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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좌 제9회 제8.의법출생분(법에 의하여 출생하다)
/부처와 깨달음의 어머니, 금강경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소득복덕 영위다 부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 不.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의 복덕이 진정 많겠는가?”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설 복덕다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 福德多.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바로 복덕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약부유인 어차경중수지 내지 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승피
若復有人 於此經中受持 乃至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 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 급 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 諸佛阿褥多羅三邈三菩提法
皆從此經出.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법은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여!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第八 依法出生分
제팔 의법출생분
내가 옛날에 역경 연수원에 있을 때 그때 원장이 운허스님이시고, 역장(譯場)이 이제 역경하는 장소가 수원 용주사였었어요. 그때 이제 연수생을, 역경하는 연수생을 키운다고 용주사에서 스님들이 많이 살았어. 나는 연수생으로 들어가 사는데, 운허스님의 강의가 있으면 탄허스님은 제~일 앞좌석에 제일 먼저, 항상 10분 전에 와서 딱 앉아서 운허스님 능엄경 강의를 다~들으시는 거야. 난 한 두번 듣고 마는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안 빠지고 운허스님 강의가 있으면 꼭 와서 제일 먼저 앞에 와서 듣고 그래.
우린 또 운허스님인데도(께도) 듣고 탄허스님인데도(께도) 듣고 그때 뭐 이시형? 박사라든지 등등 그런 강사들이 있었는데, 그래 내가 한번은 물었어.
그 당시는 우리가 알기로 정화 이후 우리 조계종에서 삼대강백(三大講伯)을 치면은 운허스님, 탄허스님, 관응스님, 그렇게 세 분이었거든요.
정말 전설 같은 그런 삼대 강백인데 ‘그런 그 입장에 있는 스님이, 스님 뭐 들을 게 있습니까? 우리나 뭐 들을 공부하고 그러지 스님 같은 분이 뭐 들을 게 있냐’고 그러면, ‘그런 소리가 어딨냐?’고 막 꾸중을 하시는 거라, 탄허스님이.
운허스님인데(께) 운허스님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런 그 어떤 견해가 있다는 거야. 그 ‘저런 훌륭한 그런 그 강사스님의 그 소중한 강의를 하는데 내가 이런 들을 인연이 되었는데 안 들을 수 있느냐’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그렇게 내가 아주 그 꾸중을 들었어요. 그게 정말 아 내가 이제 탄허스님을 존경하는 뭐, 그 면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걸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그 점이 참 훌륭한 점이고,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된다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도 가서 듣는 것, 그걸 흔히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묻는 것, 또 듣고자 하는 것, 이런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그 유교 덕목을 그대로 실천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어요.
그게 참 탄허스님에게서 정말 본받을 점이다 하는 것을 늘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여덟 번째 분, 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第八 依法出生分
제팔 의법출생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약인 만삼천대천 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소득복덕 영위다부
須菩提言하사대
수보리언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심다 세존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 설복덕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라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 승피
何以故오
하이고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第八 依法出生分
제팔 의법출생분
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이것도 좋은 용어죠.법에 의해서 거듭 태어나는 거죠.
이를테면 출가하는 것도 새로운 태어남이고 출가해서 부처님 법을 이런 내용, 저런 내용 새롭게 접할 때 마다 또 거기에서 또 한 생각 바뀌고, 또 한 생각 달라지고, 이것이 사실은 출생(出生)하는 것입니다.
거듭 거듭 새롭게 출생하는 거죠. 사람은 그래서 끊임없이 바뀌어져야 된다고 하는 것.
그래서 아마 탄허 스님도 운허스님에게 듣는 것을 끊임없이 그렇게 쉬지 않고 했던 것 같애요. 이건 참 우리가 살아있는 생물로서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기한다고 하는 것. 기회만 되면 자기 발전을 끊임없이 기하는 그런 그 노력, 이것이 말하자면 원력이고 따라서 생명력이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나의 그 어떤 희망이고 기대감이고 그런 거죠.
저는 뭐 T.V를 잘 봅니다. 불교 T.V 도 설법하는 것 잘 듣고, 또 스님들 테잎(tape), 뭐 강의한 테잎 같은 거 있으면 어떻게든지 하여튼 구해가지고 저기 저 우리 학무거사가 아주 테잎 조달을 잘 해주고 있는데 그것 일일이 구해가지고 다 듣고, 심지어는 불교 T.V 옆에는 바로 기독교, 그 다음에 천주교 이렇게 연달아 채널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 손만 한번 까딱하면 바로 목사 설교도 나오고 신부 강설이 나오고, 얼마나 편리한 세상입니까?
나는 그 목사나 신부들의 그 강의도 잘 듣습니다. 참고 듣기도 하고 어떨 때는,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고, 들어봐도 내 같은 소리지마는. 그래도 또 참고 또 듣고, 또 어떨 때는 또 하나씩 건지는 것도 있고 그래요, 또.
