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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① 안동 ←반변천 청송(2)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별도 탐방] ① 안동 반변천 수계-청송(2)
청송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청송 제1경 길안천 신성계곡
경상북도 청송은 내륙의 오지라 불리는 곳이다. 그만큼 맑은 공기와 청정자연지역으로 손꼽힌다. 인적이 드문 관광지이기에 요즘 같은 코로나시대에 언택트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보통 청송이라고 하면 주왕산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송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은 바로 길안천의 ‘신성계곡’이다.
신성계곡은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에서 시작하는 길안천의 한 부분으로, 신성리 ‘방호정’에서 고와리 ‘백석탄’에 이르는 약 12㎞ 계곡을 말한다. 맑은 천을 따라 '신성계곡 녹색길'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감입곡류(嵌入曲流)하며 산비탈을 깎아 만든 암반과 암벽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렸을 만큼 빼어난 비경을 자랑한다. 물이 감도는 절벽 위 그림 같은 ‘방호정(方壺亭)’은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함안 조씨(趙) 조준도(趙遵道)가 맞은편에 있는 생모 권씨의 묘소를 기리기 위해, 1619년 44세때 건립한 정자다. 조준도는 함안 조씨 17대손으로 아버지는 조정백(趙庭栢)이다. 방호정을 방대정(方臺亭)정이라고도 한다.
방호정 부근에 병풍처럼 둘러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은 길안천을 이루며, 맑은 물가에는 넓은 자갈밭과 운치 있는 숲이 있다. 방호정에서 8km 정도 아래에 위치한 ‘백석탄’은 3,000여 평의 부드러운 백색의 암괴(巖塊)가 마치 눈으로 뒤덮인 듯 온통 알프스의 연봉을 연상케 한다. 백석탄 계곡에는 옛 선현들이 고기를 낚았던 바위라 하여 ‘약어대’가 있으며 약어대 밑에는 고기를 낚다보면 저절로 시상(노래)이 떠오른다 하여 ‘가사연’이라는 맑은 소(沼)가 있다. 백석탄 계곡에는 장군대라는 평지가 있는데 이곳은 조선조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는 김한룡이라는 사람이 순절한 부친의 갑옷과 투구를 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경북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청송 주산지
청송군 부동면 소재지인 이전리에서 약 3km 지점에 있는 이 저수지는 경종 원년(1720년)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0월에 완공된 것이다. 길이 200m, 너비 100m, 수심 8m로 그다지 큰 저수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 한다. 특히 저수지 가장자리에 수령이 20~300년 된 왕버들 30여 그루는 울창한 수림과 함께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가 촬영되어 현실세계가 아닌 듯한 아름다운 '주산지'로서 각광받고 있다. 이 영화 덕분에 이제는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올 만큼 유명한 여행지가 되었다. ☞ 경북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주왕산국립공원 — 기암절벽의 계곡
청송 주왕산(周王山)은 한반도 산맥의 중심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낙동정맥이 국토 동남부로 뻗어 나온 지맥에 위치한다. 해발 722.1m의 주왕산은 청송의 진산(鎭山)이다. 청송읍에서 동남쪽으로 13.5㎞ 지점에 있다. 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3대 암산의 하나이다. 1976년 3월 30일,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주왕산 산군에는 태행산, 두수람, 가메봉 등의 봉우리 외에도 주방계곡, 절골계곡, 월외계곡 등이 있다. 주왕산은 4군데의 폭포 외에 동굴, 대전사 및 부속 암자들이 있어 천혜의 관광자원이 많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주왕산의 명칭은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당나라에서 반정(反正)을 하다가 실패하여 이곳에 와서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 뒤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 이름을 주왕산(周王山)으로 하면 고장이 복될 것이라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신라의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하여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돈산(大遯山)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웅장하고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이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서 석병산(石屛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 경북 청송군 부동면(주왕산면)
☆… 필자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주왕산을 오르고 기암절벽의 계곡과 폭포를 탐방한 바가 있다. 특히 주왕산 권내의 주산지의 아름다운 새벽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의 산행기를 통하여 주왕산의 실제적 면모와 감동을 다시 살려본다.
