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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2권 계방일기(桂坊日記)
1. 갑오년(1774, 영조 50)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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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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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을미년(1775, 영조 51)
8월
26일
내집 3권 서(書)
1. 정광현에게 주는 편지[與鄭光鉉書]
2. 미호 선생 김원행에게 올리는 편지[上渼湖先生金元行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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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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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어떤 사람에게 주는 편지 두 편[與人書二首]
16. 유경여의 호기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편지[答兪擎汝浩氣問書]
내집 3권 서(序)
1. 주도이에게 주는 서문[贈周道以序]
영남(嶺南)은 본디 동국(東國)의 관민(關閩)이라 일컫는다. 회재(晦齋)와 퇴도(退陶)가 앞서 인도하고,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이 뒤에 잇달았으니, 염락(濂洛)의 시절이 이때에 융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우옹(金宇顒)과 정인홍(鄭仁弘)이 앞서 변고를 일으키고 정희량(鄭希亮)과 이인좌(李麟佐)가 뒤에 난리를 일으켰으니, 어진 이와 정직한 자를 모해하는 의론과 하늘을 욕하고 해를 꾸짖는 무리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러므로 빙 둘러있는 72주(州)가 이적ㆍ금수의 지경에 빠져버린 지 아마 백 년이 넘으리라.
이 때를 당해서 주군(周君) 도이(道以)란 사람이 칠원(漆原)에서 생장하였는데, 퇴도(退陶)의 친구였던 신재공(愼齋公)의 후손으로서 나이는 30이 채 못되고 체구는 7척(尺)이 차지 않았으나 몹시 슬퍼하는 모습으로 그 조상의 일을 기술[述]하고 회재와 퇴도의 업(業)을 계승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향리(鄕里)가 배격했으나 그는 마음이 더욱 굳었고, 친척이 비웃었으나 그는 뜻이 더욱 돈독했던 것이다. 천리 길을 가볍게 여기고 여강(驪江) 위에서 스승을 따랐고, 서울 안의 모든 현자(賢者)의 집에 왕래하였다.
그를 본 모든 현자들은 또한 그의 뜻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4년 동안 나그네 생활로 쌀가루를 먹고 박나물을 씹었으나 그래도 부족해서 의복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 몸 또한 병이 많았으나 추위와 더위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아! 도이 같은 이는 맹씨(孟氏)가 이른바 ‘호걸의 선비[豪傑之士]’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듣고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더니, 계유년(癸酉年) 동짓달에 석실 원중(石室院中)에서 처음 만났었다. 그는 얼굴이 희고 눈동자가 분명하며 기질이 맑고 말씨가 적었다. 한번 보아도 그가 조용하고 욕심이 적은 선비인 줄을 알 수 있었다. 한달이 넘도록 함께 거처했는데, 비록 묵은 병이 간혹 발작되었으나 글 읽는 소리가 아침 저녁으로 그치지 않았으니, 도(道)를 구하는 돈독한 마음과 배움에 나아가는 용맹은 지금 세상에 구하여, 아마 상대될 짝이 적을 것이리라. 나처럼 게으른 자도 매양 자고 싶은 생각이 나고 정신이 흐려질 때에 그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경계하고 깨닫게 되었으니, 그대는 나에게 도움된 것이 많았다.
그대는 나를 보잘 것 없이 여기지 않고 상종할 만한 자로 대하고자 하였으나, 나는 감히 당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러나 나도 또한 전혀 뜻이 없는 자는 아니다. 그 뜻과 도가 진실로 같지 않음이 없어서 잘못을 간하고 착함을 권한다면 나도 끝내 사양하고 싶지 않고, 또한 그대에게도 희망이 없을 수 없다. 지금 나는 장차 서원(書院)에서 경성(京城)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대도 장차 내년 봄이면 다시 여강(驪江)으로 향하여 그 길로 재[嶺]를 넘어 남쪽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뒷 기약이 막연하다. 어진 자의 증언(贈言 글을 지어줌)하는 일은 비록 감히 할 수 없으나 아녀자(兒女子)의 석별(惜別)하는 태도야 내가 어찌 하겠는가? 장차 우리가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을 가지고 일러줌이 마땅할 것이다.
요순(堯舜)의 덕은 이치뿐이니, 나와 자네도 그 이치가 있고 요순의 능함은 마음 뿐이니, 나와 자네도 그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하면 요ㆍ순이 되고 아니하면 걸ㆍ주(桀紂)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자네로서 함께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요ㆍ순의 성인(聖人)이 된 까닭은 일마다 그 이치에 알맞게 했기 때문이고, 걸ㆍ주의 하우(下愚)가 된 까닭은 일마다 그 이치에 알맞게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구하지 않음을 걱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하겠는가? 옛날 학자들은 격우 한 가지의 일을 알면 즉시 그 일을 행하되, 마치 한번 뺨을 치면, 한 손바닥에 피가 맺히고, 한번 몽둥이로 때리면, 한 가닥에 흔적이 생기듯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입만 열면 곧 성선(性善 인성(人性)은 원래 착하다을 말하고 말만 하면 반드시 정ㆍ주(程朱)를 일컬으나 재주가 높은 자는 훈고(訓詁)에 빠지고, 지혜가 낮은 자는 명예와 이욕에 떨어지고 있다. 아아! 성인이 좋은 줄을 뉜들 모르랴마는 세상에는 그에 알맞는 사람이 없고, 하류(下流)가 나쁜 줄을 뉜들 모르랴마는 뭇 사람은 모두 그에로 돌아가도다. 이는 다름 아니라 행하지 않은 탓이다. 사람이 능히 그 아는 바를 행한다면 어찌 옛 사람에게 미칠 수 없겠는가? 정일(精一 정미하고 전일함)을 읽으면 정일로 가야하고 경의(敬義 공경하고 의로움)를 읽으면 경의로 하는 것이니, 나는 자네에게 〈행(行 행하라는 뜻)〉이란 한 글자를 주는 바이다.이때에 그대가 《심경(心經)》을 읽는 까닭에 이런 말을 한다.
[주D-001]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의 호.
[주D-002]퇴도(退陶) : 이황(李滉)의 호.
[주D-003]여헌(旅軒) : 장현광(張顯光)의 호.
[주D-004]염락(濂洛) : 염(濂)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출생지, 낙(洛)은 정명도(程明道)의 출생지이니, 즉 도학(道學)의 연원을 가리킴.
[주D-005]김우옹(金宇顒) :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주D-006]정인홍(鄭仁弘) :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庵).
[주D-007]신재공(愼齋公) : 주세붕(周世鵬)의 호.
[주D-008]걸ㆍ주(桀紂) : 걸(桀)은 하(夏) 나라의 끝 임금, 이름은 이계(履啓). 주(紂)는 은(殷) 나라의 끝 임금, 이름은 수(受). 둘 다 폭군이었음.