들어보면 그래요. 불교 들으면 하나도 힘없이 하다가 그 다음에 옆에 천주교 채널 딱 틀면 약간 톤이 높아. 음성도 또 달라. 그 다음에 또 기독교 채널을 돌리면 막 열광적으로 하지. 고것이 어떻게 그렇게 일부러 만들은 것 같이 그렇게 분위기가 그래 연출이 되더라구요. 그런 것도 비교하면서 들으면 재미가 있어요.
가을에 새로 개편한 불교 그 프로그램은 어떻게 이게 불교 텔레비전인가 아니면 뭐 세상에 무슨 그냥 보통 텔레비전인가 싶을 정도로 어떻게 다양하긴 하더만 내용이, 그런 이야기로써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닌데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어떤 그 참 위대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토굴이 됐든지, 쪼그마~한 열 평짜리 포교당이 됐든지, 아니면 좀더 큰절이 됐든지 간에, 그것은 전부 불교를 펼 수 있는 그런 바탕인 거야. 자료고 밑바탕이 되고, 도량인 거라. 그게 그대로 도량인데, 비록 뭐 10평짜리 작은 포교당이라고 하는 그런 도량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십분 살려서 부처님 법을 편다고 하는 것은 참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 걸 우리가 지금 포교가 절대 부족한 이 시대에 살면서 어떤 그런 그 불교에 대한 여기 뭐 ‘법도 하물며 버려야 하거든 하물며 비법이겠는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한편 공부하면서도 불법에 대한 그 애착, 어떻게 하더라도 불법, 불법, 불교를 널리 펴고자 하는 그런 그 애착심이 있어야 돼요. 불교에 대한 애착심이 있어야 됩니다.
애불심(愛佛心), 나는 그러는데 불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 이제 애착하고는 또 다른 차원이죠. 그러는 과정에서 새롭게 새롭게 우리는 태어나야 합니다.
그게‘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법에 의해서, 진리의 가르침에 의해서 새로 출생하다’, 그런 뜻인데,
依法出生分 第八
의법출생분 제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약인 만삼천대천 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소득복덕 영위다부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약인 만삼천대천 세계칠보 이용보시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가지고서 보시에 사용했다면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시인 소득복덕 영위다부
이 사람은 얻을 바 복덕이 얼마나 많음이 되겠는가?
須菩提言하사대
수보리언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심다 세존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 설복덕다
須菩提言하사대
수보리언
수보리가 말하기를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심다 세존
심다(甚多)니이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오 是福德이
하이고 시복덕
왠고하면은 이 복덕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 설복덕다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니이다!
이랬어요.
이게 이제 복덕(福德)과 복덕성(福德性)이라고 하는 것, 요게 이제 늘 마음에,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좀 걸리는데, 복덕은 뭐고 복덕성은 뭐냐, 복덕의 입장에서는 많은데, 복덕성의 입장에 있어서는 많다 적다 할 수 없다. 이거는 이미 뭐 인위적으로 복을 지어서 그 결과로서 얻어오는 것은 복덕이라면, 복덕성은 본래로 가지고 있는 것, 우리 본성에 이미 어마어마한 복덕을 지니고 있는 그 본래적인 그런 그 복덕, 이게 복덕성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냥 복덕은요, 심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그게 복덕이고, 복덕성은 뭐 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심어서 얻는 것은 그건 불과 얼마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건 많다, 적다고 할 수가 있어.
그런데 복덕성, 본래 우리 심성에 갖추고 있는 기존의 복, 기존의 복은 많다 적다 할 수 없어. 아주 우수해. 뛰어나! 그래서 수승(殊勝)할· 승(勝)자를 써요.
이 금강경에 보면은‘많다’ 안 하고, 저 복보다 ‘우수하니라’. 저 복보다 ‘수승하니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의 이치를 ‘저 복보다 수승하다’, 우수하다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심성으로서의 금강경, 본래 지닌 마음의 어떤 그 복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렇게 분별해버리면은 그 ‘성[(性);복덕성(福德性)]’ 자가 아마 해소가 될 겁니다.
시고로(是故)로,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말한다’
[卽非福德性(즉비복덕성)일새 是故(시고)로 如來(여래)가 說福德多(설복덕다)니이다], 그랬어요.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라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 승피
何以故오
하이고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若復有人이
약부유인
만약 어떤 사람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경 전체거나, 내지 사구게등을 수지해서,
내지란 말은 그런 뜻이 숨어 있습니다.
경 전체거나, 내지 사구게 만이라도 수지해서,
爲他人說하면
위타인설
딴 사람을 위해서 해설한다면
其福이 勝彼하리라
기복 승피
其福(기복)이 勝彼(승피)라,
저 복보다 우수하다, 뛰어나다, 차원이 다르다. ‘승(勝)’자, 많다는 뜻이 아니고, ‘저 복보다 우수하다’, 영 차원이 다른 복이다, 이 뜻입니다.
그래, 심어서 얻는 복, 베풀어서 얻는 복은 그냥 복덕(福德)이야. 복덕성(福德性)은 아니야.