☆ [2014-10월 백파] 청송 주왕산(周王山) 산행기 ☆
▶ 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 [산행코스] 청송 주산지→ 절골→ 대문다리→ 주왕산 가메봉(883m)→ 사창골→ 후리메기 삼거리→ [주방천 계곡]▶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휴게소[시루봉 전망]→ 주왕산 대전사
☆…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밤 11시 30분, 서울에서 출발했다. 청송의 주왕산(周王山)은 서울에서 워낙 먼 거리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차박(車泊)으로 진행하는 산행이었다. ‘금강고속버스’ 전용편으로 서울 군자역(지하철 7호선)에서 출발하여 중부내륙-영동-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안동I.C에서 내려, 진보를 거쳐 청송 주왕산까지 가는 사이 버스 안에서 눈을 붙이고, 이른 새벽에 산행을 하는 것이다. 사실 차박(車泊)까지 하면서 밤의 어둠을 가르고 질주한 것은 본격적인 주왕산 산행에 앞서 새벽의 주산지(注山池)의 풍경을 보기 위함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 만산이 단풍으로 넘실거리는 가운데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주산지의 풍경은 너무나 신비롭고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청송 주산지(靑松注山池) 탐방
주산지(注山池)는 반변천(半邊川)에 유입되는 주산천의 발원지이다. 저수지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별바위까지 이어지는 주변 지역도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주왕산국립공원 내에서도 맑은 물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주산지(注山池)는 1720년 8월 조선조 경종 원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저수지(貯水池)다. 길이는 200m이고 평균 수심이 약 8m인 주산지는 준공이후 현재까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밑바닥이 드러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주산지에는 뜨거운 화산재가 엉겨 붙어 만들어진 용결응회암이라는 치밀하고 단단한 암석이 아래에 있고, 그 위로 비용결응회암과 퇴적암이 쌓여 전체적으로 큰 그릇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비가 오면 비응결응회암과 퇴적암층에서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기 때문에 이처럼 풍부한 수량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주산지에는 150여 년이나 묵은 왕버들이 자생하고 있는데, 그 풍치가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암석, 물, 나무가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풍광을 선보이는 주산지는 2013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5호로 지정되였다.
주산지(注山池)가 다른 저수지에 비해 돋보이는 이유는 수려한 주변의 산줄기와 함께 저수지에 서식하는 왕버들 때문이다. 저수지에 자생하는 능수버들과 왕버들 20여 그루는 울창한 수림과 함께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수령이 150년 이상 된 왕버들이 수면으로 뻗어 있는 모습은 태고(太古)의 신비를 간직한 듯하다.
주산지 일원(一圓)은 주왕산의 정상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따라 만들어진 울창한 숲이 주산지와 그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주산지 둘레에는 굴참나무, 굴피나무, 망개나무 등이 자라며, 야생동물로는 솔부엉이(천연기념물 제324호),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 수달(천연기념물 제330호), 고라니, 너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야생동물들의 먹잇감이 풍부하다. 그래서 주산지 일원은 ‘야생동물서식지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산지 입구에는 월성 이씨 이진표의 후손과 조세만(趙世萬)이 세운 ‘이진표의 공덕비(李震杓功德碑)’가 있다. 이진표는 주산지 건설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축조할 당시만 해도 주산지는 그저 산골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하나의 저수지였다. 그러나 주산지는 사계절 아름답다. 비온 뒤의 청아한 풀잎과 산등을 지나가는 낮은 구름과 안개, 가을 단풍과 저녁노을이 어우러져 신비롭고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준다. 주왕산 절골의 아름다운 산세와 주산지의 경치가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곳이었지만,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란 영화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대개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 꼭두새벽에 몰려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다.
☆…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오늘도 고요한 아침 호수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물에 잠겨있는, 철 지난 수양버들이 연록의 실가지를 늘어뜨리며 새벽을 열고, 주변 산비탈과 호수 주변에 불타는 단풍이 잔잔한 수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주산지의 물안개는 말할 수 없이 신비로웠다.
고사목처럼 기둥만 남은 왕버들나무가 물에 잠겨 있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준다. 거기다가 물가에 드리운 불타는 선홍빛 단풍과 금빛으로 빛나는 산색이 맑은 수면와 어우러져 깊은 정취를 더한다. 저수지의 수면은 그대로 거대한 캔버스가 되어 어느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여준다.
특히 해 뜨는 위치도 절묘하다. 버들 숲을 이루고 있는 뒤쪽에서 해가 떠오르며 뿌리는 빛과 호수와, 연록의 잎들, 그리고 몽환적인 물안개가 한데 어우러지면 빛과 그림자의 향연은 극치에 다다른다. '찰나'라고 해야 할 짧은 시간에 변화하는 풍경이다. 그야말로 만추의 산속의 호수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그림이다.
2003년 김기덕 감독,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야기
특이한 영화 세트 — ‘물 위에 떠 있는 암자’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관객을 끌어들이는 압권은 ‘섬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세트)이다. 업(業)으로 이어지는 인간사의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촬영의 현장이다.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의 산중에 자리 잡은 주산지. 3억 5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하여 3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전통예술장인들과 미술가 등으로 구성된 미술팀이 완성한 세트이다.
약 68평의 바지선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물 위를 부유하는 사찰’을 조성한 것이다. 물살과 바람을 타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사찰은 주위의 비경과 맞물려 환상적이고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물속에 반쯤 몸을 담근 150년 된 왕버들과 능수버들이 운치를 더한다. 호수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선(禪) 세계에 들어선 듯한 신비함을 자아낸다.
[봄] ... 업(業) ▶ 장난에 빠진 아이, 살생의 업을 시작하다.