2. 향약서(鄕約序)
향약(鄕約)은 옛부터 있었다. 삼대(三代) 때의 법은 향전(鄕田)에 정(井)을 같이 하여 출입할 때에 서로 동반(同伴)하고 질병이 있으면 서로 도우며, 상서(庠序)와 학교(學校)의 가르침을 삼가하고,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의리를 밝혔다. 이것은 백성의 풍속을 두텁게 하고 다스리는 교화를 높여서, 고을에 폐퇴한 행동이 없게 하고 나라에 도적의 걱정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세 이후로는 왕도(王道)가 닦여지지 아니하므로 민심은 날로 무너지고 법만 가지고 행한 때문에 풍속은 점점 각박해진다.
아아! 이 어찌 백성의 선악(善惡)이 고금이 다르겠는가? 다만 수령(守令)의 인도하는 방법이 그 올바르지 못한 때문이다. 나주(羅州)라는 고을은 폭원이 넓고, 인구ㆍ물산이 많으니, 실로 전국에서 웅부(雄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는 어진 법이 없고 아래에는 착한 풍속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마음을 주장하여 서로 통섭(統攝)되지 않는다. 이런 때문에 명령이 행해지지 못하고 송사만이 날로 늘어나서 악한 자는 꺼려할 것이 없고 착한 이는 법받을 바가 없게 되었다.
내가 이것을 두렵게 여기고 고을 어른들과 바로잡을 계책을 상의한 끝에 이 향약(鄕約)의 법을 설시하였는데, 이는 찬동한 여러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그 규모와 조항은 모두 전현(前賢)이 이미 행한 규범(規範)을 참작하고 예나 지금이나 통해 쓰는 제도를 가렸는데, 삼대(三代) 때 남긴 뜻을 근본으로 삼았다. 아아! 흉년에 굶주린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진 지 오래 되었도다.
그런데 전지(田地)를 분배하고 재산을 제정하는 정사를 능히 베풀지 않고 법도와 예의의 가르침을 우선으로 한다면 누구인들 우습게 여기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법이 없는 것은 근심하지 말고 정성껏 행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할 것이다. 무릇 이 향약에 입회한 사람으로서 진실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규약을 지켜,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군자(君子)에게는 곤궁함을 잘 견디어 범람한 짓을 못하게 하고 소인(小人)에게는 위엄을 두려워해서 허물이 적도록 하면 반드시 풍속과 교화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후일 왕정(王政)을 행할 때에 또한 이것이 법으로 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힘써 해야 할 것이다.
[주D-001]삼대(三代) : 하(夏)ㆍ는(殷)ㆍ주(周)를 칭함.
[주D-002]상서(庠序) : 삼대(三代) 때의 학교의 별칭
3. 권무사목서(勸武事目序)
무사(武事)란 백년토록 쓰지 않는 것은 가하나 하루라도 강습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란 시기에 강습하면 외구(外寇)를 막고 왕실(王室)을 호위할 수 있으며, 평화 시대에 강습하면 간인(奸人)들의 넘겨 봄을 끊고 화란(禍亂)의 싹을 막을 수 있다. 이는 싸우지 않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며 병가(兵家)에서 이른바, ‘좋은 중에 가장 좋다.’는 것이다.
나주(羅州)는 산해(山海)의 중간과 수륙(水陸)의 요충 지대에 위치하였으므로 민물(民物)이 번성하고 재곡(財糓)이 풍부하다. 서쪽으로는 청제(靑齊)와 접근하고 남쪽으로는 도이(島夷 일본)와 이웃하였으니, 은연중 남해(南海) 연안의 울타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장(保障)의 대책과 군기(軍器)의 준비를 이 한가한 시기에 새롭게 정련하여 쓸 때를 대비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소인(大小人)을 막론하고 모두 게으르고 편안함에 습성이 되어서, 창이나 칼집을 몸에 휴대하여 한갓 겉치레만을 숭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활을 들면 명중(命中)한다고 장담하나 실용(實用)은 볼 수 없고, 혹 시사(試射)할 때를 당하면 모두 어긋나고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움직일 때마다 법도를 잃는 것이다. 이같은 자들을 만약 외구(外寇)의 난리가 갑자기 일어날 때에 호령해서 기고(旗鼓)의 아래로 몰아들인다면 저들이 어찌 적의 갑옷을 뚫거나 말[馬]을 쏘아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겠는가? 아아! 이는 어찌 사람의 재력(才力)이 미치지 못한 바만이 있어서랴? 이것은 윗사람이 원대한 계획을 하지 않고 옛 관습을 편케 여겨서, 그 벌(罰)이 족히 징계할 수 없고 상(賞)이 족히 권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쓸모 없는 선비로서 외람되이 이 고을 수령(守令)이 되었다. 본디 도략(鞱略)이 없을 뿐더러 활쏘기와 말달리는 것도 익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음우(陰雨 비상시를 비유함)에 대한 준비와 강무(講武)에 관한 방법만은 일찍이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군교(軍校)들을 모두 집합시킨 다음, 격려하고 권장할 계책을 물었더니 모두 이르기를, ‘예전에는 권무청(勸武廳)이 있었는데, 한달 동안에 두어섬 쌀을 소비하면서 한 고을 사람들을 시사(試射) 시키되 그 중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 이것이 해마다 상례(常例)가 되어서 사람들은 모두 그 상을 영화로 여기고 얻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서로 다투어 연습하여 혹 뒤질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엔 활 잘 쏘기로 이름난 자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이 없어지자 연습하는 자가 날로 적어져서 활 쏘는 기술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한다. 나는 그 권장하는 바가 없어진 까닭에 그들의 재주가 스스로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드디어 사봉(私俸)을 덜어내어 상줄 자료를 준비한 다음 규모와 조목은 모두 옛 제도를 따랐으니, 뜻 있는 자는 거의 권면할 바를 알아서 흥기(興起)할 것이다. 그러나 활 쏘기란 진실로 병가(兵家)의 장기(長技)라 할지라도 또한 한 사람을 대적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올바른 방법으로 쓰지 않으면 비록 유궁후예(有窮后羿)나 양유기(養由基)와 같은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그 교(巧)함을 베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요량하고 적을 헤아리며, 꾀를 내고 기틀을 결정함이 장막[帷幄] 속을 벗어나지 않아서 천리 밖의 적을 억누르는 것은 그 공이 진실로 활 쏘는 데에 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낮은 졸병 사이엔들 어찌 그럴사한 사람이 없다 하겠는가? 이는 사람마다의 스스로 힘 씀에 달려 있는 것이며, 더욱 오늘날에 무사(武事)를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D-001]청제(靑齊) : 중국의 지명.
[주D-002]명중(命中) : 활 쏠 때 겨냥한 곳을 바로 맞춤.
