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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함께 나눈 정체성 다시 한 번 옆에 분들에게 나눠보겠습니다.
당신은 소금이십니다. 어떻게 짠맛을 내시면서 이번 한 주간 살아보셨나요?
우리는 소금으로서 지난주에 두 가지 기능을 크게 말씀을 드렸죠.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이렇게 한 주간 소금에 대해서 좀 깊이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거 외에도 해독제 또 방부제, 소독제 이런 기능도 있더라고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 여러 가지 기능의 공통점이 무엇이냐면 바로 항상 다른 것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깨어지고 부패한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그 상황 가운데 이 세상에 동화되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다시 옆에 분들 보시면 당신은 빛이십니다.
반짝반짝 빛이 나시나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여러분 이 말씀은요. 단순한 우리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자라고 인정하신 의미가 그 안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아멘 예수님이 빛으로서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그 빛을 주기 위해 오신 분이신데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 믿는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로서 예수님처럼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전기가 들어오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집집마다 그냥 전기 스위치만 딱 켜면 전기가 딱 들어와서 환한 그런 가정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등잔을 사용했습니다. 그 등잔에 기름은 올리브유가 이제 주요 원료입니다. 고대에는 지금같이 성냥이나 라이타 같은 게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 불 한 번 붙이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등잔불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면서 사용하는 게 관건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이 등잔을 이 등경 위에 올려놔서 사람들이 이렇게 생활하는 데 있어서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면 이제 좀 집 밖에 나가거나 외출할 때는 이게 계속 위에 있다가 꺼질 수도 있고 안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걸 내려놓고 이제 점토로 만든 대박 위에다가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잔의 원래 자리는 등경 위인데 이제 이것이 이제 안전을 위해서 내려놓는데 원래 위치는 이 등잔의 위치는 어디여야 된다고요? 저 위에 그렇죠 등경 위가 원래 위치입니다. 누구든지 이 등잔불을 대박에 뒤집어서 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꺼지기도 하겠지만 이 불빛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으니까요.
등불은 등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항상 높은 곳에 위치해서 모든 사람이 밝게 비추게 하는 것이 그 빛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빛의 성격을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빛된 삶이 무엇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근데 먼저 생각할 것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사실을 감추고 지내는 그러한 신앙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또 여러 가지 헌신과 봉사를 해 나가며 살아가지만 교회 밖에 나갔을 때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졌다는 것, 마치 비기독교인처럼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요즘 굳이 내 신앙을 드러내면 불편한 일들이 많이 생기니까 그게 더 편하고 사회생활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지난주에 성결 신문을 보니까 저희 교단 신문지인데요. 거기 보니까 청소년들에 대한 이런 설문 결과가 있더라고요. 청소년들의 57%인가가 이 부분에 대한 설문을 했는데 학교에서 자기가 기독교인인 거를 드러내지 않는대요. 제가 볼 때는 이것도 수치가 굉장히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인 우리 청소년들 가운데 거의 60%에 가까운 인원이 자기가 교회 다닌다는 말 자체를 안 한다는 거예요. 교회 다닌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자기들이 불편한 일들이 생기고 자기들이 뭔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 이렇다면 그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지금 그렇게 살아갈까요?
바로 우리들의 모습도 별반 다름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요. 우리가 빛인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는데 빛이 그 빛을 바라기를 포기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빛은 감출 수 없습니다. 빛은 이렇게 가려도 그 사이사이로 빛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감추고 아닌 척하고 살아가는 것은요. 한번 자신의 신앙관을 또 구원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제 빛의 기능 몇 가지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먼저 빛은 어둠을 밝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납니다. 예전에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시골 출신들은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가로등이 없이 이 위에 떠 있는 달 달빛만으로도 길을 걸어 다녔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거든요.
