朝日平吾, 1890-1921)가 사칭한 것으로 정작 카자마 본인은 사건과 관계없었다.
다음날 다시 방문한 아사히(朝日)는 문 앞에서 4시간가량 버텨 겨우 면회를 허락받고, 오전 9시20분 경, 응접실에서 만난 자리에서 젠지로를 암살하였다. 이후, 자신도 자살하였다.
아사히(朝日)가 남긴 유언장에는, '간악한 부호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郎)는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 국가사회를 무시하고, 탐욕스럽고 천박하여 오랫동안 구두쇠로 민중의 한을 쌓고 있다, 나는 그 완고함을 불쌍히 여겨 불심과 자애로운 말로 타일렀으나 참회하지 않았고, 이로서 천주(天誅)를 더해 세상을 대신하여 응징하고자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도쿄대학의 야스다강당(安田講堂), 히비야 공회당(日比谷公会堂), 치요다구립(千代田区立) 코지마치(麹町) 중학교 부지는 젠지로(善次郎)가 기증한 것이었으나, 익명을 원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도쿄대학 강당의 경우, 사후 추모의 의미로 개명하게 되었다.
도야마시(富山市) 아타고쵸(愛宕町)에 있는 야스다 공원(安田公園), 현재의 야스다 기념공원(安田記念公園)은 야스다 가문(安田家)의 생가가 있던 곳에 만든 것으로, 그 동쪽으로는 개명한 야츠다쵸(安田町)가 있다. 구 야스다 정원(旧安田庭園)의 경우, 젠지로(善次郎)가 소유하고 있었던 탓에 이름이 붙었던 것으로 이후 유지를 따라 도쿄시에 기부되어 일반공개되었고 현재는 스미다구(墨田区)에서 관리하고 있다. 1879년 구입한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田安徳川家) 저택, 히젠 히라도번주(肥前平戸藩主) 마츠라 후(松浦侯)의 은신처, 카즈사 이치노미야번주(上総一宮藩主) 카노우 후(加納侯) 저택 부지에 지은 접객용 별장, 신슈엔(深秀園) 자리에는 도아이 기념병원(同愛記念病院), 야스다학원(安田学園) 등이 세워졌다.
1922년, 그의 유지에 따라 도쿄시에 기증되었지만, 1923년 칸토대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었고, 도쿄시에 의해 남은 부분을 살려 복원을 진행하여 1927년 시민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67년 도쿄도에서 스미다 구(墨田区)로 이관되어, 현재는 스미다 구(墨田区)에서 관리하고 있다. 2018년에는 부지내 료고쿠 공회당(両国公会堂) 터에 요요기(代々木)기로부터 도검박물관(刀剣博物館)이 이전 개관했다.
예전에는 스미다가와(隅田川)로부터 물을 끌어와, 도쿄만의 조수가 변화하면서 연못의 수위가 바뀌면서 나타나는 풍경의 변화를 즐기는 정원이었는데, 같은 방식으로 정원을 꾸민 곳으로는, 하마리큐 은사공원(浜離宮恩賜庭園), 구 시바리큐 은사공원(旧芝離宮恩賜庭園)이 있다.
고도성장기 스미다가와(隅田川)의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취수가 중지되었고, 현재는 정원 북쪽의 지하저수조를 이용한 순환정화장치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조수가 재현되고 있다.
원내에는 코마도메이시(駒止石), 코마도메 은행(駒止銀杏), 코마도메이도(駒止井戸)가 있는데, 1631년 아베 분고노카미(阿部豊後守)가 스미다가와(隅田川) 범람을 살펴보러 들렀을 때, 말을 매어놓고 휴식을 취한 곳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