[주D-003]양유기(養由基) : 춘추 시대 초(楚) 대부(大夫), 활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4. 대동풍요서(大東風謠序)
노래[歌]란 그 정(情)을 말하는 것이다. 정(情)이 말에 움직이고 말이 글에 이루어지는 것을 노래라 한다. 교졸(巧拙)을 버리고 선악(善惡)을 잊으며 자연을 따르고 천기(天機)를 발하는 것은 노래의 우수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은 허다히 이항(里巷)의 가요(歌謠)를 따랐으므로 혹은 덕성(德性)을 함양하는 교화가 있고 또 아름답지 못함을 풍자하는 뜻도 있다. 그러니 진선진미한 강구요(康衢謠)에 비하면 비록 손색은 있으나 진실로 모두가 그 당시의 정당한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때문에 방국(邦國)이 아뢰면 태사(太師)가 이를 채취하여 관현(管絃)에 올려서 연락(宴樂)에 사용하여, 상숙(庠塾)에서 거문고를 타고 글을 외우는 선비나 전야(田野)에서 패랭이를 쓰고 농사짓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기뻐하고 감동하여 날로 착함에 옮기되, 스스로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시(詩)의 교화가 아래로부터 위에까지 통달한 것이다. 주(周) 나라 이후로는 화ㆍ가(華夷)자 뒤섞여 방언(方言)이 날로 더욱 변하고, 풍속이 각박하여 거짓말이 날로 더욱 늘어났다. 방언이 변함으로 시(詩)와 노래의 그 체(體)가 다르게 되고, 거짓말이 늘어나므로 정과 글이 서로 응하지 않았다. 이런 때문에 성률(聲律)만 교묘하고 격운(格韻)만 높았으니, 생각함은 비록 세밀하나 그 자연스러움은 더욱 없어지고, 소리는 비록 올바르나 그 천기(天機)의 참다움은 더욱 잃어버렸다. 이로써 풍아(風雅)를 잇고 나라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또한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보건대, 이항(里巷)에서 지은 가요는 자연의 소리 그대로 나온 것이므로 곡조와 박자(拍子)는 비록 화ㆍ가(華夷)가 간격이 있을지라도 간사하고 정직함은 그 풍속을 많이 따르는 것이었다. 장(章)으로 나누어 운(韻)에 맞게 하고 사물(事物)에 감동되어 말로 형용한 것은 진실로 곡조는 다르나 이른바, ‘오늘날의 음악과 같다.’는 것이다. 이에 그 글이 옛것을 본받지 않고 문장으로 만들은 것이 조잡하고 속되다 하여, 방국에서 아뢰지 않고 태사(太師)도 채취하지 아니하여, 그 당시에 있어서도 음률에 맞추어서 천자(天子)에게 드릴 수 없게 하고, 후세의 사람도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의 자취를 상고할 수 없도록 하였으니, 대개 시교(詩敎)의 멸망함이 여기에서 극도로 된 것이었다.
조선(朝鮮)은 본디 동방(東方)의 오랑캐[夷]이다. 풍기(風氣)가 좁고 얕으며 방음(方音)도 분명치 못해서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시률(詩律)의 공교함이 중화(中華)에 비교하면 동떨어지게 미치지 못했으니, 사조(詞藻)로 된 체재(體裁)는 더욱 들을 것이 없다. 그 소위 노래란 것은 모두 항간에 퍼져 있는 상말로 엮었는데, 간혹 문자가 섞여 있다. 옛 것을 좋아하는 사대부(士大夫)로서는 가끔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서 많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므로 그 말이 얕고 속되다 하여 군자(君子)는 모두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경(詩經)에 이른 풍(風)이란 것도 본디 풍속을 노래한 보통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듣던 자도 지금 사람이 지금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아니하였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오직 그 입에서 나오는대로 노래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혹 곡조에 알맞게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진(天眞)이 드러나면 초동(樵童)과 농부(農夫)의 노래라 할지라도 또한 자연에서 나온 것이니, 말은 비록 옛 것이니 그 천기(天機)를 깎아 없앤 사대부로서 이것저것 주어 모아 애써 지은 것보다는 도리어 나을 것이다. 진실로 잘 관찰하는 자가 자취에 구애하지 않고 뜻으로써 미루어 간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감발(感發)하여 결국 백성답게 되고 풍속을 이룸에 돌아가도록 하는 의의는 애당초 고금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그 비유함을 취하고 흥(興)을 일으키는 뜻과 시대를 슬퍼하고 예전을 생각하는 말이 혹 현인ㆍ군자의 입에서 나온다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사랑하는 뜻이 또한 아름답고 알맞게 되어서 말은 끝난다 해도 뜻은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개 풍아(風雅)의 남긴 뜻을 깊이 얻는 것이니, 그 말이 얕으면서도 밝고 그 뜻이 순하면서도 나타나서 부인과 어린애가 들어도 모두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즉 이른바, ‘시교(詩敎)가 위아래에 통한다.’는 것은 이를 버리고 무엇으로써 하겠는가?
옛부터 지금까지 전해 온 것을 삼가 뽑아 모아서 두 책을 만들고 《대동 풍요(大東風謠)》라 이름했는데, 무릇 천 편이 넣는다. 또 별곡(別曲)으로 된 수십 편을 그 끝에 붙여서 태사(太師)의 채택함에 대비하니, 성조(聖朝)에서 풍속을 살피는 정사에는 거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그 희롱하고 음탕한 말 같은 것은 또한 부자(夫子)께서 정ㆍ위(鄭衛)의 시(詩)를 버리지 않았던 뜻인 것이다. 회옹(晦翁)이 이른바, ‘스스로 권선징악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 윗사람으로서는 몰라서는 아니될 것이리라.
[주D-001]강구요(康衢謠) : 중국 고대 이상적인 요순 시대에 백성들이 태평함을 즐기던 노래.
[주D-002]태사(太師) : 고대 중국에서 악(樂)을 맡은 벼슬 이름.
[주D-003]이것은 : 시경(詩經)의 국풍(國風)과 아송(雅頌)을 말함.
[주D-004]정ㆍ위(鄭衛) : 시경 국풍(國風) 중에서 음탕하다고 칭해진 정풍(鄭風)과 위풍(衛風).
[주D-005]회옹(晦翁) : 주자(朱子)를 존칭함이다.
5. 민낭경을 화산으로 보낼 때 써 준 서문[贈閔朗卿送花山序]
내가 염재(念齋)를 따라 놀 때부터 화산(花山)에 있는 낭경 선생(朗卿先生)이 시호(詩豪)라는 소문을 이미 들었던 것이다. 그 후에 그가 지은 시를 보니, 비장(悲壯)하고 강개(慷慨)한 말에 더욱 장점이 있었다. 그가 절협(節俠)을 읊었는데 그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을 여러 가지로 보는 듯이 형용하였다. 대저 염재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식견이 있어 평생에 남을 허여(許與)하는 일이 적었으나 낭경의 사람됨만은 늘 칭찬하였다.