아스라한 호수 위에 떠 있는 적막한 절간. 호수 위 암자와 세상을 이어주는 문이 열린다. 만물이 생성하는 봄. 호수 위의 작은 암자에 스님과 함께 지내는 천진난만한 동자승(김종호 분), 숲에서 잡은 개구리와 뱀, 또는 물고기를 아무런 생각 없이 돌을 매달아 괴롭히는 짓궂은 장난에 빠져 천진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승(오영수 분)은 잠든 아이의 등에 돌을 묶어둔다. 잠에서 깬 아이가 울먹이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승은 ‘잘못을 되돌려놓지 못하면 평생의 업(業)이 될 것’이라 이른다.
[여름]... 욕망 ▶ 사랑에 눈뜬 소년승, 집착에 빠지다.
아이가 자라 17세 소년승(서재경 분)이 되었을 때, 조용한 절에 몸이 아픈 한 소녀(차수아 분)가 요양차 오고, 청년이 된 소년승은 난생 처음 여자를 보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결국 ‘사랑을 저지른다.’ 소년승. 말하기를 “잘못했습니다! 스님!” 주지스님이 말한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라.” …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품게 한다.” — 소녀가 떠난 후 더욱 더 깊어져만 가는 사랑의 집착과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한 소년승은 결국 암자를 떠나고 만다.
[가을]... 분노 ▶ 살의를 품은 남자, 고통에 빠지다.
소년은 절을 떠난 후 십여 년 만에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사실 그는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 암자로 도피해 들어온 것이다. 그가 단풍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자 노승은 그를 모질게 매질한다.
[겨울]... 비움(公) ▶ 무의미를 느끼는 중년, 내면의 평화를 구하다.
남자는 노승이 바닥에 써 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칼로 새기며 마음을 다스리고... 남자를 떠나보낸 고요한 산사에 노승의 다비식을 치른다. 중년의 나이로 폐허가 된 산사로 돌아온 남자(김영민 역).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불상을 만들고, 겨울 산사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봄] ▶... 새로운 인생의 사계(四季)가 시작되다.
절을 찾아온 이름 모를 여인(박지아 분)이 어린 아이만을 남겨둔 채 떠나고... 노인이 된 남자는 어느 새 자라난 동자승과 함께 산사의 평화로운 봄날을 보내고 있다. 동자승은 그 봄의 아이처럼 개구리와 뱀의 입속에 돌맹이를 집어넣는 장난을 치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사계절에 담긴 인생의 사계
윤회(輪廻)로 이어지는 업보(業報)
천진한 동자승이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는 파란 많은 인생사가 신비로운 호수 위 적막한 암자의 사계(四季) 위에 그려진다. 윤회(輪廻)의 굴레 속에 얽혀있는 인간사를 통하여 욕망(慾望)과 비움[空, 진리]의 이치를 처절하도록 아프게 각인시킨다.
선업(善業)이 아닌 악업(惡業)을. 불가에서는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말한다. 업이 행위의 대상인 중생에게도 화를 입히지만 업의 주체인 자신에게는 더 큰 화를 입힐 수도 있다. 동자승은 자신의 몸에 돌이 매달림으로써 중생(영화에서 물고기, 개구리, 뱀)에게 가한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게 된다.
업(業)과 윤회(輪廻)
불교의 경전에서는 윤회(輪廻)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돈다고 설명한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 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 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 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윤회(輪廻)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 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업(業)의 결과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윤회는 계속된다. 윤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3계(三界)를 통해 전개된다. 3계는 다른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다. 그러나 업의 결과가 모두 소진되어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된다. 이것을 해탈 또는 열반이라고 한다. 그런데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시작이 없다(無始)고 말한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다. 부처님처럼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업이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업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은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인 윤회의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난 여운(餘韻)은 무겁다. 다시 봄이 왔지만 —.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외진 이곳 주산지가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그러나 영화의 세트장은 자연보존을 위해 영화 촬영 후 철거되었다. 결국, 주산지의 비경을 이루던 물위 암자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아, 색즉시공(色卽是空) —
본격적인 주왕산 산행
주왕산 절골 -신선한 가을 아침
☆… 주산지 탐방을 마치고 주왕산 산행에 돌입했다. 산행은 주왕산의 동쪽 ‘절골 탐방로’ —. 절골 깊숙이 들어가 계곡의 막바지에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가메봉(883m)’ 정상에 올라가 정상에서 주왕산 전경(全景)을 조망하고, ‘사창골’-‘후리메기삼거리’를 경유하여 ‘주방천 계곡’을 따라 ‘대전사’로 내려오는 노정이다. 주방천 계곡은 기암절벽의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상류로부터 ‘용연폭포’(제3폭포)→ ‘절구폭포’(제2폭포)→ ‘용추폭포’(제1폭포)의 절경이 이어진다.
