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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야암 지안스님 원문보기 글쓴이: 영축산
한국불교사의 대표적인 석학 고승들 (3) 자장율사
통도사는 자장(慈藏, 590∼658) 율사가 선덕왕 15년(646)에 창건한 사찰이다.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자장 율사는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알려졌으며, 문수보살로부터 범어 게송을 전해 받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입던 가사와 진신사리를 받아가지고 유학 7년 만인 선덕왕 12년(643)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율사는 모셔온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와 태화사 탑에 각각 봉안하고, 나머지 사리와 가사는 통도사를 창건한 후 계단을 쌓아 모셨다. 통도사가 불보종찰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바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다.
통도사의 부처님 사리탑
절 이름 ‘통도(通度)’는 ‘승려가 되려는 이들은 모두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통해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는 뜻이 있고, 또 ‘산의 모양이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거나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度衆生〕’는 뜻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자장 율사는 승단 최고위직인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매달 두 차례 계율을 설하고, 매년 봄·겨울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는 등 신라불교 교단의 기틀을 세웠다. 또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대승경론과 보살계본을 설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도 힘을 썼다.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세울 것과 당 연호와 복식을 도입할 것을 선덕왕에게 건의하는 등 신라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고골관 닦으며 홀로 수행
통도사 소장 자장 율사 진영
자장 율사의 속성은 김씨고 이름은 선종랑(善宗郎)이다. 부친인 무림은 진골 출신으로 소판(蘇判)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한다. 무림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다”고 발원하고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여 아들을 얻게 되었다 한다.
율사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가 돌아가자 율사는 처자를 버리고 깊은 산에서 고골관(枯骨觀, 시체가 썩으면서 백골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관하는 수행)을 닦으면 홀로 수행을 하였다.
율사는 치열하게 정진을 했다. 《삼국유사》 ‘자장정률(慈藏定律)’ 조에는 당시 율사의 정진 모습을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이 없어지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율사로서의 면모는 왕이 재상으로 기용하기 위해 율사에게 세상으로 나오라 한 것을 거절한 데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율사는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왕명을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며 거절을 한다. 율사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왕은 어쩔 수 없어 출가를 허락했다 한다.
선덕왕 5년(636) 율사는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범어 사구게(四句偈)와 부처님 가사(袈裟)·발우, 진신사리를 전해 받는다.
당 태종 귀의…대장경 가지고 귀국
율사가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들어가자 당 태종이 명성을 듣고 칙사를 보내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도록 했다. 그러나 번거로움을 꺼려한 율사는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산록에 들어가 3년간 수도를 하였다. 그 뒤 장안으로 다시 돌아간 율사는 당 태종으로부터 극진하게 예우를 받았다.
선덕왕이 즉위 12년(643)에 당 태종에게 글을 보내 율사를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자, 율사는 대장경 1부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가지고 유학 7년 만에 귀국했다. 선덕왕은 율사에게 분황사(芬皇寺)와 황룡사에 머무르게 하고 대승경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하도록 했다.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보고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탄복했다”(《삼국유사》 ‘자장정률’ 조)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을 보면 율사의 강의는 대중들에게 목마른 대지에 내리는 비와 같이 갈증을 풀어주고 감동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구층목탑 건립, 당 문물 수입 건의
율사는 선덕왕에게 “이웃 나라가 항복해 오고 구한(九韓.일본, 중국, 오월, 탁라, 응유, 말갈, 거란, 여진, 예맥)이 조공을 바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며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한다. 또 진덕왕 3년(649)과 그 이듬해는 당나라 복식과 연호를 각각 들여오도록 건의해 시행토록 하였다.
대국통 임명, 보름마다 계율 강의
선덕왕에 의해 대국통에 임명된 율사는 승려의 규범을 주관하는 등 계율정신의 선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율사는 15일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시험을 보도록 해서 지범(持犯, 계율을 지키고 범함)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서 이를 유지해 나가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조사하고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했으며 경전과 불상을 엄중하게 모시도록 타이르고 경계했다.
율사의 이런 노력으로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에 가장 성했으며, 계를 받고 불법(佛法)을 받는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은 되었다”(《삼국유사》 ‘자장정률(慈藏定律)’ 조)고 한다. 율사는 그 당시 출가하려는 이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했다고 한다.
율사가 계단에 사리를 봉안한 사실은 당에서 계율을 전수받아 왔음을 의미합니다. 문수보살에게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전해 받은 율사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종남산 운제사(終南山 雲際寺)에 머물며 3년간 수도한다. 당시 종남산 백천사(白泉寺)에는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인 도선(道宣) 율사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자장 율사와 도선 율사는 서로 교류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도선 율사가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자장 율사가 기록돼 있는 점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 화엄사상 첫 전래
율사를 신라에 화엄사상을 제일 먼저 소개한 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율사가 출가할 당시 자신의 논과 밭을 내어 창건한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의했다는 것이 그 근거다. 당시 52명의 여인이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고 한다.
율사는 만년에 수도 경주를 떠나 강릉지방에 수다사를 세우고 주석하다가 태백산 기슭 영월 정암사에서 입적을 한다. 어느 날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맨 늙은이로 변신한 문수보살이 찾아왔다. 그러나 율사는 늙은이를 미친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만나지 않았다. 문수보살은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라며 사라졌는데, 이 말을 들은 율사가 황급히 쫓아 고개에 올랐으나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합니다. 율사는 그 자리에서 몸을 던져 입적했다 는 설도 있다. 대중들이 율사의 법구를 화장해 굴속에 안치했다고 전해진다.
율사의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1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觀行法)》 1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 승려 양충(良忠)이 지은 《법사찬사기(法事讚私記)》에 율사가 지은 《아미타경의기》에서 옮긴 구절이 일부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