낭경은 술이 취하면 남을 곧잘 꾸짖었고, 옛 일을 이야기 할 때에는 의론이 퍽 종횡(縱橫)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한대(漢代)에 두 인물이 있으니, 노주가(魯朱家)와 관부(灌夫)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그의 기개와 의리를 알 수 있다. 내가 염재를 따라 비로소 낭경을 사귀었는데, 잠깐 보아도 눈썹 사이에 한 가닥 기이한 기상이 있고 온화한 모습은 남에게 친근한 감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장구(章句)에 얽매인 선비와는 동떨어지게 달랐던 것이다. 그 후에 또 낭경 선생의 의협심(義俠心)이 큰 것과 염재의 빛나는 두 눈동자가 사람의 마음을 밝게 알아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비록 구구한 소장부(小丈夫)일지라도 긴 갓끈에 짧은 옷을 입고 짐승을 도살하면서 낭경 선생의 뒤를 따르기로 청하였으니, 이에 노래를 읊는다.
[주D-001]노주가(魯朱家) : 한 나라 때의 협사(俠士).
[주D-002]관부(灌夫) : 자는 중유(仲孺), 한 나라 때 유명한 협사였음.
6. 종제를 금강산에 보내면서 지어 준 서문[送從弟金剛山序]
금강산(金剛山)은 동방(東方)의 장관(壯觀)인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한 태호(太湖)와 같은 가품(佳品)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에게 쌀을 바침은 가하거니와 한번 절한다는 것은 미친 짓인데, 동방 사람이 망령되이 봉래(蓬萊)라 부르고 신선이 산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정양사(正陽寺)에 올라 중향(衆香)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촘촘히 들어선 것이 창을 모아 세운 듯하고, 영원(靈源)ㆍ원통(圓通) 여러 골짜기는 위태롭고 궁벽하며 험하고 좁아서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진실로 신선이 있다면 이것은 항간에서 이르는 금신선(金神仙)이란 따위인 것이다.
동방에는 안목(眼目)을 갖춘 자가 적다. 한갓 남의 말만 믿고서 문득 말하기를, ‘봉래산은 신선의 산이므로 장차 온 천하의 명산을 압승할 것이다.’ 하니, 이는 동방의 비루한 습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금강산을 본 다음 동방에서 사람 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았었다. 또 안문(雁門)을 나와서 효령(孝嶺)에 올라 멀리 바다를 바라본 후에 멍하게 맥이 빠진 듯했었다. 나의 아우 아무가 장차 금강산 놀이를 하게 되므로 나는 이 글을 적어서 주고 그 관점이 어떤가를 묻는 바이다.
내집 3권 기(記)
1. 석거소기(石居小記)
사대부(士大夫)로서 시대를 만나지 못하면 숨을 뿐이다. 이제 낭경(朗卿)이 진사(進士) 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만석산(萬石山) 속에 살면서 자호(自號)를 석거(石居)라 하였으니, 그는 때를 만나지 못하여 숨음에 뜻을 두는 자인가? 순(舜)이 깊은 산에 있을 때 목석(木石)과 더불어 살았었다. 요(堯)의 시대를 당해서는 들에 숨은 현인(賢人)이 없었으나 순 같은 성인으로서도 미친함을 이처럼 편하게 여겼던 것인데, 하물며 말세임에랴? 더구나 보통 사람에 있어서랴? 낭경의 석거(石居)는 그 알맞은 바를 얻었도다.
낭경은 해서(海西)의 호걸로서 옛 절협(節俠)을 사모하여 연ㆍ조(燕趙)의 유풍을 간직하였다. 나는 그의 기절을 기특히 여기고 그와 더불어 수시로 교유(交遊)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는 지금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나에게 좋은 말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옛 사람의 말에, ‘몸을 장차 숨기려고 하면 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낭경이 이미 돌과 더불어 살면서 또 남에게 글을 구하니, 그 숨음을 꾸밈에 가깝지 않겠는가?
숨어 사는 것에 도(道)가 있으니, 그 덕을 검소하게 할 뿐이다. 덕을 검소하게 함에도 도가 있으니, 이름을 구하지 않을 뿐이다. 그 덕을 검소하게 하고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면 사방을 통하는 큰 도시에서도 숨을 수 있는데, 어찌 돌과 더불어 살기를 취하는가? 이것은 석거자(石居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므로 이로써 기(記)를 한다.
[주D-001]연ㆍ조(燕趙) : 연 나라와 조 나라에는 불우한 어진 이들이 많았다 함,
2. 충천묘화벽기(忠天廟畵壁記)
병술년 봄에 나는 공사(貢使)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서 철교(鐵橋)ㆍ추루(秋) 두 공(公)과 더불어 놀기를 매우 즐겼었다. 어느 날 그의 문에 들렸더니, 두 공은 딴 이야기를 할 겨를 조차 없이 다섯 쪽 비단에 그린 그림과 다섯 책으로 된 시고(詩稿)와 한 폭으로 된 편지를 꺼내어 놓고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개 소음(篠飮) 육해원(陸觧元) 선생이 항주(杭州)로부터 와서, 우리들의 상황을 듣고는 말 안장을 벗기거나 좌석을 정돈하기도 전에 촛불을 밝히고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을 다 그리고는 글씨를 썼는데, 글씨를 다 쓰자 밤이 벌써 3경(更)이 되었었다는 것이었다.
아아! 선생의 의리는 높고 선생의 뜻은 근실하도다. 내가 어떻게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에 두 공을 통해 제자(弟子)의 예로써 보기를 청했더니 선생은 이미 그 문에 있었다. 몸을 이끌고 그의 좌석에 나아가자마자 선생은 나를 아우라고 부르면서 옛 친구처럼 반겨주는 것이었다.
대저 사람이 한번 만나고 한번 헤어짐은 명(命)에 매인 것이다. 오늘날 서로 만남은 아마 하늘의 도움이리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어음(語音)이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 붓으로 혀를 대신하여 희롱도 하면서 한껏 즐겼다.