오전 7시 20분, 주왕산 ‘절골탐방안내소’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아직 산곡에는 아침 햇살이 들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다른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하고 맑은 아침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곡. 계곡의 수량은 많지 않지만 맑고 깨끗했다. 그리고 은은히 가을 색을 띠고 있는 계곡의 풍경이 더없이 정결했다. 계곡의 가장자리로 난 산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나무테크 통로를 따라 절벽을 돌아가기도 했다. 절골 입구에서 1.5km 걸어서 들어가면 ‘선술골’, 맑게 고여 있는 계곡의 물이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이루고 있었다.
계곡을 가로질러 걷기도 하고 징검돌다리를 대원들이 열을 지어 건너기도 했다. 나무테크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기도 했다. 계곡은 점점 깊어지고 주위의 절벽이 솟아있고 작은 폭포가 바위를 타고 쏟아지고 있었다. 고요한 아침, 물소리가 더욱 산의 정적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계곡의 주위 곳곳에는 은은한 단풍이 물들어 계절의 정취를 더욱 깊게 했다. 가는 곳마다 맑게 고인 가을 물이 거울처럼 투명하다. 산이 높고 계곡은 깊다.
오전 8시 30분, 절골 입구에서 3.5km 들어간 지점, ‘대문다리’ 너럭바위에 이르렀다. 골이 깊어 아직도 아침 햇살이 내리지 않은 곳이다. 맑은 물가의 암반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대문다리에서 1km 지난 지점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로소 아침 햇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왕산 가메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고도를 높여가면서 숨을 가빠지고 다리가 팍팍했다. 산을 ‘가을산’이다. 산길을 올라갈수록 갈색과 노란색을 그린 맑은 수채화처럼 산의 가을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주왕산 가메봉 정상
오전 10시 정각, 주왕산 가메봉(883m) 정상에 도착했다. 시월의 맑은 햇살이 내리는 산봉이다. 가메봉은 주왕산 주봉(722m)에서 동북쪽으로 4.5km 이어진 산줄기에 솟아있는 고봉이다. 가메봉 깎아지른 절벽 위에 올라서면 전후좌우 주왕산의 첩첩산군이 시선을 압도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우리가 올라온 절골의 깊은 계곡도 은은한 가을빛을 띠고 있다.
가메봉에서 급한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이다. 사창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가파른 토산의 길을 30분 정도 내려오면 사창골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아름답다. 가을이 깊어 계곡의 물은 많지 않지만 간간이 고여 물이 수정처럼 맑다. 계곡 주위에는 선홍빛 붉은 단풍이 곱다.
오전 11시 45분, 사창골 후리메기삼거리(이정표)에 도착했다. 이곳 삼거리는 가메봉에서 2.6km 내려온 지점인데, 주왕산 주봉으로 가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사창골 계곡을 따라 1.4km 내려가면 ‘주방천’에 이른다. 맑은 햇살이 내리는 하늘, 선홍빛 단풍이 고운 계곡이다. 곳곳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이 거울 같다. 후리메기삼거리에서 1km 계곡을 내려오면 주방천(周房川) 계곡이다.
주방천계곡의 폭포와 기암절벽
주왕산의 고도는 높지 않지만, 산세가 서남쪽으로 열려 있는 ‘ㄷ’자 모양으로 그 서남쪽에 주왕산(722m), 동북쪽에 가메봉(833m), 동남쪽에 910고지, 북쪽에 금은광이(812m) 등의 산봉이 연해 있다. 그 중앙을 주방천(周房川)의 물이 흘러내리면서 제1폭포·제2폭포·제3폭포 등을 만들고 있다. 주왕산 주봉(전망대)과 가메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동남쪽에 절골이 있고 그 서쪽에 주방천계곡이 있다.
오전 12시 15분 주방천 제3폭포인 ‘용연폭포’에 도착했다. 용연폭포(鏞淵瀑布)는 주왕산 국립공원 폭포 가운데 제일 위쪽에 있으면서 가장 크고 웅장한 폭포로서, 물이 두 줄기로 떨어진다. 폭 48m, 길이 37m, 수심 4m의 규모를 지니고 있다. 구혈은 2단 폭포와 연결되어 있으며, 폭포의 왼쪽에서 3개, 오른쪽에서 1개의 해식동을 관찰할 수 있다. 제1폭포 용추폭포에는 동전 크기 정도의 피아메를 볼 수 있는데, 이곳 용연폭포에는 그보다 훨씰 큰 피아메를 관찰할 수 있다. 구혈(口穴)은 폭포 아래쪽에 생긴 원통형의 깊은 구멍으로 일명 돌개구멍이라고도 한다. 하식동(河蝕洞)은 폭포나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겨난 동굴을 말한다. 피아메(fiamme)는 크기가 4mm보다 작은 응회암질 화산재가 퇴적하는 과정에서 잠열과 압력으로 인해 검고 길쭉한 모양으로 굳어진 것을 말한다.