근데 여러분 달도 모양새가 계속 바뀌지 않습니까? 조그해졌다가 커졌다가 보름달이 되었을 때는 굉장히 길이 밝게 보였던 그 어렸을 때의 추억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은 그 가운데 그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리스도인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어두움이 사라지는 빛의 밝힘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빛으로 비춰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빛을 바라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착한 행실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바라는 착한 행실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렇지 못한 어두운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빛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본받는 그러한 영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성도는 빛으로서 인도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면 항구에 등대가 있죠. 또 공항에도 인도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빛을 잘 비춰주지 않으면요. 그 큰 배 으리으리한 배도요. 한순간 좌초돼버리고요. 그렇게 최첨단의 비행기도 한순간에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등대지기는 또 그 공항의 인도자는 늘 그 불빛이 켜지고 정확하게 그 불빛을 비추고 있어야 합니다. 내 감정에 따라서 내가 좀 지금 기분이 안 좋아 그러니까 내가 불을 그냥 꺼버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죠.
등대지기는 불을 밝히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배들이 그곳을 안전하게 지나가게 하는 돕는 역할을 감당하니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바란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한 길을 알려주고 밝혀주는 역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불평하고 비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닫고 또 수리하고 우리가 가야 할 인생의 길을 우리가 신앙 안에서 분명히 발견하고 그 신앙의 길을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비춰야 할 기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인생의 길을 지금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정말 막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 분명한 핵심 이 복음을 그들에게 비춰줘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그 길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됐다고 여길 때 그냥 내 일이 아니니까 그냥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지금 그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고 말하고 동시에 그에게 바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즉 빛된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지적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이 바르게 길을 걸어가고 그렇게 보여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소금이라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앞에 중요한 단어 한 가지가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빛과 소금, 소금과 빛의 사명으로 부름받은 게 아니라는 거 여러분 신앙생활을요 교회 안에서의 어떤 헌신과 봉사에 올인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훈련받고 도전받고 은혜받고 또 회복되고 치유되어서 여러분들이 정작 빛을 바라고 또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곳은 세상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한 주간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그 영향력을 끼치다가 주일날 다시금 재충전을 하고 점검을 하고 다시금 또 결단하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 교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더러워졌고 어둡습니다. 이 더럽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소금과 빛은요 결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존재합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져야 짠맛을 낼 수 있습니다. 등불도 기름 내에 불이 탈 때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더럽고 어두운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셔서 우리를 세상 속에 녹아져 맛이 내는 소금으로 또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 우리를 세우셨음을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16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라.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에 포커스가 나 자신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면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만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선한 영향력, 은혜를, 은혜의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끼리만 모여서 으샤으샤하고 즐겁게 먹고 마시고 풍족하게 쓰고 그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셨던 변화산의 그 사건을 기억하시죠? 그 변화산 사건에 얼마나 은혜가 풍성했는지 베드로가 여기 가졌사오니 여기에 운막을 지어놓고 우리 여기서 삽시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가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끼리의 모임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여기가 좋지만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가정, 우리의 삶의 터전, 세상으로 우리는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 가정이, 우리 때문에 내 직장 내 동료들이 복을 받는 또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소금과 빛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러한 내용의 설교를 하셨는데 내용을 간단하게 좀 나누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밤에 집이 어두워졌다고 해서 집이 어두워진 것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가 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해야 할 것은 빛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기가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고기가 썩었다고 해서 고기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테리아가 번식하도록 방치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질문해야 할 것은 소금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두운 밤이나 악취가 나는 생선처럼 부패한다면 사회가 부패했다고 사회를 탓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악이 억제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짧은 메시지 속에서 어떤 것들이 와닿으시나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깨어지고 부패하고 어두운 그것들이 가득하다면 그것은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속음으로써 빛으로서 살아가지 않은 우리의 잘못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이미 깨어졌다고 이미 죄로 가득하여 어둡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부패된 곳이 이 세상입니다. 왜 정치판이 일어나고 왜 법이 이러냐고, 왜 다음 세대들은 각종 중독에 빠져서 이렇게 허우적거리냐고 우리가 말하고 비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때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세상의 소금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빛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이 썩고 어둠이 계속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믿는 이들을 향하여 비판하는 이 소리들이 들리시죠. 여러분 그 비판을 우리가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너무 지금 달아서 거기에 동기화되어 있던지 아니면 그냥 소금통에만 머물러 있는 소금인지, 또는 말 아래의 등불로 그냥 불은 켜져 있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그 말 아래의 등불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 지난주의 말씀과 이어서 우리는 세상에 소금으로 짠맛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빛으로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을 바래야 합니다. 오늘 본문 이어지는 말씀에서 착한 행실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아마 여러분들이 지난주에도 소그룹 안에서 나눔을 가지셨겠지만 몇 가지 착한 일의 착한 행실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내용들을 몇 가지로 한번 나눠보려고 합니다.