대화가 반이 채 오가지 못했을 때 선생은 그의 시고(詩稿) 중에 충천묘화벽시(忠天廟畵壁詩)를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기를, ‘벽의 그림은 우리 증조(曾祖) 소미공(少微公)의 수택(手澤)인 것이다 소미공은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되 항상 한 달을 반분하여 반 달은 술에, 반달은 그림에 숨어 지내다가 그 일생을 마쳤던 것이니, 우리 아우의 한 말씀이 있기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번 절하여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써 사례한 다음 옷깃을 여미고 이르기를, ‘천하에 도(道)가 있을 땐 어진 자가 나타나고 불초한 자가 숨으며, 천하에 도가 없을 때는 불초한 자가 나타나고 어진 자가 숨는 것이다. 소미공의 어짐에 대해선 내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시대는 곧 명 나라의 말엽을 당했거나 동림(東林)과 환시(宦寺)의 화란을 당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주역(周易) 대상에 이르기를, ‘덕을 검소하게 하여 화란을 피하고, 녹위(祿位)로써 영화롭게 않는다.’ 하였으니, 소미공 같은 이는 그 어진 자인 것이다. 그는 술과 그림으로써 자기의 덕을 검소하게 하고, 자기의 숨음을 조성하려 하였던 것이니 편하고 즐김이 어찌 여기에만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는 진세(塵世)에서 몸을 빼내어 멀리 마음대로 놀았으니, 헌면(軒冕)이 서로 미치지 못하고 증격(繒繳)도 베풀 수 없었던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높은 갓과 넓은 띠로서 마침내 어지러운 세상에 완인(完人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않으며 또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듣건데, ‘덕을 간직하고 녹을 먹지 않는 자의 자손에게는 반드시 갚음이 있다.’ 한다. 이제 선생의 어질고도 재주스러움은 능히 그 조상을 계승, 남성(南省 진사시(進士試)를 말함)에 합격하여 성망(聲望)이 자자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백 년 동안 덕을 쌓았음으로 장차 일어날 기회를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선생도 또한 일찍이 술마시기를 즐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이것은 소미공의 몸을 숨기는 도구였던 것인데, 이제 선생은 이것을 가지고 나타남을 구하는 것은 웬일인가? 아니, 그 시대가 서로 같지 않고 쓰임도 또한 다르기 때문인가? 아아! 나는 장차 선생의 숨고 나타남을 가지고 천하의 일을 점치겠도다.
내집 3권 발(跋)
1. 김양허 재행의 절항척독의 끝에 쓴 글[金養虛在行浙杭尺牘跋]
장차 크게 펼 자는 반드시 작은 것에는 굴(屈)하고, 장차 멀리 달할 자는 반드시 가까운 것에는 궁(窮)한다.
이제 평중(平仲)은 동방(東方)에 있어서 집이 아주 가난하나 몇 말의 녹(祿)을 능히 얻지 못하고, 재주는 시(詩)에 장점이 있으나 남들은 또한 매우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양 술에 취한 뒤에는 미친 듯이 읊조리면서 기분좋게 스스로 즐겼으나 남들은 모두 헛된 짓[虛]이라고 비웃었다. 평중은 이 말을 듣자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허(虛)란 것은 내가 참으로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고, 이에 자호를 양허(養虛)라 하였다.
대저 가난[貧]이란 것은 사람마다 싫어하는 바인데, 평중은 구차히 버리려 하지 않았고, 재주가 있으되 알아 줌을 받지 못함은 선비들의 불행인 것인데, 평중은 구차하게 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虛)라는 것은 세속이 모두 버리는 바인데, 평중은 이것을 즐겨 기르되, 오직 그 허(虛)가 이뤄지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아아! 이러고서야 어찌 굴하고 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하루 아침에 군복[靺韋]을 갖추고 연도(燕都)에 들어가 절ㆍ항(浙杭)의 세 사람과 더불어 마음이 맞아서 매우 즐겁게 지냈다. 세 사람은 모두 그의 고상함을 허여하되 자신들은 미치지 못할 인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 그의 시원스럽고 자유스러움에는 편방(偏邦)의 터가 없었음으로 그들의 사귐은 더욱 깊어서 마치 옛 친구처럼 대하였다. 지금 이 서첩(書帖)속의 여러 편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다 한ㆍ진(漢晋) 고가(故家)의 후예로서 풍류와 재주 또한 강표(江表)에서 뽑히는 인물이었다. 이제 그들이 평중을 이처럼 칭찬하였으니, 이로부터 평중의 시는 중국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처럼 되고, 양허(養虛)란 호도 천하에 썩지 않을 것이다.
가령 평중으로 하여금 실(實)에 힘써서 세상에 아첨케 했더라면 하찮은 벼슬을 얻음으로써 스스로 영화롭게 여겼을 것이니, 그 펴고 달한 것을 여기에 비교하면 과연 어떻겠는가? 그러나 굴신(屈伸)은 시대인 것이고 궁달(窮達)은 운명인 것이며, 시대와 운명이란 하늘인 것이다. 어찌 평중에게 영욕(榮辱)이 될 수 있겠는가? 오직 연남(燕南)에서 술이나 마시고 세 사람의 손을 끌면서 마음껏 웃고 희롱하는 그것만이 반평생의 불평을 깨끗이 씻을 수 있었으니, 양허(養虛)의 수양한 바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번 걸음에는 나도 시종(始終) 같이 했었다. 그의 시와 서찰은 분량이 이정도 뿐이 아니었는데, 귀국한 후에 많이 유실되고 겨우 보존된 것도 또한 가난해서 장첩(粧帖)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거두어다가 첩(帖)을 만들어 돌려주었다. 그 당시 우리들이 갓 귀국한 뒤에는 동방 사람 중에 없는 허물을 꼬집어 내기에 힘쓰는 자들은 비방하는 의논을 분분히 하였던 것이다. 아아! 작은 것에 국한한 자엔 족히 큰 것을 이야기 할 수 없고, 가까운 것에 얽매인 자에게는 족히 먼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도다. 양허여! 이 서첩은 상자 속에 깊이 간직하여 그 사람이 아니거든 보이지 말지어다.
[주D-001]평중(平仲) : 김양허(金養虛)의 자.
[주D-002]절ㆍ항(浙杭) : 절강(浙江)과 항주(杭州).
2. 해동시선발(海東詩選跋)
전번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항주(杭州)의 고사(高士) 반난공(潘蘭公)과 교유했는데, 난공이 동국의 시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나는 쾌히 승낙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여러 대가(大家)들의 뽑은 시를 취해 보았더니, 순수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또한 근세에 명가(名家)로 지칭된 자의 시도 미처 입선(入選)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드디어 널리 수집하여 편을 만들고자 했으나, 나는 본디 시율(詩律)에 익숙하지 못한 탓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단구 선생(丹丘先生) 민순지(閔順之)씨는 나의 아버지의 친구 분이시다.
마침 여강(驪江)으로부터 왔는데, 그 분은 내가 북녘에 갔을 때 중국 고사(高士)와 사귀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자세히 묻는 것이었다. 난공의 뜻을 언급하였더니, 그 분은 분발한 모습으로 말하기를, ‘시는 진실로 동국사람의 소장이 아닌데도 예전부터 중국 사람 중에서는 혹 수집한 자가 있었으니 이는 우리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다만 강역(疆域)이 막히고 서적이 상통되지 못하였는지라, 그들의 수집한 시는 동국의 입장에서 보면 꼭 정선(精選)된 것만도 아닐 것인데, 만약 동국의 시가 이 정도로 그칠 뿐이라면 동국 사람의 수치인 것이다. 또 난공의 뜻이 매우 근실하고, 수응해 주려는 자네의 정성도 몹시 지극한데, 내가 어찌 이 일을 위해 돕기를 즐겨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서로 왕래하며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여서 편을 이루었다.