용연폭포에서 대전사로 내려가는 계곡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국립공원 주왕산은 암벽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압도한다. 주왕산에는 주방계곡에는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등이 신비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특히 주방계곡에는 기암(旗巖), 아들바위를 비롯하여 주왕굴(周王窟), 시루봉, 망월대(望月臺), 신선대(神仙臺), 연화봉(蓮花峯), 급수대(汲水臺), 학소대(鶴巢臺), 향로봉(香爐峯), 복암폭포(腹岩瀑布), 연화굴(蓮花窟), 좌암(座巖) 등이 있다.
주왕산 대전사(大典寺)
주왕산에는 대전사(大典寺)와 백련암(白蓮庵)·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다. 대전사는 최치원(崔致遠)·나옹화상·도선국사(道詵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무학대사(無學大師)·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 등이 수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승군(僧軍)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주왕산 대전사(大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919년(태조 2)에 주왕(周王)의 아들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 중기 실화(失火)로 전소된 뒤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 보광전 석가여래삼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6호), 보광전 앞의 삼층석탑 등의 문화재가 있다. 명부전(冥府殿) 안에 있는 지장삼존 및 시왕상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다.
현재의 사찰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흔적이 있는데, 이 우물은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원래 이 절에서는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를 매일 냇가에서 길어다가 올리고는 하였다. 이를 귀찮아한 승려들은 조선 중기 앞뜰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길어 청수로 사용한 뒤 화재가 나서 절이 불타버렸다. 그 뒤 성지도사가 와서 이 절의 지세가 배가 바다에 떠서 항해하는 부선형(浮船形) 혈(穴)인데, 여기에 우물을 파니 배 바닥에 구멍이 뚫어진 격이 되었기에 불이 나서 절이 타게 되었다면서 우물을 메우게 하였다고 한다.
청송 달기약수 한방백숙
달기약수는 조선 철종 때 한양에서 금부도사를 지낸 권성화가 벼슬을 버리고 청송에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다가 부곡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개울가 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약수터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기라는 명칭은 청송군 부내면 달기동 옛 지명을 따 온 것이라고 한다.
맑고 푸른 공기만으로도 이야기가 되는 힐링의 고장 청송. 여기에다 여름 보양식의 대명사인 닭백숙이 보태지면 그저 그만 더할 나위가 없다.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는 ‘닭익는 마을’ 부곡리 마을에는 원탕인 하탕을 비롯해 상탕, 중탕, 그리고 계곡 상류 천탕, 신탕 등 10여 개의 약수터가 자리잡고 있다. 바위틈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약수는 아무리 가물어도 분출되는 양이 일정하다. 약수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약수 백숙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다양한 미네랄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달기약수를 떠서 갖은 약재를 넣고 푹 고아 낸 약수한방 닭백숙은 비린 맛이 없으며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어서 남녀노소가 한자리서 즐길 수 있는 사계절 보양식이다. 약수로 밥을 지으면 약수에 함유된 철분으로 푸른빛이 돌며 밥이 더 찰지다. 약수로 닭고기를 삶으면 지방성분이 탄산에 의해 분해되면서 부드럽고 쫄깃한 육질의 닭백숙을 얻어 낼 수가 있다. 이 때문에 달기약수 닭백숙은 청송의 오래된 향토음식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게 되었다.
청송이 낳은 작가 김주영(金周榮)
김주영 객주문학관
청송에 가면 ‘객주문학관’이 있다. ‘객주문학관’은 2014년 6월 작가 김주영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개관되었다. 김주영(金周榮)은 청송이 낳은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객주』는 19세기 말 조선 팔도를 누빈 보부상(褓負商)들을 중심으로 민중 생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김주영의 대하소설로, 한국현대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문제작이다.
한국 역사 소설의 지평을 넓힌 『객주』를 테마로 문을 연 ‘객주문학관’은 폐교된 ‘진보 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한 4천640㎡ 규모의 3층 건물로 『객주』를 중심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담은 전시관과 소설도서관, 스페이스 객주, 영상 교육실, 창작 스튜디오, 세미나실, 연수 시설 그리고 작가 김주영의 집필실인 여송헌(與松軒)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 2전시실에는 작가 김주영의 집필 배경과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활동하던 보부상들의 활동상이나 조선 후기 상업사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꾸며 역사 및 상업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흥미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객주문학관은 특정 인물이나 작품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관·전시하는 기본적인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지역민과 소통하고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환경 조성에 이바지하며 여러 장르 예술인들의 창작 공간으로 폭넓게 운영되고 있다.
한국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우리 시대의 작가
민초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가 김주영
소설가 김주영(金周榮, 1939~ )은 청송(靑松) 출신이다. 정확히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가 작가의 고향이다. 진보는 서울에서 안동까지 고속버스로 3시간, 안동에서 다시 34번국도로 차를 타고 동해의 영덕 방향으로 한 시간을 가야 만나는 마을이다. 낙동정맥 태항산(주왕산 북쪽)에 발원한 ‘서시천’에 임해 있는 산골마을이다. ‘서시천’은 진보에서,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반변천에 합류한다. 그런데 월전리는 진보면에서 동쪽으로 4km로 떨어진 곳이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맑고 자연의 생태계가 싱그럽게 살아있는 고장이다. 김주영이 고향에서 보낸 유년을 ‘그토록 아름다웠던 애틋한 시절’이라고 말한 것은 저 청정하고 아름다운 풍광, 맑은 햇살 아래 꿈결인양 펼쳐진 풀꽃과 바람이 빚어낸 자연환경 때문이 아닐까.