먼저 착한 행실 중 하나는 말 우리의 언어 생활을 좀 점검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부탁합니다는 무슨 언어라고 돼 있어요? 겸손과 배려의 언어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와 관계할 때요. 부탁합니다. 이 겸손과 배려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당연한 건 없어요. 당연한 건 없습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미안합니다. 공감과 용서의 언어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또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고맙습니다. 감사와 베품의 언어입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당신의 그 행동, 당신의 그 도움이 나에게 큰 힘이 됩니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죠.
여러분 이 말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인데요. 이 세 가지의 단어만 우리가 잘 써도 세상은 저 사람들은 좀 뭔가 다르네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부탁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세 가지의 언어가 여러분들 가정에서 여러분들 삶의 터전에서 이게 잘 사용되어서 우리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 빛과 소금에 그 은혜가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또한 착한 행실 그것은 우리의 일터에서의 정직한 삶도 그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사기 부정직 이것들을 지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소금으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 가운데 우리가 오히려 반기를 들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중장부를 기록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세금을 보고하십시오. 또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어떤 일에 있어서 거짓 저울을 쓰거나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더 뭔가를 구입하고 또 뭔가 부정직함으로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적으로도 잘못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신앙인으로서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가 절대 하지 않아야 할 부분 우리가 행해야 할 정직이라는 것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또 우리가 일터에서 행해야 할 착한 행실 중에 하나는 탁월함입니다. 탁월함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터에서 우리가 낙태하거나 꾀를 부린다면 우리 말을 누가 신뢰할까요? 여러분 직장생활하다 보면 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일하는지 다 보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속일 수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사람의 중심이 뭔지를 우리는 다 느낍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태하거나 꾀를 부리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누가 전해 들을까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는 그 일에 탁월한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탁월하게 감당할 때 그것이 착한 행실이 되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 우리 신앙인들이 가끔 쓰는 말들 중에 은혜로 합시다 이런 말들을 가끔 사용해요. 은혜로 합시다 뭐 할 때 은혜로 좀 해요.
근데 이 말이 굉장히 좋은 말 같은데 그 말에 깊이 들어가 보면 대충 하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사용할 때가 참 많아요. 여러분 은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돼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내가 그 일에 탁월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직업이 있으셨죠? 예수님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이 뭐 어떻게 목수의 사명을 감당했는지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목수로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여러분들이 볼 때 앞으로 내가 메시아로서 일을 준비해야 되니까 바빠 대충 그냥 대충 하지 뭐 이거는 뭐 내 부업이니까 그리고 그냥 대충대충 하셨을까요?
아니요. 아마 그 예수님이 만드신 그 목수로서의 작품들은 창조주의 숨결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목수로서 여러분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뭐 술 담배를 안 한다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 일을 하면서 그곳에서 탁월함을 드러낸다는 것이죠.