복덕성의 입장에서는 말하자면 이 금강경과 막 바로 통하는, ‘此經中(차경중)에 受持乃至四句偈等(수지내지사구게등)’,
이것은 우리 본성의 덕을 드러내는, 본성의 덕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제대로만 이해하면은 저 뭐 뒤에 이제 여러 번 나오지만 여기서도, 삼천대천세계, 이 지구에다가 금은보화칠보를 가득~히 실어가지고 수억 만 톤, 수억 만 톤을 다른 사람에게 희사를 했다하더라도 그거 하곤 게임이 안 된다 이거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수하다. 이 ‘승(勝)’자 중요한 것입니다.
‘勝彼(승피)’저 복보다 훨씬 수승하고 뛰어나다!
철이 아무리 많다한들 다이아몬드 뭐 주먹만 한 거 하고 비교가 되겠어요?
철이 예를 들어서 뭐 산더미처럼 많다하더라도 다이아몬드 그 한 짐만 못할 거 아닙니까? 비교가 안 되는 거죠, 그건.
何以故오 須菩提야
하이고 수보리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何以故오 須菩提야
하이고 수보리
왜냐하면 수보리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모든 부처님 제불이 깨달으신 최상의 그 깨달음의 이치[菩提法(보리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개종차경출
다 이 경전으로부터 나왔다.
그게 이제 ‘의법출생(依法出生)’이다 그래요.
법에 의해서 출생했다. 다 이 경전에 의해서 출생했다. 또 이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또 새로운 그 어떤 차원의 인격자가 되어야 된다, 또 새로운 차원의 안목을 가져야 된다, 이러한 의미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우리가 이 불법, 모든 부처님과 [일체제불 급제불],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이 경에서 나왔다하니까 ‘아, 이 경이 대단한가 보다’ 하고 또 이제 거기에 껌뻑 넘어가는 거죠. 넘어가면 집착하게 되고 아~주 온갖 사량분별이 거기에 붙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금강경의 취지는 아니죠. 물론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높이 선양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금강경의 안목에는 그것 집착하면 이건 또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곱표[×표]야. 그래서
須菩提(수보리)야 所謂佛法者(소위불법자)는 卽非佛法(즉비불법)이니라
또 ‘즉비(卽非)’!
저 앞에 신상을 ‘즉비’라고 했죠. ‘즉비신상(卽非身相)’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故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불고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
<第五 如理實見分(제오 여리실견분)에서>
불법! 얼마나 근사한 겁니까? 정말 우리 목을 매는 것 아닙니까? 목을 매는 불법인데, ‘즉비불법(卽非佛法)’이야! 즉비의 논리!
우리 육신을 부정하는 거 좋다 이거야. 결국 무상해서 죽을 몸이니까.
그래, ‘즉비신상(卽非身相)’은 이해했다 이거야, 앞에서.
여기는 불법, 만고에 변치 아니할 불법을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했다 이겁니다!
이게 금강경이에요! 이게 금강경입니다.
즉비에서 주욱~ 읽으면서, 금강경을 읽으면서 ‘즉비’가 눈에 팍팍 들어와야 돼요. 그리고 이 ‘즉비(卽非)’의 ‘투시안경’으로 모든 사물을 같이 봐야 돼.
이게 아까 내가 ‘투시안경’이라고 그렇게 이제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존재를 투시해보는, 그래 불법마저도 투시해본다 이거야.
투시해보면 뭐다, ‘공(空)’이다. ‘공(空)’자는 한 마디도 없죠?
금강경에 ‘공(空)’자 한 자도 없습니다. 한데,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 주1)가 주인공이라고 하는 사실, 그 내용은 사실은 ‘모든 존재의 공성(空性)’을 이야기한 거죠. ‘모든 존재의 공성’, 그러니까 ‘투시안경’, ‘즉비의 투시안경’을 끼고 보면은 모든 존재는 ‘공(空)’하다 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마저도 공하다! 그래 ‘즉비불법(卽非佛法)’이다 이랬어요.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불법의 상(相)마저도 떠나는 거죠.
불법(佛法)이 좋다고 해서 불법상(佛法相)에 집착해 있으면 그건 이미 불법이 아니다!
불법이 좋은 것 까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불법이 좋다고 해서 그 불법상에 집착하고 있으면은 그것은 아니다,
그 뜻입니다.
‘所謂佛法者(소위불법자)는 卽非佛法(즉비불법)이니라!’
세상에 어느 종교, 어느 철학의 가르침이 이런 논리가 있겠어요? 이게 자기 재산이고 자기 밑천인데, 자기 근본인데, 근본을 부정하잖아요. 이게.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했으니 이렇게 자기 근본을 부정하는 이런 가르침은요, 불교 밖에 없어요. 불교 밖에!
아! 이거 근사하잖아요, 참으로. 그렇다고 어디 뭐 부처님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불법이 어디 뭐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정말 더욱 불법을 더 옹호하고, 불법에 더 심취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런 것 때문에.
제대로 눈이 열린 사람들은 이런 말에 그냥 마 미치는 거예요.
‘불법이 불법이 아니다!’
차~암 불법을 만약 불법이라고 했으면 나는 불교 안 믿을란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차원 높은 사람들은. 불법을 불법이라고 막 내세우면 난 불교 좋아 안 할거다 말이야. ‘불법이 불법이 아니라’고 했으니 나는 여기에 미친다, 여기에 내 생명을 건다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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