김주영 문학의 뿌리를 거슬러 가보면 청송의 ‘진보’라는 마을에 닿는다. 진보는 그의 소설의 토대이자 토양이었다. 요즘도 5일장이 서는 '진보장' 바로 인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 가난한 시골 생활은 아주 재미없는 단편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 보는 것과 같았다. 갑갑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단연 인근에서 오일마다 서는 ‘장날’이었다. 장날만 되면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서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서 학교에 결석까지 하곤 했다고 한다. 장날만 되면 낯선 사람, 낯선 물건, 온갖 사투리, 쌈박질, 작부, 사기꾼까지 두루 구경하며 장거리를 배회하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김주영은 거기서 기른 호기심과 상상력이 훗날 ‘객주’를 쓰게 한 밑천이었다고 한다. 저자거리는 소년 김주영에게 바깥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자전적 성장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의 도입부에는 고향집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마을에서 면사무소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들머리에 궁핍을 겪었던 시절의 집이 있었다.… 울바자 너머로는 언제나 먼지와 허섭스레기가 흩날리는 장터거리가 있고, 거기선 닷새마다 한 번씩 저자가 섰다. 무싯날에는 내왕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휑뎅그렁하기만 해서 동네의 개들이 몰려나와 한가롭게 흘레를 붙곤 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서는 날엔 꼭두새벽부터 노점상들과 장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아침나절이 되면 그 넓은 장터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꽉 들어찼다.”
20대부터 30대까지 16년 동안 안동엽연초조합의 4급 주사 경리 직원으로 이름 없이 살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얼마 뒤 그는 〈휴면기〉(1971년)라는 작품으로 소설가로 제 이름을 알리는데, 그가 바로 김주영(金周榮)이다. 그후 10년 뒤 그는 『객주』를 통해 ‘길 위의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활빈도》, 《화척》』 등의 대하소설로 한국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우리 시대의 작가 김주영이 되었다.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탁월하게 재현해내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객주(客主)》 —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살아있는 민초의 애환과 파란만장한 이야기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과 봉우리를 나란히 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해온 대하역사소설이 김주영의 《객주(客主)》다. 《객주》는 ‘천봉삼’이란 보부상이 표면상 주인공이긴 하지만 길바닥을 떠도는 모든 민초들이 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근력과 근성”이라는 확고한 사관(史觀)에 기초하여 집필된 작품이 《객주》이다. 근대사에서 피지배자인 백성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샅샅이 다룬 소설은 그 이전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길산》과 《객주》는 역사소설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의 역사소설은 대개 궁중소설류였고, 역사는 정권을 손에 쥔 자들에 의해 전개된다는 의식을 가졌으나 《장길산》-《객주》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도둑과 보부상 같은 천민의 삶을 다뤘다.
* [세상으로 나온 소설 《객주》] — 1979년 6월 1일, 서울신문에 소설 『객주』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84년 2월 29일까지 4년 9개월 동안 1,465회에 걸쳐 1~9권, 이어 2013년 4월 1일부터 8월 21일까지 108회에 걸쳐 10권이 연재된 이 방대한 역사소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83~1984년에는 동명의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198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어 1984년 총 9권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문이당’을 거쳐 2013년에 ‘문학동네’에서 10권으로 완간되었다. 9권이 발간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첫 출간 이후 한 번도 절판되지 않았으며 10만 질 이상 판매되었다.
‘다시 서는 장날, 다시 열리는 보부상 길 …’ 소설 《객주》는 30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1984년 9권이 출간되었으나 김주영은 ‘완간’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천봉삼’을 비롯해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몇 등장인물의 행적을 끝까지 쫓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9년, 그는 지금의 울진과 봉화 사이에서 보부상길(십이령 길, 금강소나무길)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울진 흥부장에서 봉화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그 길은 조선 후기 울진의 염전과 내륙의 장시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로서 보부상들의 삶의 동맥이었다. 울진·두천(말내)에 서 있는 ‘보부상 반수’와 ‘접장’의 불망비(철비)가 발견되었으며, 주막과 장시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봉화 오전리에서는 지금도 보부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를 기초로 《객주》 10권 완간을 향한 작업이 재개되었다.