그러나 공사가 들어 갈 기한이 박두하므로 세심히 탈고(脫稿)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바다에 구슬을 빠뜨렸다.’느니, ‘분수없이 피리를 분다.’느니 하는 비방이 없기를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동국 시의 본말은 대략 여기에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풍격(風格)의 장단(長短)과 시대(時代)의 정변(正變)에 대해서는 자연 대방가(大方家)와 구안자(具眼者 안목이 밝은 자)가 있어서 분변할 것이니, 나는 감히 망령스리 의논하지 않겠다. 해동(海東) 홍대용(洪大容)은 발(跋)함.
3. 회성원시발(繪聲園詩跋)
등문헌(鄧汶軒)이 그의 친구 곽담원(郭澹園)의 시고(詩稿)를 나에게 붙이며 비평(批評)하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본디 시를 배우지 못했으므로 감히 망령스리 논할 수 없었다. 형암(炯庵) 이무관(李懋官)이 이를 위해 평론하고 그 밑에 쓰기를, ‘담원은 그 선대부(先大夫)의 부유한 세업을 받아 지대(池臺)ㆍ수죽(水竹) 사이에서 읊조리고 마음대로 놀았다.’ 하였다. 이제 이 시를 보고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어름과 달처럼 맑은 태도, 가을 물과 같은 깨끗한 정신은 실로 내가 한번 보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담원에 대해서는 사귐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마음은 통했던 것이니, 이미 마음이 통했으면 장차 친구로 삼아야 할 것이고, 이미 친구로 삼는다면 장차 사랑하고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미 사랑하고 중히 여긴다면 장차 그 도(道)에 나아감을 더욱 원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공자(孔子)와 주공(周公)보다 더 높은 이가 없으므로 포조(鮑照)와 사조(謝眺)는 낮게 생각하고, 일(事)은 몸과 마음보다 더 긴요함이 없으므로 글과 글씨는 하등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담원의 재주로써는 젊었을 때부터 사률(詞律)을 즐겨하여 마음을 매우 근실하게 썼으니, 그 성과는 아름답고 또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나는 그가 작은 도(道)에만 정신을 쏟다가 결국 원대한 것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된다.
대저 문장이란 나의 능한 바가 아니고, 아첨한 말이란 나의 차마 못하는 바인 것이다. 나는 이 분을 사랑하는 면에서 몸과 마음을 닦도록 충고하고 이 분을 중히 여기는 입장에서 공자와 주공을 본받기를 권면한다. 다시 말하면, ‘화려함은 버리고 실질에 나아가며, 문장은 그만두고 도학을 밝히라.’는 것이다. 내가 담원에게 원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담헌 거사(湛軒居士) 홍대용은 발(跋)함.
[주D-001]포조(鮑照) : 진(晋) 나라 때의 시가(詩家).
[주D-002]사 조(謝眺) : 자는 헌휘(玄暉), 진(晋) 나라 사람.
4. 일동조아발(日東藻雅跋)
두남(斗南)의 재(才)와 학대(鶴臺)의 학(學)과 초중(蕉中)의 문(文)과 신천(新川)의 시(詩)와 그리고 겸가(蒹葭)ㆍ우산(羽山)의 그림, 문연(文淵)ㆍ대록(大麓)ㆍ승명(承明)의 글씨, 남궁(南宮)ㆍ태실(太室)ㆍ사명(四明)ㆍ추강(秋江)ㆍ노당(魯堂)의 갖가지의 풍치로 말하면 곧 우리 나라는 물론, 제ㆍ노(齊魯)와 강좌(江左)의 사이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또한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모든 사람은 꼭 골라서 뽑음이 아니었을 것이니, 그 나머지의 사람도 추측할 수 있다. 어찌 좌해(左海)에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해서 깔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늘어나고 무력(武力)이 떨치지 못하며, 기교(技巧)가 날로 쇠약하고 칼날이 날로 무디어진다면 서쪽 이웃인즉 우리 나라도 아울러 그 복을 받음이 클 것이니, 이ㆍ물(伊物) 두 씨족은 우리 한(韓)에게 존경받아 마땅하리라.
현천옹(玄川翁)은 우리 나라에 있을 적에 불우하게 되자, ‘장보(章甫)를 쓰고 월(越) 나라에 간다.’는 말을 하였으니, ‘만백(蠻貊)에도 다닐 수 있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성인(聖人)께서, ‘바다로 떠나려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이ㆍ물(伊物)의 학술은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 요체만은 몸을 닦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었으니, 그것도 또한 성인의 무리인 것이다. 그 학술대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망령스리 성명(性命)을 논하고 한가로이 불로(佛老)를 배척하며, 참다움을 꾸미고 거짓을 파는 것은 우리의 학문에 이익이 없는 것이니, 어찌 저 돌벼의 익음으로도 오히려 족히 흉년을 구제할 수 있는 것과 같겠는가? 현옹(玄翁)의 학설인,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설(邪說)을 없앤다.’는 것은 급선무라고는 할 수 없다.
[주D-001]제ㆍ노(齊魯) : 제 나라와 노 나라는 공자와 맹자의 탄생지로서 문교(文敎)가 훌륭했다는 것을 일컬음.
[주D-002]강좌(江左) :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남쪽 지방.
[주D-003]장보(章甫)를 쓰고 월(越) 나라에 간다 : 장보(章甫)는 치포관(緇布冠)의 별칭이며, 이 대목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宋人 資章甫 適諸越 越人 短髮文身 無所用之”란 것의 약인데, 즉 송 나라 사람이 장보관을 사용하지 못할 월 나라에 가지고 갔듯이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비유임.
내집 3권 설(說)
1. 홍백능에게 주는 설[贈洪伯能說]
세상에서 이른바 선비란 것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즉 경학(經學)ㆍ문장(文章)ㆍ거업(擧業)의 선비인 것이다. 성운(聲韻)을 전공하고 시율(詩律)을 연습하여 과환(科宦)과 명리(名利)의 길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자 하는 자는 지금의 이른바 재사(才士)이나 내가 이른바의 선비는 아니다. 경전(經傳)의 글귀를 따다 쓰고, 반ㆍ마(班馬)의 설을 그대로 사용하여 쓸데없는 말을 꾸며서, 한 때의 기림을 노리고 백세의 명예를 구하는 자는 지금의 이른바 문사(文士)이나 내가 이른바의 선비는 아니다. 그 언론이 고명하고 시원스러우며 몸가짐도 단정하고 엄숙하며, 요순(堯舜)의 다스림과 공맹(孔孟)의 학설을 입에 끊임없이 이야기하므로, 유사(有司)가 그 어짐을 천거하여 벼슬과 녹이 점점 더해지게 되나 그의 행실을 자세히 살피면 안으로는 어두운 방에서 속이지 않을 덕(德)이 없고, 겉으로는 천하를 경륜할 재주가 없으며, 속이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는 자는 지금의 이른바 경사(經士)이나 내가 이른바의 선비는 아니다.
