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다리가 불편한 조제.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된 츠네오.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피어난 사랑이 결국에는 시간을 따라 흘러 이별로 흩어지게 되네요.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이 이별을 통하여 사랑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던 조제는 홀로 남겨지자 겁을 먹고 자포자기하며 망가지게 됩니다. 그랬던 그녀가 츠네오를 만나 변화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호랑이)을 이겨내며 시작하여, 깊은 바닷속을 헤엄쳐 나온 물고기처럼 절망을 벗어나며 끝을 맺습니다. 사랑은 왔다가 갔고. 조제는 변하였습니다.
결국 헤어졌지만, 조제는 "사랑과 함께 했던 순간"을 지나 변화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가치는 이별했다고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만나 달라진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으로 돌이켜보면, 주체할 수 없는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기 쉬운 '끝나버린 사랑'을 그래도 조금은 의미있다 소중하게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다. 그 때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가 있는 것이니까요.

2) [냉정과 열정 사이], 2003


10년의 세월을 거치며 재회와 엇갈림을 반복한 두 남녀의 사랑이네요.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열정이라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자 앞세우는 현실은 냉정입니다. 그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주춤거리는 사랑은 항상 냉정을 택하면서도 열정을 저버리지 못하여 10년이란 시간동안 이어져왔네요.
그저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아름답게 완성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사랑은 지켜가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지켜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하는 길고 긴 세월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더군요. 그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오해와 갈등. 흔들리는 믿음 등등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이 날카롭게 마음을 헤집으며 들이닥치는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지키는 것이 열정이요, 그렇기에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냉정입니다. 사랑의 열정과 냉정은 영화 속 주인공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란 이름으로 붙었다 떨어지는 모든 인연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인거죠. 시험에 들지 않을 만큼 쉬운 사랑은 결코 세상에 없으니까요.
열정을 택한다면 그 사랑은 미래로 이어질 테고, 냉정을 택한다면 그 사랑은 과거로 흘러가겠지요.

3)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04


여주인공 미오는 긴 꿈을 꾸고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자신을 아내로, 어머니로 대하는 낯선 두 남자와 가족으로 지냈지요.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그녀에게는 이제 선택지가 놓여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그 미래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삶을 택할 것인가? 물론 그녀는 어렵지 않게 답을 정합니다. 도저히 그 두 남자와 함께 하지 않는 삶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엔딩. 도저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향하여 그녀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참 기가 막히게 멋진 제목이네요.
요즘은 사랑이란 단어에조차 물질적 잣대를 들이미는 이들이 많지요. 그렇게 물욕의 대상으로써 사랑을 다루는 것이 얼핏 보면 똑똑해 보일 수도 있고요. 세상의 많은 목소리들이 그렇다 위세를 떠드니까요. 하지만 그 헛똑똑이들이 멋모르고 내뱉는 소리에만 휘둘리느라, 정작 자신의 안에서 움트는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인 미오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사랑하며. 또 그들에게 사랑받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한 이유. 그 소중한 온기를 너무 쉽게 포기하진 않기를 바랍니다.

4) [무지개 여신], 2006


마음에 든 여성에게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필요했던 토모야와 필름 값이 필요해 그 부탁을 들어준 아오이는 그렇게 처음 만났네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긴 시간을 동행했습니다. 사랑이 되어버린 이는 바보처럼 머뭇거렸고, 아직 우정에 머물던 이는 바보같이 둔감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떠나고 대신 무지개만 남았네요.
비가 다 지나야만 무지개가 보이듯이. 다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사랑을 만나네요. 적극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기에 알아보지 못했었고, 이제는 알아도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연을 지켜보노라면 괜시리 애꿎은 감성이 잔잔히 스밉니다. 손끝에서 닿을 듯하면서도 끝내 빗겨가곤 하는 것이 사랑의 묘한 속성인지라.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혹은 나 참 바보같구나 투덜거렸던 그 언젠가의 애틋함이 다시금 떠오르기 때문이겠지요.
이루어지지는 않았기에 사랑이라 부르기엔 다소 애매한 그(녀)를 그래도 우리는 누구나 추억 한켠에 사랑으로 간직하니까요.

5)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2006


다소 엉뚱한 매력을 지닌 소녀 시즈루. 그런 그녀와 어느샌가 가까워진 마코토. 둘만의 숲에서 함께 사진을 찍는 그들입니다. 서로의 감정이 사랑으로 이어질 듯 아닐 듯 미묘하게 달라붙은 달달한 감성을 머금고 흘러갑니다. 현실 속 어설픈 짝사랑이 그러하듯. 어정쩡한 거리에서 용기 내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확 뒤돌아서지도 못하는 소녀와 그 마음 몰라주는 답답한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일상의 공기처럼 흐르는 감성의 리듬과 취향이 잘 맞는다면 풋풋한 설렘에 젖어들며 감상할 수 있는 영화네요. 인위적인 느낌이 짙은 동화적인 결말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런 엔딩이 "기어이 닿지 못한 결핍"이기에 품을 수 있는 애잔한 아름다움을 전해주기도 하네요. 사랑때문에 죽는 병. 죽을만큼 무언가를 사랑하지 못해본 이들 혹은 못하는 이들에게는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겠지요.