“봉놋방 구석”으로 밀려난 민중 생활의 세부를 풍부한 토속어 문체로 되살려 낸 《객주》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김주영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 소설사의 큰 성과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화석으로 굳어가는 조선 시대의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을 발굴하고, 당대의 풍속사를 유장한 서사 형식으로 완벽하게 재현한다. 평론가 황종연은 《객주》를 두고 “신분과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상인들의 모험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코드, 숱하게 많은 모략과 술수의 이야기들은 의협 로맨스의 코드, 저잣거리를 비롯한 사회적 장소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풍속 소설의 코드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객주》는 조선 말기의 특정 집단을 내세워 당대 풍속사를 꼼꼼하게 그려낸 작품일뿐더러, 더 나아가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이루어진 봉건 권력 집단의 와해와 사회 질서의 재편 과정을 실감나게 재현한 작품이다. 《객주》의 곳곳에는 당대 상업의 현황, 다시 말하면 특권 상업 체제인 시전, 그것과 대립하는 사상 도가(都家)와 난전, 전국 각처의 외장, 객주와 여각, 금난전권, 매점 매석, 밀무역, 개항 이후 왜상의 진출 상황 등 조선 말기의 물화의 생산과 유통의 양상이 사실적으로 더양하게 그려진다.
소설 속 주인공 천봉삼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다. 작가는 천봉삼을 “내가 닮고 싶은 인물이며 우리 시대의 자본가들이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창조한 상인정신의 표본으로 세운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도 널리 읽혀졌다는 소문이 있다. 특히 구자경 LG명예회장 등 많은 재벌 총수들이 《객주》를 읽고 공 사석에서 소설속의 상인정신을 언급하기도 했다.
《객주》는 1878년부터 1885년까지 보부상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조선후기의 시대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정의감, 의협심이 강한 보부상 ‘천봉삼’을 주인공으로 한 보부상들의 유랑을 따라가며, 경상도 일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근대 상업자본의 형성과정을 그리고 있다. 피지배자인 백성의 입장에서 근대 역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대하소설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작품으로 평가된다.
소설 《홍어》 — 열세 살 소년이 그리는 눈물겨운 수묵화
소설 《홍어》는 1997년 《작가세계》에 발표되었을 당시 문단으로부터 본격소설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찬사를 받았다. 폭설로 고립된 산골 마을에서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는 열세 살의 소년을 화자로 내세운 작품으로, 시적 상징과 서정적 묘사를 통해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김주영 작가가 이순(耳順)에 다다라 인생을 반추하듯 써 내려간 《홍어》는 열세 살 소년 ‘세영’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세영’은 유부녀와 통정(通情)한 뒤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했던 ‘홍어’를 부엌 문설주에 매달아두지만 아버지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홍어는 먼지와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말라갈 뿐이다. 세영은 정초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가오리연을 날리며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비상(飛上)하는 몽상에 빠져든다.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때문이다. 작가는 《홍어》에 대해 “아랫목에 앉아 인생을 반추하고 싶은, 아주 조용한 소설"이라 말한 바 있다.《홍어》는 김주영의 자전적소설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과 오지 않는 이를 조용히 기다리는 모자(母子)의 삶이 고요히 하지만 가슴속 깊이 다가오는 작품이다.
소설 《잘 가요 엄마》 — 평생 가슴에 응어리진 ‘엄마’
등단 4여 년,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작가생활 동안 김주영이 한 번도 그 이름을 올린 적 없었던 '엄마' —. 작가는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 수밖에 없는 그 이름을 비로소 소리 내어 부른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살아낸 모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길고 긴 산고를 겪고, 제 젖을 물리고, 제 살을 떼어내듯이 우리를 키워낸 어머니. 그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이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엄마의 이야기는 대가 김주영의 단련된 손끝에서 더욱 미련하고 촌스럽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진다. 소설은 엄마의 죽음을 배다른 아우에게서 전해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결국 제 발로 고향을 떠나 떠돌이로 살게 만든 엄마에 대한 원망을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엄마의 장례에 관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엄마에 대한 애잔함과 미안함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흔들리게 만든다.
산문집 《젖은 신발》 — 작가 김주영의 자전적 에세이
김주영의 첫 산문집 《젖은 신발》은 작가의 성장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작가 ‘임인식’의 미발표 흑백사진과 어울려, 읽는 이를 순식간에 1950, 60년대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의 풍경들, 소박했던 서민들의 삶을 특유의 따뜻한 문체로 그린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이들이 겪은 삶의 애환과 지난 시절의 정겨운 고향 풍경을 지금 시대에 올곧게 재현해놓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빛바랜 사진 속에 작가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돈이 없어서 운동화를 사지 못하고 심지어 친구들과 찍은 사진마저 찾지 못하는 상황 등이 그렇다. 《젖은 신발》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모습이 일관된 주제에 담겨 있고, 따뜻하고 정겨운 우리만의 고유 정서가 올곧게 재현되어 있다.