반드시 인의(仁義)를 깊이 생각하고 예법(禮法)을 조용히 행하여, 천하의 부귀도 그의 뜻을 음탕케 못하고, 누항(陋巷)의 곤궁[憂]도 그의 낙(樂 도(道)를 즐겨 함)을 고치게 못하며, 천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친구를 삼지 못하며, 출세해서 도를 행한다면 혜택이 사해에 펴지고, 벼슬하지 않고 숨는다면 도를 천재에 밝힐 수 있는 자라야, 내가 이른바의 선비인 것이니, 이런 자야말로 참된 선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친구 홍자 백능(洪子伯能)은 아름다운 선비이다. 재주와 학문이 정(精)하고 박(博)하며, 뜻과 기개가 밝고 조촐하다. 만약 하루 아침에 분발하여 성인(聖人)의 길로 출발한다면 무엇인들 구하지 못하겠으며, 아무리 먼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다만 그는 착함을 하되 명예에 가까운 것은 너무 피하고, 몸을 가지되 세속에 어긋나는 것은 너무 어렵게 여긴다. 진실로 그것이 장점이긴 하나 도리어 병통이 되어서, 바야흐로 사부(詞賦 글짓는 일)의 공부에만 열중하게 되므로 남들이 이를 대하는 것은 재치 있고 아름다운 자제라 함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백능 또한 마음에 편케 여겨 받아들이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아! 백능은 여기에만 그치려 할 뿐인가? 앞서 이른바 거업(擧業)의 선비에 가까워질까 나는 두려워한다. 추환(蒭豢 도학을 의미함)은 팽개치고 어함(魚鹹 과거 공부를 비유함)을 달게 여기며, 평탄한 길은 버리고 가시밭길을 달리니 의혹할 점이 많다.
백능은 나에게 말[說]을 구함이 매우 간절하나, 나는 자부할 만한 것이 없을 뿐더러 또한 본래부터 문사(文詞)에 졸렬함으로써 서로 보답하지 못하게 됨은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다만 서재(書齋)에서 독서하던 나머지 적이 마음에 느낀 바가 있다. 그것은 세속 사람이 날로 패망[淪喪] 함에 나아가되 능히 깨닫지 못함이 슬프고 또 나의 자신도 능히 스스로 벗어나지 못함이 한스럽다. 그러므로 이제 백능에게 문득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써서, 그 은근(慇懃)한 뜻에 보답하고 또 함께 힘쓰려 하는 바이다. 내가 백능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러나 백능이 만약 말하기를, ‘자네는 왜 〈보통 사람으로써 남을 기대한다〉라는 횡거자(橫渠子)의 훈계를 읽지 않았는가?’ 한다면, 나는 장차, ‘딴 사람에게는 오히려 보통 사람으로 기대할 수 있으나, 내가 백능에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백능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주D-001]반ㆍ마(班馬) : 한 나라 사학자인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
[주D-002]횡거자(橫渠子) : 횡거(橫渠)는 송 나라의 대학자 장재(張載)의 호.
2. 스스로 깨우치는 설[自警說]
부모의 앞에서는 반드시 얼굴은 상냥스럽게 하고 말은 부드럽게 하며, 언성을 감히 높이지 말고 웃음도 마음껏 웃지 말며, 남을 꾸짖지 말고, 코와 침도 떨어뜨리지 말며, 감히 원한(怨恨)의 마음을 품지 말고, 감히 분려(舊厲)의 기색을 짓지 말며, 음식에 대해서는 힘껏 봉양하고 질병이 있을 때에는 걱정을 다하며, 하고자 하시는 뜻은 받들어 순종하고, 싫어하시는 것은 없애기를 힘써해야 한다.
아아! 나를 낳고 나를 기르고 나를 가르치실 때에 얼마나 힘들고 수고하셨겠는가! 돌이켜 보건대, 내가 하늘을 이고 땅에 서서, 아내와 자식을 두고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한 몸이 안락하게 된 것은 과연 누구가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인가? 이것을 잊고 섬길 줄을 모르는 자는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섬기면서도 제때에 하지 못하고, 제때에 한다 할지라도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인가? 세월이 감에 따라 어버이는 이미 작고하실 것이다. 인생은 재생하지 않는 법, 은혜를 갚을 곳이 없을 터이니, 그것을 매우 통념(痛念)해야 할 것이다.
무릇 부부가 동침하는 사이는 실로 도(道)의 발단하는 바요. 학(學)의 시작하는 바인 것이다. 그런데 남을 대할 때에는 무릎을 여미고 자신이 옛 도(道)를 배운다 하면서 어두운 방에서는 행동을 금수처럼 한다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니, 부끄러움이 이보다 더 큼이 있겠는가? 온화하고 공경하는 도(道)는 더욱 오래 갈수록 즐거움이 증가하고, 방자하고 음탕한 욕(慾 정욕)은 한 번만 지내도 후회가 생기는 것이다. 진실로 온화하고 공경함이란 도가 자신에서 이뤄져서 그 즐거움을 잃지 않고, 진실로 방자하고 음탕함이란 욕(慾)이 마음에 불타서 그 후회를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도(道)로써 욕(慾)을 잊으면 즐기되 미혹하지 않고, 욕으로써 도를 잊으면 미혹하되 즐겁지 않다.’ 한다. 그러므로 도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하고 욕이 미혹한 것이 아니라 한다면 어찌 크게 미혹한 것인 아니겠는가?
나는 딴 형제가 없으므로 동기간의 정의(情義)에는 적ㆍ서(嫡庶)를 구별하지 않는다. 비록 과오가 있더라도 반드시 부드러운 말씨로 가르치고 경계하며, 너무 꾸짖고 노여워함으로써 원한을 먹음거나 화목을 잃거나 해서는 아니 된다. 일이 끝나면 후회가 많은 것이니,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여러 종형제(從兄弟) 간에 사랑하고 화목하여 절대로 시기하지 말아야 하며, 허물이 있으면 온화한 말로 경계하고 착함을 보면 내가 한 듯이 기쁘게 여겨야 한다. 친척 사이에 후함으로써 잘못됨은 드문 것이니, 순수한 마음을 돈독히 하여 후함을 따라해야 할 것이다.