여러분 싱어게인 시즌 3를 혹시 보신 분들 계시나요? 저도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이슈가 좀 돼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이라고 하는 곳에서 홍이삭이라고 하는 가수가 최종 우승을 했습니다. 이 홍이삭은 선교사님의 아들이에요. 근데 이 홍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 안에는 굉장히 탁월함이 있는 겁니다. 음색, 고음을 처리하는 것 또 곡을 해석하는 능력 이런 것들이 너무 탁월한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이 사람이 최종 우승까지 하게 됩니다.
근데 이 사람이 최종 우승을 하고 난 이후에 예전에 이 사람이 불렀던 노래들이 다시 막 이렇게 역주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작사 작곡하여 부른 하나님의 세계라고 하는 찬양이 있는데 유튜브에 이게 2~3년 3년 전에 올린 찬양 3년도 더 된 찬양일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올린 이 찬양이 갑자기 역주행을 하면서 막 뜨는데 그 밑에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 댓글 가운데 이런 댓글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하는 선한 모습을 보고 너무 좋아서 나이 든 노인네가 처음으로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우승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제가 만약에 교회에 나간다면 이 곡 때문일 것입니다. 또 어떤 이가 말합니다. 실력으로 증명하고 2년 전의 영상으로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게 한 이것이 전도지 리얼 또 어떤 분은 종교는 다르지만 너무 아름답게 들리네요. 아름다운 홍이삭님이어서 그런가 봐요. 댓글이 막 어마어마하게 달렸어요.
그냥 하나의 찬양을 하는 하나의 노래를 하는 가수로서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 탁월한 그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또 그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의 이 탁월함 때문에 이 찬양 그 밑에 달려 있는 댓글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다 종교인들까지도 그 영향력을 받고 있다는 걸 보게 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 있으신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의료 과학 교육 서비스 다양한 여러분들 각자의 직종들이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 그곳에서 여러분들의 언어가 변화되고 여러분들의 삶의 탁월함이 드러난다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학생 청년들 열심히 공부할 때 공부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이 홍이삭이라고 하는 가수에게 느꼈던 그 마음처럼 그 찬양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들 믿지 않는데 그 사람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나도 이 사람 이 찬양의 가사처럼 나도 하나님을 믿어보고 싶다라고 하는 그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 주변에 있습니다. 지금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거든요. 예전에 80~90년대는 우리 주변에 믿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그래서 전도할 사람이 없다라고 말을 할 정도로 다 그냥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믿는 사람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요즘에는 저기 학교에 가보면요. 한 반에 학교 교회 다니는 애들이 손가락 이 손가락 안에 꼽힌다니까요? 이거에 꽂히는 것도 대단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궁금증을 던지며 물어볼 그날이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아멘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보시고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빛이 바래지면 사람들은 그 빛을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두우니까 그 빛이 더 드러납니다. 그리고 궁금해할 겁니다.
왜 저 사람은 대충대충 하지 않을까
왜 저 사람은 손해를 보면서까지 저렇게 정직하려 할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탁월할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기도의 삶을 살아갈까
왜 저 사람은 뻔히 내가 볼 때 힘든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까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이런 질문이 일어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 질문이 내게 들려질 때 이 말씀처럼 언제든지 그 질문에 답변할 답을 여러분들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소금과 빛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마지막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소금의 역할은 간접적인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빛의 역할은 직접적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소극적입니다. 빛의 역할은 적극적입니다. 소금은 은밀하게 또 안으로 들어가서 스며들어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게 역사합니다. 또 빛은 밝게 보이면서 밖으로 발산되어 사람들 눈에 띄이게 환하게 비칩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는 하나를 우리가 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의 사명을 우리는 다 감당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소금처럼 은밀하게 눈에 보이지 않게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 밝게 비춰져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기 위하여 녹아져 내려야 하는 소금처럼, 또 등불이 스스로를 태움으로 주변을 밝히는 그러한 희생이 섬김이 우리 안에 일어나야 우리로 말미암아 이 어두운 세상에 이 썩어가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소금, 또 빛, 우리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이번 한 주간 마음껏 그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