김주영의 인생과 문학
김주영은 절륜의 술 실력으로 유명하다. 노래판이 벌어지면 ‘개화창가에서 신·구잡가,신체유행가’를 거침없이 부르고 재담(才談)에도 능하다. 또한 김주영은 여행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소설에서 번 돈을 모두 여행에 쏟아 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작가는 여행할 때 결코 메모를 하지 않는다. 그 공간과 그 나라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낄 뿐이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으로 《객주》, 《활빈도》, 《화척》, 《홍어》, 《천둥소리》, 《외촌장 기행》, 《아라리 난장》,《도둑견습》 , 《잘 가요 엄마》 등이 있다. 1983년 《외촌장 기행》으로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 《객주》로 ‘제1회 유주현 문학상’을 수상했다. ‘제8회 이산문학상’에 《화척》이, ‘제6회 대산문학상’에 《홍어》가 선정됐다. 《아라리 난장》과 《멸치》는 각각 ‘제2회 무영문학상’과 ‘제5회 김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객주》는 1983년과 2015년에 드라마로 제작됐으며 만화가 이두호에 의해 만화로 간행되기도 했다.
청송의병
청송(靑松)은 전국에서 ‘의병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의병사(義兵史)에 있어 정신적인 선각자들의 연고지다. 의병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임란 초에 퇴계(退溪) 이황, 남명(南冥) 조식 두 학자의 후학(後學)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청송(靑松)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퇴계(退溪) 선생의 본향이 청송의 진보(眞寶)이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관군과 곽재우 의병을 규합하여 진주성을 사수한 학봉(鶴峯)이 태어난 곳이 청송의 안덕(安德)이며, 의병승장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또한 주왕산 대전사에서 의병을 훈련하였다.
이러한 토양위에서 청송의 선비는 평시에는 수신제가(修身齊家) 하다가 나라가 부르면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 있으면서 고을을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국가가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는 모름지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분연히 일어나 충의보국의 일념으로 힘이 다할 때까지 처절하게 항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양란 시 청송지방의 항전사가 있다. 1592년 시작되어 7년 동안 조선의 온 국토를 유린한 왜란에 청송인들이 의병에 많이 참여했다. —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의 《임란일기(壬亂日記)》, 영천(永川) 권응수(權應銖)의 《임란동고록(壬亂同苦錄)》과 지악(芝嶽) 조동도(趙東道)의 《화왕산회맹록(火旺山會盟錄)》등이 있어 이를 상고하여 대략 당시 의병진에 참여하여 순절하고 또 공을 세운 분들과 보급에 공이 있는 분들을 기록하고 있다. ☞ [자료] 청송군지에 의하면 —
☞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의진에 참여한 의병]은 조형도(趙亨道), 남윤조(南胤曺), 조동도(趙東道), 권준(權晙), 신지남(申智男), 권소(權昭), 안윤옥(安潤屋), 권완(權), 김사형(金士亨), 권의립(權義立) 등이다. * [영천 권응수(權應銖) 의진에 참여한 의병]은 김몽린(金夢隣), 김몽구(金夢龜), 김몽기(金夢麒), 김성원(金聲遠), 김성달(金聲達), 김몽룡(金夢龍) 등이고, * [독자 기병(起兵)한 의병]은 손응현(孫應峴), 심정(沈汀), 서사원(徐思遠), 서사술(徐思述), 이응의(李應義), 이정백(李庭柏)이다. * [단신 항왜하다가 순절한 의병]은 김응하(金應夏)·김응상(金應商)·김응주(金應周)(3형제), 신예남(申禮男)이며 * [기타 의진(義陣)에 참여한 의병]은 이홍중(李弘重), 최충손(崔忠孫), 최응삼(崔應參) 등이다. * [군관에서 참전한 의병]은 심정(沈汀), 심호(沈湖), 장후완(蔣後琬), 정운(鄭雲) 등이며 * [보급에 유공한 의병]은 심청(沈淸)이다. 심청은 본군에서 동래까지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다.
* [병자호란 당시 청송의진 항전사] ☞ 1636년 청군의 침입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청송에서 의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인사와 수절인사로 군내에서 전란을 피하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많은 인사가 있었다. * [병자호란 때 쌍영전투순절자(雙嶺戰鬪殉節者)]로 윤충우(尹忠祐)가 있다. (☞《병자순절록》 청송의 선비 권일력은 쌍영전투(雙嶺戰鬪) 중 마상(馬上)에서 전사하니 승마(乘馬)가 천리 길을 그 시신(屍身)을 실고 돌아오니 세칭 ‘의마(義馬)’라 하였다.
* [수절인사(守節人士)] 고응섭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병자호란에서 임금이 삼전도에 굴욕적인 항복을 소식을 듣고 현동면 월매리 단서굴(丹書窟)에서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申機), 김몽추(金夢鰍) 등은 정묘호란에 전공이 있다.
* [구한말 의병활동]은 1895년 10월의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弑害)와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하여, 개항이후 축적되어온 반일감정이 반일(反日)의병투쟁으로 바뀌면서 청송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1896년 청송의진, 진보의진, 산남의진이 청송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 [계속] ☞ [반변천 수계] ▶ 안동시 임동·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