어른을 섬길 때에는 반드시 공손함을 다하여 감히 성명(姓名)을 함부로 부르지 말고, 보면 반드시 절하고 꿇어앉아야 한다. 모든 부형과 할아버지뻘이 되는 일가에게는 계보(系譜)가 멀고 연치가 젊다 하더라도 노상에서 만날 때에는 반드시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 비록 시골의 가난하고 천한 자일지라도 항렬이 위가 되면 반드시 공경을 다하여 귀한 자와 간격이 없이 교만한 말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지벌(地閥)이 미천하여 칭할 만한 착함이 없고, 또 세분(世分)이 없다면 반드시 다 부집(父執)으로 대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것은 때에 따라 적중하게 할 뿐이다. 오직 자신은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친구를 사귐은 반드시 진실하고 믿음성이 있어야 한다. 그의 착함을 보면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따라서 드높여 주어야 하며, 그의 나쁨을 보면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따라서 규간(規諫)해야 한다.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자에게 나아가서 인도해 주기를 청하여, 허물을 들으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리고 토론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날로 쓰는 인륜(人倫)에 대한 일과 동(動)하고 정(靜)하는 신심(身心)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해야 한다. 천지의 바깥과 성명(性命)의 깊은 이치에 이르러서는 절대 망령된 추측으로 헛되고 먼데에 마음을 달리지 말고, 강론할 즈음에 있어서는 반드시 포용성 있게 먼저 마음에 들어 있는 소견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어리고 천한 자의 자질구레한 말이라도 반드시 귀 기울여 듣고, 그 착함을 받아 들여야 한다.
비록 존장(尊長)의 앞일지라도 반드시 질문에 따라 자기 소견을 분명히 다 함에 힘써야 하고, 절대로 구차스럽게 찬동하여 어른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질병이 있거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에는 그 정분에 알맞도록 조문(吊問)하고, 가난과 화란을 겪을 때에는 그 힘을 다해서 구휼해야 한다. 서로 착함으로써 권면하고 위의(威儀)를 단정히 해야 한다. 만약 말하는 것이 진실치 못하고 몸가짐도 삼가지 않는 자라면 반드시 가려서 대우해야 하고, 즐겁게 접촉해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기쁘게 하려고 함은 나의 큰 병통인 것이다. 그 유폐(流弊)는 반드시 싫어하는 자도 모두 착하고 좋아하는 자도 모두 나쁘게 봄에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대개 나의 자신부터 착해야만 마땅히 좋아할 자를 좋아하고 마땅히 싫어할 자를 싫어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착한 자는 자연 가깝게 되고 나쁜 자는 스스로 멀게 될 것이다. 어찌 딴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말하자면 제 자신에 돌이켜서 구할 뿐이다.
우리 집은 본디 화목이 두텁다고 칭해졌다. 지금 경향(京鄕)에 퍼져 있는 적서제족(嫡庶諸族)이 가난하고 미천해서 능히 생활할 수 없는 자가 많다. 마땅히 힘이 미치는 바에 따라 사랑하고 구휼하여 떨치도록 하고, 혼인(婚姻)과 초상(初喪)에 대해서도 마음껏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의 어리석은 이는 불쌍히 여기고, 착한 이는 아름답게 생각하여 몸과 이름을 보전하고 나쁜 짓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저 모든 종족(宗族)들이 비록 멀고 가까움의 차별이 있고 은혜와 의리가 제한이 있다 하더라도 애당초의 남[生]은, 뿌리를 같이 하고 몸은 한 체(體)를 나눈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종족은 희소함에랴? 비록 소원(疎遠)하고 미천하다 하더라도 또한 버리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하고, 돈목(敦睦)을 숭상함으로써 종풍(宗風)을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글 읽을 때에는 반드시 옷깃은 단정하게, 얼굴은 엄숙하게, 마음은 전일하게, 기운은 평이하게 하며, 잡된 생각을 내지말고 선입견(先入見)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몸 흔들기를 자주하는 자는 그 뜻이 짧게 되고, 눈동자 굴리기를 어지럽게 하는 자는 그 마음이 뜨게 된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눈동자를 일정하게 하면 중간 마음도 반드시 공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간직하고 앎을 다한다면 일거양득이 되는 것이다. 먼저 그 대의(大意)를 본 다음에 그 곡절을 미루어 생각하며 반드시 사업에 목적을 두어 장구(章句)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한 귀절만 보았더라도 꼭 알아야 하며, 한 귀절만 알았더라도 꼭 행해야 한다. 한번 알고 한번 행하면 발과 눈[足目]이 함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이외에 이단(異端)의 잡서(雜書)는 반드시 그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해야 하며, 음탕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공부에 방해되고 뜻을 잃기 쉬운 것이니, 절대로 눈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정숙하게 앉는 것은 공부함에 가장 유력한 것이다. 반드시 옷을 깨끗이 입고 자세를 엄숙히 한 다음 눈을 감고 선가(禪家)에서 눈감는 것을 가장 꺼려하는 것은 아마 정신이 혼미해지면 졸음이 올까 염려를 한 모양인데, 또한 의의가 있는 듯하다. 코끝을 내려다 보면서 망령스리 움직이지 않는 것은 또한 좋은 방법인 것이다.팔짱을 끼고서 사당[神祠]에 있을 때처럼, 엄군(嚴君 아버지의 지칭)을 대할 적처럼 한다면 고요하되 마음이 혼미하지 않을 것이다. 뜻[情]이 움직일 때에는 그 생각이 어떠한가를 살펴서 알맞지 않으면 막아 버리고, 알맞으면 따라 행하되 그 도(道)를 이미 다했다면 예전처럼 고요할 것이다.
꿇어 앉는다는 것은 비록 몸을 닦는 데에 있어서는 말절(末節)이라 하나, 두 발을 쭉 펴고서는 마음이 게으르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꿇어 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만약 기운이 피곤하다면 모름지기 책상다리를 하고 앉을지라도 역시 옷은 여미고 무릎은 단정히 해야 하지, 게을리 누워서 용의(容儀)에 맞는 태도를 잃어서는 아니 된다.
거업(擧業)이란 비록 면하지 못할 것이나 또한 공부를 대강 이루면 그만두어야 한다. 정신과 힘을 다하여 반드시 얻기를 기대하면서 실학(實學)을 방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력 다툼의 옳지 못한 길에서 명예를 구하는 것은 더러움이 도둑보다 더 심한 것이니, 절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출세하는 초기에 이미 도둑 행동을 한다면 하물며 저 높은 관직(官職)과 아름다운 봉작(封爵)을 하고 싶음에서랴? 또한 과거(科擧)에 비할 유가 아니므로 등창을 빨고 치질도 핥을 것이니, 장차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내집 3권 시(詩)
(24편 생략)
내집 4권 제문(祭文)
(7편 생략)
내집 4권 애사(哀辭)
(생략)
내집 4권 보유(補遺)
(6편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