6) [태양의 노래], 2007


XP(색소성 건피증)라는 병을 앓고 있는 가오루. 햇빛에 노출되면 안 되는 그녀는 철저히 야행성으로 외롭게 생활합니다. 그러다 매번 창 밖으로 구경만 하던 코지에게 용기를 내어 마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풋풋한 사랑이 펼쳐지네요. 삶을 낭비하듯 흘려보내던 소년은 "열심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다가오는 끝으로부터 도망만 치던 소녀는 "지금을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좋은 사랑으로 만났네요.
시한부 인생을 짊어진 소녀의 사랑. 그 예정된 비극을 향하여 진행되는 영화는 결코 슬픔을 쥐어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동력 삼아 지금의 하루하루를 더욱 찬란하게 빛내기 시작하는 그들의 바뀐 삶의 온도를 전합니다. 불치병이라는 소재가 뻔한 신파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 영화를 타고 흐르는 OST가 이리 여운 짙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가 죽음을 맞이할 "끝"이 아니라 그들이 채워가는 "생(生)의 충만함"을 비추기 때문이겠네요. 사랑에 있어서도, 삶에 있어서도 나태함에 흐느적거리던 마음에 잔잔한 간질거림이 퍼집니다.

7) [새 구두를 사야해], 2013


방황하는 20대의 남성과 외로운 40대의 중년 여성의 파리에서의 짧은 만남을 다룹니다. "파리(Paris)"라는 낯선 공간. "3박4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여행이 지니는 묘한 마력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남녀의 길지 않은 만남을 깊은 인연으로 접착시키네요. 로맨스보다는 힐링의 감성이 알알이 배여 나오는 작품입니다.
현실에 타협한 청년은 "가야 하는 길"을 몰라서 서성이며 방황하다가 길 안내를 해주는 여자를 만났고. 외로움에 지친 중년의 여인은 "아픔을 달랠 쉼터"가 없어 과거를 끌어안고 정체 중이다가 잠시 기댈 품을 빌려주는 남자를 만났네요. 그렇게 젊음은 미래를 향한 격려를, 중년은 마음을 달랠 위로를 얻습니다.
마음에 흔들림 없이 단단한 에펠탑을 세운 남자는 이제는 배고프더라도 꿈을 삼키지 않을 것이고. 새 구두를 선물 받은 여자는 주저앉은 삶에서 벗어나 또각또각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8) [연애사진], 2003


친구와 연인 사이 그 어디 즈음에 자리잡은 첫사랑. 그 추억. 그리고 사진.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무지개 여신] 등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일본멜로 코드의 시초가 아닐까 싶네요. 사진을 매개로 하여 영상으로 자아내는 서정성은 오히려 가장 뛰어납니다. 생뚱맞은 결말로 이어지는 후반부가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여행과 사진에 대한 낭만을 감성적으로 담아낸 전반부만큼은 참 매력적입니다.

9) [전차남], 2005


일명 오타쿠인 전차남은 전철에서 추태를 부리는 취객으로부터 여자를 구해냅니다.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한 이 연애초보가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얻어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라는 점. 인터넷에 올린 전차남의 사연이 이슈가 되어 책, 만화, 드라마, 영화까지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이한 열풍은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은 서툰 사랑에 간절히 조언을 바래봤기 때문이겠지요.
영화자체는 평이한 편이지만, 연애쑥맥이 어떻게 사랑을 쟁취하는 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소재 자체가 매력이네요.

10) [러브 콤], 2006


키가 너무 작아서 슬픈 남자 오오타니. 키가 너무 커서 슬픈 여자 코이즈미. 그들의 아기자기 유치뽕짝 하이틴로맨스입니다. "러브 콤플렉스"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며, 일본 코미디 특유의 오바와 과장이 난무하므로 취향을 좀 많이 타는 스타일이네요. 거북함만 느끼시지 않는다면 킥킥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감상하실 수 있겠습니다.

11) [허니와 클로버], 2006


낡은 아파트에 모여 살게 된 미대생들 사이에 펼쳐지는 청춘로맨스입니다. 청춘이란 단어가 지니는 싱그러움은 아직 빈 여백이 많이 남은 캔버스처럼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퍼져나오는 것이겠지요. 미완성의 불안과 가능성의 설렘이 공존하는 청춘이 꿈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고꾸라지고 또 다시 일어나면서, 자신의 캔버스에 색을 채워갑니다.
5명의 주인공을 내세운 산만함과 잔잔한 흐름 탓에 호불호는 다소 갈리겠지만, 아직 무언가 거머쥔 것이 없는 빈손이기에 더 자유롭고 생기로운 청춘의 눈부신 반짝임만큼은 잘 담긴 작품입니다.

12) [리틀 디제이], 2007


일본판 "소나기"라 칭할 수 있겠네요. 병원에서 라디오 DJ를 하게 된 백혈병 소년과 그가 사랑하게 된 소녀. 그리고 병원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와이 슌지의 조감독 출신답게 익숙한 흐름 속에서도 마음이 젖어드는 감성을 잘 끌어내는 영화네요.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어린 소년과 소녀를 중심으로 하는 청아한 감수성이 전해집니다. 병원사람들 사이의 슬픔을 머금은 따스한 정서도 마음을 울리네요.

역시나 이번에도 사랑에 대한 에세이와 영화소개를 왔다갔다 하는 성격의 글이 되었네요.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인지라 사랑이 불필요하고 유치한 사랑타령으로 취급하는 시선이 없지 않아 있는 요즘입니다. 아무래도 사랑이 밥 먹여주진 않으니까요.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적어도 사랑이 밥맛 끝내주게 만들어주긴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없이 살 수는 있겠지만, 한 번 뿐인 인생. 기왕이면 사랑 충만하게 살아가시길 응원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