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사기 16:1-31
삼손과 들릴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활약한 20년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생략되었으며 그 대신 본장에는 그의 최후를 둘러싸고 벌어진 극적 사건들이 소상히 서술되었다. 특히 본문에는 삼손의 인간적 약점들과 그로 말미암은 수치와 곤경 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어 그를 신앙의 용사라고 부르기에 무색할 정도이다. 이처럼 특정 인물을 이상화(理想化)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다.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깔려 있다.
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징벌과 구원: 삼손이 하나님의 율례를 무시하고 음란한 행실에 빠졌을 때 그에게 임한 환난은 실로 엄청났다(21절). 즉 그때에는 블레셋인들이 삼손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손이 하나님 앞에 다시금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삼손은 자신에게 맡겨진 영광스러운 사명을 수행하며 최후를 장식할 수 있었다(28-30절). 그리고 비록 삼손과 블레셋인들은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그 죽음의 성격은 서로 판이하다.
②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 : 최초에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이간시키려 했던 사탄의 책동은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탄은 성도들을 어그러진 길로 들어서게 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마 24:24). 삼손이 여자 문제로 말미암아 한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다시피 된 것도(20절), 엄밀히 따지고 보면 사탄의 계교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결코 좌절될 수 없기 때문에 구속 역사를 방해하는 어떤 세력도 필경 물리침을 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단번에’ 완성되었으며 오늘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구속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창3:15; 히9:28).
출처: 『톰슨III성경주석』.
첫댓글 삼손은 예정과 부르심이 있던 분입니다. 실수와 허물이 많았지만 끝내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성역에 사용된 믿음의 용사입니다.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좋은 예입니다.
맞이요. 좋은 분별에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삿16:22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 '시작하다'라는 단어는 이미 13:5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본서 기자는 이 단어를 통하여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그리고 또 육의 눈을 잃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중에 삼손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하였음도 암시해 주고 있다.
영의 눈이 뜨기 시작한다는 것을 회개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호크마 주석>, 삿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삼손은 '엔학고레'(15:19)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의 심정으로 다시한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본절에 기록된 삼손의 기도는 그가 사용한 하나님의 명칭 세 가지와 더불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주(* , 아도나이):이것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주장하시는 분은 곧 주 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슬로 맨 블레셋이 주(主)가 될 수없으며 자신의 영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이심을 보여 준다. (2) 여호와(* ,예호와):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말하는 삼손의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3) 하나님(* , 하엘로힘) : 여기서 관사 '하'(* )가 붙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신들 중의 신임을 나타낸다. 이로 볼때 삼손은 이 싸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숭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 여기서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자카르'(* )는 '기억해내기 위해 표를 해두다'는 뜻이다. 즉 삼손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구별해 주신 것(13:2-5) 에 의거, 다시금 자기를 권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의 장중(掌中)에 다시한번 사로잡히기를 소원하는 삼손의 심경을잘 나타내 준다.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 이러한 삼손의 기도는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븍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삼손이 정말로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그것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롬12:19 ; 히 10:20)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의 강조점은 '원수'인 블레셋에게 있다. 즉 삼손의 기도는 자신의 두 눈을 위해서 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고통을 준 원수들인 블레셋족에 대하여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장코뱅 부르짖고 기억하는 것은 처절하게 회개기도를 하고 이어 실제적인 회개도 살천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귀와 죄악은 하나님의 원수이며 동시에 우리의 원수가 되며 투쟁의 대상이 됨을 알려줍니다.
@장코뱅 삼손이 하나님을 호칭할 때, 아도나이, 여호와, 엘로힘으로 각각 달리한 것에 대한 설명이 좋네요. 잘 알겠습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삿16:30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 자기 한 몸을 던져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는 이러한 삼손의 살 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라고 말한 에스더의 정신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이 된다. 한편 이와 관련 우리는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전사(戰死)였다. 즉 삼손은 최후의 장렬한 죽음으로써 블레셋의 신 다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 것이다(Keil).
육체의 죽음으로 영화의 시작에 이른다는 것은 성도의 구원의 서정을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살신성인으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사사들의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입다의 이야기도 가장 사랑하는 딸을 바쳐야 했던 사건을 통해서 메시아의 구속 계획을 예표하고 있는 것 처럼요.
사사들 중에서도 삼손의 죽음이 가장 장렬한데 항상 큰 감동을 줍니다. 삼손의 죽음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귀를 멸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네,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